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네시 윌리엄스 (1911~1983)는 이 작품(1947)
으로 유진 오닐 (1888~1953) 이후 최고의 미국 극작가로 떠오른다. 윌리엄스는 이 극으로 뉴욕 극비평가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1947년 12월 3일에 시작된 뉴욕 공연은 무려 855회 동안 계속되었으며 300만 달러나 벌어들였다. 말론 브란도는 스탠리 역활을 맡아, 야생마 같은 남성미의 전형으로 부각되었다. 희곡은 곧 말론 브란도(스탠리)와 비비안 리(블랑시) 주연으로 영화화되었으며 영화 또한 고전의 반열에 들어섰다.
이 작품의 배경은 뉴올리언스의 빈민가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는 하지만, 골목만 돌면 블루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고 강가에서는 훈풍이 불어오는, 안온함과 서정성이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미군 특무상사 출신의 외판원인 스탠리와 부유한 남부 귀족 집안 출신의 스텔라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느 5월, 연락도 없이 찾아온 스텔라의 언니 블랑시에 의해서 두 남여가 살던 작은 집은 평온이 깨어진다. 사사건건 과거 자기 집안의 영광을 들먹이며 동생이 사는 방식과 제부의 행동 거지를 비판하는 블랑시는 환영받지 못하는 귀찮은 친척일 뿐이다. 11장으로 구성된 이 극의 중반 지점인 5장부터 귀부인인 척하던 블랑시의 실제 정체가 서서히 밝혀진다. 그녀는 사실 동성애자 남편의 자살 이후 낯선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고등학생까지 유혹해 직장인 학교와 고향에서 추방된 상태였던 것이다. 스탠리의 폭로로 블랑시는 교제하던 미치와도 헤어지게 되고 극도의 정신 혼란 상태에서 스탠리에게 겁탈당한다. 결국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놓아 버린 블랑시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고 아이를 낳은 스텔라는 언니가 떠나는 것을 애통해하면서도 스탠리에게 남는다.
극은 5월의 어느 날, 블랑시의 등장으로 시작해서 가을, 그녀의 퇴장으로 막을 내린다. 블랑시와 스탠리의 재산 문제뿐 아니라 문화, 어법, 예법을 둘러싼 기 싸움은 처음부터 치열하다. 삶이 곧 처절한 전쟁터임을 암시하는 카드놀이는 3장과 11장에 포진한다. 블랑시가 미치에게 매력을 발산하고, 문화적 우월감을 과시하는 3장에서는 스탠리의 포커 운이 저조하기만 하다. 그러나 스탠리에게 짓밟힌 블랑시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11장에서 스탠리는 승승장구한다. 블랑시와 스탠리의 기세 대결은 중반 이후 균형을 잃는다.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에서도 나타난 '망쳐진 행사'라는 모티브는 8장과 9장, 비참한 생일 파티에서 재현되며 블랑시의 몰락을 가속화한다. 하지만 블랑시의 몰락으로 그녀의 매력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극은 남부의 사라진 영광에 연연해하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독특한 여성 인물을 만들어 냈다. 섬세하고 서정적이며, 전통과 문화를 알지만 냉혹한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적응하지도 못하며 환상이나 과거, 때로는 방탕함으로 도피하는 여성. 블랑시뿐만 아니라 《유리 동물원》의 아만다, 《여름과 연기》의 앨마에서도 그 모습은 발견된다. 윌리엄스의 어머니와 누나의 흔적이 결합된 이 인물들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계산하고 따지고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은 가차없이 배제해 버리는 현대 산업사회가 과연 정당한가를 묻는다. 블랑시는 남부의 거대한 영광을 상징하는 농장을 잃어버린다. 그 농장의 이름은 '벨 리브', 아름다운 꿈이란 뜻이다. 꿈을 잃고 가문의 몰락과 친척의 죽음을 목격하고, 사랑했던 어린 남편의 자살까지도 경험한 블랑시의 도피처는 욕망이었다. 그녀에게 욕망은 죽음의 반대 자리에 놓여 있다. 누구든 낯선 이의 친절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블랑시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좌절해 버린 많은 미국인들을 대변하였다. 블랑시는 거짓을 말하고도 남을 속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자신은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했다고 하는 그녀의 주장은 타락한 상황에서도 위엄을 드러낸다. 그녀는 20세기의 가장 매력 있고, 애처로우면서도 품격 있는 인물이 되었다.
블랑시가 섬세함, 과거나 환상에의 도피를 나타낸다면, 스탠리는 강인하고 육적이며, 현실적인 힘의 논리를 드러낸다. 스탠리의 의상은 원색이며 그의 친구들의 의상 또한 그렇다. 현실은 포커와 볼링 게임과 같이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스탠리의 삶의 원천은 여성과의 관계다. 인물 묘사에서부터 스탠리의 중심은 육체적 쾌락임이 강조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 또한 성에서 온다. 아내 스텔라와의 관계도 이에 기초한다. 극의 마지막에서 정신이 혼란한 상태의 블랑시를 겁탈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것도, 경쟁에서의 승리와 성적 욕구를 삶의 축으로 삼는 스탠리를 생각할 때 이해할 만한 행동이다.
블랑시가 과거와 환상에 연연한다면 스텔라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녀는 하얀 기둥이 거대하게 버티고 있던 남부의 저택을 버리고 스탠리와의 색 전등이 돌아가는 육욕의 밤을 택한다. 언니를 사랑하지만 스탠리가 주는 육체적, 정서적 만족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극의 마지막, 스탠리가 언니를 겁탈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탠리의 애무를 받아들이는 스텔라, 스텔라를 통해서 이 극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되는 현실의 논리를 보여 준다.
죽은 옛 애인을 그리는 미치는 외로운 사람이다. 역시 외로운 블랑시는 그 외로움을 간파하고, 둘은 어쩌면 구원이 될지 모를 사랑을 한다. 병 든 어머니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미치에게 블랑시는 돌파구 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치는 블랑시의 과거를 포용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미치는 블랑시를 거리의 여자로 취급하고,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다. 극의 마지막에서 미치가 스탠리를 공격하지만 블랑시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는 비상식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현실의 무기력한 인간이다.
위 인물들의 애증과 갈등을 통해서 기본적인 주제는 다 드러났다. 현실과 과거의 대립, 환상과 현실의 대립, 남부 전원 사회와 도시에서의 삶 사이의 대조와 대립, 건강한 성과 왜곡된 성의 대립, 스텔라를 둘러싼 스탠리와 블랑시의 애정 대결 등이 이 극에서 찾을 수 있는 주제들이다.
이 극에는 상징이 가득하다. 극의 제목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실제로 뉴올리언스에서 운행되는 전차 이름이다. 블랑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고 '극락'이라는 곳에 와 동생을 찾는다. 블랑시는 남편과 친척의 연이은 죽음의 반대 축으로 '욕망'을 택하지만, 결국 '묘지(죽음)'의 기차를 타게 된다. 더 큰 아이러니는 블랑시가 도착한 곳이 결코 극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텔라와 스탠리에게는 이상향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실재의 기차 이름을 가져와 상징성과 아이러니를 부가하고 블랑시의 운명의 결말까지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 극의 제목은 탁월하다. 블랑시가 사다가 전구에 씌운 '종이 등'도 상징성을 지닌다. 종이 등은 알전구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실체를 보이고 싶지 않은, 감추고 꾸미고 싶은 블랑시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극의 종반구에 이르러 미치와 스탠리에 의해서 종이 등은 찢기고, 블랑시는 자기의 몸이 찢긴 듯 비명을 지른다. 냉혹한 현실주의자들 앞에서 블랑시의 환상은 찢겨 나가고 타락한 여자라는 정체는 알전구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스탠리를 비롯한 남성 인물들은 원색 의상을 즐겨 입는 반면, 블랑시는 나방같이 흰 옷을 입는다. 원색 옷을 입은 남성들이 원색적으로 인생을 즐길 때, 블랑시는 나방같이 떠돌며 바스러지기 쉬운 외면과 내면을 드러낸다. 스탠리는 원색 옷뿐만 아니라 생고기와도 연류된다. 작품의 도입부에 스탠리는 스텔라를 향해 '생고기'를 던지고 스텔라는 그것을 받으며 자지러지게 웃는다. 둘의 관계가 극히 육적인, 성적인 관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언어는 무척이나 시적이다. 특히 영어 교사 출신에 뛰어난 감성을 지닌 블랑시의 대사는 서정적이면서도 강한 폭발력을 갖는다. 그녀가 스텔라를 향해서 문명의 발전을 토로하며 원시인의 세계에만 머물지 말 것을 강변하는 장면이나, 자신의 정체를 알고 모욕하려는 미치에게 죽음과 욕망을 대비하면서 과거사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장면은 유창하면서도 시적이고, 상징이 가득하며 운율이 있는 명대사이다.
이 극은 노골적인 성적 대사와 장면으로 공연 초기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미국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아니 미국의 고전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공연되는 우리의 고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극단 신협이 공연한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는 이 극이 단지 남부 출신의 신경과민 여성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랑과 꿈을 잃었지만 새로운 사랑을 그리며, 그 사랑이 올 수 없다면 거짓으로라도 만들려 하는 우리 인간 모두의 아픈 초상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테네시 윌리엄스,《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김소임, (민음사)
첫댓글 너무나 잘 정리한 글이라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희극이라 책장을 술술 넘겨 읽고 이렇게 정리해준 글까지 읽으니 공부가 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