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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구몽 은둔 생활 陆龟蒙的归隐生活
2021년 11월 1일2일 12:15 시나 모음집
출처: 오문화박박물관
(원)왕몽[전]왕비망천도 미국 플릴미술관 소장(원) 왕몽 [전]비망천도' 미국 프릴 미술관 소장 (元)王蒙[传]《仿王维辋川图》 美国弗利尔美术馆藏
육구몽고진사불중후는 호주자사 장단문 하류에서부터 보리에 은거하여 '보리 선생'이라 불렸다."다. 은둔의 육구몽,"세속과 교대하지 않고 늘배를 타고 돗자리를 차리는 식으로 속박을 준비하다.책, 차, 붓, 수저.강과 호수를 마음껏 유람하라'고 적혀 있다.이것은 옛사람의 형용이다개요를 말했는데, 만약 탐구한다면 육구몽.은둔 생활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장서장서는 그리 부유하지는 않지만, 진귀한 도서를 얻을 때마다 반드시 숙독하고 암기하여 베껴 쓴다원수를 더 가르친 후행베껴 써서 책마다 다 써 버리다보관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보리선생전》에서그렇게 자진(自眞)하는 것이다.책 한 권을 얻으면, 상세하고 익숙하다면, 그렇다.뒤에 방책에 넣어두면, 본보기 바로 교정일 뿐 재삼 제한하지 않는다주황이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사람이 책을 빌리다가 파손되거나 편질서가 잘못되면 반드시 집탈정을 가한다.육구몽과 당대 장서자에는 시가 많다사교창의 작품으로 서수오의 화시 '봉화습미이유시·서시'에 나오는 '팔만오천권, 낱낱이 납칠하기'는 장서지악을 말한다.
시를 쓰다. 시인으로서육구몽의 본업은 말하지 않아도 좋다.
차를 마신다. 고대의 것과은자처럼 육구몽도 차를 좋아했다. 아마도 그와 같은 성씨 선대 육우를 받았을 것이다영향에 관한 것이다. 육우재호주에 살았더니, 육구가 몽롱하다.장박막료 때도 묵었다호주를 지나 호주를 돌아보다저산 아래 차밭을 하나 장만하고육우의 '모방'까지 했다.다경'에 《차서》를 한 권 썼으나 아깝게도 나중에 잃어버렸다전한다. 그러나 그의 조시 《화다구십영》은 남아 있다."십영"은 다독·다인·다순·다반·다사·다부자·다부자·다부자·다부자·다부자·다정 등이 포함된 것에 대한 것이다'차구(茶口)' '차를 끓이다'는 찬사가 일개 다객의 마음을 대변한다.육우의 다경과 대조해 보면 사료적 가치도 적지 않다.
농학·어구를 연구하다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한 시인의 농학공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이 점.
그러고 보니 육지거북이몽은 적어도 대은자라고 할 수 있다.이것 역시 그와 춘추의 범려, 서진의 장한이다나란히 '천고삼고'에 속하다그 이유 때문이겠죠. 송나라에 있을 거예요.대, 오강수홍교남세 고사가 있는데, 주도면밀하게 '에 있다.제동야어·치이자견》'에 기술되어 있다.범성대는 '오군지'에도 나온다.서진(西晋)에 항복하고 오(吳)에 은인(隱人)이 많았는데, 어찌하여 육구몽(陸龜蒙)이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의 은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대의 중국에는 많은 문인들이 은자의 탈을 쓰고, 한편으로는 밭을 지켰다귀은(歸隱)은 불평불만이 가득하지만 육구몽은 진짜 귀은(歸隱)이다.마음이 편안하고 무덤덤하기 때문에 그의 발성은 매번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다.또한 이러한 은자(隱者)의 이름은 있지만 유교(儒家)의 뜻을 품고, 수신(修身)이 집안을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리는 이상(理想)도 자주 나타난다.그래서 육구몽은 은자였지만 우국우민(憂國憂民)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북송)이공린[李公林]전]《오중삼현도권》(북송)이공린[전]《오중삼현도권》》(北宋)李公麟 [传]《吴中三贤图卷》
노신은 《소품문》에 있다'의 위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말 시풍은 쇠락하고그리고 소품문은 빛을 발했다….피일휴와 육구몽은 스스로 은자라고 여겼다.은자를 위하여 그들이 있는 것을 보다《피자문수》와 《삿갓》택총서'의 소품문, 결코 천하를 잊지 않았다바로 엉망진창의 진흙탕이다.안의 광채와 예봉.
《삿갓택총서》는육구몽의 글집.
루쉰의 눈에는 《 在》이 보인다.'카사자와 총서'에는 어떤 빛이 있을까.먼저 《야묘비》부터 이야기합시다.이 글은 대학어에 수록되었다문교재의 풍자 잡문, 따랐다'비'의 본뜻을 말하자면,서술비의 유래와 위야묘립비석의 원인은 이어서 심문하다한 야묘에 가서 전기를 쓰다이유. 문장 전체가, 마치 라라처럼 보인다.복잡하게 소감을 말하지만, 또 준엄한 풍자의 냄새가 내포되어 있다.이치대로 말하면 은자 하나가 자기를 구속하였으면 좋으련만 육구몽은 하필 천하를 품었느니라사실 가사자와 총서에는 야묘비처럼 시사(事事)를 다룬 글이 적지 않다.육구몽은 당시 사회의 부패와 봉건 미신을 신랄하게 풍자했고, 전환기의 만당문학가에서는 색다른 풍경이 됐다.
이것은 아마 노신희일 것이다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죠.
물론 육구몽능그렇게 쿨하게 만당에 사는 것은 원생 가족과도 무관치 않다.
출신 세가
육구몽의 일생,잠시 막료를 지냈을 뿐 평생 선비에 불과했다.혹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그의 천성을 위해 유유자적하나 실은그가 이렇게 선택한 이유는그의 생활은 그와 관료 출신이다세가상관이 깊다.그의 아버지는 육빈우 씨가 맡고 있다과어사직증조할아버지는 육강하시고, 관리는 택주에 가 사시하였다그의 고조부인 루푸는 소부소감을 거쳐 평창현남에 봉작되었다.더 밀면 그의 5대조 육경천은 감찰어사, 6대조 육상은 선증당나라의 재상을 거쳐 연국공(延國公), 7대조 육원방(陸元方)은 호부시랑(戶部詩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그런 대망의 대가족이 육구몽 대에 이르면 가문의 영향을 받을 게 분명하다.그래서 진사부제(進士不制)를 칠 때 저력과 배짱이 있었고, 세속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만약 일정한 경제 보장이 없다면, 그의 생활은 승낙할 것이다틀림없이 계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명) 구영 망천십경도(국지) 랴오닝성 박물관 소장(명) 구영 망천십경도(국)부)'의 랴오닝성 박물관소장하다(明)仇英《辋川十景图(局部)》 辽宁省博物馆藏
비록 조상께서 남기셨을지라도가산이 적지만 그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파탄의 상이 되었다.말라 죽은 낙타에 지나지 않는다.말보다 크지만 그의 집은 그래도 크다가옥 30칸과 논밭이 있다400묘·경우 10마리고용인 10여 명. 이치대로이런 날 살았대와도 나쁘지 않지만, 육지거북.자기 집의 논바닥은 물에 잠기기 쉬우며,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족하다. 그는 『보리선생전』에서 "선생님은 가난해서 창고에 승두리가 없다"고 한탄했다.오죽하면 송대손 광헌이 북몽사설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을까."성품이 고결하고 집안이 가난하며 가족을 사양지록(思養之錄)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참은 것이다뭍거북이 속였지.
청대의 야오청서의《오추방고록》에는 육구몽이 소주(蘇州)에 세 곳의 거처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한 곳은 루직의 천수이다별장, 안에 청풍정이 있다.기국혜, 무지개 다리, 셈.두 번째 대저택을 얻다진택의 천수종별업—일개 전문낚시터세 번째로 쑤저우 성 임돈교 부근, 피일휴《임돈은 오중에서 승리한 곳으로 육로망이 거처했다는 시 전문이 있다.성곽을 벗어나지 않고 교외의 서가처럼 광활하고, 여느 때마다 방문해도 아쉬움이 남는다.'오언십수, 지붕 벽에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렇게 말하면 육지거북이다멍하니 우는 것은 대개 조상님과 비교가 되는 것이지요.
한 시인의 농학공헌하다
"농아, 천하가 크다.본디 백성들이 믿고 산다"고 말했다.
이것은 한 무제가 조명한 것이다책에 나온 말 한마디.한·당은 성세였기 때문에, 이 말도 곧 관을 덮는다는 결론이 났다라는 뜻입니다. 사실은 천올해 들어 중국 사회가 하나바로 농업경제사회다농업도 국가 경제 민생이다.그 근본이 있습니다. 반영되어 있습니다.문학에 있어서 시와 사를 막론하고가곡이든 모두 한 줄기 농업의 빛을 찾을 수 있다마찬가지로 시인이나 작가에게 있어서, 작게는 초목충어라는 이름을 많이 알고 농경 문명에 대한 깊은 관조까지, 고대 문학사에서 매우 중시되어 왔다.요현상.
(명)육치 《춘경도》>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소장(명)육치 《춘경도》타이베이 고궁박물관숨기다(明)陆治《春耕图》 台北故宫博物院藏
육구몽은 남달랐다그는 전원에 은둔하고 농사 반독의 은둔 생활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학에도 관심이 있다과학적인 태도로 깊이 탐구하다삭. 그의 문장을 정리하지 않는다발견하기 어렵다. 그가 뿐만 아니라한 시인, 더더욱엄밀하고 꼼꼼한 농학자,농업기구에 대하여 끌채를 휘어 갈고 쟁기를 하다식물 보호나 운동과 같은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사물 사육 등 여러모로 유익하다.
그의 소품문 《좀》화'의 본래 의미는 물건을 빌려 감흥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글에서는 귤나무가 벌레와 좀을 해치는 형태, 습성에 관하여라는 서술은 분명 공평한 것이다시시때때로 자세히 관찰하여라.귤나무 해충생물이 되다방제의 중요한 사료 중 하나. 이 글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시작:
귤의 좀과 같이 크기가 작다.머리와 뿔은 잔뜩 찌푸린 채 희끗희끗한 푸른빛을 가리킨다.나뭇잎을 무는 것이 마치 굶주린 누에의 속도 같다막상막하이다. 사람이 감동하거나 감동하다.노여움, 노여움, 노여움, 노여움, 노여움.색채가 걸악하고 오만하다. 일단 보고 지나치다.解析:응연불식불동;해가 거듭되면 나비가 된다아! 힘에 구애되고 그 힘에 구애된다새털이 아직 펴지지 않았다.배가 메워지면 타원이 되고, 가늘고 길다.취해서 자나 깨나, 몸이 축 처지다.내일이면 바람결에 이슬을 받아 풀과 나무에 기어오르고하늘하늘 가볍게 날갯짓하며 지나가다.때로는 은혜로운 틈을 비집고, 때로는 대숲을 남겨 두고 빙빙 돌기도 한다.허망하고 너덜너덜한 것이 매우 사랑스럽다.잠시 그물에 걸려서 엉키고 질곡처럼 단단하다.비록 사람이 매우 불쌍하지만, 풀어서는 안 된다!
과학적인 문장을글씨를 이렇게 천근하게 쓰면서 문체가 날라 정말 흔치 않다.
귤 좀을 제외하고 그는 좀이 먹는다들쥐·부리·부리 등 각종 병충의 식량 피해도 관찰한다.벼쥐를 외우다.들쥐 퇴치와 관련해 제기하다생물 방제 방법가금'이라는 글에서 그는 그물을 제시했다포화약살의 방제 방법하지만 동물 자원 쪽에서는면, 그는 또 보호해 달라고 큰소리로 호소했다.그는 '남경어부(南京漁父)'라는 시에서 "자꾸계오속은 천물이 폭발할 수 없다.크고 작은 것들은 거류하여 번식한다.언젠가 어부지리를 얻어도 물고기는 소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는 약어를 반대하며 종어(種魚)인 알을 채취해 번식시켜 어족자원을 보호하자는 '종어(種魚)'를 내세웠다.
감정이 없는 사람 하나사람은, 이런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지거북'을 읽는다.몽전집 교주(봉황출판사 2015년 1월호), 나는 단호하게 인정한다.그를 위해서라면 진짜이다농학자여도 자신을 위한학양이 얕아 창피하다부끄럽다. 나는 북방의 시골에 있다.18년을 살았는데, 거의 같다모든 농사일을 배웠다그러나 그것을 생존의 기량으로만 여겨졌다.고향에서 나는 옥수수 감자 호마 등 많은 식물의 글을 정성 어린 마음으로 외우지는 못한 것으로 동지는 파악했다.
정말 부끄럽다!
어구 완전
양어에 관해서는 최초《제민요술》에 나오는 몇 편의 산실문은 범려 《도주공양어경》이라고 한다의 잔본은 명나라 때 황성이었다또 《양어경》이라는 책도 있습니다.양어지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다법어류물고기의 법을 취하여 결여되다.그나저나 황은 일찍이 반성하였다.'양어경'과 '주어보'가 있다.원래는 물고기를 기르는 것을 말하는데 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합니까?물고기를 기르는 것은 보는 즐거움이고, 잡는 것은 고기 잡는 즐거움이다.
(남송) 산실된 이름군어희조도' 고궁박물관 소장 (南宋)佚名《群鱼戏藻图》 故宫博物院藏
다행히도, 육구는 몽여하였다.우리는 적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육지거북이 계산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다.당대에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전형적인 인민 대표라 할 수 있겠지, 어쨌든 그는 늘 걸핏하면 그랬으니까필묵지와 벼루를 가지고 다방에 가다.태호 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주 오래되었다.…그냥 축적이야낚시 경험. 이것들은 일본에서 온 것이다.상생활의 경험을 그가 보게 하다이어 《어구 10》을 완성하였다5수(병렬) 및 《화첨어구오편》.이 두 조의 시는 고기를 잡는 도구와 고기를 잡는 기술에 대해 전면적인 서술을 하였다.
《어구 15수》에서'의 서문에서 그는 13종 총 19종의 어구와 2종의 어법, 19종의 어법을 소개했다구기에는 이미 그물 속에 속해 있는 것이 있다어망, 반두, 참수리, 갓…또는 제비류에 속하는통과 수레, 그리고 대들보와 통발.、, 、, 、, 、, 、, 、, 、, 、딱딱 울리는 소리, 신, 상해, 、——-이 어구들은 제조에 따라 다르다.재료와 제조방법 및 용도와 용법에 따라 나뉜다.
(명) 주신악도' 고궁박물관 소장 (明)周臣《渔乐图》 故宫博物院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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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내가 일개이다북인, 고문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두야말로 2년 전 원저우 석당진에서 처음 나온 일이다보고, 그래서, '어'를 읽는다.구15곡'은 안갯속이다.물의 느낌. 두 가지 고기.법, "혹은 술로 불러도""혹은 약으로 다한다", 아니어느 쪽이든 육지에 있다.보니 "활어지구,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다.。
피일휴는 이런 것에 대해"라고 말했다.어구시'를 매우 상찬하며, "무릇 어기가 이미 왔으니 술과 기는 모두 이에 해당된다.야"라는 글을 올렸다.
(원)당제포귀어도(국지)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소장 (元)唐棣《霜浦归渔图(局部)》 台北故宫博物院藏
화첨어구오편>에서 육구몽이어암, 낚시, 도롱이, 조릿갓, 등딱지 등 5종은 어인과 함께 사라진다.서로 관련이 있는 사물에 대한 문제,어부지구를 쓴 것 같지만 실은뱃사람 살림을 도맡아 하는새콤달콤한 입구는 작지만얇게 썬 것이 오히려 크다는 것은 옛말이다시조.
보리오리와 보리오리수프
1982년, 위바다 영화제작사는 코미디 영화 《소득월루》를 제작하였다.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는 주요이다사람이 수양버들 머리와 조조 등 하나를 기다리다.젊은 사람이 개업했다식당이 작은 월루인데, 한번 태워 보자.실수한 지 오래된 소주 이름채록직 "보리오리"그래서 일부러 도서관에 가서 강남을 찾기도 했다.메뉴판, 다행히 대박이 났다.
보오리,육구몽이 만든 음식이다
육구몽은 보리에 은거하며 오리를 기르기를 좋아한다.그가 오리를 기르는 것은 무얼 하는가? 용감한 자를 택하여 오리를 싸우고, 아름다운 자를 택하여 오리를 놀리며, 요리하는 것이다.육구는 천성이 호매하여 친구를 잘 사귀었으며, 문인 묵객과 장수가 찾아올 때마다 오리 요리를 대접하였다.육구몽이 창제한 보리오리는 왠지 모를 일이다.
(남송)일명 《유압도》타이베이고궁박물관장(남송)일명 《유압도》타이베이고궁박물관장(南宋) 佚名《乳鸭图》 台北故宫博物院藏
한 번은 단골 식객이 "오리 요리를 먹는 방법을 바꾸면 안 되겠느냐"고 육 조언했다고 한다.이런 제안은 육구몽의 심기를 건드렸다.그는 며칠을 심사숙고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구이법이 생겼는데, 바로 오리에 비둘기, 비둘기 속에 참새를 싸고, 참새에 알을 싸고, 오리가 껍질을 튀기고, 오리에 석류꽃 한 송이를 물고, 밑을 따는 것이다.연잎을 큼지막하게 받쳐 주다.이런 공정만 보면, 재료가 많고, 절차가 복잡하며, 반드시 시간이 걸리고 또 힘이 소모되기 때문에, 말하기 보다는보리오리는 육지거북이 손님을 대하는 쌈채라기보다 옛 문인들의 한가로운 정취를 잘 보여준다.고대의 미식은 언제나 문인 묵객과 가까이 지내야 했다.항저우의 동파육은 전형적인 항방채소로, 보리오리는 소방채소의 경전이다.
나중에는 이런 방법이 없어졌다.
나는 루직의 한 오래된 가게에서 그들의 방법을 본 적이 있다.오리의 뱃속에는 백과, 육피, 생육정이 곁들여져 있을 뿐이지만, 먹어도 여전히 맛이 좋다.관건은 결실이다.흰 열매가 비교적 채소에 덜 들어가 먹으니 신기하다.흰 열매는 찰기가 있고 약간 쌉쌀한 맛이 나기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신선한 맛이 더 두드러진다.
육구몽과 관련된 보리 오리탕도 있다.
늙은 오리 한 마리가 발굽힘줄, 말린 조개, 햄, 표고버섯, 죽순을 넣고 천천히 끓인다.그런데 경험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국물은 밑바닥의 찌개와 겉면의 기름층을 쓰지 않고, 성년의 오리가슴살을 취하여 썰고, 갓김치, 다진 햄을 국물에 넣어 살짝 전분을 가하면 상에 오를 수 있다.
소주 민간에는 "보리 오리탕을 먹으며 뺨을 때리려 해도 놓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먹어 본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청화자 그릇으로 나누어 먹는 것인데, 꽤 오래된 맛이 있다.그때 동항 신촌에서 내가 면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던 진익화는 국물에 국수를 한 그릇 넣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비색자 애호가
육구몽은 《비색월기》를 쓴 적이 있다.
아홉 살 가을바람은 노월요개하여 천봉의 푸른빛을 거두었다.
중식에게 부동통을 잘 담아 혜중산두유배( 中中産鬪中産頭遺배를 잘 탄다.
월요에서 불의 세례를 받고 구추풍로에서 마침내 천봉취색을 쟁취했다는 뜻인데 어찌 혜강 같은 인걸과 귀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5대)월요비색자사각형고족투반 오문화박물관 소장 (五代) 越窑秘色瓷方形高足套盘 吴文化博物馆藏
신당서에 따르면 비색, 즉 청자다.당송시대에는 비색자가 조정의 '공물'이었지만 만당과 송의 차이점은 당시 유약은 황색, 송대는 청록색이었다.소주박물관에는 비색자의 연꽃사발이 마치 만개한 연꽃을 연상케 하는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진관지보가 있다.
(5대) 비색자 연화그릇 소주박물관 소장 (五代)秘色瓷莲花碗 苏州博物馆藏
나는 육구몽이 분명 비색자 애호가이리라 생각한다. 그가 태호를 방탕할 때 비색자 다기도 가지고 다니겠지.
문단의 질리.
피륙, 만당문단 피일휴, 육구몽을 합친 말이다.
당대의 문단은 합칭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이두(李杜, 이백과 두보), 원백(元 与, 원진과 백거이), 온이(溫李, 온정균, 이상은)가 흔하다.그러나 고대의 합칭에는 제명과 병칭의 구분이 있었고, 제명은 당세의 이론, 후대의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피일휴와 육구몽은 서로 아끼고 화기애애하며, 아니 한 쌍의 고산유수 같은 친구였다.경의의 순간에 역사책에 빛나는 만당시학의 표본이 되다.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은 후베이(湖北)성 톈먼(天門) 출신과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 출신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역사의 인연은 어떻게 이들을 한데 묶었을까.
피일휴는 송릉집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통) 10년, 청하공(淸河公)이 오(吳)에서 출목할 것을 간언하고, 일휴위부(日休爲部)에 종사하였다.일월에 진사육구몽이 그 업으로 창조하였으니 계수편이라
대체로 그들은 이때 알게 되었다.이후 호흡이 잘 통했고, 곧 절친으로 이끌었고, 노래도 많이 했다.또한 피일휴는 노래와 작품을 자작하여 송릉창화집(松陵唱和集)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만당시단의 송릉체(松陵體), 피륙체(皮陸體)라고도 한다.이 시들을 읽으면 시풍이 청수하고 담백하여 저절로 한 격이 된다.전형적인 만당강호 은둔 일파는 온이의 허례도, 교도(맹교, 가도)의 초췌함도 없었다.그들의 악창과 작품고대 창과 시의 내포를 넓혔다.
노래와 시는 옛날부터 있었지만, 한 사람이 많이 선창하고, 한 사람이 화해를 하는 것도 결국 각자 정치를 하며, 각자 쓴 것이다.그러나 피륙의 다음 운창과, 순차적으로 수창의 시를 써야 하는 운각은 창작의 난이도를 높였고, 창과 작품이 한층 더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게 했다.피륙이 차운창화(次運唱和)를 처음 창시한 이후 이후 시단에도 한 사람이 수창하고 여러 사람이 차운과 작성을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아쉽게도 그 다음 운창과기이한 싸움을 위해 칠첩, 팔첩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첩전운' '재첩전운'과 운으로 겨루는 시인이 있어 시의 내용이 무색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송릉창화집'의 등장은 중국 고대 시단의 첫 번째 창이자 시집이라는 노래와 시집이 없는 세간의 공백을 메웠다.이후 《서곤교수창집》과 청나라 문인들이 결사를 좋아하고 시를 쓴 것도 피륙의 효시 덕분이다.
지금도 남쪽의 시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전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붓방아궁이
신당서 육구몽전을 보면 은둔생활이 대체로 이와 같다.
세속과 사귀는 것을 싫어하며 비록 집을 만들지만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말을 타지 않고 배를 띄워 돗자리를 만들고, 속서·다부자·필상·낚시를 주고받았다.이때 강호산인(江湖産人) 또는 호는 천수자(天受子), 보리선생(普里先生)으로 부옹(富翁), 어부(漁父), 강상장인(江上將人)이다.
《보리선생전》에서 이 소요는 더욱 자세하다.
천성이 속인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비록 집을 방문하더라도 만날 수 없다.수레와 말을 두지 않고 경조하지 않으며, 내외부의 인당이나 복랍상제에도 제때 가지 못했다.추위에 몸이 무사한 날에는 작은 배를 타고 돗자리를 차리고 책 한 다발, 다부기, 필상, 낚시 도구, 도선랑 등을 베푸는 정도에 그쳤다.비록 물새가 날아오지만, 작은 일에는 뜻을 알 수 없고, 지름길은 아직 남아 있지 않다.사슴이 무서워하는 것만 못하다.사람들은 강호산인이라고 하는데, 선생은 《강호산인전》을 저술하여 그것을 노래하였다.
다시 말해 육구몽은 책 몇 권과 펜꽂이(고대에 붓을 놓던 선반), 그리고 차를 끓이는 부뚜막을 들고 다니며 배를 타고 다니는 등 목적 없이 돌아다녔다는 것이다.이런 생활은 고대 사람만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니, 정말 나를 부러움을 산다.
여기에다 펜꽂이 이야기까지 하자.붓을 놓는 전용 기물로 오래된 필상이다.남조 서릉은 옥대신영서에서 유리연갑은 하루 종일 들고 다녔고 비취 필상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다.오랜 기간 동안 문방 용구가 풍부했고, 능수능란한 장인들이 그들의 상상력을 통해각종 재질을 이용해 손에서 놓지 않는 문방 공예품을 만들었다.
문헌에 따르면 필상의 재질에는 반지와 금, 비취, 자단, 오목이 있는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전세기물들은 대부분 도자기나 대나무 나무로 만들어졌다.오래된 필기용 침대는 이미 흔치 않은 문구이다.지금은 문구함이라고 고쳤어요.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철제 문구함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사치였다허황된 일. 침대와 다궁이가 한데 모여 은자의 생활에 가깝다.물론 옛 선비들의 향락이기도 하다.지금 나는 항상 태호에 간다.전쟁하듯 총총히 돌아간다.
(청) 청옥필상 고궁박물관 소장 (清) 青玉笔床 故宫博物院藏
한번은 랴오닝성 박물관에 소장된 원전의 그림을 읽은 적이 있다.그림 속에는 배가 있는데, 한 옹은 왼손으로 거문고를 치고 오른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시동이 차를 끓이기를 기다리고 있다.그림 왼쪽에 시를 쓰다
오만한 편주가 운수변에 있고, 붓방석에 찻부뚜기가 매일 지니고 있다.
밑으로는 임금의 이름을 찾지 마라, 강호에 흩어진 사람이니라.
(원)일명 《편주오사도》 랴오닝성 박물관 소장(元)佚名《扁舟傲睨图》 辽宁省博物馆藏
'강호일산'이 되는 것은 인생의 여미이자 필상다구의 귀결이자 궁극적 의미이기도 하다.저자의 명어가 분명하지 않은 이 고화는 내가 늘 그린 것이 육구몽의 필상다레의 은둔 생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나 나는 고고학자가 아니라 육구몽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고고학자들을 그린 것인지.판정하세요.
묘원
루직의 보성사는 당나라 때 진흙 인형으로 유명한데, 내가 보기엔 보성사는 마치 육구몽묘의 입구 같았다.보성사에서 서행하면 육구몽의 묘원이다.묘원은 크지 않고 비석에는 '당보리 선생 묘'라는 여섯 글자가 강건하다.묘 앞에는 못 하나, 못은 두압지, 정자가 하나 있다.청풍정입니다. 연못은 육구몽이 오리를 기르던 곳이고, 정자는 육구몽이 바람을 듣던 곳입니다.
육구몽묘, 사진 : 강파육구몽묘, 사진 : 강파陆龟蒙墓,摄影:江波
사실 정자와 못은 모두 정비하여 복원한 지 불과 30여 년 만이다.고서에 언급된 다림과 비랑은 이미 찾아볼 수 없다.묘원 서쪽에는 천년 은행나무로 줄기가 굵고 잎이 무성하여 주변에 새로 심은 작은 나무들에 비해 듬직하다.나무 앞에 패를 하나 놓았는데, 패 위에 '남조'라고 쓰여 있었다.이쯤 되면 육구몽이 본 것 역시 뜰에 우거진 나무였을 것이다.
나무 밑에 서서 나는 단향내를 맡았다.향을 찾아 바라보니 정교하고 아름다운 동로와 살짝 부풀어오른 무덤들이 보이는데, 이들은 조용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녹색 몇 송이 뒤에 숨어 있었다.이런 모습은 육구몽의 생전 성격과 같다.
묘는 볼품없고, 작고, 비석 하나, 흙더미 하나일 뿐, 대시인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묘의 위치와 규모는 적절한 듯 한쪽에 치우쳐 떠벌리지 않는 은자(隱者)의 관습에 잘 들어맞는다.내가 구리 난로 안의 향을 세어 보니, 높고 낮은 것이 수십 심지가 있었다.육구몽에게 이것은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불과 그 옆의 황량함에 가까운 봉분은 은둔의 끝일까, 영광의 시작일까.천 년 동안 그는 줄곧 허락을 받았다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계속 의논하고 있다.그의 인생도 이로 인해 천 년이나 길게 이어졌다.
묘주에는 정렬된 초석이 있는데, 비록 성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것을 알 수 있다.초석 위의 민가, 처음에는 제법 거창했을 텐데, 육구몽은 손을 뿌리치자마자 백련사 뒤편으로 보냈고 지금은 담장입니다.예전에는 육구몽의 조각상이 놓여 있던 사당이었다고 한다.
알현을 마치고 다시 보성사로 돌아가다. 谒毕,复又绕回保圣寺
절 안의 흙 인형들은 조용히 구경해야 하는데, 마침 시끄럽게 떠드는 관광객들에 의해 방해되었다.여기서 영면할 줄 모르는 육구몽이 이런 소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참고 문헌
① 육구몽저.《육구몽전집교주》[M] 장쑤: 봉황출판사, 2015.
[2] 야오청쉬 지음.《오추방고록》[M].장쑤 고서적출판사, 1999.
[3] 문진맹 등저.오중소지 속편[M].안후이:광릉서사,2013.
[4] 오중구 루직진지 편찬위원회 편.루직진지[M].베이징: 팡즈출판사, 2016.
参考文献
[1]陆龟蒙著。《陆龟蒙全集校注》[M]江苏:凤凰出版社,2015。
[2]姚承绪著。《吴趋访古录》[M]。江苏古籍出版社,1999。
[3]文震孟等著。《吴中小志续编》[M]。安徽:广陵书社,2013。
[4]吴中区甪直镇志编纂委员会编。《甪直镇志》[M]。北京:方志出版社,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