보는 것과 보이는 것(부활)
(누가복음 24:13-34)
우리가 지난 주에 부활절을 지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습성 중 하나가 부활절 날이 지나면 부활의 기쁨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오랫 동안 고통스럽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부활절도 역시 기쁨으로 그렇게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 후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의 신체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눈입니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 만날 때 그 사람의 눈을 제일 먼저 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22~23에서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시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눈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눈이 맑은 사람이 있고 어떤 분은 눈이 흐린 사람이 있습니다. 마약을 하면 눈이 흐립니다. 알콜 중독자도 눈이 풀어져 있습니다. 대체로 눈이 맑은 사람이 정신도 맑은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눈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절망하며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똑같은 예수님인데도 이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몇 년 동안 같이 지냈는데도 왜 그 예수님을 몰라봤을까요? 누가복음 24장 16절에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또 누가복음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눈이 가리워져 있다가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눈이 가리워졌고 무엇 때문에 눈이 밝아졌나? 참 궁금합니다. 눈이 밝아지는 약을 먹은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한번 이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눈에 관련되어 세 가지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눈은 똑같은 사실을 놓고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3장에 정탐꾼의 보고를 보면 똑같은 사실을 보고도 한쪽은 우리가 분명히 이긴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우리는 진다고 보았습니다.
선조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침략의도를 살피게 했습니다. 갔다 온 두 사람 중 한 쪽은 침략할 의도가 있다고 그러고 다른 한쪽은 침략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와서 서로 다르게 보고한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옆에 모셔놓고 조금 전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알아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가 정말 보는 것을 잘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리고 정말 잘 보고 계십니까? ‘눈이 가리워져’라는 헬라어는 ‘방해받다, 억눌리다, 제한받다’라는 뜻입니다. 눈이 어떤 것에 체포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란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바울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기 전에는 바울은 눈은 떴으나 정말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18에 보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비로소 사울은 진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세상을 가짜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울처럼 눈의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눈의 비늘이 벗어졌다는 것은 자기가 잘못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견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 보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과 관련이 깊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17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길가면서 나눈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그 말은 너희가 도대체 관심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너희의 관심은 도대체 무엇인가?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 옷을 제비 뽑아 갖는 로마 병정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지금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과연 교회에 나와서 여러분이 갖고 있는 관심이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이 가리워졌다가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관심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변할 때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관심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보입니다. 부동산 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것과 관련된 사항에 관심이 있습니다.
여름에 집 앞 숲에서 산딸기를 딴 일이 있는데 모두 나무가 다 산딸기로 보입니다. 골프에 관심 가지면 모든 물체가 둥그렇게 보입니다. 저는 이것을 ‘본다’라기 보다도 ‘수동적으로 보여지다 혹은 보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신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이 보이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은 신앙과 영적인 것에 대해서 진정으로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요즘 주된 관심은 무엇입니까?
셋째, 여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늘 그것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 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합니다. 7절에 보면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지 그들이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입니까? 이렇게 신앙생활은 여러분에게 무엇이 보이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 주로 무엇이 보입니까? 이상한 것을 보거나 그러한 것들이 보여지지 않습니까? 바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택해서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 여러분의 눈에 보이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게 될 나라가 멀지 않았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 삶 속에서 보일 때 비로소 부활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천국이 여러분의 눈에 보입니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눈에 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가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보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