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아버지와 나: 미류나무의 나이테에 새긴 헌사
제1장. 20미터 미류나무가 쓰러지던 날의 간장 냄새
우리 집 마당 입구에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20미터 높이의 거대한 미류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단순히 마당에 그늘을 드리우는 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덟 남매의 소란스러움을 묵묵히 품어주던 우리 집안의 기둥이었고, 가난 속에서도 꼿꼿하게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았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해야 할 무렵, 가난은 우리 가문의 숨통을 쥐고 흔들었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며칠 밤을 어둠 속에서 뒤척이시던 아버지는, 결국 당신의 피붙이 같았던 그 거목을 내놓기로 결단하셨다.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톱날이 나무의 밑동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거목이 허공을 가르며 처절한 비명을 지르듯 '쿵' 하고 땅에 쓰러졌다. 그 육중한 소리는 어린 내 심장에 떨어지는 천둥소리와 같았다. 나무가 쓰러지던 순간, 아버지의 등도 아주 미세하게 휘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버지는 나무를 판 돈 3만 원에, 어디서 어떻게 애써 구하셨는지 모를 꼬깃꼬깃한 4천 원을 보태어 내 손에 쥐여주셨다.
"선생님께 갖다 드려라."
그 짧은 한마디. 거기엔 변명도, 생색도, 가난에 대한 한탄도 없었다.
그날 밤, 미류나무가 뽑혀 나가 구멍이 휑하게 뚫린 마당을 등지고 우리 여덟 남매는 밥상에 둘러앉았다. 밥상 위엔 꽁보리밥과 간장 종지 하나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말없이 간장에 밥을 비벼 씹으셨고, 우리도 숨을 죽인 채 숟가락을 들었다. 어린 나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던 그 날카롭고 비릿한 간장의 짠맛. 그것은 훗날 내가 평생을 두고 삼켜야 할 삶의 맛이었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도, 나는 홀로 새우젓에 현미밥을 싸 먹으며 그날의 간장 냄새와 아버지의 거룩한 침묵을 처절하게 복기하곤 한다.
**제2장. 가방공장의 기계 소리와 푸른 스레트 지붕의 기적**
내 배움의 종이는 형제들의 고단한 피땀과 부서진 유년으로 벼려졌다. 첫째 형 이병모는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는 대신, 친구의 손을 잡고 낯선 가방공장의 매캐한 기계 소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열여섯,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본드 냄새를 맡으며 가죽을 자르고 바느질해 형이 받아 쥔 한 달 월급은 고작 3,500원이었다.
명절이 되어 집에 돌아온 형은, 그 피 같은 돈에서 500원을 떼어 동생인 내 손에 쥐여주었다. 까칠해진 형의 손끝에서 건네진 그 500원짜리 지폐는 내 손바닥 위에서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형은 그 고된 노동의 대가를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아, 마침내 비가 새던 우리 집의 낡은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매끈한 푸른 스레트 지붕을 얹어주었다. 새 지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날, 나는 아버지가 평생 그렇게 환하고 자랑스럽게 웃으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러나 지붕 아래의 희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와 두 살 터울인 여동생 이의옥은 초등학교 졸업장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짐을 쌌다. 누나 이연옥의 손을 잡고 타향의 큰 고모집으로 돈을 벌러 떠나는 어린 여동생의 뒷모습. 우리 팔남매의 유년은 그렇게 가방공장의 먼지와 타향의 외로운 눈물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들의 짓밟힌 꿈을 거름 삼아 기어이 펜을 쥐고 일어서야만 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
**제3장. 논바닥의 벼락같은 화두와 송아지 네 마리의 피눈물**
"우리 소리는 분명한데 적을 글자가 없구나. '이응' 할 때 그 소리를 한 글자로 붙여 읽어야 하는데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볍씨 파종을 위해 질척이는 논바닥을 고르던 날, 아버지가 무심코 던지신 그 한마디는 내 인생을 관통하는 벼락같은 소명이 되었다. 하지만 진리를 쫓는 구도자의 길은 한없이 잔인했다. 스물여섯이라는 창창한 나이에 조울증이라는 끔찍한 병마가 나를 덮쳤다. 이성이 끊어지고 광기가 몰아칠 때마다 나는 병원의 폐쇄 병동으로 실려 갔다.
그렇게 네 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외양간에 매여 있던 송아지들이 한 마리씩 사라졌다. 한 번 입원할 때마다 당시 300만 원이 넘던, 농가의 전 재산이자 미래와도 같았던 귀한 송아지들이 내 치료비를 위해 팔려 나갔다.
네 마리의 송아지가 빈 외양간을 남기고 떠날 때마다 어머니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고, 나는 가족들의 생살을 깎아 먹는다는 지독한 부채감 속에서 펜을 쥐었다. 정신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한글의 획을 그었다. 그리고 서른 무렵, 나는 기어이 아버지가 내주신 숙제를 풀고 한글 연구를 완성해냈다. 내 연구가 서울대와 충남대 언어학자들의 극찬을 받고 세상에 알려졌을 때, 아버지는 깊은 안도 섞인 숨을 내쉬며 묵묵히 말씀하셨다.
**"우리 병수가 이제 실력 발휘를 하네."** 그것은 나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송아지 네 마리의 목숨과 가족의 피눈물이 빚어낸 처절한 승전보였다.
**제4장. 납작바위 논의 비극과 둔산동의 굳은살**
운명은 우리 가족에게 쉴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동생 이병민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1년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벌어진 다툼 속에서 동생의 친구가 후배의 가슴을 때려 그 자리에서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사람의 생명이 스러진 그 끔찍한 사건 앞에서, 가해자 선배 네 명의 부모들은 감옥행을 면하기 위해 각각 1,200만 원씩, 총 4,800만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합의금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주저 없이 가문의 상징이자 당신의 전부였던 '납작바위 논'을 농협에 근저당 잡히셨다. 하지만 세상은 비정했다. 다른 아이들은 집행유예 후 학교로 돌아갔지만, 내 동생은 교감의 배신과 불공정한 처사로 홀로 퇴학의 철퇴를 맞아야 했다.
그 억울함과 빚더미 속에서, 평생 흙만 만지시던 늙은 부모님은 대전 둔산동의 삭막한 막노동 현장으로 향하셨다. 도심의 차가운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쓰며, 허리 뼈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육체적 고통을 몇 년이나 묵묵히 감내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피땀으로 모은 돈으로 빚을 갚고 근저당을 풀던 날, 아버지는 그 납작바위 논을 다시 당신 명의로 돌려놓으며 자식의 허물로 무너졌던 가문의 자존심을 꼿꼿하게 세워 올리셨다.
**제5장. 지붕을 팔아 산 축복, 그리고 다은이의 탄생**
내 앞가림조차 버거웠던 시절, 나는 장모님의 요구로 내 몫의 텃논을 1,000만 원에 심영기 박사님께 팔았다. 500만 원은 아버지께 드리고, 영문도 모른 채 500만 원을 장모님께 바친 뒤 은반지 커플링 하나를 쥐고 선화동 2층 빌라에서 월세살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내 주머니엔 결혼 전 씀씀이가 헤퍼 생긴 5,500만 원이라는 감당 못 할 카드 빚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내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 거대한 빚을 고백하러 아버지를 찾아간 날,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절망하는 나를 향해 아버지는 단호하고도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그린벨트라 납작바위 논을 못 판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이라도 팔아서 빚부터 갚고 당당하게 살아라."**
아버지는 당신이 늙어 몸을 누일 마지막 안식처마저 팔아 아들의 탕진된 세월을 덮어주셨다. 천만다행으로 귀인 심영기 박사님께서 그 집을 사주시며,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은 쫓겨나지 않게 하겠다는 각서를 법무사 사무실에서 공증해 주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쉴 곳의 소유권을 내어주며 자식의 앞날을 사주신 것이다.
2003년 7월 15일, 딸 다은이가 선화병원에서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렸을 때, 아버지는 병실로 달려오셨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하얀 봉투 하나를 말없이 건네셨다. 집까지 남의 손에 넘긴 빈털터리 처지에 어디서 어떻게 털어오셨는지 모를 빳빳한 100만 원. 그것은 내가 다은이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묵직하고 거룩한 내리사랑의 확약서였다.
**제6장. 거목의 귀천: "엄마를 위로해 드려라"**
2009년, 아버님의 몸속에 담도암이라는 무서운 병마가 자라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나는 즉각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님의 병상을 지켰다. 병원비의 압박과 짐이 된다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나는 아버님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온전한 말벗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그 무렵, 장장 9년 동안이나 집안과 연락을 끊었던 큰형님 이병모의 소식을 이길수 목사님의 도움으로 찾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집으로 내려온 형님 앞에서, 나는 큰절을 올리며 엎드려 통곡했다. "형, 내가 집안을 말아먹었어." 형은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나를 안아주었지만,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신탄진 보훈병원 병실에서, 형은 법무사를 대동해 아버님의 납작바위 논을 자신에게 증여하는 데 동의해 달라며 형제들의 서명을 요구했다. 막내 선옥이가 9년 만에 나타나 땅을 차지하려는 처사를 따져 물었고, 수치심을 느낀 형은 지분을 포기하겠다며 병원을 뛰쳐나갔다. 나는 울면서 1층까지 쫓아가 형을 붙잡았다.
병실 침대에서 그 모든 참담한 소란을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법무사에게 돌려받은 땅문서를 가슴에 품고 깊게 탄식하셨다.
**"내가 병모를 초등학교 때 쫓아내고, 이번에 또 쫓아냈구나."** 얼마 뒤, 나는 의사로부터 아버님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형선고를 전해 듣고, 그 잔인한 사실을 내 입으로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야 했다.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2011년 4월 11일. 눈을 감으시기 직전,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불러 생의 마지막 문장을 남기셨다.
**"엄마를 위로해 드려라."** 자신의 찢어지는 육신의 고통보다 아내의 슬픔을 먼저 살피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미류나무가 쓰러지듯 하늘의 별로 돌아가셨다.
**제7장. 삼겹살 한 점과 112 신고: 여경 한 명과 네 명의 경찰**
아버지가 살을 깎아 지켜주려 했던 나의 성채는, 장모님의 지독한 가스라이팅과 아내, 딸의 합심 속에서 사소하고도 참담한 이유로 무너져 내렸다. 다은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거실에서 아내가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나는 안방에서 나와, 다은이가 장모님을 위해 접시에 담고 있던 고기 한 점을 무심히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다은이는 내 젓가락을 손으로 톡 쳐서 고기를 떨어뜨리게 하곤 그것을 제 입으로 가져가며 나를 향해 싸늘하게 비웃었다.
아비로서의 모멸감에 "너 혼나볼래"라고 꾸짖자, 딸은 되레 "때려, 때려!"라며 악을 쓰고 대들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뺨을 때린 순간, 딸은 나를 거칠게 밀치며 더 때려보라고 악을 썼고, 그 사이를 아내가 철석같이 막아서며 나를 화장실 구석까지 몰아붙였다. 내가 아내에게 "그럼 네가 대신 맞아라"라고 절규하자, 다은이의 입에서는 아비를 향한 섬뜩한 욕설이 날아들었다.
**"너 이 새끼."** 나는 좌절감에 안방으로 들어가 주저앉았다. 그때 밖에서 다은이가 112에 전화를 걸어 "도와주세요"라며 신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여경 한 명을 포함해 무장한 남자 경찰관 네 명까지, 총 다섯 명의 경찰**이 좁은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경찰들이 다은이의 방을 살피자, 아이의 왼쪽 팔에는 커터칼로 자해한 상처가 있었고 휴지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경찰관은 그 참담한 광경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그들은 토요일이라는 이유로 즉각적인 임시집행을 선고하며, 두 달간의 격리 조치와 함께 나를 그 집에서 내쫓았다. 지갑에 십 원 한 장 챙기지 못한 채 가방 하나를 들고 밖으로 끌려 나온 나. 싸이카 안에는 장모와 아내, 다은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쫓겨나는 아비를 향해 누구 하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평안교회 앞에서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100만 원만 꿔달라며 사정했지만 단호히 거절당했다. 과거 직장 동료였던 정재환에게 10만 원을 부탁하자 **"쪽팔리게 10만 원도 없냐. 이런 전화 하려거든 다시는 하지 마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김현우에게 모멸감을 견디며 10만 원을 빌려, 택시를 타고 유천동의 낡은 여관으로 향했다. 하루치 방값을 치르고 차가운 열쇠를 받아 들던 그 밤의 적막. 그것이 아버지가 지붕을 팔아 빚어주신 내 가정의 참담한 민낯이었다.
**제8장. 어머니의 소천과 부조함의 30만 원**
격리 조치 속에서 홀로 출퇴근하며 고독을 씹던 중, 2024년 8월 21일 평생 나를 지켜주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동생 영옥이가 챙겨준 200만 원을 쪼개 아내에게 80만 원, 다은이에게 40만 원, 그리고 장모님께 30만 원을 챙겨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죽음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탐욕의 불호령이었다.
장모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서슬 퍼렇게 호통을 쳤다.
**"장례식 날 처남이 30만 원 부조한 것을, 너희는 처남댁 일 있을 때 부조도 안 해놓고 그 30만 원을 넙죽 받았느냐! 당장 부조함에서 그 돈 꺼내와라!"** 어머니의 영정 앞을 지킨 부조금까지 셈을 하며 빼앗아 오라는 장모의 그 탐욕스러운 명령. 그 서슬에 질린 아내는, 자기 통장에서 30만 원을 찾아 장모에게 갖다 바치며 부조함에서 꺼내온 척 연극을 했다. 내가 아내에게 당장 처남에게 전화해 확인해 보라고 다그치자, 전화기 너머로 처남의 곤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내가 누나 계좌로 30만 원 바로 입금시켜 주겠다고 했잖아."
그 통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아비의 장례식, 어미의 장례식 부조금마저 쥐락펴락하며 휘두르는 장모의 탐욕과, 그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아내를 보며 나는 이 가정이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었음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2024년 9월 26일, 나는 아내와 함께 법원에 가서 합의 이혼을 접수했다.
**제9장. 마지막 퇴장: "아빠, 내가 죽으면 나갈래?"**
합의 이혼을 접수하고 며칠이 지난 9월 말, 다은이와 또 한 번의 다툼이 일어났다. 그때 다은이가 아내 앞에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뱉은 독한 한마디가 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아빠, 내가 죽으면 이 집에서 나갈래?"**
그 서늘하고도 끔찍한 눈동자. 나를 미워하다 못해 제 목숨을 담보로 아비를 벼랑 끝으로 떠미는 자식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가 둘이 행복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다은이 생명이 이쯤 되면 위급하니 이혼하자. 다은이 생명부터 구하고 보자."
이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길은, 내가 영원히 이 집에서 지워지는 것이었다. 2024년 11월 6일, 나는 정식으로 판사 앞에서 이혼을 확인하고 서구청으로 향해 그날 바로 이혼 처리를 마쳤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집, 내가 온 생을 바쳐 일군 가정을 모두 내어주고 나는 다시 고독한 벌판에 홀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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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다시 홀로 차리는 새우젓 밥상**
아버지가 나를 위해 20미터 미류나무를 베어냈듯, 나 또한 딸 다은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나의 삶을 뿌리째 베어냈다.
지독했던 인연의 사슬을 끊어내고, 나는 다시 홀로 현미밥에 새우젓을 올려 쌈을 싼다. 남들은 이것을 이혼남의 초라한 식탁이자 고독의 증명이라 부를지 모르나, 내게 이 투박한 밥상은 시련을 견뎌낸 자의 승전보이자 아버지와 영적으로 교감하는 나만의 성소(聖所)다.
나의 가정을 무너뜨린 것은 비정한 장모와 가족들이었지만,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아버지가 볍씨를 뿌리던 논바닥에서 내 가슴에 심어주신 '진리를 향한 집념'이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삼겹살 한 점의 모멸감도, 다섯 명의 경찰관이 주었던 수치심도, 여관방의 뼈 시린 한기도 모두 내 안에서 정제되어 세상 사람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뜨거운 활자로 부활할 것이다.
아버지의 미류나무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그 촘촘한 나이테는 이제 한글을 연구하고 시를 쓰는 이병수의 영혼 속에 이식되어, 비바람 속에서도 영원히 푸른 잎을 틔울 것이다.
2026년 3월 21일 이병수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