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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육대학교 동기동문은 크고 튼튼한 우산이다.
李鶴源: 江原大學校 師範大學
地理敎育科 名譽敎授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반갑잖은 궂은 날이 오는 때도 있고, 그
칠 줄 모르고 하염없이 내리는 궂은비에, 잘 차려입고 나간 새 옷을 적
시기도 하고,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오랫동안 절망과 실망에 빠져
세상을 원망하며, 허망한 세월을 보내는 때가 있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일차적으로 가족이라는 따뜻한 우산이 필요하다. 어쩌
다보면 일가친척의 우산도 필요하고, 친구와 동기동문들의 우산이 절실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동기동문의 도움으로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
고, 대학총장과 학장이 되기도 하고, 대학교수가 되고, 교장·교감도 되고,
죽을 사람이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할 수도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소프트라이트를 잘 받는 힘 있는 부서에서 근무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주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의 동기동문은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이라는 굳건한
두 뿌리를 근간으로, 사회조직 깊은 곳 까지 큰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
왔다. 분야에 따라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자랑하는 이익 집단
이 되어,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히든파워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역기능을 행사하며, 조직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대학교에서 교수들이 여태까지 선출해온 대학교
총장과 학장 선거였다. 그 지역의 최고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한 로칼에
다가, 교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서울대학이나 연·고대 출신이 아니면, 아
무리 유능한 인재가 출마해도 총장이나 학장이 되기는 힘들었다.
이와 같이, 동기동문의 역기능도 있지만, 세상 살 맛을 나게 하는 순
기능도 많아서 대부분의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의 동기동문은 단지 같
은 학교, 같은 시기에 공부했다는 인연 하나만으로, 열기 힘든 가슴 속
속마음을 열어놓기도 하고, 선배가 아니면, 동기가 아니면, 후배가 아니
면 정말로 도와주기 힘든 일이라도, 시간을 내고 정성을 다하여 피붙이
형제간의 일처럼, 서로 도와주며 위로해 주는 것이 동기동문이다.
부산교대 서울총동문회가 2014년 11월 25일 오후 6시, 서울 마포구
공덕동 더부페 마포점에서 열렸다. 다음 날, 곽신도 선배님께서 카페에
올린 사진을 보니, 부산사범 4회의 문정옥 대선배님께서 90세의 노구에
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동문회에 참석하신 사진을 보고, 만감이 교차
하며 가슴 뭉클하였다. 90세의 연세에 백발을 휘날리시며 찾아오신 대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저 부산사범, 부산교대 동문 모임이 있어서
참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시다고 말씀하셨다니, 바로
대선배님의 그 마음을, 우리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마음이 아닌가
하여 감개무량하였다. 우리 동기동문을 사랑하시는 선배님의 따스한
마음이 오래도록 후배들 가슴에 남아 기억되었으면 한다.
이런 순기능이 잘 발달된 동기동문이, 부산사범과 부산사범대학,
부산교육대학을 졸업한 동기동문들이다. 우리 동기동문 대부분이 교육계
에서 한평생을 보냈고, 지금도 보내고 있지만, 그 외 법조계와 재계 및
자유업으로 진출하여, 사회적으로 큰 명성을 얻고, 부를 일궈 동기동창
의 일에 적극 참여하여 동기동창들을 불러 모으며 만남의 즐거움을 나누
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아끼는 동기동문이 많아서 자랑스럽다.
우리 동기동문들 대부분이, 한 평생 또는 꽃다운 청춘의 대부분을
조국의 교단에서 헌신 봉사한 영웅들이다. 우리들은 교육이란 총을 들고,
우리들의 다음 세대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고, 지켜낸 용사들이고 영웅들
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누굴 보고 우리들을 위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우리 동문들이 걷는 걸음걸이와 짓는 얼굴 표
정이, 가슴 가득 훈장을 단 장군처럼 의젓하게 걸어가고, 밝고 환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여한이 없는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을 따
름이다.
우리 동기동문 중에는, 보통 우리들 보다 훨씬 큰 스케일로 국가 민
족을 위하여 헌신 봉사한 분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교육문화 수석을 지내고, 김대중 정부 때 교육부총
리를 지낸 천포 이상주 동문께서는, 부산사범을 졸업(9회)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한 후, 강원대학교 총장, 울산대학교 총장, 한림대학교 총장, 성신여자대
학교 등, 4개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한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가
장 오랫동안 총장을 엮임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멸사봉공(滅私奉公)
한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동문이시다. 그 외에도 한국교육과정학회 회장
을 역임하시며 한국 교육과정의 발전을 위하여 큰 업적을 남기신 강원대
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명예교수인 김수천 교수님과 한국 법조계의 포
청천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던 삼성특검의 조준웅 검사님도 우리 동문이
셨고, 수안보 사장님 이셨던 박진식 동문, 한국 회계학의 선구자 이셨던
고려대학교 교수님과 행정학의 거물급 학자 이셨던 연세대학교와 KDI 교
수로 지내셨던 기라성 같은 대선배님들이 학계는 물론, 여타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찬란한 별들처럼 무수히 반짝이고
있다.
우리 부산교육대학 2회 동기 중에 경남 함안 출신의 최윤도 교장은
11년 동안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교육세”라는 기발
한 아이디어를 정책으로 입안, 정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쳐 국회에서 입법
통과된 후, 오늘날 까지 존속하는 세금으로 교육재정을 뒷받침하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중이다.
1981년 12월에 신설된 이 교육세는 교육환경의 개선을 위한 교육시
설 확충과 교원 처우개선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조세로서 출발했다. 우
리 2기 동기 및 동문들이 교단에서 콩나물 교실과 박봉으로 한창 시달리
며, 말 못할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직접적으로 혜택을 입었던 조세라
서 더욱 최윤도 교장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이 교육세는 1981년~1986년 까지 5년간만 징수할 한시적인 목적세
로 출발했으나, 1986년 개정하여 1991년 까지 연장 징수하였고, 1990년
또다시 재개정을 하여 한시적 세금에서 영구세금으로 전환하여 오늘 날
까지 징수하는 국세로 남아있다.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국민들이 기대하는
교육환경 개선과 공교육 내실화 및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폭발적으로 증
가 일로에 있는 교육재정 수요를 뒷감당 하고 있는 원천세가 되었다.
교육세는 국세이고 목적세이며, 대체적으로 부가세 형식으로 부과 된
다. 금융보험업자와 교통세, 주세(술에 부과), 담배세, 각종 등록세, 재산
세, 종합토지세, 주민세 등에 부과되고 있다. 한국에 사는 국민이라면 결
국 교육세를 내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세금이다.
그리고 최윤도 교장은 교육세 입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초등학교
에 조기영어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개발하여 이를 입법하 하고 초
등학교와 유치원, 유아 돌봄이 교실에 까지 조기영어교육 붐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 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3세까지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본토인과 같은 발음을 하기 힘들다는 외국어 습득
교육과정이 널리 알려지면서, 요즘 젊은 엄마들은 한 살도 채 안 된 아이들
을 상대로 각종 미디어를 통한 외국어 학습을 맹렬히 시키고 있다.
온 나라 안 젊은 엄마들이 유아 조기영어교육 열풍에 푹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붐을 타고 조기영어교육이 활성화 되면서 수 많
은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최윤도 교장의 아이디어 덕택이다.
교육세 징수와 초등학교에 조기 영어교육을 도입하게 만든 이 정책
은 한국 교육에 크나 큰 혁명적 변화를 이끌었다. 1960년대 중반은 6·25
전쟁 이후 휴전조약이 체결된 후 한국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된 사회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그러자, 각 가정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인명
손실을 보상하려는 자연스런 욕구가 불이 붙으면서 폭발적인 베이비붐이
일어났다.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대단한 베이비붐이었다. 내가 9~10살
쯤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담을 사이에 두고 같이 사시거나,
걸어서 5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모여 집촌을 이루고 사시면서, 다섯
형제분들이 각각 1년 터울 내지 2~3년 터울의 자녀들을 7~8남매 씩 두
셨기 때문에, 내 동생들을 비롯하여 고만고만한 어린 사촌들과 젖먹이
사촌들을 모두 합치면 52명이나 되어, 1개 중대 병력이 넘을 정도였다.
여름철 긴 한낮이 끝나고 해질 무렵이 오면, 각처에 흩어져 놀던
꼬맹이들이 속속 집으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
온 집안이 아이들 우는 소리로 뒤덮이는 것이다. 온 동네 안 다른 집안
사정들도 대동소이했다. 사람들이 동네어귀에만 들어서도 아기 우는 소
리가 먼 곳 까지 들리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내 귀에는 떼거리로 앵앵 울어대는 동생들과 어린 사촌 동
생들의 우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아서 때때로 씀 웃음을 짓는
때가 있다. 그 수많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부모님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많은 자식들 역시, 골고루 부모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 할 수 없이 고생을 하며 자랐다.
다른 동네 집안들도 마찬가지 형편 이었고, 농촌과 도시할 것 없이
온 나라 안이 축복 받아야할 베이비붐으로 기뻐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정부는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유일한 대안이 멀쩡한 아버지를
꼬셔내다가 내시를 만들거나,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키워보
세”, “잘 키운 아들 하나, 열 아들 부럽잖다” 등 대(對)국민 계몽 홍보
전이 나라 전체를 뒤덮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 요원들이 가정과 사랑
방을 찾아다니며 임신 피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콘돔을 나누어 주었
다. 초등학교 아이들까지도 그 캠페인(campaign)내용을 잘 알게 되었
다.
그 결과는 대단했다. 정부의 대국민 캠페인이 먹혀들었다. 출생률
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출생률을 보
이고 있어서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은 셋 이상
많이 낳아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다. 셋 째 부터는 지방자치 단체가
학비를 대 주겠다고 하고, 개인 회사와 지방자치 단체 중에는 셋째 출
산 축하 금으로 200만원을 주는 곳도 나타나게 되었다. 산아제안 캠페
인에 세뇌당한 우리 세대는 격세지감이 든다.
살림은 가난하였지만, 자식농사만큼은 부자 못잖게 풍성하게 지
은신 부모님들께, 들어내 놓고 대들지 못한 그 자식들은 약속이나 한
듯 결혼을 한 후, 자식을 하나만 낳거나, 실수하여 둘만 낳았다. 많은
형제 남매들과 같이 자라면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 둘만
낳아 잘 키우면 만사형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인생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자녀를 더 이상 낳을 나이도, 처지도 못
되 정부 캠페인에 동참한 것이 후회가 된다.
산아제한이 필요한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후진국들의 관계 기관은
성공한 우리나라 가족계획 사업을 연구하려 찾아온다. 모르긴 해도 추
측 하건데, 죄 없는 수많은 아시안과 아프리카 인들이 한국판 내시들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후회하게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3가지 정책을 성공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산림녹화정책, 가족계획정책,
경제개발정책이다. 가족계획 정책과 경제개발 정책은 불가분의 관계
에 있지만, 그 후유증이 이렇게 빨리 올 줄 아무도 몰랐다.
국가도 이 베이비붐을 타고 태어난 난 수많은 아이들에게 어떤
종류의 복지혜택도 주지 못 했다. 유일하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
학교에서 끓여주는 따뜻한 우유와 옥수수 빵 같은 먹을거리가 나왔다.
공부는 둘째고, 이 것 얻어먹는 재미에 학교에 열심히 나오는 아이들
이 많았다.
최윤도 교장이 만든 교육세 징수와 초등학교 조기영어교육 도입
정책은 한국 교육에 크나 큰 혁명적 변화를 이끌었다. 앞에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1960년대 중반은 6·25전쟁 이후 휴전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된 사회를 구축해 나가자 대도시를 중심으
로 전국에 걸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폭발적인 과밀학급 증대
와 과대규모학교의 증대를 완화하거나 대체할 방안이 묘연하였다.
정부는 1958년 8월에 처음으로 교육세를 신설하여 시행하다가
1961년 12월에 폐지하였다. 1981년 최윤도 교장이 만든 이 교육세
도 2008년 12월 5일, 국회기획재정위원회 조세위원회에서 이 교육
세폐지 법률안을 전격 통과시킨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 의원과 그 외
야당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4명만의 찬성
만으로 전격 통과시켰다. 전국 교육위원회와 교직단체들, 교사, 시민
단체들, 일반 국민들의 저항과 극렬한 시위에 부딪치어 국회 본회의
에 안건을 상정도 못한 채 폐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 교육 연구의 엘리트 집단인 한국교육개발연구원의 교육정
책개발 파트에, 과밀학급과 과대시설학교의 해소 문제, 교원처우 우
대 문제를 해결할 정책연구 과제가 주어졌고, 부산교육대학을 졸업
한 최윤도 동기가 초등학교 현장 교사를 경험한 유일한 연구원이
서 교육현장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 정책 연구에 참여·
담당하게 되었고, 최윤도 동기는 한국 교육의 장래 운명을 좌우할
이 정책 연구를 위하여 불철주야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최윤도 교장은 1964년 2월에 최 교장의 고향인 경남 함안군 대
산면 구혜리에 위치한 대산초등학교에 발령이 났다. 최 교장이 태어
나 성장하고 졸업한 이 초등학교에 지방교생실습을 간 것이 인연이
되어 교장선생님의 스카웃이 있었기 떄문이다. 1965년 교원 주특기
로 군대에 갔다. 경북 영천 부관학교에서 군대교육을 받던 중, 여름
장마철 어느 일요일에 외박을 나갔다가 큰 홍수에 일대가 휩쓸려가
는 천재지변을 당했다. 귀대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어 귀대를 못하게
되자 본의 아니게 장시간 탈영병 신세가 된 것이다. 큰물을 뒤집
어 쓰고 뒤늦게 귀대했지만, 헌병의 추적을 받아 이미 탈영병의 처벌
을 면할 수가 없었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일이었는데도, 어려운 형편
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경력 기록으로는 고생하는 최전방 배치나 최
전선 가까운 도서 지역에 배치를 받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다. 최 교장보다 먼저 와서 영천 부관학교 인
사과에 근무하고 있던 2반의 권용호 교수와 3반의 이기동 교장이 하
필이면 그 때, 그 곳에 포진 근무하고 있었다. 배치 지역이 궁굼했던
최 교장이 얼마나 속이 탔겠는가? 입을 꼭 다문 두 동기가 최 교장
을 어디로 배치했겠는가? 최특급 지역 부산시내 부대에 배치를 해
주었다. 억울하게 탈영병이 되었던 동기 최윤도 교장을 도와준 것은,
한새벌에서 동문수학한 동기 권용호 교수와 이기동 교장 이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한국교육연구원 연구원 성원
의 97% 정도가 서울대학교 출신이고, 연·고대 출신이 2~3% 정도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연구원 대부분이 국내외에서 박사 학위
를 취득하고 연구원이 되었지만, 대학원 석사학위를 가지고도 연
구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탁월한 논문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
이었고, 시사성이 있는 논문에다 한국 교육문제를 연구 해결해 나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논문과 인간관계에서 검증이 가능한
극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스카웃 되어 연구원이 될 수 있다.
그런 엘리트 집단 연구원에서 최윤도 동기의 최종 학력은
유일하게 부산교육대학 2년 졸업이었고, 유일한 지방 출신 연구원
이었다.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지 않고는 연구원이 되기 어려운 형
편이었다. 입사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산교육대학이 갖고 있는
무게 있는 지역성과 초등학교 교육현장을 경험한 유일한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것이 큰 장점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최윤도 교장이 갖고 있었던 이런 요인들이 한국 교육이 당
면한 화급한 문제를 해결하고, 탁월한 교육정책 아이디어를 창출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연구원 자질로 인정받으면서, 대
한민국정부 세금부과 역사상 전례 없이 국회나 납세자인 국민들
로부터 큰 저항이나 반대 투쟁 없이 “교육세”라는 세목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정착시켜, 한국 교육 발전을 위한 재원 조달의 토대
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 동기 동문의
업적인가! 정말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도 국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과도
하거나, 잘 못 부과되면, 정권을 내 놓거나 격렬한 민심의 저항을
받아 왔다. 조선시대 전라도 고부 군수의 과도한 물(보)세 부과가
농민의 반발을 사면서 동학운동을 촉발하여 국내 정치의 불안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 정치의 불안이 청국을 불러들였고,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977년 박정희 정부
가 부과한 10%의 부가가치세 도입은 유신의 내리막길을 재촉하였
으며,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의 부과는 상위 1% 계층에 대한
세금 인상이었는데도,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어 정권 재창
출의 꿈을 접게 하였다. 종국에는 대통령 자신도 암살되거나 자살
을 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부가 국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국민 전체의 의식주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작금에 정부가 추진하려고 계획하고 있고, 실시하고 있는 담
배값 인상과 공무원연금 조정과 봉급자들의 연말정산 혼란, 사학
연금과 군인연금 조정 같은 문제들은 보수정당이 집권한 10년과
맞물린 아주 예민한 시기에 불거진 일들이라 걱정이 된다.
공무원 연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아무 부수입 없이 연금만
으로 생활해 가는 연금 수혜자 여러분! 더 보태드리지 못하면
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 되어서 미안하다. 옛 날 공무원 봉급이
상대적으로 박봉이어서 고생이 많았던 때도 있었는데, 여러분들
은 잘 참고 견디면서,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끝까지 평생
을 바쳐 헌신하였다. 정부가 처음 약속한 대로 연금을 지급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으나, 나라 형편이 여차 여차 이렇게 어려
워져 연금을 조정하려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하려고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한 평생 헌신하신 여러분들께서, 한
번 더 국가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셈치고, 깊은 이해가 있으시
면 감사하겠다. 여러분들께 먼저 이해를 구하고, 도움을 받아야
국민 여러분들께도 이해와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명분이 서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정부가 먼저 연금수혜자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애국심에 호소하여 소통을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정부가 하는 일을 믿고, 군말 없이 한 평생 연금만 바라보
고 청렴을 지켜온 다수의 공무원 연금자들이 하루아침에 국민
들이 내는 세금이나 축을 내는 암적 존재나 버러지 같은 신세
로 추락하고, 나라의 발전과 나라 장래를 망칠 수 있는 연금
자로 추락하는 기분이 드니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정말로 자존심이 상한다.
우리 연금 수혜자들이 크게 잘 못한 것인가? 힘없는 어린
이와 노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정상적인 민주사회다. 노인들을
공경은 못하더라도 그렇게 모욕을 주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가서야 되겠는가? 괜히 내가 왜 이렇게 열이 나는지 모르겠다.
교육세 징수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 될 때, 별다른 문제없이
통과된 것은,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좀 어렵게 살더라도 자식들 교
육에 쓰이는 재원이 제대로 확보되어야겠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암
묵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고, 교육세 신설 당시에 한시적으로 5
년간만 징수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국민들 대부분이 그 정도
기간이라면 세금을 내면서도 참고 견딜 수 있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고, 열악한 교육현장의 형편과 박봉으로 시달리는 선생님들
처우에도 과감하게 제대로 투자하여 선생님들에 대한 대우를 획기
적으로 개선하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음을 최윤도
교장은 현장 감각을 살려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혜로운 혜
안의 동기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교육세 징수 안이 국회에서 통과할 당시에는 한시적이
었으나, 지금은 거의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물어야
할 영구세금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의 경
이로운 경제 발전은, 질 높은 교육의 힘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한
다. 정치가나 학자나 시민이건 간에 입 있는 자들은, 모두 이구동
성으로 입을 모은다. 그 교육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 것
은 교육세를 징수하여 교육 발전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
문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기발한 “교육세” 세목을 만든 당사자 최윤
도 동기는 한국 교육의 발전을 가져온 공을 뛰어넘어 한국의
국운을 개척한 우리의 위대한 동기가 아니겠는가. 최윤도 동기
의 이와 같은 위대한 연구업적과 정책개발의 공적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대한민국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참으로 잘 한 일이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최윤도 동기는
우리 당대의 한국교육 발전뿐만 아니라, 장래 한국 국민이 세계시
장에서 선진 제국의 엘리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경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 또 대 못질까지 끝내놓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영웅이다.
최윤도 교장은 교육세와 초등학교 조기영어교육 정책의 입
안 성공으로 교육부장관의 특채로 교육인적자원부 상훈계 장학
관으로 6년이나 계속 근무 봉사했다. 최윤도 교장은 6년 동안이나
교육의 핵심 부서인 최고 부서에 재직하는 동안, 전국의 부산사범
과 부산사범대학, 부산교육대학의 동기 동문들이 비빌 수 있는 유
일한 중앙 부서의 언덕이었다. 최 장학관은 수많은 동기동문들을
도와주며 덕을 쌓았다.
교장승진이 동기들 보다 늦은 착하고 순진한 친구가 있었다.
대통령 표창장이 절실히 필요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찾아 어려
운 과정을 거쳐 그 것도 대통령 표창 수상자 대표로 수상할 수 있
도록 도와주기도 한 다정다감한 친구다. 재경 교대2회 동기들에게
연락하여 축하연을 열어, 동기의 경사스러운 수상을 축하해 주기도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동기들로부터 축하의 꽃
다발을 받아든, 이 동기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 뒤 바로 교
장으로 승진했을 때, 이 동기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 동기
동문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였을 것 아닌가.
교육부의 지체 높은 장학관이 지방 일선학교에 장학지도를
나갔는데, 교장실에서 교장·교감·3부주임과 같이 환담을 마친 후,
폼을 잔뜩 잡은 교육부 파견 장학관이 상냥한 교장의 안내를 받
으며, 핵심연구 상황을 브리핑 받기 위하여 브리핑 교실 문을 열
고 들어서는데, 그 브리핑을 담당한 교사가 막 브리핑 실에 들어
서는 문교부 장학관을 보고 “아! 너 최윤도 아니가?” 그러는 거
다. 최윤도 장학관이 “아니, 너 XXX 아니가? ” 이런 대화
가 오고 갔다. 성공적인 연구보고 브리핑이 끝나고, 교장선생님
이 최윤도 장학관을 모시고 점심대접을 하기 위하여 같이 나가
자고 말하자, 최윤도 장학관이 교장에게 말하기를, 오래간만에
모처럼 이런 좋은 연구발표를 한 유능한 내 친구 동기를 만났
으니, 내가 동기와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그 정황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브리핑
한 동기도 일행과 같이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교장과 헤어지면서 브리핑한 동기의 연구업적을 잘 보고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동기의 앞날도 부탁하지 않았겠는가? 일선 교장
이라고 하지만, 함부로 최윤도 장학관의 친구인 그 교사가 발표
한 연구 업적을, 손발을 잘 비비는 다른 선생님의 업적인양 바꾸
어 보고 하려는 허튼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동기동문이 이런 것이다. 서로가 언덕이 되고, 비 오는 날
우산이 되는 것이 아닐까. 부산교육대학 우리 동기동문들은 좋은
동기들이 너무나 많아, 이 짧은 글에서 다 열거할 수가 없는 것
이 안타깝다. 동기들 끼리 만나서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고,
기쁘고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 동기동문들 서로가 믿으며, 비빌 언
덕과 우산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인생을 잘 살아가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우리 동기동문들 서로 간에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해 살아 온 삶이, 결국은 동기동문 서로 간에 아픈데 먹을 명약
을 구해주기도 하고, 배고프고 외로운 동기동문들에게 한 끼 배
를 채워 주고, 외로운 마음을 덜어주는 다정다감하고 그리운 동행
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서울이고, 부산이고, 고성이고 간에 우리 동기들의 모임이 있
다는 소리만 들어도 내 가슴은 늘 콩당콩당 뛰기 시작한다. 왜
그런지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지난 가을 2회동기회 여행이 있었다. 2014년 11월 4일에서 5일
까지, 1박 2일의 교2회 50주년기념 가을여행 계획이 잡혔다는 통지
문이 부산에서 우편으로 왔다. 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영월 장
릉-한반도면-사북 강원랜드-영주 부석사 코스다. 이 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서 즐거워하고 반가와 하는 동기들 얼굴을 한번
보고 와서, 거기 가더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내 형편과
이 나이에는 이번 여행이 자랑스러운 우리 동기들을 마지막으로 보
는 여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봄 4월 7일~8일, 화려했던 졸업기념 50주년 부산·경주·감포여행
때 불참한 것은 나에게 천재지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전립선암수술을 받기로 예정된 날이 하필이면 바로 이날 여행을 시작하는
4월 7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타이밍 매치를 운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술 바로 전날 이른 새벽에 나를 수술할 주치의 부친께서 작고
하는 이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수술이 7일간이나 순연된다는 전갈이 왔다.
링거를 팔목에 꼽고 수술을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
게는 맥 빠지는 일이었다. 내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가족에
게 했더니. 아들이 옆에 있다가 아버지, 그렇지 않다. 아버지 액운을 혹시
그 어른이 갖고 하늘나라로 가셨을 수도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당
시 나의 입장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그 찰나에 들은 말
이라, 그 한마디 말이 천근만근 무거운 내 근심걱정을 일시적으로 진정시
키는 몰핀 주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순간을 놓치지 않는 재치 있는 유
머가 참 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 때 또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일이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서울 2기동
기들과 부산행 KTX에 동승하여 다녀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병
원도 말리고 가족들도 말리는 바람에, 그 간절한 마음을 접기는 했어도
얼마나 섭섭했던지 말로 이루 표현하기 어려웠다.
수술 할 사람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며, 완강하게 말리
는 데다, 기차표를 사달라고 서울 동기회 회장에게 뒤 늦게 부탁하는 것
도 미안한 일이고, 설령 기차표를 구할 수 있다한들, 친구들과 한데 어울
려 떠들지 못 하고, 나 혼자 동떨어져 다른 객실에서 앉아 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으며, 그동안 기다릴 가족과 친지들에게 걱정만 끼치는 일이
라며, 나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느라 무진 애를 쓰면서 참을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긴 시간 수술을 기다리며 병원에 누어있어도 이미 마음은
기차를 타고 부산 모교와 경주호텔이라는 콩 밭에 가고 없었다.
신기석 회장을 비롯한 서울 김정태 친구와 부산 공흠일 친구, 그리
고 행사준비위원을 비롯한 우리 동기 모두가 합심하여 졸업 50주년을 맞
을 때까지도 안 죽고 잘 살았다며, 얼마나 애를 쓰고 준비한 행사이며, 여
행이었던가! 그 행사에 내가 동참을 못하다니, 링거를 팔 둑에 꼽고 누어
있어도 동참을 못한 섭섭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동기들이 눈에 삼
삼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번 50주년 기념 모임에는 6, 7, 8반 여자동기들이 어떤 레퍼토
리(repertory)를 들고 나와 늙스구레한 우리 남자동기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줄지 궁금하고 보고 싶어, 온 몸에 좀이 쑤셔 잠을 빼앗아
가는 바람에, 길고 노곤한 봄밤을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며, 오랫동안
잠 못 들어 하였다.
1주일 후, 옛날 맹장 수술을 했을 때, 복강경 수술을 했던 전력이 종
합 검진 마지막에 발견됨에 따라 예정된 로봇수술을 못하고, 카소덱스정
50mg 알약 1일 1정 투여 처방과 42회의 방사선치료 및 홀몬 주사 처방이
선고 되었다.
로봇수술로 초기 암세포가 발견된 전립선을 확 잘라 내버리는 수술
을 못하고, 발견된 암세포를 서서히 죽이는 방사선 치료와 알약 복용 처방
및 홀몬 주사 처방은 차선책이라고 하였다. 차선책 처방이 다행이었는지
아닌지는 좀 더 결과를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누구나 배꼽을 통해서 화급하고 중요한 큰 수술을 할지도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서라도 함부로 배꼽을 통한 맹장 수술 같은 간단한 수술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을 제외
하고는 매일 약 5~6분가량의 시간이 소요되는 방사선 치료가 42회나 계
속되었다. 방사선 치료는 전연 고통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매일
춘천에서 서울까지 내왕하는 것이 꽤 힘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건강할 때 대도시 근교에 살던 사람들도, 질병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는 노년이 되면, 오히려 대도시로 몰려드는 이유를 절감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다. 질 좋은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종합병원이 있
기 때문이다. 나이 든 노인들이 주거지를 결정할 때, 가장 큰 변수로 작
용하는 요인이, 질 좋은 의료 서비스이다. 사는 집 가까운 곳에 유명대학
의 종합병원이 있거나, 재벌이 운영하는 질 좋은 종합병원이 근처에 있는
것이, 여생을 살아가는 동안 병이 났을 때 자식들에게 걱정을 덜 수 있는
방안이 되고, 병원을 내왕하는 데 드는 시간과 금전을 절약할 수 있다.
여차하면 큰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
이다.
지금 내가 암 치료약을 복용한지는 약 9개월이 지났고, 42회의 방
사선 치료가 끝 난지는 7개월이 지났건만, 치료 받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난 1월 15일, 2월 4일에 비뇨기과와 방사선
종양과에서 3개월과 6개월 만에 한 번씩 조사하는 혈액검사에서 ①간, 신장,
당, 콜레스테롤 검사, ②심장, 근육 검사, ③전해질 검사 ④ 염증 검사, ⑤
전립선암 검사(PSA: 전립선특이하원검사), ⑥호르몬 검사 ⑦남성호르몬 관
련 검사 ⑧혈액구성세포수, 형태변화측정 등, 8가지를 검사했는데, 의학상
으로는 나타난 수치는 완치 상태라는 말을 들어 마음이 좀 가벼워지고 큰
걱정을 덜었지만, 앞으로 3년 간 계속 3개월, 또는 6개월, 1년을 기간으로
혈액검사를 하여야 하고, 그 결과 데이터를 추적 관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환자 본인의 절제 있는 생활과 적당한 운동과 먹는 음식물을 유의해야 한다
고 하였다.
가장 궁금한 검사가 PSA 수치였는데, 보통 건강한 일반인들의 정상수
치가 3인데, 치료받기 시작한지 3개월 뒤인 8월에는 0.23, 10월에는 0.164,
2015년 1월에는 0.003이 나와 아주 좋아지고 있고, 다른 검사도 정상 수치
를 보인다고 하였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심정으로 투병생활을 한
보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1회 선배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
2회 동기들의 따뜻한 관심과 위로가 병마를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그래도 심약한 나는 이 번 가을여행을 앞두고도 자꾸 엄습해 오는 생
각이, 이 번 동기회 가을여행 역시 내 생애 마지막으로 동기들을 만나볼
수 있는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혹시 나에게 또 여행
을 못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날까 봐, 그 동안 조바심을 하면서 조심 또
조심을 하며 지내다보니 여행 날짜가 더 기다려지고,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 번 가을여행지가 내륙 강원도 지역이라, 봄 여행 때 동기들이 감
포 앞 바다의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는 싱싱한
바다 생선회보다는 못하겠지만, 수십억 년의 풍화작용에도 용케 견뎌 온
백두대간에서 캔 산나물로 비벼먹는 비빔밥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라는 생
각을 하였다. 특색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재미도 재미지마는, 언제 다
시 볼지도 모르는 정다운 동기들과 같이 음식을 먹으며, 동기들의 장수와
노년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손을 한 번 잡아보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 또 간절하였다. 이 세상에 돈이면 다 될 것 같아도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이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재학시절 지리반에서 같이 답사를 다녔던 류동철 교장이 총
무 일을 맡아 봉사하면서 여행자보험 가입에 필요하다면서 주민등록번
호를 전화로 물어왔다. 류동철 교장의 목소리를 전화상으로만 들어도 얼
마나 반갑던지 모른다.
류 교장은 이 번 여행지는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지역이니 건강이
허락하면 여행지에서 꼭 만나 보자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고, 그 외에
도 친구 장두기 교장과 임정남 교장, 박태우 회장, 김중용 교장, 박연남
회장, 박선자 교장, 최정자 동기, 윤미순 동기들도 통화 중에 치료를 받
고 있는 내가 참가한다는 명단을 봤다면서 우리 이 번에 만나보면 얼마나
반갑겠느냐며 격려 말을 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가슴이 마구 뛰는 판국
이었는데, 정다운 친구들이 연거푸 격려를 해주니 사생결단을 내서라도
꼭 참가해야겠다는 마음이 서는 것이었다. 그 마음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 구만장공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가 그리운 동기들을 만나 보
는 황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 동기들의 만남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는 마력이 있다.
첫댓글 이 교수, 맘 머고 시간 만들어 심금을 표현하셨네요. 긴 글 잘 읽었어요.
병 중에 가장 치료하기 힘든 중병이 지나친 "건강 염려증" 이래요.
어때요...맞는 말 ??? ...'화이팅'하시고 두 주먹 불끈 쥐세요.
덕불고필유인 (德不孤必有隣;덕이 있는 자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이래지 않는가..
정현경 교장! 맞는 말씀이요. 건강염려증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말 같소이다. 언젠가 정 형이 너무
벌벌 떨지마라고 야단을 치는 바람에 나도 사내 꼬타린데 싶어 용기를 내 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소. 나는 확실한 겁보였소. 그래도 요즘은 좀 덜해진 것 같은데, 그 것은 마누라,
며느리, 아들에게 코를 끼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요. 마침 목사님 설교가
명설교라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요. 내가 선배들과 2기 동기회 친구들에게
진 빚이 많은데, 이 마음을 담아 어슬픈 글 3편을 준비했소. 1.2편이 나갔고 3편이 남아 있는데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렵기만 해요. 많은 이해와 관용을 빕니다. 학원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