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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시인(女流詩人) 피춘자(疲春雌)-14
14.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놀라 일어난 춘자는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알렉스. 어디 있어요?"
무심결에 튀어나왔다. 춘자는 곧 다시 놀라서 입을 막았다.
거실에서 아들이 뭐라고 하였다.
"어머니. 뭐라 하셨어요?"
"아니야. 나는 아직 여행 중으로 착각한 거야."
춘자는 얼른 운동복을 입고 거실로 나갔다. 아들이 거실 쇼파에 막 앉으려다 춘자를 보고 일어났다.
"어머니. 잘 주무셨어요?"
"응. 그래 내 아들. 아주 잘 잤어. 내 집이 최고인 것을 느꼈다."
"어머니. 무척 고단하셨던가 봐요. 아직 피곤하시지요? 오늘은 싸우나에 가서 푹 쉬시면 좋겠어요."
"그래. 그게 좋겠다. 멋지고 적당한 제안이네. 엄마 생각하는 것은 내 아들 밖에는 없어."
"에이. 엄마도. 누나도 있잖아요. 참, 저녁식사는 누나와 매형과 다 함께 하기로 했어요. 괜찮지요?"
"응. 그래. 그러자꾸나.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를 하자. 기대되는데."
아들이 출근하는 것을 본 후 춘자는 커피 한 잔을 만들어 사람들이 출근으로 부산한 바깥이 보이는 창가 탁자에 앉았다. 오랜만인 것 같은 커피 냄새가 참 좋았다. 스리랑카도 좋았지만 한국의 집 거실에서 아침 시간에 이렇게 호젓이 앉아 커피 냄새를 맡는 것도 역시 좋았다. 반복은 습관을 만들었고 그것이 일상의 기호가 되어 있었다.
춘자는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이 마른 목을 타고 넘어가 기억을 깨우기 시작함을 느꼈다
.
공항 출구에는 찬다나 데 죠이샤도 통역을 해 주었던 조이사도 그리고 그녀가 떠나는 시각을 안 지장우 몇몇과 그 외 또 몇 사람이 나왔다. 춘자는 그들과의 작별 인사를 하느라 정작 알렉스와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였다. 기억에 없었다. 그날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 분주하게 떠날 체비를 하느라 바뻣고 알렉스가 간단하게 만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후 비행기 출발시각 1시간 30분 전에 도착하기 위하여 더 일찍 출발하였다. 알렉스는 공항 가는 길이 밀릴 거라 좀 더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하여 서둘렀다. 그래서 제시간에 닿을 수는 있었지만, 서로 따뜻하게 말할 시간이 없었다. 출국 게이터 앞에서도 그 흔하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작별의 장면 같은 것도 만들지 못하였다. 처음 도착해 만나던 장면 이상이었으면 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알렉스와 그 순간 어떻게 이별했는지 그 장면이 없었다. 다 생생하게 떠올라 보이는데... 그 장면은 찍지 못하였다. 아니다. 그 장면은 만들지 않았는가 보다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허나 어쩌랴. 비행기는 떠났고 지금 이렇게 진짜 거실에 앉아 리마인드하고 있는데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춘자는 다시 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입안에 넣고 머리를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알렉스는 이해할 거야. 그는 나 밖에 모르는 남자니까. 오히려 나를 위해 그냥 보낸 것을 후회하며 안타까워할 텐데 뭐.' 그렇게 생각하니 좀 서운했던 마음이 편해졌다. 춘자는 이제 가벼워진 마음으로 거실을 천천히 거닐었다. 알렉스를 만나고 온 것이 뭔가 희미한 장막을 걷어 버린 것 같이 그렇게 개운함을 느껴졌다. 가슴속에 아지 못할 것으로 남아있던 덩어리를 끄집어 내어 버려 버린 것 같이 마음이 텅 비어 편하였다. '이제 이 빈 가슴에 무엇인가를 가득 채워야지.' 춘자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샤워실로 가며 껍질을 벗듯 옷을 훌훌 벗어 버렸다.
15.
"피춘자 시인님."
사워를 마치고 가벼운 여름 옷을 입은 춘자는 상쾌한 기분이 되어 거실 쇼파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 벨이 울렸다.
"예. 누구세요?"
"나 야. 천삼분. 의상 코디네이터 잡지 편집장. 언제 도착했어? 벌써 보고 싶은데..."
서울 남영동에 사무실을 두고 계간 한국패션 코디네이터 잡지사를 경영하고 있는 카페 회원인 천삼분었다. 그녀는 꼭 이름 뒤에 잡지사와 직책을 붙이곤 하였다. 그녀는 대전의 한 대학에 있는 패션 컬러리스트 과를 최근에 다녔다고 말하였다.
"어제 도착했어요. 잘 지냈지요?"
"그럼요. 나야 맨날 쳇바퀴 돌듯 변함없지만, 피 시인은 어때? 시간 있으면 이 아니고 지금 커피샾으로 나올 수 있어요? 그 사이 얼마나 변했는지, 아름다운 피춘자 시인 얼굴 좀 보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고."
이 여자는 우연히 카페에 가입하게 되었다며 나이가 같다고 했는데 말을 높였다 낮췄다 제멋대로였다. 원체 성격이 서글서글하여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직업이 또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어서.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만나기로 하였다.
"알았어요. 어디로 가요?"
"우리가 만나는 곳. 늘봄으로 와. 30분 후 11시 30분. 오케이?"
"예. 그곳에서 봬요."
오늘은 사우나를 좀 했으면 했는데 그건 틀렸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옷차림으로 준비했다. 특별히 선물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알렉스가 필요할 거라며 챙겨준 실론티 한 상자를 골랐다.
8월의 마지막 토요일, 그리고 정오는 싱그러웠다. 원래 토요일은 기대가 많은 날이다. 뭐라도 만들기 좋고 이루어지기 좋은 요일이 토요일이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산들 불어 보도를 걷기 좋은 시간이었다. 피춘자 시인은 오른손에 천삼분에게 줄 실론티가 든 그린 색이 시원하게 코팅된 종이 쇼핑백을 들고 왼쪽 어깨에는 가늘고 붉은 가죽끈이 허리 아래에서부터 소설책 크기 정도의 붉은 가죽 핸드백을 양쪽에 묶어 잡고 위로 올라온 붉은 가죽끈을 매고 있었다. 그 가죽끈은 흰색 면 점퍼에 선명히 나타나 멋진 움직이는 칼라 패션이 되었다. 얇은 점퍼의 소매는 보기 좋게 접혀 팔꿈치 위까지 올려 있었다. 점퍼 안에 입은 면회 색 티셔츠도 보기 좋았다. 그 면 티셔츠는 길어서 엉덩이 반쯤을 덮고 있었고 그 엉덩이는 검은색 스니커 7부 바지가 잘 감싸고 있어 엉덩이와 허벅지의 탄력을 잘 소화하여 건강하게 보였다. 흰색 여름용 메시 운동화는 발목 아래에서 검은 선으로 끝마무리되어서 오히려 산뜻해 보였다. 아웃 솔이 생고무로 되었으며 뒷굽의 높이는 약 3센티미터 되었다. 싱그러운 공기와 화창한 날씨와 보도 경계에 드문드문 만들어진 화단에서 이제 막 꽃을 피운 장미의 향기까지 어우러져 피춘자 시인을 한껏 들뜨게 하였다. 역시 한국의 여름은 나에게 너무 정겨워. 그렇게 생각한 피춘자는 스리랑카에서 맡은 열대 냄새는 이 오전에 모두 잊어버렸다. 그 생각이 에스컬레이터 되어 휘파람까지 절로 입에서 나왔다. 집에서 걸어 10분 거리를 그렇게 기분 좋게 걸었다.
출입구와 벽과 천정 그리고 의자와 탁자까지 흰색으로 장식된 커피샾은 카운터의 검은색과 조화를 잘 이루어 현대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냉방은 잘되어 카페에 들어서자 시원하였다.
“헤이. 피춘자 시인. 여기야!”
먼저 알아 본 천삼분이 큰소리로 불렀다. 그녀는 얼굴 모습이 좀 평평한 편이었다. 웃으면 사람 좋은 아줌마였다. 여름인데도 후줄 건한 천을 두르듯 아래로 주름진 조끼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조끼 안에는 황색 바탕에 청색 글씨가 크게 프린터 되어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었다. 부담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나중에 보았지만, 그 글씨는 영어로 'suck me'라고 되어있었다.
그녀는 나이의 경계를 수시로 허물며 상대편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바쁘신 몸이 여기 대전에는 웬일이에요? 그동안 별일 없었지요?”
“아! 그동안? 우리가 지금 한 달 만에 만나는 거잖아. 너무 바빠. 피춘자 시인.”
그녀는 앉은 채 춘자가 맞은편에 의자에 앉자 곧 반갑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춘자는 미소로 답했다.
“야! 외국을 다녀오더니 더 예뻐졌는데, 무슨 좋은 일이 생겼구나. 어서 이실직고 좀 해요.”
“참나원. 저야 일 때문에 며칠 다녀온 거라서 특별히 달라질 거도 무슨 일이 생길 거도 없지만, 천 사장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어어허~ 사장님 소린 이제 그만하라니까. 편집장. 따라 해봐요. 천삼분 편집장.”
춘자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천삼분 편집장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옳지. 이제 제대로 하시는구먼.”
그녀는 남자 같은 목소리에 남자 같은 타입으로 말하였다. 숱하게 많은 남자들을 만나며 일을 하다 보니 음성도 말투도 그렇게 변했다고 했다. 피춘자 시인이 들고 왔던 쇼핑빽 채로 그녀에게 건넸다.
"뭐시유- 이건?"
"스리랑카에서만 나는 유명한 차 실론티. 좋은 시간일 때 마셔봐요."
"웨메. 이렇게 귀한 실론티를. 나는 그럼 뭘 해줘야 되나."
그녀는 생글 웃으며 피춘자 시인을 봤다. 피춘자 시인도 크고 검은 눈망울의 눈을 그녀 두 눈에 맞추었다.
"이그- 날 그렇게 보지 마. 꼭 안아주고 싶은 욕망이 든다니까. 근데, 자 이것."
찬삼분이 삼베천으로 만든 커다란 끈이 짧은 빽에서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것은 검은 바탕에 골드 칼라로 현란하게 디자인하여 인쇄한 초청장이었다.
'시와 통기타의 만남'
시인: 천삼분
통기타 가수: 정지훈'
장소: 대전
"어머. 천 편집장님. 이건 공연 초청장이잖아요?"
"왜 아니래요. 글쎄, 내가 일을 저질렀다니까. 오는 가을에 멋진 정지훈이 하고 한무대에서 나는 통기타 반주에 시를 낭송하고 가수 정지훈이 노래하는 감미로운 가을의 음악을 즐기는 모임으로, 한 60명 정도 앉을 좌석이 있는 까페를 빌려 하는데, 당신이 찬조 사랑시 낭송을 해 주셔야 한다는 정중한 부탁이니 들어 주어야 해. 피춘자 시인. 그날 정지훈 가수도 만나고 작곡가도 몇 명 올 거야. 다들 괜찮은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이야. 오케이?"
16.
초청장의 공연 일은 두 주일 후 금요일이었다. 전반부 한 번의 시 낭송 후반부 한 번의 시 낭송을 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앞과 뒤 시작과 마무리는 천삼분이 하게 되어 있었다. 춘자는 그동안 꼭 참석해 주길 원하는 까페 회원의 부탁으로 의사협회의 음악회에 참가하여 사랑시를 낭송한 경우가 2번 있었다. 두 번 다 큰 호응 속에 잘 마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렉스의 말처럼 프로 퍼스널이 되기 위한 준비로 해 보고 싶었다. 플라이어(Flyers 전단지)에는 정지훈이 베이스 기타와 메인 기타 및 노래까지 거의 2/3 이상을 맡아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창가의 탁자에 놓인 커피가 식을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춘자 씨. 지금 빨리 커피샾으로 나와. 공연에 대한 의논을 하려고."
천삼분은 춘자가 몇 년 전 여름에 남편을 보내고 혼자 아들과 살고 있는 것을 안다. 그날 남편이 유명을 달리한 날. 전화를 받은 것이 실수였다. 그녀는 위로를 한답시고 장례식장에도 왔었다. 그때 그녀의 발설로 몇몇 카페의 회원이 다녀갔고, 춘자가 가입한 '식스. 오 친구'의 회원들도 다녀갔다. 천삼분이 그 인터넷 까페의 까페지기이다. 춘자가 켜피샾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실내는 전과 같이 쉬원하였다. 그때 우측 유리 창가 끝에 있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손이 번쩍 들렸다. 확인하나 마나 천삼분이었다. 이제 곧 큰 목소리가 나오겠지 했는데 틀림없었다.
"피춘자 시인! 여기야. 이리로 오소."
이건 또 어느 나라말인가. 도대체 그녀의 말은 기분과 상황에 따라 정제 없이 막 튀어나왔으므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몇 발짝 가까이 가니 그녀의 앞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춘자는 주춤하며 테이블 옆에 섰다.
"에구- 웬 수줍음이래. 여기 내 옆에 앉아 인사나 하시유. 이쪽은 시와 통기타의 공연을 이끌 또 다른 주인공인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겸 가수 정지훈."
정지훈이란 사람이 일어났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대전 지향 지적장애우 보육원장 겸 낭송가 겸 사랑시의 대가인 시인 피춘자."
천삼분이 소개를 마치자 정지훈이 일어난 그대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지훈입니다. 피춘자 시인님의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직접 뵈오니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미인이십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는 키가 컸다. 아마도 180센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달걀형의 얼굴 모습에 눈썹이 짙었다. 뺨과 턱에 조금 난 수염은 그를 더욱 야성적이게 하였다. 40대 후반이라고 들은 것과는 달리 더 어려 보였다. 몸매는 근육질은 아니나 비대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청바지에 낡은 네이비블루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위에 연분홍 여름용 얇은 재킷을 입었는데 지퍼는 채우지 않고 앞을 풀어 놓았다. 대체로 야성적인 음악가 같았다.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피춘자이에요. 멋진 작곡가님을 이렇게 직접 뵈니 영광이에요. 아주 멋지신데요. 음악 하시는 분들은 다 이렇게 분위기 있는 건가요?"
그때 천삼분이 끼어들었다.
첫댓글 여류시인 피춘자 .좋은 소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 늘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