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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상황/국가(정상성, 제도, 포획 등) - 사건(포획되거나 파악되지 않는 어떤 우연의, 튀어나오는 사건) |
진리-지식 : 진리는 사건을 통해 발현되는 것, 지식은 기존의 상황이 가진 지식체계 |
진리는 그것을 충실하게 따르고 지속되는 주체들을 계속 포섭함으로써 유지되고 '나타난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로 인식되지 못한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나중에, 후역사적으로 증명될 뿐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 상황속에서 평가되지 못하고 미래적으로 밝혀지는 것. 그래서 이 주체들은 도래하는 주체, 출현하는 주체이다. |
근대 철학에 대한 비판은 진리와 주체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일자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로 나아가고 있다…
니체는 근대를 겨눈 최초의 저격수였고, 하이데거는 대상성을 비판한 시인들을 사유의 전면에 다시 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합리주의 전통에 대한 이런 날카로운 비판들은 전후 프랑스에서 더욱 구체적인 형태의 비판으로 발전하게 된다.
푸코는 근대 철학이 주체로 삼은 ‘인간’이 그저 특정한 에피스테메의 맥락에서 구성된 지적인 생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라캉은 사유하는 합리적 인간과는 거리가 먼 무의식의 주체를 그의 분야인 정신분석학을 통해 잘 드러내었다. 또한 리오타르는 보편이라는 관념을 그저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폭력적인 관념으로 간주하였다. 보편적 진리는 자신을 보편으로 삼는 동시에 보편의 타자를 비-진리로 억압하고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진리는 폭력으로 점철된 자기 전개 과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진리 개념을 비판하면서 철학사 전체를 곤경에 빠뜨린다. 철학은 진리를 기준으로 삼아 텍스트의 의미를 고정시킴으로써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였고, 결국 진리의 전제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폭력적인 과정이었고, 그 와중에 텍스트의 풍요로움은 진리의 폭력을 통해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 데리다의 탁월한 입론이다.
다수와 일자
바디우의 철학은 세계를 현시된 다수성으로 파악하고 이를 ‘상황situation’ 이라고 부른다.
상황 속에서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다수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시된 다수성으로, 다시 말해 구조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이 구조화된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체험하는 세계이다.
이 상황은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정한 ‘무엇’으로 다가온다…….
구조화는 어떤 상황을 구체화하는 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을 구성하는 다수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다수가 아니라 이미 상황의 통일성 속에 포섭된 다수, 특정한 셈을 통해 규정된 다수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노동자’라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체계 속에 놓여있는 그의 위치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규정성이 그를 ‘노동자’ 로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를 특정한 존재로 규정하는 셈에 의해 결과된 것일 뿐, 있는 그대로의 그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상황은 구조화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화 작용은 정확하게 존재의 일자를 수립하는 일자화의 작용과 일치한다.
이 작용을 바디우는 하나로-셈하기compte-pour-un) 라고 부른다.
다수는 그렇게 하나로-셈하기라는 구조화 작용을 통해 일자로 파악된다.
그러나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존재와는 거리가 있다.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존재, 다시 말해 ‘존재로서의 존재être en tant qu'être’란 모든 질적인 규정성에서 벗어난 존재, 감산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상황이 구조화된 것이라고 할 때, 이 상황 속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라기보다는 규정된 존재, 일자로 셈해진 존재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다수를 일자로 규정하는 구조화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일자를 수립하기 위한 작용으로서의 하나로-셈하기를 통해 현시된 다수는 일자로 파악될 뿐, 일자 그 자체는 아닌것이다. 일관성consistance이 부여되기 이전의 비일관적 다수multiple inconsistant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구조의 법칙에 의해 억압될 뿐이다.
집합론, 공백
존재의 과학으로서의 집합론은 존재의 질적인 차이를 제거하고, 가장 근원적인 존재를 향해 접근한다.
그것은 바디우가 존재의 본래 모습으로 간주하는 비일관적인 다수성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는 수학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언어의 형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의 비일관성은 집합론에 의해정확하게 표현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집합(∅)이다.
단적으로 우리가 {a, b, c}라는 임의의 집합을 가정할 때, 분명 공집합은 이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원소를 하나로 셈하는 구조화 작용 속에서 공집합은 누락되어 있다.
공집합(또는 공백)은 하나로-셈하기라는 현시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비일관적 다수성의 이름인 것이다.
그것이 구조화의 작용을 벗어나는 것은 확실하다.
공집합은 장소를 가질 수 없지만 모든 장소에 있고, 현시 속에서 현시 불가능한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공집합의 현시 불가능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비일관적 다수성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한다.
존재로서의 존재가 갖는 비일관성은 확실히 하나로-셈하기라는 구조화 작용의 외부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공백(또는 무無)으로서의 공집합 이다.
…...
이 공백은 직관이나 지각,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공백은 현시될 수 없는 것의 현시이며, 고정할 수 없는 것이고, 상황 속에서 배회하는 구조화될 수 없는 다수이기 때문에 구조화 작용 이전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바디우는 이 공백을 존재론이 출발점으로 삼는 존재의 고유명nom propre de l'êtr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공백의 존재는 상황의 안정적 일관성을 위협한다…...
상황 속에서 현시 불가능한 공백의 방황은 두 번째 셈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구조화된 상황을 다시 구조화하는 재구조화의 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두 번째 구조화는 구조화된 상황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제기되는 필연적인 요구이다.
…...
이러한 재구조화는 필수적이다. 공백의 방황으로 인해 상황의 일관성은 항상 위협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상황은 재구조화되고, 상황은 구조의 구조, 다시 말해 메타 구조를 갖게 된다.
이때 재구조화가 셈하는 부분들은 “공백이 존재의 잠재적 형상을 부여받는 장소” 가 된다.
다시 말해 공백은 재구조화의 셈을 통해 고정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그러한 상황의 재구조화가 만들어내는 두 번째 구조를 상황상태l'état de la situation 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미 하나로 셈해진 상황을 다시 셈함으로써 일자의 지배를 관철하는 기제이다.
…..
사회적인 차원에서 국가는 이런 재구조화의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항상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집합들, 즉 집단들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국가에게 개인이란 사실상 없다. 국가가 개인을 다루더라도 그것은 항상 집단 속의 개인일 뿐이다.
그렇게 재구조화의 작용은 부분들을 셈함으로써 상황의 부분들을 관리한다.
예를 들어, 상태/국가의 셈은 노동하는 개별적 원소들을 노동자로 분류하고, 그 집단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황의 항목들을 특정한 부분으로 구분하고 분류하는 작용으로서, 식별과 분류의 체계를 수립하여 백과사전적인 지식 체계를 확립시킨다. 결국 상황의 법칙성이란 상황의 항목들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체계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사건
그런데 상황과 상황상태가 구조화하는 현시와 재현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화된 현시와 재구조화된 재현 사이의 연결정도는 가변적이다. 바디우는 그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눈다.
정상성normalité의 연결은 현시되는 동시에 재현되는 항목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다수는 현시와 재현이 항상 일치하는 다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돌출excroissance은 현시되지는 않지만 재현되는 다수, 상황의 원소는 아니지만 부분집합인 다수를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단독성singularité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상황 속에서 현시되지만 상황 상태의 셈에 의해 재현되지 않는 항목들, 상황에 귀속되지만 상황 상태의 셈에 의해 상황에 포함되지 않는 항목들은 단독성의 규정 안에 있다. 단독적인 항목들은 상황 속에서 부분으로 파악되지 않고, 상황의 부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셈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단독적인 항목은 역사적인 것, 즉 사건événement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범주이다.
단독적인 항목은 자연적 다수가 아닌 역사적 다수에만 존재한다.
일어난다. 바디우는 총체적으로 비-정상적인 다수, 즉 단독적인 항목으로만 구성되는 다수를 사건의 자리le site événementiel라고 부른다. 정확히 말해 사건의 자리는 공백이 아니다.
사건의 자리는 분명 하나의 집합으로서 상황에 현시된다.
그러나 사건의 자리를 구성해내는 원소들은 모두 단독적인 다수로, 그 어느 것도 하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건의 발생은 우연적이며, 어떤법칙성에도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건은 사건의 자리에 속하는 여러 원소들(마르세이유 의용군, 쌍 퀼로트, 쟈코뱅, 삼부회등등)과 더불어 ‘대혁명’ 이라는 항목, 즉 사건 자신을 필요로 한다.
사건의 자리의 원소들이 배열되는 것만으로는 사건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사건은 사건의 자리가 속해있는 상황, 다시 말해 사건이 일어난 그 상황에 속해 있는가?
이것은 결정 불가능한 문제이다. 엄밀히 말해, 사건은 그 성립에서부터 결정 불가능하다.
1871년 프랑스 파리 코뮌의 예를 들어보자.
파리의 노동자들은 보불 전쟁의 패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의 봉기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 봉기였고, 그것은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는 것이었다. 당시 노동자 대중은 그저 하나의 불명확한 집단으로만 존재했을 뿐 그 개개인들은 정치적으로 전혀 가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봉기를 ‘파리 코뮌’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이 이름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의 이름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상황 속에서 그들은 단지 ‘폭도들’, ‘불순분자들’이라고 지칭되었을 따름이다.
‘파리 코뮌’이란 상황의 법칙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름, 상황에 대하여 철저히 정원외적인surnuméraire 이름이었던 것이다. 바디우는 상황 내부에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사건은 '이름-없음' 을 자신의 이름으로 지닌다고 말한다.
.......
<서용순(광운대), 바디우 철학에서의 존재, 진리, 주체: 존재와 사건을 중심으로>,
철학논집 제27집 2011년 11월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27, Nov 2011, pp.79-115
[출처] 알랭 바디우의 존재, 진리, 주체, 존재와 사건 - 철학논집 요약|작성자 나만의 공부 창고
첫댓글 사건 철학? 존재 사건,, 뭐 그런 단어 검색을 하다보니 이런게 나왔는데..
바디우는 아직 읽어본적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한번 보려고 올려두었다.. 말이 좀 어려운듯 하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