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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동맹 대 가톨릭 연맹?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합스부르크 가 황제들은 가톨릭과 루터파가 공존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체제의 수호자를 자청하였다. 그렇다면, 이 체제는 어떻게 해서 최종적으로 붕괴하게 되었을까?
30년 전쟁의 배경을 서술하면서 흔히 편의상, 혹은 습관적으로 '구교vs신교 대립' 이야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도식에는 문제가 하나 있음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바로 프로테스탄트 내의 심각한 갈등 양상을 경시하게 만드는 부작용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제국 내 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각각 결집하여 첨예하게 대립하였다는 것은 사실과 별로 일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하나의 단일한 전선을 형성하기에는 내부 갈등이 너무 심했다.
독일 지역의 종파갈등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는 1560년대 칼뱅주의의 대두였다. 사실 이 당시 독일에서 '칼뱅파'라는 것을 일종의 멸칭으로, 본인들이 스스로 일컬은 것이 아니라 루터파와 가톨릭이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점에서 미루어 짐작할수 있듯이, 루터파와 칼뱅파의 사이는 대단히 좋지 않았다.
사실 많은 경우, 루터파와 칼뱅파는 서로를 가톨릭보다 더 경계했다. 칼뱅파는 이 당시 자신들이 독립된 종파라기보다는 '루터가 시작한 개혁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루터파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주장일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너희는 반쪽짜리'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루터파 입장에서 더더욱 심각한 것은, 새로이 칼뱅파가 된 이들 대다수는 가톨릭에서 칼뱅파로 개종한게 아니라 루터파에서 칼뱅파로 개종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때쯤이면 프로테스탄트가 될 사람들은 대부분 다 개종하고 난 뒤였기 때문에,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종파가 등장하면 그 신자들은 대부분 기존 프로테스탄트 종파 출신이 될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칼뱅파의 세력확장에 가톨릭보다 루터파가 더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 중 하나다.
물론 칼뱅파와 루터파는 신학적 차이도 있었지만, 그 차이는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와닿지도 않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근대 초기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종파의 차이를 복잡한 교리 논쟁보다는 눈에 보이는 전례와 행동으로 구분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 독일 칼뱅파와 가장 비슷한 이들은 동시기 잉글랜드 퓨리턴이었다. 그리고 퓨리턴과 마찬가지로, 칼뱅파를 루터파와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시 성상이고 그림이고 다 때려부수고 보는 파괴본능(...)이었다. 이 역시도 루터파가 칼뱅파를 싫어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이 시기 종파간 갈등은 미묘하면서도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기정사실이 되었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개신교 진영이 분열되었다면 그만큼 전면적인 종교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크게 낮아진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또다른 변수 하나가 끼어든다.
팔츠 선제후국-판도라의 상자를 반쯤 열다
여전히 제국 내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체제 유지를 통한 평화를 선호하는 이들이 다수였고, 루터파는 칼뱅파의 세력 확장에 심기가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때 등장한 변수가 바로 칼뱅파의 리더를 자처하고 나선 팔츠 선제후국이었다.
팔츠 선제후국은 비교적 늦게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합류한 국가였다. 바로 이 늦게 개종했고, 또 프로테스탄트 내 소수파인 칼뱅파로 개종했다는 것 떄문에, 과거 주변지역에 행사하던 영향력을 일부 상실해버렸다. 반대급부로 이웃인 작센의 상대적 위상이 올라간 상황이었다. 그러나 야심이 대단했던 팔츠 선제후들은 먼저 개종한 작센이 독일 개신교 제후국들의 맹주 노릇하는 것을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 잃어버린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팔츠 선제후는 더욱더 광적으로 칼뱅파 신앙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팔츠 선제후국은 Mortimer 선생의 표현대로, '제국의 여러 개신교 제후국들 중 가장 극단주의적 성향의 국가'가 되었다. Wilson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팔츠는 '정부를 주도하는 칼뱅파들이 다수의 루터파 백성들을 억압하고, 유대인을 탄압하며, 가톨릭과의 그 어떤 대화도 거부하는 국가'였다. 이는 라이벌인 작센이 취한 중도적 스탠스와 크게 대비되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다수가 루터파인 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맹주가 되는 야심을 실현할 수 있었을리가 없다. 그래서 팔츠 선제후들은 루터파 제후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반가톨릭주의 음모론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분위기는 쉽게 표현하자면
팔츠 선제후: 개신교를 전부 말살하기 위한 전유럽적 음모가 진행중이며 그 선봉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황제다. 이 위기 상황에서는 너희 모두들 찍소리 말고 나를 따라야만 살아남을수 있다!
루터파 제후들: 뭔 개소리야.
정도 되겠다.
오히려 팔츠의 이러한 선전 행위는, 가톨릭 제후들의 경계심만 날카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때까지 가톨릭 제후들도 아우크스부르크 체제를 유지하자는 온건파가 대다수였고, 강경파는 소수였다. 그런데 팔츠의 이 막나가는 행동이 가톨릭 강경파에게 아주 좋은 명분을 던져주고 말았다.
여기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또 터져서 일을 한층 더 꼬아놓았다. 팔츠의 프로파간다가 루터파 제후들 대신 다른 유럽 칼뱅파들을 자극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는 작센을 비롯한 독일의 온건파 개신교도들은 개혁의 기치를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해버린 이들인 반면, 팔츠야말로 신앙의 모범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럽 칼뱅파들이 줄줄이 팔츠로 이주해왔다. 일부는 탄압을 피해온 난민이었고, 일부는 국제 칼뱅파의 대의를 실현하러 온 광신적 투사들이었고, 일부는 칼뱅파인 팔츠 제후 밑에서 한자리 얻을까 해서 온 야심가들도 있었다.
이는 예전에 없었던 독특한 현상을 초래했다. 팔츠 선제후국 정부의 요직들이 순식간에 외국 출신 칼뱅파들에게 장악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때맞춰 선제후 루트비히 6세가 짧은 재위 끝에사망하고, 프리드리히 4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또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연이어 프리드리히 5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과정을 통해 어린 선제후들이 이 외국인 출신 조언자들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게 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근본적으로 이 조언자들은 팔츠 출신이 아니었고, 팔츠 자체에도 애착이 별로 없었다는게 문제의 근원이었다. 게다가 상당수들은 팔츠의 이익이 아니라, 칼뱅주의의 대의를 위해 팔츠를 이용하려는게 주 목적이었다는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변수와 우연의 일치가 겹치면서 제국 내에는 폭탄 하나가 생긴 셈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것이 전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국 구성원의 대다수는 아우크스부르크 체제 유지를 강하게 밀고 있었다. 이는 소위 '프로테스탄트 제후 동맹'과 '가톨릭 제후 연맹'의 성립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전에는 제국이 이렇게 두 진영으로 갈라섬으로서 이제 돌아갈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연맹과 동맹 내부에서 연합전선 따위는 없었다. 일단 가톨릭 연맹의 경우, 수도회도 아니고 보편교회 내에서 따로이 이러한 조직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꽤 강해서 생각보다 큰 세력을 형성할수가 없었다. 게다가 연합한 가톨릭 제후들 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크게 달라서 그리 강력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613년에 연맹은 사실상 해산상태가 되었다. 이후 30년 전쟁중에 활동한 가톨릭 연맹은 개전 후에 다시 만든 것이다.
개신교 동맹도 사정이 그리 다를것 없었다. 개신교 제후들이 팔츠 선제후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드디어 팔츠 선제후의 야심이 이루어진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제후들마다 동상이몽이기는 가톨릭 진영과 다를게 없었다. 그리고 상당수 루터파 제후들은 도나우뵈르트 사건을 비롯해서 당시의 여러 특수한 상황 때문에 마지못해 가담한 것이라 활동에 매우 미적거렸다. 애초에 동맹에 가담한 루터파 제후들은 자신들은 '오직 방어 목적'으로만 활동하겠다고 선을 긋기도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개신교 동맹도 가톨릭 연맹처럼 사실상 와해 상태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애초에 참여한 이들도 별로 적극적인 이들이 없었지만, 그렇게나마 참여한 이들은 더 적었다. 제국의 가톨릭 제후들 중 연맹에 가담한 이들은 절반이 안되었다. 개신교 제후 중에 동맹에 가담한 이들도 절반이 안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국의 주요 제후들 과반수는 확고하게 아우크스부르크 체제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 역시 제국이 완전히 둘로 쪼개져서 전쟁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즉, 전쟁은 여전히 불가피한 귀결이 아니었다. 상황이 많이 악화되었음에도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온건파와 루터파 온건파는 황제의 조정 아래 비교적 원활하게 협조하면서 평화를 지켜가고 있었다. 또다른 변수만 아니었어도 아마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제법 높다.
그런데 전쟁은 전혀 뜻밖으로 엉뚱한 곳에서 폭발했다.
프라하 투척 사건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프라하 투척 사건, 즉 프라하 성 밖으로 제국 관리들을 집어던진 사건은 사실 상황이 대부분 정리되고 안정화를 찾아가던 시점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 자체도 대대적인 민중운동이나 불만의 폭발이 아니라, 불만을 품은 소수의 보헤미아 귀족들이 벌인 일이었다.
사실 이 무렵에 가톨릭 연맹과 개신교 동맹은 둘다 사실상 와해상태였다. 따라서 프라하 투척 상태는 이들과 무관하게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장작에 열심히 불을 지피고 있던 팔츠 선제후국과도 별 관련 없이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벌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다시 온건파 쪽으로 정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맹이 거의 붕괴된 상황에서, 강경파들은 다수의 온건파들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자극적이로 극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 결과가 이 투척이었다.
그리고 한번 일이 터지자 이제까지는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던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사태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사실 보헤미아의 반란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보헤미아의 왕위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제안하면서 일이 커졌다. 야심을 다시 되살린 팔츠 선제후가 왕관을 덥썩 받아버리면서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져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비로소 외국 세력들이 차례로 개임하기 시작하며 상황은 우리가 아는 그 거대한 전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나오며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수면 깊이 잠복해있는 구조적인 문제들이, 그것을 터져나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과 '우연'히 접촉할 경우에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를 필연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구조적 문제점이 없는 시대, 없는 나라는 현재도 없고, 예전에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30년전쟁은 비교적 건실하게 유지되고 있던 한 사회가 어떻게 예상치 못하게 분열하고 내전에 이르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사실 그 과정은 조금 후에 터져나온 영국내전, 그리고 200여년 후에 벌어진 미국 내전(남북전쟁)과도 상당히 닮아있다. 따라서 이를 신성로마제국의 특수성 탓으로 돌려, '신성로마제국은 ~~한 구조적 약점이 있어서 불가피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당대의 복잡한 진상을 제대로 반영하는 설명이 아니다.
참고
Peter H. Wilson, The Holy Roman Empire: A Thousand Years of Europe's HIstory (London, 2016).
Peter H. Wilson, Europe's Tragedy: A New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Cambridge, 2009).
Geoff Mortimer, The Origins of the Thirty Years War and the Revolt of Bohemia, 1618 (Basingstoke, 2015).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토크멘토리 전쟁사에서 해당항목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와 얼마나 다를지
기대되네요
저도 좋아하는 프로고, 패널이신 임용한 선생님은 제가 많이 존경하는 학자이시지만 아무래도 조선사 전공이시니 서양사학계의 최신 담론이 반영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 서양 중세쪽 관련 주제 다룰때도 느낌이 그랬거든요.
;;;;;; 프리드리히 5세가 정작 보헤미아로 갔을 때 그쪽 사람들 반응이 뜨듯미지근 했다는데, 이런 황당한 내막이 있었군요...ㅡ.ㅡ;;;;;
장인도 말리는 보헤미아 왕위 받겠다고 굳이 간 이유가 그냥 이놈이 모지리라서 그런줄 알았습니다만..... 칼뱅파 강경파가 끼어 있었네요...ㄷㄷㄷㄷ
특저 종파에 편견을 가지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17세기 한정으로 칼뱅파는 유럽 최강의 트러블메이커입니다 -_-
크 프라하 저 창문 가서 봤습죠
뭔가 유럽은 근세로 넘어가면서 부터 어떤 한개의 혁명 내지는 개혁이란 것들이 기폭제가 되면서 '유럽전체'를 휩쓸게 되는 것 같음요;;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 공산주의 혁명 등등.
무섭군요. 대다수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넘어가려 하는데 몇몇 극단주의자들이 우발적인 사고를 통해 인류역사상 최악의 전쟁중 하나인 30년전쟁을 일으켰다니.
현대사회에서도 뼛속까지 통찰해야 하는 교훈입니다. 북한과의 전쟁, 미중전쟁 이런것을 무슨 게임인마냥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런식으로 굴다가 우발적으로 한번 일어나면 걷잡을수 없을거에요.
동감입니다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