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춘덕, 가족 23-16, 어버이날을 맞아
북상 고모님 댁으로 가는 길, 어제부터 내린 비는 오늘도 그치지 않고 내린다.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고모님을 생각하면 아저씨의 마음은 벌써 그곳에 가 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모님은 문을 활짝 열고 툇마루에 앉아계셨다.
조카가 온다고 하니 아침부터 그렇게 앉아 기다리신 듯하다.
“춘덕이가? 비가 이렇게 오는데 온다고 애먹었제? 어여 안으로 들어 온나. 방으로 드가자. 아이고, 춘덕아. 네가 안 오면 나한테 누가 찾아오겠노. 고맙다.”
“고모님은 그간 잘 계셨지요? 고모님 드시라고 베지밀하고 바나나 사 왔어요.”
“그냥 오만 되지, 꼭 빈손으로 안 오고 뭣이라도 사 오네. 어여 들어가. 비가 오니까 날이 찹다. 방바닥이 찹아. 이리 이불 깔린 데로 싹 내씨 앉아. 춘덕이는 따신 커피 한 잔 주까?”
고모님은 조카를 위해 따뜻한 커피와 빵, 아저씨가 준비한 베지밀과 바나나를 다 열어 조카 앞으로 내밀고는 그것도 모자라 초코파이와 키위까지 내오셨다.
껍질 벗긴 키위 한 조각을 조카 입에 쏙 넣어주시며 몇 달간의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고모님, 행님이 죽었어요.”
“누구? 너그 행님이 죽었다고? 춘수가 죽었단 말이제. 아고, 그 자슥이 그리 허망하게 죽었다고? 너는 그걸 우찌 알았더노?”
“나도 행님 죽은 거 몰랐어요. 작년에 그리됐다는데 이번에 알았지요.”
돌아가신 형님을 모신 봉안당에 다녀온 것, 조카 백창근 씨와 소식한 것, 4월 초에 부모님과 큰형님 산소 벌초한 것, 조카의 이야기에 고모님의 얼굴이 눈물에 젖는다.
“그래, 산소는 찾아가겠더나? 풀이 많이 짓어서 오데가 오덴지 몰랐을 낀데.”
“찾아가지요. 내가 모르만 되나.”
“그래, 니가 혼자 벌초한다고 애썼다. 춘수가 있었으만 같이 할 낀데. 이자, 너그 형제간은 다 죽고 니 하나뿐이다. 그 자슥, 부모 제산 다 탕진하고 그런 생각하만 밉지만 그래도 인생이 불쌍타. 춘덕이 니는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된데이. 창근이는 잘 있다카더나?”
“서울에 있다캐요.”
“결혼은 했다카더나?”
“결혼은 안 했다캐요.”
“여다가 창근이 전화번호 하나 적어주고 가소.”
고모님은 내게 백창근 씨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며 옆에 있던 공과금 명세서 겉봉투를 내밀었다.
아저씨가 “고모님은 글자 알아요?” 하고 물었다.
“아니, 글은 몰라도 숫자는 보고 누르만 되지.”
고모님이 알아보기 좋게 큼지막하게 적었다.
고모님은 “춘덕아, 이거 집에 가져가서 먹어라.” 하시며 검정비닐에 초코파이와 베지밀 몇 개를 담아 아저씨 손에 들려주셨다.
북상과 고제를 잇는 산길을 달려 형수님 댁에 도착했다.
“아재, 오랜만에 뵙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엄마, 춘덕이 아재 오셨어요.”
조카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저씨를 반긴다.
“형수님, 그간 잘 계셨어요?”
“왔어요. 비 오는데 오느라고 힘들었겠어요. 야들아, 아재 뭐라도 챙겨드려라.”
“아재, 거실은 불을 안 때서 바닥이 차가워요. 주방이 따뜻한데 그리로 가실래요?”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던 백지숙 씨가 아저씨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조카라고는 하지만 다들 아저씨와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이야기하다 보니 아재와 조카들 나이가 고만고만하다.
“아재 얼굴이 좋으시네. 지내는 건 어떠세요?”
“그냥 그렇지 뭐.”
“아재, 도시에서 살아볼 마음 없어요? 우리랑 부산에 가서 사실래요? 부산이 얼마나 좋은데, 바다도 맨날 보고 참 좋아요.”
조카의 권유에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시골에 살던 사람은 도시 못 산다. 평생을 농사짓고 살던 분이 어떻게 도시에서 사시겠노. 그건 언니 생각이라. 아재는 더 갑갑해하실 것 같은데.”
조카들은 아저씨의 지난 삶이 궁금해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낸다.
아저씨는 대답 반 웃음 반으로 물음에 답했다.
“이것은 백춘덕 아저씨 지원하면서 쓴 글을 책으로 엮은 겁니다. 작년에 지원하신 분이 쓴 글인데 아저씨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어요. 조카분들 읽으시라고 두 권 챙겼습니다.”
“선생님들은 책도 쓰시나 봐요. 와, 신기하네요. 우리 아재가 주인공이고요.”
“맞습니다. 저희가 도운 백춘덕 아저씨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 글이니까요.”
“천천히 읽어봐도 되지요?”
“가족분들 읽으시라고 드리는 거니까 두고 천천히 보시면 됩니다.”
율무차를 타서 대접하던 조카 며느리는 벌써 책을 들고 이리저리 훑어내린다.
“아저씨, 모처럼 조카분들 만나셨는데 따로 이야기 나누세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가족분들끼리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을 텐데 천천히 나오시면 됩니다.”
“선생님 그냥 계셔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조용히 나누세요.”
자리를 피해드리려고 했는데, 아저씨는 이내 따라 일어나셨다.
“아재, 내가 오늘 부산 갔다가 화요일 아침에 다시 거창에 와요. 9일이 엄마 생신이라서 오빠 차로 함께 오니까 아재도 여기 와서 식사하고 가세요. 오빠 얼굴도 보고요. 갈 때 모셔다드릴게요. 제가 거창 도착할 때쯤 전화드릴 테니까 그렇게 하세요.”
“일 있으만 오기 힘들고, 일 없으만 그라지 뭐.”
2023년 5월 7일 일요일, 김향
5월, 시기가 좋아요. 이렇게 고모님, 형수님 찾아뵈면서 조카들도 만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신아름
고모님 찾아뵙고 인사드리니 감사합니다. 조카들이 반기며 먹거리 내오실 정도로 건강하시니 감사합니다. 형수님 건강하시고 오랜만에 조카들 함께하니 감사합니다. 오월이라. 월평
첫댓글 백지숙 씨를 직접 만났군요. 아저씨와 통화하며 울었던 그 분 맞죠? 형수님 댁에 자주 들르는 것 같으니 자주 만나고 안부 전하며 지내면 좋겠습니다. 조카들에게 둘러 싸인 아저씨 모습 보니 기쁘고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