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78
12월18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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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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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zOtuQNoY00 (김민수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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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대림 시기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한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살짝 등장하는 요셉 성인이십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서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을 소개할 때 언제나 교회는 그를 의인, 과묵한 사람, 침묵의 성인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 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결혼 문화 안에서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던지,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 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 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 없이 첫 삽을 뜰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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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3CHYaj5aD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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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기도와 관상기도 사이에서의 묵상기도의 역할>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하며 이름을 ‘예수’라 지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 예수라는 이름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임마누엘’과 연결합니다(이사 7,14 참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 함께 계셔주심은 곧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 머물며 나를 바꾸려 한다면 나의 의지보다는 그 사람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자칫 이것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피그말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키프로스의 조각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의 문란한 모습을 보고 여인과의 사랑에 환멸을 느낍니다. 그는 순결한 여성을 만들기를 원했고 상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조각하여 갈라테이아로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면을 갖춘 여인이라 믿으며 갈라테이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키스하거나 포옹하기도 했으며 비싼 옷과 꽃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을 아내라 불렀습니다.
아프로디테를 위한 축제의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후 아프로디테에게 한 가지 청을 합니다. ‘상아로 만든 처녀’를 자기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게 키스하자 갈라테이아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둘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훗날 파포스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사랑의 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테이아는 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조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랑 이야기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인간이 된 갈라테이아가 자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혼자 남겨두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의미합니다. 만약 피그말리온이 계속 눈앞에 있다면 갈라테이아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잠시 떠나있으며 인간에게 묵상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함께 있어서 변화시킬 수 있는 한계는 육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육체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계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감독이 여배우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요제프 폰 스턴버그’ 감독과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관계입니다. 스턴버그 감독은 당시 무명 배우였던 디트리히를 과감하게 ‘푸른 천사’의 롤라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디트리히를 완벽하게 스타로 재탄생시킵니다. 스턴버그는 디트리히를 할리우드로 데려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변신시킵니다.
우선 몸무게를 13kg이나 빼게 했고 이를 뽑아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눈썹을 잡아당겨 높게 하고 코에 명암을 주어 콧방울이 좁아 보이도록 했으며 머리에는 금가루를 뿌려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상도 손수 골라서 입혔습니다. 스턴버그는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디트리히의 얼굴만 있으면 숨 막히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오래갔을까요? 그나마 오래갔습니다. 둘은 8년을 연애했습니다. 문제는 둘 다 유부남, 유부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녀에 대한 스턴버그의 소유욕과 집착이 둘의 관계를 파경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훗날 디트리히는 “그는 나를 자기의 갈라테이아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토로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자 스턴버그는 불면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감독으로서도 퇴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와 비교하여 닉 부이치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이미 자살 시도를 했고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자신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는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미야하라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지만, 미야하라는 평생을 그 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닉 부이치치는 자신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맡겨보자고 합니다.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사랑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미야하라는 단 몇 번 본 그 팔다리 없는 사람을 1년 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하루하루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상대를 깊이 생각하며 내린 결정은 나중에 거의 바뀔 일이 없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도 묵상하여 주님을 자의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멀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사랑이 더 증가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감소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일찍 그 관계를 접는 게 낫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참사랑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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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8-24 :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1,1)으로 나셨고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위대한 태어남이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징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투심이 아닌, 남다른 자제심을 지닌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에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 이름은 어떤 죄와도 연관된 적이 없다. ‘요셉’이라는 말은 ‘흠잡을 데 없는’이란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고 하셨기 때문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요셉을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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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친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복잡한 일이 생기자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잠시 하와이엘 다녀와라. 그러면 여기 일은 내가 처리할게!’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가라 하와이’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입니다. 친구가 병원으로 면회를 왔습니다. 당시는 서품 받은 지 1달이 안 되었을 때입니다.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품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성령이 충만할 거야! 죽으면 하늘나라 갈 거야!’ 친구가 한 위로의 말이었지만 들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먼저가라 하늘나라.’ 벌써 30년이 지난 일입니다. 시장에 가면 덤으로 콩나물을 더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제게 덤으로 시간을 주셨고, 아직까지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는 한국에서 온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대전교구, 대구교구, 부산교구, 서울교구입니다.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은 연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줄이 없으면,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신부님들이 뉴욕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교구라는 연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신문을 만들 수 있는 것도 본사에서 지원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면의 60%는 본사에서 보내 줍니다. 편집의 방향도 본사에서 정해 줍니다. 뉴욕에서는 본사에서 정해준 방침을 중심으로 미주지역의 소식을 편집합니다. 본사의 지원이 없다면 신문을 만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구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태양계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달이 없다면 지구의 생태계는 지금과는 무척 다를 것입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구의 아름다움은 상상 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날이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유배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날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그날이 오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날을 만드는 걸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를 만났고,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날은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그날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가 성탄을 향해 가야만 성탄은 나의 성탄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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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오늘도 묵묵히,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며 주님 곁에서 참된 사랑을...>
지금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와 있습니다. 베네딕도 수도원의 모토는 “Ora et Labora,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묵묵히 기도하고 일하며 하느님 안에서 숨어 살아가는 수도승들의 모습은 오늘 복음의 요셉 성인과도 닮아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수도원 소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요셉 성인처럼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나의 상처와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를 다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받아 주시듯이 주님께서 내 안에 태어나실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지금 우리는 수도원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의 뒤에 있는 벽화가 참인상적이지 않습니까! 2007년 수도원 화재가 나기 전 예전 성당에 알빈 신부님께서 그리신 벽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저는 이 벽화를 참 좋아합니다.
먼저 이 벽화 속에는 예수님의 공생활 모습으로 시작해서 최후의 만찬과 수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여정을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할까요? Pascha 파스카라고 하죠! 구약의 파스카는 어린양을 대신 죽여 그 피를 통해 죽음을 면하고 홍해를 건너 시나이 산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을 맺고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신약의 파스카는 어린양 대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건너가게 하셨고 이로써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구원을 우리 각자가 완성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통 성전에는 십자가가 많이 놓여 있거나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성전의 벽화는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묘사하고 있어 구원의 전 과정을 묵상하게 해 줍니다.
두번째 이 벽화에 담긴 신학 중에 하나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묘사입니다. 과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바친 제사로써의 미사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이후 신학에서는 제사와 더불어 이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바로 “잔치”입니다. 미사는 파스카의 잔치입니다. 함께 제자들과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친교, 나눔, 섬김, 사랑” 등의 미사의 의미를 제대로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놀랍죠!!!
그런데 우리가 이 벽화에 담긴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파스카의 신학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이 그림이 완성될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 역시 자신을 나누는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우리 역시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가는 삶,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는 피로써 우리 죄를 씻으셨듯이 우리의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더 큰 사랑으로 건너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게 요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피정을 하고, 기도를 하고, 미사를 하고 나면 그런 마음이가득하다 가도 일상으로 돌아와 조금만 나와 맞지 않는 상황, 조금만 힘겨운 상황이 다가오면 “징징댑니다” 주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열등의식 속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요셉 성인의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보면 먼저 “받아들임”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뜻이나 세상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지금 당장은 손해가 되고 힘겨움이 될지라도 선으로 인도해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혼전 임신을 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당시의 관습 안에서 “마리아가 돌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황을 믿고 받아들이신 요셉 성인의 순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일상은 무수한 관계들로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들 안에서 이해관계나 미숙함 때문에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배척하며 받아들이지 못해서 참 힘들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다운 영적 탄생을 맞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하느님께서 나를 받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짐승들이 살아가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마구간처럼 옹졸하고 이기적인 우리 마음 안에서도 태어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선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되돌아가고자 하면 항상 받아주시는 분 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닮아 가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일상의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과 사건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과 사건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주신 성탄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렇게 하느님의 눈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마음과 계획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너무도 소중한 나를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주님과 대화 나누고 그분 안에 머물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탄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 좋은 많이 해서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살게 된다.
2000년 전에 탄생하신 주님께서 예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셨듯이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의 마음 안에 태어나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요셉 성인처럼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성탄절이 진정으로 우러나는 기쁨과 감사가 되지 못함은 아마도 우리 마음이 주님과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듯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며 고요한 침묵 가운에 나의 나약함을 봉헌하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때 우리 각자가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 되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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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주님의 탄생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은 했지만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혼자 속으로 조용히 결심합니다. 파혼하기로 말입니다. 법대로 사는 의로운 그였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기까지 요셉 성인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잉태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배신과 분노의 감정이 그를 휘몰아쳤을 것입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는 그 시대에, 복수의 방법은 간단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요셉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 이릅니다. '평소에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마리아,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를 사랑하기에 해치지는 말자. 이에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파혼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기를 잉태시킨 남자와 잘 살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은 여기에까지 이르렀지만, 실망과 외로움은 요셉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할 일을 다 한 요셉은 더 이상 견딜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껴안는 일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꿉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배신감과 분노로 며칠 밤낮을 고통스럽게 지내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혀 마리아를 풀어주고자 하였지만, 실망과 허전함, 그리고 외로움으로 시달려야 했던 요셉의 아픈 마음, 이 아픈 마음이 따뜻한 햇살에 얼음이 녹듯 녹아내립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기 예수의 탄생에는 인간을 향한 요셉의 끝없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배려할 힘조차 없어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견디어야만 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좇아 들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힘을 서서히 활동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 마음속에서 성령은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곳에 주님의 탄생은 예비되어 있습니다.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께서 탄생하셔야 할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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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남모르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두 번 태어납니다. 그리고 한 번 죽습니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서 두 번 죽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전합니다(묵시록 21,8 참조).
이미 하느님이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상의 것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음을 당한 우리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이 채워지는 곳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사도는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서 8,5)라 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로마서 6,11)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삶 안에 놓인 허다한 난관, 그 깊고 험한 구비마다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고 무서워하지도 두려워 할 까닭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날, 약혼녀의 임신을 알게 된 요셉이 겪었을 무지막지한 고뇌의 무게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날 요셉의 머리는 터질 것 같이 복잡하고 요셉의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경우에 따라서는 참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르심으로 새깁니다.
오늘 성경은 요셉의 의로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인정된 요셉의 의로움은 세상에 정의를 외치고 세상에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만큼만 자신에게 이해되는 만큼만 행하되 상대를 궁지로 몰아가는 경우가 없도록 살피고 상대가 힘들어지지 않을 방법 때문에 고민한 결과입니다.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되 남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행할 때 의롭게 기억하신다는 주님의 고백이라 짚어봅니다.
날마다 부딪히는 상황이 낯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나 싶은 지경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그분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얼마쯤 힘들고 어려운 것을 아시는 그분께서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며 “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로마서 8,26-27)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 눈물까지도 함께 하시는 그분께서 남모르게 살피고, 아무도 모르게 도우십니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했던 요셉의 숨겨진 의로움이 하느님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남모르게 행하는 의로움이 세상을 살리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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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천사를 통한 하느님과 요셉의 거래>
마태오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활(가르침과 행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비교적 먼 과거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전사(前史)에 속한다. 이러한 전사는 루카복음(1-2장)에도 있다.
둘 다 원전(原典)이 될 마르코복음과 예수어록에 없는 전승들과 각자 고유의 자료들을 토대로 전사를 엮었을 것이다. 루카복음의 전사(前史)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성장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 암시한다.
아울러 루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즈카르야,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목동들, 그리고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 등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도 포함시켰다.
이와는 달리 마태오는 예수님 단 한 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족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경위, 동방박사들의 방문, 헤로데 대왕의 베들레헴 아기학살, 이집트 피난, 그리고 성가정의 나자렛 정착에 관한 이야기를 위주로 전사(前史)를 엮었다.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러한 전사(前史)들이 예수의 생애 시초와 어린 시절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근거로 엮어진 기록들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밝히려는 신학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즉, 인류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신뢰와 신앙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사가 마구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사가 사실과 달라야 하는 법도 없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경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물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소개한 마태오가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마태오가 저술한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전자(前者)는 인간의 이름이요, 후자(後者)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즉,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어야 한다.
마태오는 다윗의 후손인 요셉을 예수의 합법적인 아버지로 서술함으로써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되게 하였다. 마태오는 예수의 공생활 중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예수께 8번이나 더 부여한다.(마태 9,27; 12,23; 15,22; 21,9.15 등)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밝혔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는 일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추진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의 잉태’(이사 7,14),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이다.(18절)
루카복음은 예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하느님의 계획과 이 계획에 대한 동정녀 마리아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루카 1,26-38) 또한 루카는 마리아의 합법적인 남편 요셉을 두세 번 언급할 뿐 전적으로 배경에 머물게 한다.(1,27; 3,23)
그러나 마태오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에 관한 사실은 간단하게만 밝히고, 오히려 요셉을 부각시킨다. 마리아의 잉태가 자신과 무관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은 상상에 맡기겠다.
복음은 요셉이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나, 마리아를 법대로(신명 22,20-21) 다루지 않고 자비로이 선처(善處)하려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때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여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사건의 정황을 설득시키고, 요셉은 이에 순명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요셉 사이에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에게 천사의 명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21절, 25절)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합법적인 아들로서 다윗이 자손이 되었고, 동정녀를 통한 성령의 잉태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의 아들이요, 하느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더 나은 이름이 있다. 바로 ‘임마누엘’이다.(23절)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적은 없다. ‘임마누엘’은 실상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의미상의 이름이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참다운 만남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예수께서 저 바깥 마구간 구유에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은 맨 먼저 요셉의 과제이기도 했다. 요셉은 아내 마리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안에 구유를 만들어 예수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의 거래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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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복음>은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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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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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1,20)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오늘 복음(마태1,18-24)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풍속은 혼인하기에 앞서 보통 일 년 동안 약혼 기간을 두었는데, 이 기간에는 각자 자기 집에서 지내고, 육체적 관계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기를 가지게 됩니다.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커다란 배신과 분노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요셉에게 보냅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이어서 '잉태된 아기는 육체적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이며,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를 맞아들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게 되고, 요셉은 주님의 양아버지가 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처한 경우처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닌, 보여지는 것 안에 주님께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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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결단 앞에서>
마태오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결단 앞에서>
그 앞에
선
나를 보되
이와 함께
아니
이에 앞서서
그 앞에
세우신
분을 보아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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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만 원을 투자해서 만 원을 버는 사람과 만 원을 투자해서 백만 원을 버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잘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큰 이익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능력 있고 지혜롭다는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번에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백만 원을 투자해서 일주일의 행복을 얻는 사람과 한 푼도 쓰지 않고서 한 달 이상의 행복을 얻는 사람 중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당연히 후자의 모습입니다.
행복은 물질적 가치가 아닌 영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으로 그 가치를 채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행복 연구가 대니얼 길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사소한 일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
감사의 인사하기,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 불필요한 소비재 사지 않기, 친절 베풀기, 밝게 웃어주기 등등….
돈 들이지 않고 행복할 방법이 참 많습니다. 소위 ‘명품’이란 이름이 붙은 물건을 산다고 해서 행복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 자신이 소중한 ‘명품’이 될 때, 행복도 오래 지속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올곧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오지요. 하지만 그의 약혼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벌여서 마리아가 곤욕을 보는 역경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22)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간음한 여자’로 신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요셉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소중한 ‘명품’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사랑에 기초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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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보석감정사가 되기를 원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보석의 달인을 찾아가 비법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보석감정사는 거절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진득함과 끈기가 없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자신은 다르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보석감정사는 한 번 기회를 주겠다며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잡아 주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온종일 다이아몬드만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렇게 일주일 동안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묻습니다.
“배우고 싶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배울 수 있습니까?”
“곧 배우게 될 거야.”
열흘째, 청년은 오늘도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올려놓으면 집어 던지고 포기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석감정사는 오늘도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올려놓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은 화가 나서 다이아몬드를 집어 던지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어제까지의 다이아몬드가 아니잖아요.”
보석감정사는 웃으며 말합니다.
“이제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군!”
기다림의 중요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섣부른 판단보다는 확실한 결과를 위한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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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성조들이 전쟁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를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과 고통,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고, 숨었을 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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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침묵의 사랑, 침묵의 훈련>
-침묵 예찬-
요셉 수도원 성탄카드의 배경 그림과 수도형제들의 얼굴 모습들의 구성이 참 깊고 신비롭고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깊은 사랑의 침묵중에 태어난 성가정의 예수님 아기와 더불어 동안의 미소띤 수도형제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무엇보다 감지되는 사랑의 침묵의 분위기입니다. 흡사 침묵의 호수위에 피어난 흰 연꽃송이같은 얼굴들이었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침묵의 사랑, 침묵의 훈련-침묵 예찬-”입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은 예외없이 사막의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의 생래적 특징이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이요 이 또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관상적 성향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침묵과 고독을 사랑합니다. 오늘(11.15) 보름날 달밝은 밤에 아주 예전 써놨던 '둥근 달'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푸르른 밤 하늘
휘영청 밝은 달 하나
온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른 깊은 침묵이
휘영청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푸르른 깊은 침묵의 하늘이!-2001.2.11
얼마 전 수확이 끝난 텅 빈 충만의 배밭, 광야의 수도승들같은 겨울 동안거에 들어간 배나무들을 보며 쓴 글입니다.
“일체의
부수적인 것들은
미련없이
다 떠나 보내고
본질로 남아
동안거
깊은 침묵중에
봄꿈을 꾸는
겨울나무들
겨울은 이렇게 지내는 거다.”-2021.12.12
대림2부 강론은 저녁성무일도 마리의 노래중 “오” 후렴을 나누고자 합니다. 흡사 깊고 아름답기가 하느님의 깊은 침묵중에 태어난 “오” 후렴처럼 생각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20세기의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 영성가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토마스 머튼을 꼽고 싶습니다. 참으로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던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요 그의 주옥같은 무수한 글들은 이런 깊은 침묵중에 태어난 것임을 깨닫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침묵예찬과도 같은 침묵의 소중함이란 시도 나눕니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안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믿음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하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이런 침묵이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구원합니다. 침묵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가이자 침묵의 사람입니다. 침묵의 관상과 사랑의 활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침묵의 관상에서 샘솟는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러니 침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훈련이 뒤따릅니다. 기쁨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훈련이고 침묵도 바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깨어 침묵의 훈련에 전념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저는 21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성인이자 영성가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꼽겠습니다. 어제는 마침 교황님의 85세 생신날이었습니다. 전 전주 수요일 일반 알현시 교황님 강론도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침묵의 사람, 성 요셉에 대한 내용으로 성 요셉뿐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침묵의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통째로 번역하여 나누고 싶은 강론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번 침묵에 대한 강론은 그러했습니다. 침묵의 여정중의 성 요셉으로 묘사했습니다. 특히 공감하는 감동적인 부분을 나눕니다.
“침묵, 얼마나 자주 우리는 침묵을 필요로 하는지! 침묵은 중요하다. 나는 다음 지혜서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온유한 침묵이 만물을 감쌌을 때, 당신의 전능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뛰쳐나왔다.’ 바로 침묵의 그 순간에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복음은 나자렛의 요셉이 발설한 말은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는다. nothing! 무無다! 그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말없음tacitum’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왜 복음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지 거기에는 깊은 사유가 있다. 자신의 침묵으로 성 요셉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말씀the Word’이 우리 안에 자라나면서 ‘말들words’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성생활은 말씀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정도에 따라 말들도 사라지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말했다. ‘그분은 커져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바로 이것은 그분은 말씀하셔야 하고 자신은 침묵해야 함을 뜻한다. 요한은 자신의 침묵을 통해 말씀이 살이 되신 분의 현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드리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성 요셉의 침묵은 결코 말없음의 침묵이 아니라 경청으로 가득한 침묵, 근면한 침묵, 그의 위대한 내면을 보여주는 침묵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아버지는 한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바로 그의 아드님이다.’
삶의 관상적 차원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침묵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계속 말을 쏟아내며 라디오를 텔레비전을 찾는다. 그들은 두렵기에 침묵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한다. ‘사람들의 모든 불행은 단 하나의 사실에 기인한다. 그들은 자기의 방안에 고요히 머물수가 없는 것이다.’ 침묵의 훈련없이, 침묵의 수행없이 우리의 혀는 우리를 괴롭힌다. 진리가 빛나게 하는 대신 우리의 혀는 위험한 무기가 된다. 실로 우리의 말은 아첨, 허풍, 거짓말, 험담, 모함의 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선을 앞둔 오늘의 현실에서 수없이 목도하는 이런 공해와 같은 쓰레기 같은 말들이요 가짜 뉴스들입니다. 오죽하면 기자들을 기레기라 하겠는지요! 내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혀의 말들이요 그만큼 내면의 침묵이 고갈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정말 영성가들은, 성인들은 침묵의 사람들입니다. 성 요셉,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요한, 오늘 복음의 의로운 성 요셉, 프란치스코 교황, 또 제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 예외없이 모두가 침묵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의 태몽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요셉을 신뢰했는지 감지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얼마나 성 요셉을 흠모하는지 요즘 배웁니다. 예전 마음 순수했을 때는 태몽도 많았는데 오늘날 태몽을 꾸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침묵중에 일어납니다. 주님 천사를 통해 밤의 침묵의 꿈중에 나타나 마리아에 관한 비밀을 소상히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환대, 겸손과 경청, 그리고 마지막 섬김과 순종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하느님은 얼마나 성 요셉이 고맙고 사랑스러웠겠는지요! 정말 하느님과 요셉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한없이 깊어졌을 것이며 성 요셉의 무궁한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 요셉 역시 예수님을 키우면서 이 태몽의 꿈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며, 하루하루 날마다 침묵과 경청의 하느님 환대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했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깊은 침묵의 영성가입니다. 깊은 침묵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서 서두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이고 은혜로운지요!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대림시기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매일매일의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 부르시는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모두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과 침묵의 결정체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침묵의 사람, 정의와 평화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우리 나라에, 우리 공동체에, 우리 하나하나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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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5tXIdSr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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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들의 성탄 축제)
https://www.youtube.com/watch?v=UCvZisWT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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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 21)
내려놓은 적
하나 없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오고 있다.
맞아들임과
받아들임 사이에
우리가 있다.
내려놓음과
함께함 사이에
우리가 있다.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함께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열리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의 참된
중심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제 색깔을 찾게된다.
탄생은
제 색깔을
찾는 기쁨이다.
사랑은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이다.
누군가의
받아들임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다.
받아들임은
감사이며
기도이다.
말씀은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성 요셉의
받아들임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거기에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여정이다.
내려놓기에
우리가 되고
받아들이기에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내려놓기에
보이는 성탄의
신비이다.
우리의 색깔도
내려놓기에
활짝 열리는
꽃이 된다.
내려놓음과
받아들임이
사라지면
성탄도 없다.
내려놓음이
성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자신을 뜻을
내려놓는
성 요셉의
눈물에서
아래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탄생이 있다.
내려놓는 말씀이
받아들임의 탄생
말씀의 사람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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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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