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9) 시노달리타스의 전형으로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하)
선교적 쇄신과 변화 바탕으로 교회 사명 새롭게 인식
변화하는 세상 인식과 자기반성으로
폐쇄성 벗어나 문을 열고 복음 선포
새로운 표현·사고방식으로 소통하고
하느님을 새롭게 찾는 여정 떠나며
시대에 희망 주는 교회로 거듭나야
발행일2023-07-02 [제3350호, 15면]
1962년 10월 2일 로마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 마지막 사전 모임에 참석한 주교단. 공의회는 교회가 선교 사명을 위해 세상 안으로 투신하도록 한 사건이었다.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자료사진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교적 쇄신의 흐름에서, 시노달리타스는 현대 세계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선교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한 쇄신과 개혁의 원동력이다. 여기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공의회가 변화하는 시대 안에서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기 인식하고자 했던 사건이며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바로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을 새롭게 계승하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시노달리타스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과 매우 닮아 있는 공의회 당시의 교회 상황에 주목해야 하며, 쇄신과 개혁을 가능케 했던 공의회 정신에서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
변화된 세상에 대한 인식과 교회의 자기반성
공의회가 현대화와 쇄신, 개방과 대화를 핵심 기치로 내걸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변화된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자기반성이 출발점이었다. 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폐쇄된 교회였다. 세상의 변화에 닫힌 채 자족하려는 교회였으며, 시대적 도전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회였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교회에 맡겨진 선교 사명 수행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교회 내에 팽배하였다. 과거의 전통적 신학 방법에 바탕을 둔 복음 선포가 더는 동시대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에 부합하지 않으며, 과거의 획일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교회 통치로는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선교 사명 수행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었다.
공의회가 가져온 ‘선교적 쇄신’은 이러한 폐쇄적 자세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세상과 대화하며, 세상 안으로 들어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하는 하느님 백성’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그리스도교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탈그리스도교적이고 다원적인 세상 속에서 제기되는 사목적 도전에 진지하게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상황을 시대적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내적 쇄신을 기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살을 깎는 자기반성과 예언자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향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다. 교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참으로 교회다운 교회를 찾아가도록 했던 것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공의회의 정신을 창의적이고 충실하게 계승하기 위해, 공의회를 통해 일어난 교회의 선교적 쇄신과 변화가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 내용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공의회는 신앙의 핵심 내용인 계시 사건을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와 함께하시는 소통으로, 인류의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며 역사를 변화시키는 구원 업적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하시며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며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대에도 활발히 활동하시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성령께 대한 강한 체험과 확신이 있었기에, 오순절의 사도들처럼 담대하게 세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의회가 새롭게 발견한 계시 진리란 역사 안에 육화하는 진리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진리다. 살아있는 인간 주체와 소통하고, 소통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리다. 그 진리란 한 마디로 세상을 향한 진리로, 새로운 표현과 사고방식을 통해 소통되어야 할 진리다.
이러한 재발견은 교회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다. 교회는 모든 것을 갖춘, 모든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의미에서 ‘완전한 사회’가 아니다. 교회는 계시 진리가 역사와 세상 안에 육화하도록, 그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고 종말론적 완성으로 이끄시도록 봉사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세상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며, 바로 거기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현실성 있게, 곧 세상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사고방식, 체험의 영역에서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새롭게 하느님을 찾는 여정으로
시노달리타스의 수용이 개념이나 제도적 측면에만 머무르거나 의회 민주주의적 협의 절차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신앙의 범주에 속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의회는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감을 준다. 공의회는 역사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대한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며, 교회가 선교 사명을 위해 세상 안으로 투신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시노달리타스 역시 궁극적으로는 새롭게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선교 사명을 위해 투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한국교회가 하느님을 찾는 신앙 여정을 새롭게 출발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새롭게 찾는 여정을 떠날 수 있을까? 그 답은 세상 사람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삶을 나누는 것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길은 바로 가장 가난하고 비천하며 버림받은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하느님 자비를 전하며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 구원의 길을 찾아 함께 걷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시노달리타스를 통해 추구하는 선교적 쇄신의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느냐에 있을 것이다. 교회의 진정한 미래와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대에 희망을 주고 신뢰를 줄 수 있는 교회란 예수님을 닮은 교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예수님과 더 일치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그들을 섬기고 그들 안에 하느님 자녀로서의 고귀함과 거룩함, 품위를 드높이는 교회일 것이다. 이를 위해 가난하고 고통받고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자극받지 못하는 우리의 무뎌진 마음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이다.
시노달리타스의 전형으로서 공의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한편으로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사목의 도전 앞에서 눈을 가리지 않고 복음 선포의 시급함을 인식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 자신이 선교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의 발걸음은 늘 즐겁지만은 않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의 시급함을 아는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사람처럼 재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즉시 가서 상처를 싸매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인은 그러한 가톨릭교회를 만나고 싶어 한다. 시노달리타스는 바로 이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한민택 바오로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