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웹툰, 10초면 뚝딱… “학습해 베낀것 거부를” “창작 도구로 활용할만”
[위기-기회 갈림길에 선 AI]〈3〉 AI, 창작 영역까지 잠식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작업실. 웹툰 ‘지옥에서 독식’을 그린 김동훈 작가가 대형 태블릿PC 앞에서 웹툰을 그리고 있었다. 밑그림을 만든 뒤 선을 따고 채색과 명암까지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총 5시간.
옆에 있던 박광철 작가(한국만화가협회 이사)가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같은 작업을 해보겠다며 ‘노블AI’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입력창에 영문으로 ‘남성 1명, 파란 넥타이’ 등 20여 개의 명령어를 쓰자 10초 만에 김 작가 그림과 비슷한 이미지가 여러 장 생성됐다.
김 작가는 “그림을 안 그려도 그림이 만들어지는 세상이 됐다. AI가 창작자를 대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AI 기술 변화에 대응하지 않고 두려워하기만 하면 한순간에 업계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했다.
AI가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창작의 세계마저 빠르게 잠식하면서 창작의 개념과 AI 활용 범위를 두고 사회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AI 웹툰에 대해 국내 여러 독자는 “결국 누군가의 그림을 베낀 것”이라며 보이콧(거부운동)에 나섰다. 미국 최고 권위의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는 16일(현지 시간) AI로만 만든 노래는 수상 자격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AI를 창작 활동의 보조 도구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창작개념 뿌리째 흔들… 그래미 “AI가 만든 노래 수상자격 없다”
작가들, 네이버의 ‘AI 페인터’ 활용
14개월 동안 웹툰 72만장 채색
AI로 제작한 음원 출시도 앞둬
“저작권 침해 논란… 사회적 합의 필요”
박 이사는 “AI 기술이 태생적으로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를 떠나서 창작자들이 AI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며 “AI에 대응하고 준비하는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I 개발이 고도화하며 이를 활용한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자 AI를 주요한 창작 도구 중 하나로 인정해야 할 시기가 머지않았다는 주장이다.
● 이미 보편화된 AI… 거부감은 여전
창작 생태계에서 AI 기술은 더 이상 새롭고 생소한 도구가 아니다. 웹툰 업계에서는 노블AI 등 새로운 웹툰 이미지를 만드는 생성형 AI부터 작가를 보조해주는 수준의 기능까지 다양한 범위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다.
네이버웹툰이 2021년 10월 출시한 ‘AI 페인터’는 웹툰 30만 장의 데이터를 추출해 학습한 AI가 인물의 얼굴이나 신체, 배경 등에 자연스럽게 색상을 입혀주는 기능을 갖췄다. 네이버웹툰에 따르면 출시 후 약 1년 2개월간 작가들이 웹툰 72만 장을 AI 페인터로 채색했다. 네이버웹툰 측은 “AI 기술로 (작가들의) 작업 시간이 기존 대비 30∼50% 줄어드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음원 창작 분야에서도 AI 기술 활용이 보편화하고 있다. JYP엔터테인먼트 출신 김승수 KSS뮤직 프로듀서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미 AI 보컬 기술을 활용해 음원 제작 시 시간을 단축하고 비용도 줄이고 있다”고 했다. 국내 콘텐츠 기업 엔터아츠는 AI로 제작한 멜로디와 보컬을 입힌 음원을 완성해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중국에 비해 인력이 부족해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임 업계에서도 한국 콘텐츠의 활로를 찾기 위해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문제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일부 창작자까지 창작물에 AI 기술을 활용하는 것에 여전히 작지 않은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네이버웹툰에 지난달 22일 처음 공개된 작품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은 AI를 활용해 보정 작업을 거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됐다.
권혁주 한국웹툰작가협회장은 “현재 웹툰 창작자의 절반 정도는 AI에 대해 ‘규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거부감을 내비치는 분위기”라며 “기술 발전으로 앞으로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막연한 공포감이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전했다.
● “누군가의 저작권 침해, 사회적 합의 만들어야”
AI 활용이 결국 누군가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점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웹툰, 음원 등 창작 생태계에서 저작권 침해 논란은 생성형 AI 기술에 대한 거부감을 키운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AI가 콘텐츠를 직접 생성하기까지는 기존 창작물을 대규모로 학습하는 과정이 불가피한데, 이 과정에서 글로벌 AI 기업이 창작자들에게 동의를 얻는 세부 절차를 생략하고 정당한 대가도 내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하신아 웹툰작가노동조합 위원장은 “누가 봐도 특정 작가의 독창적인 그림을 베껴낸 듯한 AI 창작물이 양산되고 있다”며 “이걸 어디서 어떻게 학습시켰는지, 기존 창작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유튜브나 스포티파이 등의 플랫폼에선 AI로 유명 가수의 목소리를 학습시킨 뒤 다른 노래를 부르도록 한 음원이 논란을 빚고 있다. 올해 4월 4일 유명 가수 드레이크와 위켄드가 함께 부른 것처럼 보이는 신곡이 올라왔다가 AI로 만든 가짜 음원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플랫폼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CNN에 따르면 두 가수의 소속사인 유니버설뮤직그룹은 “아티스트의 음악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AI 기술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삭제 조치를 요구했다.
AI 기술 발전에 따른 저작권 침해 논란을 법령으로 규제하기 위한 국내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다. 전문가 10여 명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한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9월까지 AI 기술 발전에 따른 저작권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전응준 한국지적재산권변호사협회 부회장은 “AI의 저작권 침해 논란과 관련해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나뉘어 있는 만큼 충분한 논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남혁 기자, 지민구 기자, 최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