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이사를 했습니다 짐들을 부려놓자 성당의 종소리 바람을 만들었습니다 책을 둘 데 없어 책장을 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번쯤 가봤던 목공소로 향하는 길, 버스 정류장의 나무 한 그루 기대기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아는 체하는 목공소 사내,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것을 압니다 손가락의 안부는 탄성을 숨깁니다
칠팔 년 전 조수 시절에 내 책상을 짜면서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를 가득 걸어놓은 벽을 등진 그가 웃으며 자꾸 웃으며 책장 선반의 간격을 물어오는데 봉해진 손가락 마디가 막 꽃 진 자리 같습니다
선반의 높이야 나의 뼘보다 그의 뼘에 맞으면 좋을 것이고
선반의 깊이야 붕대들을 모아놓을 정도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이의 손이 내 찬 손하고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숨길 수 없었던 겨울이었습니다 ☆★☆★☆★☆★☆★☆★☆★☆★☆★☆★☆★☆★ 《2》 겹
이병률
나에겐 쉰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 원도 부치고 오만 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그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 《3》 내 마음의 지도
이병률
1 자주 지도를 들여다 본다 모든 추억하는 길이 캄캄하고 묵직하다 많은 델 다녔으므로, 많은 걸 본 셈이다 지도를 펴놓고 얼굴을 씻고, 머리 속을 헹구워 낸다 아는 사람도, 마주칠 사람도 없지만 그 길에 화산재처럼 내려 쌓인다 토실토실한 산맥을 넘으며, 온 몸이 다 젖게 강을 첨벙이다 고요한 숲길에 천막을 친다 지도 위에 맨발을 올려보고 나서도 차마 지도를 접지 못해 마음에 베껴두고 잔다 여러 번 짐을 쌌으므로 여러 번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여러 번 등 돌렸으므로 많은 걸 버린 셈이다 그 죄로 손금 위에 얼굴을 묻고 여러 번 운 적이 있다
2 깊은 밤, 나는 그가 물을 틀어 놓고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울음소리는 물에 섞이지 않았지만 그가 떠내려보낸 울음은 돌이 되어 잘 살 거라 믿었다 ☆★☆★☆★☆★☆★☆★☆★☆★☆★☆★☆★☆★ 《4》 누(累)
이병률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 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 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 아뿔싸 그이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 살기가 그의 눈을 빛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환히 웃으며 들킨 건 나라고 뒷걸음질쳤다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늦은 밤 빨랫감을 털고 있는 내 방 창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숫그림자는 구두 굽에 잔뜩 실은 욕정을 들키자 번득이는 눈으로 달겨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 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 또 한 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 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 ☆★☆★☆★☆★☆★☆★☆★☆★☆★☆★☆★☆★ 《5》 면면
이병률
손바닥으로 쓸면 소리가 약한 것이 손등으로 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삶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먹을 것 같지 않는 당신 자리를 비운 사이 슬쩍 열어본 당신의 가방에서 많은 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을 삶의 입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지 못했던 간밤 꿈이 다 늦은 저녁에 생각나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그것을 삶의 아랫도리라 생각한다
달의 저편에는 누군가 존재한다고 한다 아무도 그것을 본 적 없고 가진 적 없다고 한다
사람이라고 글자를 치면 자꾸 삶이라는 오타가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삶의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 《6》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 《7》 밤 열두 시
이병률
1 밤 열두 시는 떡복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 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섭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게 수술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메꿀 길이 없다
반찬 묻은 족을 먹어야 할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 《8》 봉인된 지도
이병률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 《9》 사랑의 역사
이병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 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 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 《10》 새
이병률
새 한 마리 그려져 있다 마음 저 안이라서 지울 수 없다 며칠 되었으나 처음부터 오래였다 그런데 그다지 좁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키우는 새 날려 보낼 방도를 모르니 새 한 마리 지울 길 없다 ☆★☆★☆★☆★☆★☆★☆★☆★☆★☆★☆★☆★ 《11》 생의 절반
이병률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 년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삼십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 《12》 서쪽
이병률
집 밖에서 자신에게 편지나 우편물을 보낼 적에 일본에서는 이름자 뒤에 行이라 쓴다 죽기 직전 나에게 편지 쓸 일이 있더라도 내 집 방향에선 등 하나 켜놓지 않을 테니 行이 마땅하다 받게 될 애먼이 없으니 行이면 충분하다
이 책들을 부쳐야 하나 이 옷가지들을 빨아야 하나 이국異國으로 원행園行 가서 버리고 돌아오는 것이 도리가 아닌 듯하여 주섬주섬 포장 들고 우체국에 들렀을 적에 내 이름자 옆에 무엇이 마땅할까 머리를 쓰다 그 순간 벅차고 시름했던 적 몇 번 있지 않았던가
왼발 오른발 걷는 모습 둘이 모여 行이라는데 반겨줄 이 없어도 나를 떠메고 가야만 하는 길이 行일진대
가 닿는 일이 공치는 일이더라도 이마에 行자 하나 붙인 채로 산 넘다 인적을 만나거나 서쪽 어디쯤에선가 行不이 되거나 하는 일 아름답기는 할런가 ☆★☆★☆★☆★☆★☆★☆★☆★☆★☆★☆★☆★ 《13》 세상의 많은 조합
이병률
거미가 실을 잘못 사용한다면 꽃대가 진 꽃을 내려놓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리 세상의 많은 조합일지니 이해할 때까지 비가 마를 때까지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리 가을이 여름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더라도 그래서 감기로 잠시 아프더라도 정녕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리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당신이 그 사람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것까지도 아무도 안 가는 시장에 간 것 나의 잘못은 아니리 오후에 붙들려서 길을 따라 나선 것은 생각을 안 만나고 싶은 날인 것이라 조금 맨발이 되자는 것이다 마음이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 휘감기는 것도 구덩이에서 꺼내지는 것도 찬바람이 길을 지나는 동맥의 내용일 테니 애써 모른 체한들 나의 잘못은 아니리 ☆★☆★☆★☆★☆★☆★☆★☆★☆★☆★☆★☆★ 《14》 스미다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 《15》 시인들
이병률
1 나이 먹어서도 사람들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 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 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잔 오가며 -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 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 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 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 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히히덕거리는 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 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 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 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 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2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어찌할 것도 아닌데 지갑이 두둑해서도 아닌데 그냥 물어서 괜찮아지고 속이 아무는 말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말고 시 쓰는 이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달려가서는 대뜸 묻는 말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 《16》 아무것도 아닌 슬픔
이병률
아이는 마당에 나와 흙을 집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흙을 털어넣습니다 아이는 꿀꺽 흙을 삼키고 나무 옆으로 기어가 나무허리에 자기 배를 문지릅니다 소화를 시키려는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웃통을 벗어던지더니 모래를 쥐어 얼마 안 되는 배꼽에 채워넣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그러더니 그네에 앉아 거미줄을 올려다봅니다 감옥을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맨살에 가 닿자마자 피가 솟구치는 지구 저편의 소란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물살에 호청이 흘러가듯 창문 너머 아무것도 아닌 한 아이가 소문을 씻어내고 있습니다
마알간 잔을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낯익은 무늬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이면지를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복도의 물기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나는 누구의 편이 되어본 적 없는데 숲도 숲의 편을 들지 않았는데 편을 먹어 땅을 넓힌 족속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놀다 간 자리를 들어 허공에 대보면 눌린 솜의 결들도 허공의 편입니다 포도주로 벌게진 얼굴을 허공에 대보면 잔을 드는 사이 퍼졌던 소문들도 죄다 허공의 편입니다 ☆★☆★☆★☆★☆★☆★☆★☆★☆★☆★☆★☆★ 《17》 아무것도 아닌 편지
이병률
어느 먼 지방 우체국 사서함번호가 찍힌 편지가 배달되었네 면회를 와달라는 어느 감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엔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버젓이 내 집주소가 적혀 있었네
오래 책상 위에 올려둔 알지 못하는 이의 편지 화분이 편지봉투 위로 마른 꽃잎들을 한웅큼 쏟아놓은 어느날 새 봉투에 또박또박 그의 주소를 적고 편지를 밀어 넣고 풀칠을 하였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며칠 뒤 편지는 나에게로 되돌아왔네 그가 출감한 것으로 치자며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채라도 지어 올리기를 바라자며 감옥의 자물쇠들을 흔들어보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 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 《18》 아주 오래 천천히
이병률
떨어지는 꽃들은 언제나 이런 소리를 냈다
순간 순간
나는 이 말들을 밤새워 외우고 또 녹음하였다 소리를 누르는 받침이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그 받침이 순간을 받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새벽에 나는 걸어 어느 절벽에 도착하여 그 순간순간의 ㄴ들이 당도할 곳은 있는지 절벽 저 아래를 향해 물었다
이번 생은 걸을 만하였고 파도도 참을 만은 하였으니 태어나면 아찔한 흰분홍으로나 태어나겠구나 그렇다면 절벽의 어느 한 경사에서라면 어떨지
그리하여 내가 떨어질 때는 순간과 순간을 겹겹이 이어 붙여 이런 소리를 내며
순간들 순간들
아주 아주 먼 길을 오래 오래 그리고 교교히 떨어졌으면 ☆★☆★☆★☆★☆★☆★☆★☆★☆★☆★☆★☆★ 《19》 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
이병률
三月 비워 둔 화분에 고인 빗물이 자꾸 없어지겠구나 죽거나 살거나 하는 시간의 기록지 위에 또 한 사람을 눕히는구나 그대가 까마귀떼 맴도는 바람의 중심에 그 사람 입다 간 옷가지들을 걸었구나 오지 않은 봄마저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그대 모습이 저물 무렵 바지랑대에서 빛나는 속옷보다 더 희구나
四月 밤새 별과 그 사이의 어둠과 집을 찾지 못하는 것들이 뒤척이는 소리를 듣느라 너의 마음에 결석을 했네 헤진 角을 꿰매지 못하는 달 그림자와 번호를 지우며 잠을 청하는 나무들과 얘기를 하느라 한 무리의 짐승들이 떠나는 밤길에 동행하지 못했네 七月 가을엔 떠날 것이네 세상의 옷 벗은 나무들을 사진 찍어 주러 짐도 싸지 않고 그렇게 떠날 것이네 취기를 빌리지 않고 돈도 갚지 않고 갈 것이네 가을과 풍경 사이를 한눈 팔지 않고 직행할 것이네 바람 다음에 오는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네
八月 여름 내내 나를 데웠던 윗집 현악기 소리 내 살에 와 닿는 울림을 쳐내느라 천장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았네 더운 바람마저 혈관을 휘젓고 빠져나가는 날엔 누구나 닿고 싶은 것에 닿지 못했네 몸을 빠져 나오는 찌꺼기들과 쥐도 새도 모르게 갉아 먹히는 마음들, 그 더미 속으로 목쉬도록 빨려 들어가지 못했네 여름엔 지우는 일이 많았네 무엇보다 미워하는 일이 허무는 일이 많았네 十一月 마음의 등걸에 첫 눈이 쌓이네 바람 부는 날이 되어서야 기차 소리를 겨우 듣고 짤막한 확성기 소리에 밖이 궁금했네 누구도 만난 적이 없는 십일월, 누구라도 열쇠로 문을 따고 어둑신한 내 몸 뒤로 난 길 그 한가운데로 내몰아줬으면 했네 ☆★☆★☆★☆★☆★☆★☆★☆★☆★☆★☆★☆★ 《20》 오래된 사원
이병률
나무뿌리가 사원을 감싸고 있다 무서운 기세로 사람 다니는 길마저 막았다 뿌리를 하나씩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원의 벽돌이 하나씩 무너져내렸다 곧 뿌리 자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래 걸려 나를 다 치우고 나면 무엇 먼저 무너져내릴 것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워 여태 이 벽돌 한 장을 나에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 《21》 이사
이병률
이삿짐을 싸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괜찮다는 듯 떨어진다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 주지 않을 生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 《22》 인기척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 《23》 저울
이병률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그건 아마도 저울바늘이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 힘차게 심장을 잘라 저울 위에 올려 놓으면 바늘은 한 자리에 멎기 전까지 두근 반과 세근 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요동을 친다는 말 심장을 더디다 쿵 하고 올려놓고 싶어 눈이 멀 것 같을 때 놀랐다 홧홧해졌다가 몸을 식힌라 부산한 심장을 흙바닥도 가시밭도 아닌 그저 저울 위에 한 몇년 올려두고 순순히 멈추지 않는 바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말 ☆★☆★☆★☆★☆★☆★☆★☆★☆★☆★☆★☆★ 《24》 전갈(傳喝)
이병률
겨우 남긴 몇 천 원으로는 택시를 탈 수 없겠다 싶어 서둘러 술자리를 벗어나 다급한 형편 되어 전철역을 찾는다 먹물 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밤 을지로 3가 지하도에 들어서니 이불이며 상자조각들을 펴던 부랑인 가운데 한 사내가 긴 지하도 저편에 대고 외치고 있다 ㅡ거기 시청 앞 용식이 아침에 밥 먹으로 3가로 오라고 해. 꼭 그 말을 받은 2가의 부랑인이 1가쪽을 향해 소리치니 메아리가 메아리를 끌어안는다 ㅡ거기 시청 앞 용식이 아침에 밥 먹으러 3가로 오래 아쉽게도 꼭이란 말은 생략되었으나 1가의 부랑인은 시청 지하도 쪽으로 목청을 높이며 꼭이란 말을 보탰을 것이다 지하도가 굽은 길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한밤 표를 끊을새 없이 겨우 몸을 실은 마지막 전철에서 먼 곳으로부터 메아리를 싣고 달려왔을 바퀴들의 수고가 고마워 나도 모르게 숨이 가지런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를 불러 따뜻한 국밥 두 그릇 시켜 천천히 먹자 하고 나도 나에게 전갈을 보낸 뒤에 길고도 아름다운 메아리가 도착한 종점 즈음에다 자리를 봐야겠다 ☆★☆★☆★☆★☆★☆★☆★☆★☆★☆★☆★☆★ 《25》 전부
이병률
이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기차입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이 나라 말을 알지를 못합니다
이 기차가 어질어질한 속도로 당신을 데려가 어디에 내려놓을지를 알고 싶은데 물음은 물컹 내 귀에 도로 닿습니다
당신의 시간의 옆모습을 바라봐도 되겠다고 믿고 싶어서 발목은 춥지 않습니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묻고도 싶은 겁니다 우리가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막다른 증거는 쟁쟁합니까
안녕,이라는 이 나라 말만 알아서 그 말이 전부이기도 하여서 멀거니 내 아래에다 인사만 합니다
기차 밖으로 번지는 유난한 어둠이 마음에 닿으려 합니다 큰일입니다 소홀한 마음이 자꾸 닿으려 합니다 ☆★☆★☆★☆★☆★☆★☆★☆★☆★☆★☆★☆★ 《26》 절연
이병률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리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영혼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이라도 눈을 뜨고 봐야 삶은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잘 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 《27》 첫사랑
이병률
젊은 날 우리 한 사랑을 돌아보지 마오 눈 비비면 후두둑 떨어지는 소금 같은 시절 뙤약볕 아래 물새는 병을 쥐고 서서 뽑을 것처럼 머리채를 움켜쥐고 극치를 맞던 몸부림을 곱씹지 마오
몸 구석구석 철조망에 긁힌 자국과 쳐낸 살점들 자리 몸에 박혀드는 못냄새를 맡는 일처럼 젊은 날 묶어 치운 열매들을 꺼내지 마오
단 우리가 열일곱으로 돌아갈 것인가만 생각하오 이 세상 다 신어야 할 구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지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아침 이마에 내려앉는 슬픔의 그림자 따라 좋은 옷 한 벌 훔쳐 내달릴 수 있을 것인지 문득 우리가 열일 곱 살로 돌아가 첫 술을 마신다면 ☆★☆★☆★☆★☆★☆★☆★☆★☆★☆★☆★☆★ 《28》 풍경의 뼈
이병률
단양 역 지나 단성 역 네 평 대합실에는 온실에 들어선 것처럼 국화 화분이 많습니다 정 중앙에 탁구대도 있고 연못도 있고 역기도 있고 자전거도 들여다 놓고
잉꼬도 두 쌍 늙은 쥐도 두 쌍 물고기도 두 쌍 살아있는 것들은 다 짝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上行 두 편 下行 한 편 열차 시각표 빈칸에는 적요만 도착합니다
역무원 두 사람이 물 끓는 난로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희끗희끗 내리는 눈송이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 속절없는 풍경 안에 넣어야 할까요 ☆★☆★☆★☆★☆★☆★☆★☆★☆★☆★☆★☆★ 《29》 화분
이병률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 《30》 거인고래
이병률
거인고래는 크지 않습니다 왼 눈은 감정 있는 것을 보고 오른 눈은 죽어 있는 것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상처가 생기면 상처 된 자리를 스스로 떼어내 번지지 않게 하며 백 오십년을 살 뿐 오래 살지 않습니다 그 일생의 한번 나의 천막에 들른다 하였습니다
밤은 어둡고 꽃들은 서로를 모른 체 하는 사이 나는 그의 눈을 받아먹고 고양이 되고 얼음이 되고 눈발이 되려 질척이며 그가 오는 소리를 향하여 몸 돌리려 하였습니다 헌데 거인고래는 살아오지 않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구실이며 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설레는 일 없도록 다 내려놓아야겠는데 팔뚝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는 천막 밖의 저 큰 나무 큰 나무 아래 몸에서 몸위로 까무러치는 수천의 달(月)들
혹 내가 터를 옮길 적마다 서 있던 저 나무 한그루가 거인고래는 아니었는지요
그것으로 다녀간 것으로 치자는 셈은 아닌지요 거인고래가 다녀가고 나와 내 생각의 풍경들은 마지막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
첫댓글 겨울 이사를
할 땐 참 서글플것 같아요
둘이 합쳐
이삿짐 정리할 때
스치는 차가운 손
애잔합니다
두근 반
세근 반
저울 달듯
사랑을 할 땐
늘 그리되는것을요
겨울
이병률
추운 이사를 했습니다
짐들을 부려놓자 성당의 종소리 바람을 만들었습니다
책을 둘 데 없어 책장을 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번쯤 가봤던 목공소로 향하는 길,
버스 정류장의 나무 한 그루 기대기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아는 체하는 목공소 사내,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것을 압니다
손가락의 안부는 탄성을 숨깁니다
즐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