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장막이 무너져가는 나의 옆지기
순야 이선자
지난 5월 2일, 남편을 요양원에 입원시켰다.
폴란드에서 온 입주간병인은 4월 30일 날, 자기 고향으로 보냈다.
하루가 다르게 더 나빠지는 남편의 건강은 입주한 간병인의 도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자녀들의 권고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한 번은 늦은 밤에 가래와 기침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을 맞아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다.
가래가 목구멍에 걸리면 병원에서는 튜브로 빨아내는 기계가 있지만,
개인집에서는 그런 장비가 없어서 손가락에 얇은 휴지를 감아서
가래를 줄줄이 뽑아낸 적도 있었다.
이러다가는 집에서 급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온 날 큰소리로 펑펑 울었다.
그간의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2006년 10월, 남편이 폐암이라고 판정을 받은 날,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으로 그날도 한 밤중에 일어나
큰소리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이사야 42:3)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다가,
문득 히스기야의 기도가 생각났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이사야 38:3)여호와께서 그의 생명을 15 년을 더하신 것처럼
나도 눈물로서 기도했다.
제발 그의 생명을 15년만 더 연장시켜 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주 하나님 아버지, 저의 남편이 주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주님의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
라고 통곡하며 기도한 후, 마음에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눈물을 보시고, 응답을 받았다는
확신 때문에 그날부터 더 이상 근심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때 그렇게 큰 수술을 받고서도 오늘까지 18년째나 살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아니라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당시에 내가 아는 주위의 사람들이 폐암 판정받고 6개월을 더 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물가물 꺼져가는 촛불처럼 남편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고 있을 뿐,
지금은 내 입이 열개라도 남편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달라는 기도는 할 수 없다.
올해 만 86세가 되도록 남편은 평생토록 헌신적인 삶을 살았기에,
이제는 그 육신이 쉼을 얻고, 하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누려야 할 때가
바로 문 앞에 와 있음을 어쩔 것인가?
폐암 수술 이후, 만성기관지염으로 자주 가래가 끓고, 기침을 하고,
숨을 가쁘게 쉬는 일이 자주 있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금쪽같은 시간이라
여겨,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에 감사하는 마음만 충만할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아무 고통 없이 잠자는 듯, 예비하신 고향집으로 데려가 주시길 기도하지만,
이 땅에서의 이별을 생각하니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걸까?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꽃을 본다면 무거운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이펠에 많이 피어나는
야생화꽃 Ginster(금작화 족)를 보려 갔습니다.
노랗게 피어 있는 꽃들이 긴스터(Ginster)라고 하는데 한국의 시골동네에 피어는 돌감초꽃과 흡사합니다.
첫댓글
나무들은 녹음으로 우거지고
들에는 온갖 꽃들 만발한데
이 봄을 즐길수 없는 안타까움
병실에서 세상일도 모르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신을 돌봐온 아내도 몰라보고
미지의 세상 속에 같혀버린 당신
그동안 쌓인 정 헤아릴 수 없지만
이제는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날까지
무탈하기만 간절히 빌어봅니다.
현대의학이 발전해도 이병은 제대로 치료도 잘안도는가 봅니다.암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기에 본인도 가족까지도 힘들게 하는가봅니다.
이세상 소풍길 끝나는 날
까지 모자람이 없이 그나마 잘 살아 왔노라고 당당하게 위로하시길 빕니다.
고모부님의 평안과 마지막 허락해 주시는 시간동안 가족분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