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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몬테소리 이중언어교육 원문보기 글쓴이: 고정관념
이라크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중동의 역사와 세계열강들의 침략사(또는 식민지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따라야 한다. 또 하나 주된 포인트는 아랍국들과 이스라엘 간의 해묵은 갈등이다. 사실 세계최강의 나라라고 하지만 미국은 고작 몇백년 된 문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생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의 나라들은 고고하고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라크 파병문제에 대해서 '한미 동맹'이라는 케케묵은 논리가 등장한다. 한미갈등을 치유할 수 있다며 파병을 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는 극우보수세력의 논리가 많은 신문지상을 오르내렸다 .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미 갈등의 근본요인을 잘못 파악한 대단히 허구적인 논리이다. 한미 갈등이 왜 생겨나게 되었던가?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범죄와 오만한 태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방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가. 또한 미군 재배치 문제에서도 미국은 한국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일정대로 재배치를 서두르고 있다.
미국이란 나라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미국과 함께 했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미국내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또한 미국 내에서도 이라크 전과 같은 '뜨거운 감자'가 이슈로 등장할 때면(대부분 국제 정치적인 부분이지만) 미국 시민들도 그 뛰어나다고 자랑하는 민주주의의 본질로는 이해하기 힘든 - 이를테면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집회와 시위의 법률이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자유가 한껏 보장되어 있을 것 같은 미국에서도 이라크전과 같은 경우 반전 관련 시위는 불법 행위로 간주되곤 하여 공권력의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라크 전과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는 우리나라가 이 전쟁에 깊숙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파병문제 자체는 제껴 놓더라도 보수와 진보진영간의 국론분열적인 무분별한 논쟁은 이미 국내의 중요문제에 버금가는 사회이슈가 되었다. 왜 우리는 이런 논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이 시기에 국민적 갈등만 더 키워가는 것일까? 진정 세계정세속에서 한국의 이라크전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한국군의 이라크전 파병이 중요한 것일까? 미국이 우방이므로 당연히 미국을 도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미국의 불법 침략전쟁이므로 단호히 파병을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미국의 그 동안의 국제정세속에서의 역할과 한 많은 중동 국가들의 역사를 간단히 되 짚어보기로 하자. 아시아 태평양 국가에서의 미국의 전략 또는 개입 또한 우리나라와의 역학관계를 따져보기 위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주므로 같이 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명분이 약해 보이는 가장 큰 이유 즉, 미국이 그동안 이라크의 후세인을 적극 지원하였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란-이라크 전쟁 또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짚어봐야 할 것 같다.
★ 중동 지역의 전반적인 현황 ★
중동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두 차례의 중요한 정치적 혁명을 겪었다. 1958년 이라크에서 영국 제국주의를 대변하던 왕정이 붕괴되는 군사혁명이 있었고, 1979년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정이 회교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를 위해 값싼 원유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자원을 공급해 줄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후 고조되는 아랍 민족주의는 서구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자국의 석유자원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도모하고자 했다. 1951년 이란의 총리가 된 모하메드 모사데그는 영국-이란석유회사(현재 브리튼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이란의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며 국왕의 전제적인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이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1953년 미국 CIA의 지원(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을 받은 장군 자헤디의 군부쿠데타를 통해 실각하고 만다. 그는 체포·구금되었다가 1956년 석방된다.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중간의 이해가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자 미국은 중동지배 전략을 간접지배방식으로 전환하고, 이 지역에 다국적 석유기업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보수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이라크 왕정 역시 이런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1958년 압둘 카림 케심 대령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붕괴된다. 군사쿠데타 당시 이라크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이라크 공산당이었다. 이 시기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이집트 등에서 개혁 시도는 1차적으로 석유산업의 국유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바트당이었다. 바트당은 1963년 짧은 집권 이후 잠시 실각하기도 했으나 우익 군부와 연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이라크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주의'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이라크에서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이었으나 1973년 쿠르드족 진압을 위해 일시적으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한 기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철저히 실천에 옮긴 일은 공산당 탄압이었다.
1978년 이란에서 미국과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던 팔레비 왕정이 민중혁명에 의해 붕괴된다. 이란 팔레비 왕조의 제2대 국왕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석유 국유화와 왕권 제한을 추진하던 모사데그 총리와 대립하다가 1953년 로마로 망명했으나 망명 3일 뒤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귀국한다. 그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통한 공포정치와 미국과 군사협정을 맺으며 급격한 서구화(백색혁명)을 추진한다. 중동 지역은 세계 석유 수요의 60% 이상을 공급하는 현대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미국은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중동의 급격한 변혁을 원치 않았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립을 원한 아랍 민중의 이해를 배신하고 그들의 파이프라인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보수 왕정과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해왔다. 이란에서의 민중혁명은 미국이 과소 평가해 온 아랍 민족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해 미국은 크게 당황한다.
그동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던 보수왕정을 통해 저유가 시대의 호황을 누리던 세계 경제는 급전직하 곤두박질쳤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의 걸프만 일대의 왕정 국가들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자본주의는 이란 회교 정권을 제거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고 이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여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일으킨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아랍 왕정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이라크에 무기를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8년에 걸친 전쟁이 이들 국가에 남겨준 것은 막대한 사상자와 전쟁 부채였다. 이 전쟁을 가리켜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슬람 내부의 전쟁,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수니파 국가인 이라크의 전쟁으로 표현했으나 이것은 전쟁의 원인을 오도한 것이다.
실제 이라크의 종교 분포는 시아파가 55%, 수니파가 20%, 쿠르드족이 20%로 되어있다. 다만 이라크의 지배 권력인 바트당의 기반이 수니파였고, 급격한 도시화로 농촌에 뿌리를 둔 대다수 시아파 농민들의 삶의 물적 토대가 붕괴되면서 이라크 내에서도 이슬람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불어오자 이런 내적 긴장을 외부로 발산한 것이다. 8년간의 소모전이 끝난 뒤에 이란과 이라크에 남은 것은 폐허였지만 민중의 의지를 토대로 수립된 이란의 이슬람 정권은 호메이니의 사후 유연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독재를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다시 들고 나오면서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중동 지역의 국경선이 자로 잰듯 반듯한 이유는 석유 자원을 탐낸 서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을 부추겨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의 패배로 독립한 이들 국가들은 다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보호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보호국, 독립국을 오가게 된다. 쿠웨이트 역시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오래 전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행정구역상에 속하는 등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지역에서의 석유 자원을 탐낸 영국에 의해 분리되駭?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이라크의 후세인은 자신을 아랍민족주의자, 반제국주의자라고 부르며 쿠웨이트 알 사바 왕가를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며 아랍민족주의의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1990년 8월 개전 5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완전히 장악한다.
한동안 미국은 이런 이라크의 영토 확장욕을 비밀리에 부추겼으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미국은 UN을 통해 신속하게 이라크 제재를 결의하고 이라크의 패권주의와 아랍민족주의에 위기를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일부 아랍 국가까지 포함된 33개국의 다국적군을 편성 1991년 1월 17일부터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그 뒤 1백 시간의 지상작전을 통해 지상작전 개시 4일 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걸프전은 베트남전 이후 실추된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한 전쟁이자 미국이 앞으로 추진할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TV 수상기를 통해 안방까지 전쟁의 참상이 생생히 방영된 결과 반전여론이 조성돼 전쟁에서 패했다고 보고, 걸프전 전기간을 통해 언론 보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했다. 또한 이 전쟁은 철저한 하이테크 전쟁으로 이라크 사망자 15만 명에 비해 다국적군 사망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걸프전의 결과로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 이란- 이라크 전쟁 (1980 ~ 1988 年) ★
1. 이란- 이라크 전쟁의 배경
1968년 미국의 CIA를 등에 업고 사담후세인은 이라크의 Baath 당을 통하여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세인은 CIA 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CIA 는 사담후세인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중 인접국 이란에서는 역시 CIA 의 조장에 의하여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았지만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다보니 국가가 극히 혼란한 상태였다.
ⓐ 이란의 상황
이란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그리스, 아랍, 터키 및 몽골 등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는 영국과 러시아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1925년에 팔레비 왕조가 건국되었고, 1935년에는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이란에서는 1962년 서구화 지향의 백색혁명이 시작되었는데, 1963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반백색혁명의 폭동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고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5년간에 걸친 망명생활의 대부분을 이락에서 보내게 되면서 시아파 지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1977년 재미 유학생들에 의해 반정부시위가 발생하고, 1978년에는 반정부 시위 활동이 이란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팔레비왕 치하의 이란은 정치와 종교의 분권을 도모하였는데, 이로써 종교인의 사회적 지위 저하와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성직자 참여가 위축되었으며 독실한 신자의 불만을 격화시켰다.
이러한 불만이 계속되어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이 세속적인 팔레비 왕조를 뒤엎게 되었다. 1979년 팔레비왕은 망명을 하게 되고, 호메이니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게 된다. 즉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결국 국민투표로 이슬람공화국이 선포되고 이란 학생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태가 발생하여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혁명정부는 신헌법을 제정하게 되고, 이러한 와중에 1980년에는 이라크와의 국경분쟁으로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 이란의 이슬람혁명
1979년 2월에 일어난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왕권의 지나친 친서구화 정책 및 권위주의적인 통치에 대한 이슬람민족의 반발과 더불어, 장기간 정치·종교적인 면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호메이니에 의한 반서구 이슬람세력의 반발로 일어난 정통 이슬람주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혁명으로 인하여 걸프연안의 세력 구도는 큰 변동을 겪게 된다.
왕정제의 붕괴로 인한 걸프연안 왕정국들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전통적 보수왕정제 국가들로 이루어진 중동지역의 여러 국가들이 이 사건으로 자신들의 지배 체제가 시대적으로 변혁을 겪게될 것으로 예상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란의 시아파 지도자들은 혁명 직후 걸프연안 왕정국들에 거주하는 다수파인 순니파가 시아파 무슬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시아파 무슬림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걸프연안 왕정국가들을 타도하라고 부추기게 된다. 특히 이란의 호메이니의 혁명수출정책이 주변 지역으로 파급되어 이라크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라크의 상황
이라크는 1932년 영국의 위임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였으며, 하심왕가에 의하여 입헌군주제가 성립되었으며, 1958년 혁명 전까지는 친미·친서방 국가였다. 그러나 1958년 까심장군의 군사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국으로 정치체계가 변화되었다. 혁명 이후 이라크는 1968년 바크르 장군의 쿠데타까지 3 차례의 정권 변화를 경험하였다.
1963년 민족주의 청년 장교단 주도의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바아스당 정권이 출현하면서 아레프(Are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6년 아레프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형인 모함맛 아레프(Mohammad Are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8년에는 바아스당내 온건파 쿠데타로 아레프 정권이 붕괴되고, 바크르가 집권하였다. 1975년 이란과 신국경협정(샤트 알-아랍수로 문제)을 조인(알제리 협정)하고, 쿠르드족과의 오랜 내전을 잠정적으로 종식하였다. 1979년 삿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바크르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게 되고, 1980년에는 이란과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후세인은 1980년 국민헌장에서 비동맹원칙을 발표하면서 아랍결속을 촉구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으로 스스로 상실한 중동지역에서의 지도력을 후세인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아랍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의도와 함께 국제적으로 비동맹주의 원칙을 주장함으로써, 1982년 비동맹 정상회담을 바그다드에서 개최하고 국내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비동맹세계의 지도자로 등장하려는 야망을 가지게 된다.
이라크는 군사적으로는 구 소련으로부터 우수한 무기를 도입하여 지역 군사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또한 1975년 이란과의 국경분쟁과 쿠르드족의 분리 요구 문제 등으로 국방에 많은 지출을 하였다. 이라크는 지리적으로 아랍국가로는 유일하게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이란인의 불만 등으로 대립 관계를 계속하였다.
1980년 9월 후세인은 이란과의 국경문제를 협약한 알제리 협정을 폐기하고 샤트-알 아랍수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란은 이라크 경비선에 공격을 명하고 곧 바로 이라크의 전면적 공세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2. 전쟁의 전개
ⓐ 이란-이락전쟁 발발의 직접적 배경
이란과 이라크간의 아랍권의 맹주권 및 영토 분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1980년 9월의 이란-이라크 전쟁은 특히 양국의 국경지역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쟁 발발은 표면적으로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영유권 문제와 이란이 강제로 점령한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서의 반환 문제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중동지역에서의 맹주권, 즉 이라크의 후세인의 정치적 야망과, 혁명 수출을 위한 호메이니의 혁명관이 서로 상충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샤트 알-아랍 수로의 경우, 걸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므로 양국간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란과 이라크의 관계에 있어 변수로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2년 이라크가 독립하면서 이란과 이라크 간에 국경조정 문제가 제기된 이래 이 수로는 1937년 이란·이라크의 국경협정에서 임시로 그 경계선을 수로의 동(東)안으로 결정하므로써 이라크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란측은 국제법상의 관례를 들어 수로의 계곡선을 국경선으로 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영국이 이라크 측을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 후에도 이란은 수로의 경계를 계곡선으로 하기 위하여 이라크와의 협상을 수 차례 시도했으나, 이라크의 경우 일단 자국 소유로 인정된 지역을 이란에 반환할 의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하여 수로 문제는 계속적인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고, 1960년대 말∼70년대 초, 이라크가 국내의 쿠르드족의 반란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을 때 이란은 쿠르드족을 지원한다.
이에 따라 이라크는 1975년 알제리에서 개최된 이슬람국가들의 정상회담에서 이란측이 쿠르드족의 반란군에게 일체의 원조를 중단하는 대신에, 수로의 양국경계로서 계곡선으로 하는 지정 문제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1979년 후세인이 이라크의 대통령이 되면서 알제리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게 된것이다. 그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이라크의 영유권을 선언하고, 1971년 팔레비 정권이 걸프만 안보의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점령한 아부 무사, 톰브 등의 도서에서의 이란군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국경 문제에 대한 충돌이 결국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전쟁의 발발
이라크는 전쟁 초기계획으로 이란의 유전, 정유시설, 운반 루트의 파괴와 이러한 산업지역을 테헤란 정부와 단절시킴으로써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예상하였다. 이라크는 바그다드와 가까운 중부 접경지대로 진격하고 다음 목표인 샤트 알-아랍수로를 넘어 후제스탄의 주요 도시인 호람샤흐르와 아바단을 점령하였다.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양국간의 전쟁은 점차 이란의 반격으로 상호공방이 교차되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이란의 경우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정권을 붕괴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혁명 이전부터 계속된 시위와 파업은 다국적기업의 철수, 석유 수입의 감소 등으로 이란의 경제는 1982년 초 최하수준을 기록하였다. 또 산업생산 능력이 40%를 밑돌았고 실업률이 40%를 육박했으며, 전 분야에서의 고질적인 물품부족 현상은 부품과 원자재, 섬유류에서 매우 극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쿠르드족과 발루치족 그리고 후제스탄 아랍인에 의한 소수민족의 소요와 자치 요구 및 1980년 사전 발각된 쿠데타 등으로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란 내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과 이라크의 침공은 이란의 호메이니에게는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된다. 이란은 위기를 이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정적의 조직적 근절과 성직자에 보다 의존하는 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위기를 이용하려는 방법으로 대중의 관심 대상을 이라크와의 전쟁, 즉 이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음으로써 국내적 불만이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다. 또한 이 전쟁은 혁명에 대한 개인적 의지에 관계없이 모든 이란인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민족적 동원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이란 혁명정권은 혁명임무가 완수되어졌다고 국내 정세를 평가할 때까지 이라크와의 전쟁을 대가 없이 종결지을 이유가 없었다.
ⓒ전쟁의 영향
장기전으로 약 8년간 교전했던 이라크와 이란은 1987년 UN의 종전권고 결의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988년 8월에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란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이라크 전쟁은 걸프지역 국가들과 중동지역의 석유에 의존하는 서방세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고 그 대책을 강구케 하였다.
1980년 미국의 카터는 걸프에서 미국의 이익이 외부 도발에 도전 받을 경우 군사력을 통해서라도 방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카터 독트린'). 이러한 경고는 이란의 혁명(친서방적 팔레비 정권 붕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걸프 연안국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낀 후에 취해진 조처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후 아랍국가들에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심화된 양극화 현상이었다. 이란을 지원했던 아랍국가들은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사회주의)과 같이 친소련 국가들이었으며, 이라크를 지원했던 국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및 걸프 연안국 등의 친미 국가들이었다.
★ 미국의 이라크 침공 ★
1. 역사적 배경
중동지역은 유목민족의 특성상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였지만 국경선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주요 인종은 셈족, 아리아족, 우랄알타이족이고, 셈족에는 아랍인, 시리아인, 유대인이 있고, 아리아족에는 이란인과 아프간족이 있고, 우랄알타이족은 터키족으로 대표된다. 중동은 유사 이래로 지리적 특성상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다. 중동지역은 역사의 전개에 따라 계속해서 이합집산을 거듭해왔다. 이러한 중동지역에 가장 강력한 역사적인 사건은 마호메트의 출현으로 인한 이슬람 문명의 탄생이었다.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아랍세계는 하나가 되었고, 다른 문명과 인종도 포용하는 이슬람의 특성으로 인하여 이슬람은 계속 팽창되었다. 이슬람을 침략했던 몽골이나 투르크 역시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어 이슬람영역과 세력은 더욱 확대 되었다.
400여년간 중동 대부분을 통치했던 오르만 투르크 제국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에게 패하면서 중동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에 들어갔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은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인종이나 종교적, 지리적 환경들을 모두 무시하고 중동을 분할하였다. 중동지역의 국경이 자로 잰 듯 직선으로 되어있는 것은 바로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이후 중동지역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 팔레스타인 문제
제1차 세계대전중 영국은 아랍인을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아랍국가의 독립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후 이번에는 유대인을 이용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 인정선언을 한다. 그 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에 패배하며 45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게 된다.
ⓑ 레바논 전쟁
1920년 프랑스는 시리아의 통치를 위해 레바논을 만든다. 그 후 기독교와 무슬림의 의석수를 6:5로 하는 국민 협약을 만들지만 기독교 세력이 부정선거까지 하자 무슬림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그러자 미국은 제6함대 해병대를 파견하여 반대세력을 무력진압한다. 미국이 무력 개입하므로써 레바논 내전을 더욱 악화 된다.
ⓒ 쿠웨이트
쿠웨이트는 수백 년간 이라크와 같은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이라크에 편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유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음모로 쿠웨이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1960년 쿠웨이트는 영국의 속국에서 독립하게 되는데 미국이 개입하여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부족의 장이 아닌 엉뚱한 부족장을 국왕으로 세우며 친미대리정권이 형성된다.
2. 미국의 이라크 침공
영토문제와 종교간 갈등 등으로 인하여 8년간 이란과 전쟁을 벌여온 이라크는 미국과 쿠웨이트의 정치적,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하였다. 영토문제와 종교간 갈등 등으로 인하여 8년간 이란과 전쟁을 벌여온 이라크는 미국과 친미대리정권인 쿠웨이트의 정치적,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수행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은 이라크를 배후조종하면서 석유를 확보하고 싶어하였다.
1989년 6월 사담 후세인의 초청을 받은 미국 경제 사절단(미국의 거대 석유회사들이 포함되어있는)이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후세인은 미국정부에 전후복구와 이라크 개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미국 사절단은 투자에 앞서 조건을 내세웠다. 이라크 정부가 대외 채무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절단은 후세인 정부가 채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국영 석유산업 민영화'를 제시했다. 이라트 전 산업을 주도하는 원유사업을 독점하여 정권을 유지하던 후세인이 국가 주권의 상징이자 정권의 돈줄이기도 한 석유산업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정부는 후세인에게 약속했던 23억 달러 차관을 동결했다. 미국은 이라크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전략을 사용했는데 우선 정보전을 가동시켰고 이때부터 미국과 영국 언론에는 이라크의 재무장을 경계하라는 보도가 줄을 잇기 시작한다. 미국의 경제 봉쇄로 인하여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친미정권인 쿠웨이트가 이라크를 무너뜨리기 위하여(또는 미극측의 사주를 받아서) 비정상적으로 원유가격 하락을 주도했다.
쿠웨이트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합의를 일방적으로 깨었기 때문에 1990년 7월에는 원유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 쿠웨이트의 반칙에 반발했지만 쿠웨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이라크와 석유수출기구(OPEC)에서 제안하는 협상도 거부하였다. 조그마한 소국인 쿠웨이트가 불현 듯 이렇게 여러 대국들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배후조종 또는 사주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였다고 짐작 된다.
3. 후세인, 미국의 '불간섭 약속' 믿고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변심 때문에 피를 말리는 위기에 몰렸다. 원유 수출 가격이 곤두박칠치면서, 빚을 갚을 수 있기는커녕 식량 수입마저 어렵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이라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쿠웨이트를 점령하여 원유를 적정가격으로 다시 수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뿐이었다.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는 쿠웨이트에 대하여 후세인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7월27일 후세인은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글라스피를 만나게 되고 후세인은 미 대사에게 "쿠웨이트 분쟁은 미국의 국익에 무관하며 따라서 미국은 앞으로도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것" 이라는 답변을 얻어 내는 소득을 올린다. 왜냐하면 이라크의 쿠웨이트에 대한 침공은 미국과 대항할 의도가 아니라면 미국측의 허락 내지는 묵시적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의 군사 작전에 미국은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 담긴 이 날의 면담 기록을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 후에 공개했다. 부시(현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내용은 1년 후 미국 의회에서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미국의 비열한 침공유도 작전에 이라크는 오히려 궁지에 빠지게 된다. 우선 쿠웨이트의 왕족부터 잡아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이미 미국이 사우디로 피신시켜 놓았다. 둘째, 쿠웨이트를 침공하자마자 1천억 달러에 이러는 이라크 자산을 동결하였다. 셋째, 쿠웨이트를 점령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침략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넷째, 미국은 다국적 군을 동원하여 이라크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였고, 엄청난 인명손실과 함께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이라크는 미국과의 비밀회담 기록을 공개하였고, 사실상의 항복선언으로 쿠웨이트에서 철수 하였다. 하지만 이 항복선언은 어떤 소녀가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종합병원 산부인과 병동의 조산아 보육기(incubator)에 들어있는 갓난아이들을 집단 살해하는 만행현장을 목격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이라크의 항복선언은 무효화된 것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항복선언과는 무관하게 계속되었고, 1991년 2월 28일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전을 선포하기까지 이라크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집중포화를 맞고 만신창이가 된다. 미국에서 전쟁 지지 여론에 불을 지른 소녀가, 실은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며 이 인터뷰도 날조극이었다는 것은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다.
이후 이라크는 미국의 강도 높은 경제 봉쇄 조치로 인하여 의약품과 식료품조차 수입하기도 힘이 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이라크 어린이들이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유엔을 앞세워 이라크를 완전 무장해제하였고, 지난 3월에는 이라크를 침략하여 다시 이라크 민중을 유린하였다.
참고 :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과 주한미군 철수(한호석 저)
★ 미국의 침략역사 ★
1. 하와이 원주민의 90%를 학살하며 세운 나라
아메리카 대륙을 얻기 위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의 90%를 학살하였다. 학살의 과정에서 천연두가 묻은 담요를 원주민에게 제공하면서 생화학전의 유례없는 승리를 이룬 미국은 출발에서부터 잘못된 나라였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의 프런티어 정신은 자신의 이익이 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하와이를 얻기 위하여 미국에게 기대지 않는 원주민의 90%를 학살하면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명언을 만들게 된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지구의 청부 폭력배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세계침략은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낮은 단계에서는 정치,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가지만, 중간 단계의 침략적 형태로서 불법적 경제제제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경제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달성할 수 없을 때는 불법적인 군사지원뿐만 아니라 군사개입과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참고: 전쟁중독(안드레아스)
2.베트남 전쟁-스페인 전쟁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
공산주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편견과 미국의 전쟁에 희생이 되었던 우리의 젊은 목숨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감히 쉽게 거론하지 못하다가 최근 몇 년간 한겨레신문사를 중심으로 새롭게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는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베트남 전쟁은 단순한 이념적 대결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독립투쟁과 식민주의, 혁명과 반혁명, 통일과 분열, 자유와 억압, 황인과 백인, 서양과 아시아, 낙후와 현대, 농업과 공업, 원시적 소총과 현대식 폭격, 선입관, 사랑, 증오, 인권, 종교의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1) 1차 인도차이나 전쟁 -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음모와 미국의 개입
2차 대전으로 인하여 베트남에서 물러났던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물러나자, 베트남을 비롯하여 인도차이나 반도를 재지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식민지배의 음모를 실행하기 위하여 이전에 베트남에 했던 많은 약속을 파기해버린다. 하지만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하였던 계획은 베트남의 자주 민중에 의해서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결국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베트남 민중의 전쟁이 시작되고 54년 5월까지 프랑스는 40만의 군인을 동원하여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의 음모를 알고 있으면서도 프랑스와 베트남 전쟁을 외란으로 규정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정치적인 지원은 물론 군사 경제적인 개입으로 확대하며 프랑스를 지원한다. 22억 8천 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전쟁 자금으로 지불하고, 나토라는 군사 동맹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군사적 개입도 계속 시도 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 방위 조약기구를 결성하여 인도차이나 국가들은 보호 지역으로 편입하여 결과적으로 이후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위한 틀을 만들어 낸다.
2)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과 전쟁 조작
베트남 민중의 자주적인 힘으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자 미국은 민중의 삶을 무시하는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정부를 배후 조종하면서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는 의도를 실행으로 옮겨갔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디엠 정부가 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자 미국은 군부 쿠데타로 일어난 자들을 지원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지원하던 정당하지 못한 정부가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을 만들어 내고 베트남 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른다.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개입을 하게 하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기밀 해제된 <국방부 비밀문서>에 의하면 '북베트남에 대한 정교하고 은밀안 군사작전계획'은 64년 2월 1일 '3알파 작전' 이라는 암호명으로 개시되었다.
※ 참고 34알파작전 계획의 주된 내용
①U-2정찰기에 의한 북베트남 공역 침입 및 정찰 강행,
②북베트남 내부 정보 수집을 위한 심리작전 및 특수요원(스파이)의 투하
③정보수집을 위한 북베트남인의 납치와 유괴
④북베트남 오지 중요시설 파괴를 위한 파괴반 투입
⑤철도와 교량 파괴를 위한 해상으로부터의 남베트남 군부대의 기습공격
⑥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 베트남 연안시설의 포격
3) 결과 -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 VS 베트남 민중의 자주의지
잘못된 시작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전력으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양심을 비웃듯 대량살상 무기와 생화학 무기(네이팜탄과 수많은 비치사성 생물무기, 고사용 화학 무기)를 동원하며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라는 미국의 패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베트남 민중은 반제국주의 자주역량을 높였다. 결국 지상병력 54만을 동원하며 문명의 석기시대화를 만들어 내려던 미국은 73년에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군사간섭을 중지하게 된다. 수 백년간 외세의 지배 속에서 외세에 기대면 망한다라는 베트남인들의 민족 해방의 신념이 베트남을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됐다고 밀할 수 있다.
참고자료 : 베트남 전쟁 (리영희 -한양대 석좌교수-)
3. 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진 수탈과 학살
미국의 세계 침략사에서 중남미에서 처럼 광범위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중남미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미국의 만행에 대하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중남미 지역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높은 수준의 문명(잉카문명 등)을 물려 받았으며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미지역의 경제상태는 좋았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의 수탈로 그들의 경제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어갔다. 전체적인 생산량은 높아갔지만 그 나라 국민들의 소비량을 줄어들었다. 질 좋고 값 싼 1차 생산량은 계속 늘어갔지만 이들의 이윤은 미국 기업과 친미 독재자의 배만 불려 주었다.
미국 정부가 만들어내고 지원하는 독재자가 국민을 억압하고, 고문하고, 살인하는 것에 대하여 미국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미국이 그들이 독재자이건 아니건 그들이 쉽게 조종할 수 있을 때 그들은 미국의 '좋은 이웃'이 된다.
일찍이 경제학자 에드워드 허먼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고문과 미국의 원조 사이에 폭넓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투자가의 요구에 맞추기 위하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수출용 농작물을 생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하여 자신이 먹어야 하는 농지를 줄여야만 했다. 더 많은 농산물을 수출하는 모델로 인하여 GNP는 꾸준히 올랐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굶주리고, 교육 등의 공공 서비스는 계속 감소하는 그야말로 '경제기적'을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의 반발을 없애고, 노조나 진보단체를 없애기 위하여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고문과 테러밖에 없었다.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중남미에서 이루어진 광범위한 고문과 살인, 테러는 일찍이 보고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은 주로 불법적인 경제 봉쇄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화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IMF(약소국에만 적용이 되고 미국에는 적용되지 않는) 규정에 이르는 여러 가지 수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그들의 경제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독재자에게 군사적인 원조를 진행하거나 군사위협, 군사개입 등을 진행하면서 독재정권을 유지하는데 갖가지 술수를 부렸다. 만약 그 정권이 민심과 완전히 떨어지면 다른 대리 정권을 세운다. 미국의 의사를 거슬리는 지도자라면 그 나라를 침공하여 납치하고 그들의 법대로 처벌해버린다.
1)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의 아들라카틀(Atlacatl) 부대는 1981년 3월 미 육군 특수부대 학교가 반게릴라전 전문가 15명을 엘살바도르에 파견함으로써 창설되었다. 미국교관들조차 이 군인들은 "유별나게 잔인하며.... 우리 교관들은 포로들의 귀만 잘라오지 말고 산 채로 잡아오라고 설득하는 데 항상 애를 먹었다"고 말하였다.
(노암 촘스키 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1996)
1981년 12월부터 이 부대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이었으며 1000여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13세정도의 어린이까지 동원하며 강간, 폭력 등의 나치 친위들의 과정처럼 악마적 심성으로 무장한 군인으로 만들었다.
예수교 잡지 <아메리카>에 실린 군사훈련의 결과를 하나 소개한다.
어느 날 한 농부여인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세 어린 자식과 자기 어머니, 여동생이 식탁 주위를 빙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잘려진 머리를 몸뚱이 앞에 식탁에다 조심스레 올려놓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몸뚱이들이 각자 잘려진 자기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엘살바도르 방위군에서 파견된 이 살인범들은 18개월짜리 아기 머리를 똑바로 세우기가 힘들자 아기의 두 손을 아예 머리 위에다 못 박아 버렸다.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큰 플라스틱 대접에는 먹음직스런 국이라도 담긴 듯 붉은 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산티아고 신부(엘살바도르에서 일하던 카톨릭 신부)에 띠르면 이런 소름 끼치는 현장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노암 촘스키 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1996)
2)니카라과 - 가난한 자들의 성공을 증오하다.
나카라과에는 소모사라는 학살자가 있었는데 미정부가 지원하던 그는 산디니스타에 의해 위기에 몰렸다. 미국은 자신들의 말을 듣는 독재자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니카라과를 점령할 기반마련을 위하여 소모사의 친위대인 방위군 지휘관들을 적십자 표시가 달린 비행기에 실어 출국시켜주었다.(전쟁범죄에 해당)
미국은 엄청난 군사비와 아르헨티나의 신나치 장군들을 동원하여 콘트라(테러조직-이름은 자유의 투사)를 배후조종하며 니카라과에 대규모 테러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미국의 세계개발 기구인 옥스팸이 나카라과를 지원하고 있었고, 세계개발은행 등은 나카라과를 지원하여 국민들은 기아상태를 벗어나고, 건강, 교육 등의 인간존엄성을 높일 수 있는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었다.
미국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이 침탈할 수 없는 경제체제에서는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한 어떠한 성공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첫째, 세계개발은행과 인터-아메리칸개발은행 등에 압력을 가하여 모든 사업과 원조를 중단하도록 하였다. 둘째, 테러조직을 동원하여 갖가지 개혁조치와 경제발전이 물거품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불매운동을 벌여서 조그만 나라를 철저히 짓밟았다. 셋째, 미국은 정부와 평화협상을 하였으며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테러단체인 콘트라에 지원을 세배로 늘렸으며 민주세력인 산디니스타가 선거에서 이기면 경제봉쇄와 콘트라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공정하지 못한 선거에서 산디니스타는 40%나 지지를 받았다. 미국의 성공은 니카나과의 불행이었다. 악랄한 학살은 말할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은 철저히 짓밟혔다. 미국은 자신의 말을 들어서 실패로 이어지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성공을 거두었다.
3)파나마 침략
1_미국의 중남미 전초기지 파나마
중남미 중에서도 콜롬비아와 맞닿아 있는 파나마는, 1903년 운하확보를 명목으로 개입한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한 후 중남미 정부의 감시와 탄압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파나마는 근래 미국주도하에 자행되고 있는 약소국 인권유린의 역사이기도 하다.
19세기말 당시 카리브 해와 태평양을 다같이 세력권에 넣고서 점차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미국에게 운하의 필요성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콜롬비아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파나마에 해병대를 개입, 독립을 도왔다. 1903년 파나마와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파나마는 1,000만 달러와 연간 임대료 25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16킬로미터 폭의 운하지대를 영구조차지로 미국에게 임대했다. 후에 운하는 1914년에 완공되었다.
1914년 8월 15일 미국배 ANCON이 운하를 최초로 통과함과 동시에 파나마운하는 미국의 완전주권하에 영유하에 되었다. 결국 미국은 일국의 독립을 담보로 이 전략적인 80Km의 수로와 1,426㎡의 요새를 자신의 수중에 넣은 것이다.
2-파나마 침공(노리에가 체포)
미국은 노리에가 집권당시 파나마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수행 노력을 평가, 수십만달러를 지원하는 등, 파나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1972년에 이미 노리에가의 마약 밀매 관련 사실을 알고 있었고, 1983년 미 상원에서는 마약의 근원지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1986년 노리에게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CIA와 법무부 등은 그를 집중비호 하였다. 1988년 노리에가가 법원에서 유죄선고를 받을 때 단 하나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1984년 전에 저질렀던 죄이다.
노리에가는 1984년 부정선거로 당선이 되었지만 미국은 적극적으로 비호하였다. 하지만 나카라과의 콘드라를 돕지 않는 등 미국의 눈 밖에 나는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은 더 이상 그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990년 운하 관리권이 이양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친미정권이 들어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하여 미국은 다양한 시도를 진행하였다. 경제제재를 실시하여 파나마의 경제를 사실상 파괴하였고, 미국은 1989년에는 군사 쿠테타를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자신의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노리에가가 마약 밀수에 개입했다는 혐의 등을 뒤집어 씌워 지난 89년 겨울 파나마를 침공, 노리에가를 체포해 미국법정에 세웠다. 이 사건은 미국의 마약퇴치 명제 하나가 무차별 침공을 통해 약소국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했다는 점,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 의해 응징되고 있는 후세인, 밀로세비치, 그리고 노리에가 모두가 과거 미국의 지지를 받던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결국 정의 보다는 미국의 자국논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참고로 노리에가는 자신이 멕시코 정치모델에 따라 정치를 했을 뿐 마약거래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참고자료 :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노암 촘스키)
★ 정리 및 해설 ★
후세인은 대통령 되자마자 1980년 전쟁을 하기 시작한다. 바로 8년 간에 걸친 이란, 이라크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배경에는 두어가지 정도가 있다. 이라크와 이란 모두 물이 귀한 나라다 보니 유프라테스강에 대해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1975년 두 나라는 '공동소유'라고 선언함으로써 적당히 그냥 저냥 사는가 싶었지만 둘 다 솔직히 '함 엎어서 내가 좀 더 차지하면 안될까?' 라는 욕심이 있었다.
또한 1979년 이라크에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이란에도 호메이니라는 사람이 혁명을 일으켜서 이란을 먹어버리고 만다. 이 사람은 자기가 알라의 대리자라고 선전하는 사람인데, 제국주의를 싫어하고 약간 진보적인 것이 있었는지 몰라도 어쨋든 입헌공화국을 성립한다. 또 이라크는 이 전쟁으로 인해서 아주 짧은 해안선(항구가 아시다시피 바스라항 하나 뿐이다. 그만큼 해안선이 짧다.)도 넓혀서 밖으로 좀 수월하게 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란이 이 꼴이 되자 사방에서 착한(?) 후세인을 부추기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지독한 반미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아랍의 핵심국가인 이란을 쥐고 있으면 골치 아프게 될 뿐더러, 다른 아랍국가들은 아랍의 강국인 이란과 공화정이 사방으로 전파되면 지네들도 쫓겨날까봐(나폴레옹이 온 유럽을 정복하면서 자유주의를 퍼뜨리자 온 유럽의 군주들이 이것을 막기 위해서 대 프랑스 전쟁을 일으켰듯이) 이란과 맞멎는 이라크가 한판 붙어서 이 혁명의 전파가 막아지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는 8년간 전쟁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라크는 아랍과 미국의 지원아래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한 무기를 들고 싸웠으며, 이란은 남는 건 쪽수라고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 결국 용호상박, 듀스에 듀스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나라가 지쳐 떨어졌다. 두 나라가 싸워서 얻은 대가는 서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라크가 약간 땅을 넓혀서 딴에는 '승리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남는 건 전쟁의 참화뿐이었다.
우리가 후세인을 나쁘게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쿠웨이트를 개떼 같은 군대로 달랑 8시간만에 꿀꺽한 1990년 8월 2일에 벌어진 쿠웨이트 침공일 것이다. 물론 이 침공의 내면에는 이라크의 사정이 있었다.
일단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엄청난 대가를 치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쟁을 부추기고 지원을 하던 국가들(미국을 위시한 아랍국 거의 전체)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전쟁 전에는 300억불이 넘는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1000억불이 넘는 빚을 지게 되었다. 또한 전쟁을 8년간이나 해서 늘은 것은 싸움 실력이라고 외형적으로는 세계 4위의 엄청난 군사강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인근 아랍국들이 피할 수밖에.... 아무튼 국가 이미지도 제고하고 전후 복구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이라크에는 돈이 될게 석유뿐이지 않는가? 물론 주변국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석유를 팔아먹으려고 하니까, 석유 가격이 또 문제였다. 그래서 감산합의를 하기에 이른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
그런데 아랍에미레이트(UAE)와 쿠웨이트 이 두 나라가 약속을 위반하고 양산을 하자 석유가격은 곤두박질 쳐 버린다. 누구를 위해서 이라크가 싸웠는데... 라고 후세인은 생각했을 것이다. 석유가격은 안 오르고. 다른 나라에게서 원조를 받을려고 해도 아무도 원조 안 해주고, 특히 이제는 지뤙할 가치가 없어진 이라크에 대하여 미국의 주도로 자산동결 이라는 경제적 제재까지 받게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쿠웨이트를 접수하면 해안선도 넓어지고, 그 여세를 몰아서 바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접수하면 순식간에 세계석유시장은 이라크의 것이 된다고 후세인은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전쟁도 침략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후세인의 입장에서는 인근 아랍국이나 미국의 변신(?)은 거의 배신행위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냉혹하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미국의 힘을 얻는 쪽은 언제나 기세가 등등하여 이전의 일은 잊어버리기 일수였다. 전쟁이 나고 나서 세계가 뒤집어졌다. 특히 미국은 '올게 왔구나' 하면서 대책에 바빴다.
미국이 주 이라크 미국대사를 통하여 쿠웨이트 침공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는다는 든든한 약속을 믿고 이뤄진 침공이었지만 오히려 미국은 이 전쟁을 새로운 기회로 이용하려 든다. 영양가가 떨어진 후세인이 이제는 말도 잘 듣지 않으며 아랍의 맹주로 나서려는 꼴이 못마땅해 졌으며 새로운 중동질서를 꾀하던 미국으로서는 새로운 절대적 호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또한 미국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겁이 난 사우디는 바로 미국을 불렀다.(접경지대임) 100만이 넘는 군대를 가진 이라크와 10만 밖에 안 되는 사우디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압도적인 차이였다. 결국 꿈에도 그리던 사우디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사우디가 있었기에 걸프전쟁이 가능한 것이었다.
아무리 미국이 미사일이나 공군으로 폭격을 해도 후세인을 무너뜨리려면 육군이 있어야 하는데, 이라크가 100만이 넘게 있으니 아무리 질 좋은 군대라고 해도 20만은 넘게 미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군대를 먹여 살릴 만한 나라가 있어야 했다. 그게 바로 사우디였다. 땅도 넓고, 돈도 많고, 거기에다가 매년 백만이 넘게 성지순례자를 받아들이는 나라이기 때문에 군대 한 25만 정도는 그럭저럭 수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군사작전에 있어서 보급과 후방의 든든한 지원은 실제 병력의 능력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중요하다. 결국 사우디가 없었다면 미국은 감히 이라크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1991년 2월 26일 이라크가 항복을 했다. 그리고 이라크는 정말 너무나도 참혹한 암울한 시기에 다다르게 되었다. 일단 석유를 퍼서 팔 수 조차 없었다. 또 만약에 숨겨 놓은 돈으로 필요물자를 수입하려고 해도 대부분 금지품목으로 걸려든다. 의약품들을 수입하면 그것으로 화학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 그 제재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결국 이라크는 완전히 원시국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은 1998년 후세인이 무기사찰단을 추방한 것을 빌미 삼아 '사막의 여우작전' 이라고 해서 작년 2차 걸프전까지 끊임없이 공습을 일삼았다. 그 횟수나 규모가 사실상 전쟁이나 다를바 없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두드려 맞다가 미국의 부시 정권은 자신을 지원해준 자국의 석유회사들의 이익과 불황의 타개를 위해서 다시금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라크는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벌었지만(나시라아에 있는 사담이 항복한 척 했다가 미군이 안심하고 바그다드로 올라가자 다시 총을 잡고 후방을 때리는 소위 '뒷다마 후리기' 꽁수는 압권이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라크 민중은 미국에 대항하여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등 이라크는 다시금 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반발을 막기 위해서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종교문제를 부추겨서 '이라크 분할정책'을 펴고 있다. 나라가 3개로 갈라지면 지네들끼리 싸운다고 정신이 없을 테니 굳이 미국이 감시하지 않아도 위협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과연 이라크가 어떻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갈지 매우 궁금하다.
그러면 왜 미국은 '악의 축' 에 속한 북한은 핵을 보유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침공을 하지 않는 것일까? 대량살상무기 때문에 이라크를 침공했다는데 왜 그 끔찍한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북한은 가만 두는가? 한국과의 우방관계에서 한국을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삼가고 있는 것일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는 없는 일이지만 대략 이런 추론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제껏 미국이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군사지원을 통하여 소용돌이가 일어난 나라들과는 달리 한반도에는 미국이 군침을 흘릴만한 자원이 전혀 없다.
미국이 그토록 중동지역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유 또한 석유자원이라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이 직결된 곳이기 때문이다.종교적 문제라고도 하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종교의 자유를 무시할 수 는 없기 떄문에 그 문제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어떤 구실도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실제 9.11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과 그의 추종 세력들은 모두가 사우디 사람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은 사우디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서 그랬던 것 처럼 언제 사우디를 주요 적국으로 생각할 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한결같이 "평화를 위하여" 라고 외치고 있는 이 때에도 세계의 열강들은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을 지 모른다. 세계의 역사는 열강과 약소국간의 '뺏음과 뺏김' 의 역사라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네덜란드, 일본, 독일, 중국, 러시아 등은 한결같이 외국의 침략전쟁에 압장섰던 나라들이다. 아주 먼 이야기도 아니며 불과 몇 십년 전 까지도 그들의 침략과 약탈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진행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5,000년의 역사는 우리의 부국강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늘 일깨워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토록 많은 외침으로 침략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황폐화 시키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도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이라크 전쟁에 내 몰리는 상황에 처해있다. 우방이라고 해서(진정한 우방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그들의 전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단짝인 친구가 은행을 털자고 한다고 해서 같이 은행을 털 수야 없지 않은가? 단짝인 친구가 사람을 죽이자고 해서 살인을 할 수 는 없지 않은가? 그 은행의 돈이 모두 약탈에 의한 부정한 돈이라 하더라도, 살인의 대상이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참고 :
①2000년 3월 17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올브라이트는 미국-이란 협회 연설에서 미국이 1953년 좌파 성향의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미 CIA가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고,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편을 드는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
②1990년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와 연결된 지역에서 암암리에 원유를 뽑아냈다. 쿠웨이트 침공 일주일 전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에프릴그라피스는 사담에게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훈령을 받았다. 미국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여러번에 걸쳐 거듭 밝혔다. 그리고 침공 이틀 전 국무차관 존 켈리는 "미국은 쿠웨이트 방위의 감시자가 아니다"라고 하원에서 강조함으로써 후세인의 판 전쟁 결정에 청신호를 보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이라크는 새로운 국경설정안을 포함해서 여러차례 협상제의를 했으나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44일간의 단기전에서 이라크 군인 10만 명(그것도 대부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군인들)이 전사했고, 민간인 약 20만 명이 사망해서 모두 30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이에 비해 동맹군은 미군 148명, 영국군 47명을 포함해서 모두 211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마저도 1/3은 미군의 오포 공격으로 인한 것이다.
걸프전 후 국제연합식량기구(FAO)의 1995년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56만명의 이라크 어린이들이 사망했고, 국제보건기구(WHO)는 현재 이라크에서 아이들의 불필요한 죽음이 6분마다 1명꼴로 진행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에는 "어떤 전쟁도 시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은 공격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라크의 식량부문과 농경지, 상수도, 댐, 발전소 등 사회 전부문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정문태, 「이라크 꼬마들이 죽어간다」, <한겨레21>, 238호, 1998년 57~58쪽
③걸프전쟁에 나타난 미국 언론통제전략의 실상을 연구한 룬 오트슨(Rune Ottoson)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3가지 언론통제전략을 처음부터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가능한 언론을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2)동시에 가능한한 오랫동안 취재, 보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3)최대한의 보도 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 미군 당국은 엄밀한 선발과정을 거쳐 미국과 세계에서 특파된 약 192명의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을 몇 그룹으로 나눠 각각 다른 미군기지에 주둔시켰다.
전세계 175,000명의 기자를 대표하는 국제기자연맹(IJF)은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현재 실시하고 있는 기자풀제는 명백한 언론 자유 침해이다. 또한 중요한 정보는 차단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비영국, 비미국 기자들을 차별하고 있다." … 걸프전 당시 세계 방송사에서 방영된 미군에 의한 바그다드 군사시설 정조준 폭격장면이 미군당국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된 방영물이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방송은 이 전쟁에서 미군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이라크 군사기지만 포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라크의 무고한 국민들이 얼마나 미군의 포격에 희생됐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십자사의 조사로는 걸프전으로 이라크의 시민 15~20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김창룡 -신문의 2001년 미국테러사건 보도와 문제점에 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