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제1차 세계대전의 개막과 함께 기병이 몰락했다는 서술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미 화약무기의 발전으로 기병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었으며, 기관총이 등장하자 세이버를 휘두르는 기병은 더이상 전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는 것이 이러한 서술의 요지다. 몇몇 선각자들이(특히 영국에서) 19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발전한 보병화력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전통적인 중기병 대신 승마보병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돌격은 기병의 로망'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은 높으신 분들 떄문에 묵살되었다는 서술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식의 서술은 소위 '기술결정론'적 시각이 강했던 20세기 역사가들의 서술에서도 종종 찾아볼수 있었다. 가령, 많은 사람들의 군사사 인식에 큰 (악)영향을 미친 리델 하트는 1차대전에 대해 서술하면서 기병은 '적군보다 아군에게 더 큰 폐'를 끼쳤으며, '전쟁의 진행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마르틴 반 크레펠트는 보불전쟁의 기병돌격을 다루며 '후장식 소총과 대포의 존재를 망각한 행위' 정도로 서술하였다.
스필버그의 영화 <워 호스>의 기병돌격 장면:
흔히 떠올리는 '기병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장면이다
19세기 말의 기병과 관련 논쟁
19세기 중반, 군사 이론가들은 기병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병의 개선된 화력 앞에서 정말로 기병이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는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서술한대로, 영국에서는 기병이 '승마 보병'의 형태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이쪽은 식민지 전쟁에서 기병의 수색, 정찰의 역할이 돌격보다 종종 더 중요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은 '돌격의 로망에 빠진 보수파들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사실 이른바 기병 개혁에 대해서 영국군은 상당한 합의를 이루었다. 바로, '승마 보병을 비롯해서 기병의 화력을 강화하되, 전통적인 충격 기병도 버려서는 안된다'였다. 둘 중 어느쪽에 더 중점을 둘지 문제는 1차대전 개전까지 이어진 논의이지만, 개전 당시 대체로 화력 쪽에 무게중심이 더 쏠려있었다.
실제로 당시의 논쟁을 보면 화력을 중시하는 '진보주의자vs돌격의 로망을 못버리는 보수주의자'의 이분법은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임을 알수 있다. 가령 승마보병의 확충을 주장한 대표적인 '화력론자'였던 조지 데니슨은 '최소한 기병전력의 4분의 1은 돌격을 담당해야 하며, 이들은 철저히 리볼버와 칼로만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상당부분 리델 하트 덕분에)흔히 답없는 보수주의자로 여겨지는 더글러스 헤이그는 기병돌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기병이 현대식 소총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 영국의 논의는 단순히 관념적인 진보vs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나름대로 이전 전쟁의 교훈을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들이었다.
유럽 대륙의 논의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었다. 19세기 후반을 장식한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독일 통일전쟁은 군사 이론가들에게 풍부한 자료들을 제공해주었다. 이 전쟁에 대한 관찰 결과, 이들도 분명 개선된 보병 화력을 논의에 넣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전쟁은 이 화력이 결코 극복 불가능한 대상이 아님 또한 보여주었다.
가령, 이탈리아 독립전쟁의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창기병 2개 여단은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수와 화력에서 큰 우세를 보유한 이탈리아군 보병의 진격을 막아내는 전술적 위업을 달성했다. 보불전쟁의 마르스 라 투르 전투에서 프로이센 기병의 성공적인 돌격도 마찬가지의 예를 제공했다. 이에 대한 보불전쟁 참전 장교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1866년에 우리는 프로이센 기병이 오스트리아 보병을 짓밟고 대포를 탈취하는데 성공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우리는 1870년에 프랑스 보병이 샤스포 소총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무장한 보병을 상대로 한 돌격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즉, 적재적소에 운용되기만 한다면(물론 이 적재적소에 기병을 투입해서 운용하는게 참 어려운 일이다), 기병은 얼마든지 보병 화력을 극복하고 전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중기병이라는 병종과 이들이 담당한 돌격전술이 살아남은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병의 종말?
이렇게 살아남은 중기병은 흔히 서술되듯이, 혹은 영화에 묘사되듯이 전쟁 첫해에 기관총 진지에 칼빼들고 돌진하다가 몰살당한것이 아니다. 영국군의 예를 살펴보면, 기병이 수색, 정찰에서 맹활약하고 승마보병의 역할도 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기병의 역할도 전쟁 내내 계속되었다.
가장 기병이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던 전선은 역시 말 달리기에 좋은 지형인 동부전선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였다. 여기에서는 돌격전술이 상당히 자주 사용되었으며, 성공률도 높았다. 물론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존 엘리스는 1차대전 기병은 보병이나 포병 지원 없이 단독으로 돌격을 성공시킨 예가 없으니, 이를 두고 기병의 가치가 입증된 것이라고 볼수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Gervase Philips 선생이 효과적으로 반박하였다. 이는 기병전술의 본질을 심하게 놓친 주장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기병은 혼자 싸우는 병과가 아니고, 기병돌격도 마찬가지다. 흔히 기사들의 시대였다는 중세에도 기사들의 돌격은 보병과의 긴밀한 협동 하에서 전개될 때에 가장 효과적이었다. 더욱이 기병의 돌격은 고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적의 전열을 완전히 붕괴시키거나, 이미 흩어져서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할때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이 당시 영국 기병의 돌격전술은, 이미 19세기 말에 수많은 논의를 거쳐 정립된 교범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었다. 1890년의 기병 전술교범은 공격군의 측면에 배치한 기관총으로 적 대열에 빠르게 사격을 가한 뒤, 곧바로 기병돌격을 가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전술의 존재는 20세기 초의 기병이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진화하는 존재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서 화력의 발전은 기병이 돌격전술을 가능하게 하는데 있어서 장애물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이 전역에 참전했던 영국군 장교, G. A. Weir 대령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사실 호치키스 기관총의 보급 덕분에 이루어진 화력의 증가 덕분에, 기병 지휘관은 더이상 병사들을 하마시켜서 소총 사격을 가하도록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때 언제든지 막강한 화력으로 엄호사격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때때로 기관총과 포병의 지원 없이 기병 단독으로 돌격을 해야 할 때가 생기기도 했지만, 결코 권장되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공식 교범은 어디까지나 기관총을 측면에 배치시켜서 엄청난 양의 총탄을 쏟아부은 다음에, 기병을 내보내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전술적 상황 덕분에 전쟁이 중후반으로 흐르면서 영국군 기병은 오히려 초반에 비해 승마 보병이 줄어들고 전통적인 냉병기로 무장한 기병의 비율이 늘어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물론 19세기 초반에 볼 수 있었던, 기병의 장렬한 일제돌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대규모 돌격만이 진짜 돌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 지휘관들 상당수가 흔히 생각하는 것같은 무능한 바보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차대전의 지휘관들이 생각한 기병의 주된 임무는 보병이나 포병에 대한 대규모 돌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군이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을 경우, 기병은 언제든 돌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단 그 돌격은 밀집한 대규모의 기병대가 아니라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소규모 부대들에 의한 공격이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기병은 1차대전 내내 고유의 역할을 담당했다. 전선이 참호전으로 고착된 서부전선에서는 아무래도 동부전선이나 중동보다 활약할 기회가 적긴 했지만, 전혀 없지는 않았다. 1917-18년까지도 기병은 적군의 돌파를 저지하는 기동 예비대로 활약하거나, 아군의 전선 돌파 후 전과를 확대하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전차가 등장했지만 아직 기병을 대체하기는 여러모로 무리였기 때문이다. 1918년에 기병은 전차와 함께 움직이면서 영국군의 전술교리의 중요한 일부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포병과 보병이 돌파구를 뚫으면, 기병과 전차는 적 후방까지 깊숙히 치고 들어가면서 고립된 적군을 처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1차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일공세까지 이러한 활약은 이어진다.
결론
19세기 말-20세기 초 기병의 역사는, 역사를 볼때 현상만 보고 판단하는 행위에 대해서 강력한 경고를 전해주고 있다. 전쟁사는 기술과 무기의 발달에 따라 그 합당한 활용법에 대한 수많은 논쟁으로 가득하다. 이를 단순히 전통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대립으로 나누는 것은 20세기 중반까지 상당히 유행하던 서술법이었지만, 이는 실제 역사의 복잡함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당연히 지금 입장에서 보면, 시행착오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짜 교훈은 이를 비웃는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를 복합적으로 들여다보는데서 나온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은 단순히 몇몇 복고주의자들의 고집 때문에 살아남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었다. 이 기병부대들은 수많은 고민과 논쟁을 거쳐 재탄생한 부대였다. 이들은 과거의 역할 들 중 여전히 필요하며 기병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했으며, 동시에 변화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이는 단순히 1차대전 기병에 국한된 사례가 아니라, 인류 역사상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적응과 변화의 한 예에 불과하다.
참고
William Philpott, Bloody Victory: The Sacrifice on the Somme (London, 2009).
Gervase Phillips, '"Who shall say that the days of cavalry are over?" The Revival of Mounted Arm in Europe 1853-1914' War in History 18 (2011).
Gervase Phillips, 'The Obsolescence of the arme-blanche and technological determinism in British military history' War in History 9 (2002)
첫댓글 와 미스터 스노우님 덕분에 30년전쟁도 그렇고 무지했던 것들이 다 박살나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 2차대전기 폴란드기병에 대한 평가도 예전에 달라졌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인터넷상의 유럽관련 역사담론은 아직까지도 편견이 많이 남아있는듯 하네요 ㅜㅜ. 좋은글 감사합니다.
엉터리 지식이 확대재생산되면서 넷상에서 부동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바뀔날이 요원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려주시는 글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매번 양질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병의 임무와 역할이 사라진게 아니라 예비대나 고유의 역할을 수행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견 하나를 깨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내용이 대부분 당연한 말인데 이렇게 정리해주시기전에는 그냥 기관총이 나왔는데 기병은 무슨 기병이냐는 생각만 하고있었네요 ;;;;
옛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는거 하나만 기억하고 있어도 많은 오류를 피할수 있죠.
@mr.snow 그 말씀이 이 글에 핵심이네요 ㄷㄷㄷ 명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