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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제54장 運命의 날
"호호호호…"
득의에 찬 교소가 터져나왔다. 화려한 대전(大殿), 천계주(天界主) 사라담경! 그는 문득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십이월 초하룻날.. 바로 그날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이 천사의 미(美)를 지닌 여인, 하나, 그녀의 미소는 가히 악마적이었다.
"나의 한(恨)도 끝나고, 수십년 동안 꿈꾸어온 천하 제패도 이뤄질 것이다."
그녀의 앞에는 오인(五人)이 보였으며, 그 중에는 신비천녀와 천미여왕도 있었다. 천계주(天界主)는 문득 입을 열었다.
"총순찰!"
"예, 어머니!"
신비천녀가 공손히 대답했다. 서로의 어색한 호칭에도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네 의견은 어떠냐? 살릴까, 죽일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나, 신비천녀의 대답은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환우삼천황만 죽인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으로 압니다. 십전성녀나 우내쌍천도 감히 대항을 못할 테니까요."
천계주(天界主)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들을 살려줘야 하지? 아예 후환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텐데…"
신비천녀는 즉시 답변했다.
"우내쌍천은 불타를 순종하는 사람들의 우상이며 천우삼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지극히 당연하 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만약 무공을 모르는 모든 천하인들에게까지 배척을 당한 다면 천하제패에 오히려 짐이 됩니다."
허자, 천계주(天界主)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녀는 다시 명했다.
"금봉각주!"
"존명!"
중년여인이 즉시 부복했다.
"십이월 초하룻날… 본계를 둘러싼 환상천무대절진(幻想天霧大絶陣)을 철회한다!"
아아!
--- 환상천무대절진(幻想天霧大絶陣)! 이것은 아득한 세월 속에 잊혀진 천고절진(千古絶陣)이 아닌가? 펼쳐지는 순간 그안의 모든 것은 환상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환상천계(幻想天界)!
그토록 거대한 세력이 세상에 신비(神秘)로 존재하며 발견되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하나, 드디어 그 신비의 껍질을 벗어내려 하고 있었다. 운명의 십이월 초하룻날에..
이때, 천계주(天界主)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한(恨)을 갚는 날, 바로 그 날에 천하를 움켜쥐는 것이다."
오오! 천하무림… 그것은 결국 여인(女人)들의 발에 짓밟히고, 그리고 여인천하(女人天下)가 이루어질 것인가?
× × ×
흑야(黑夜)… 별빛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화원(花園), 가운데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꽃나무가 보였다. 하나, 꽁꽁 얼어붙은 연못이나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은 화원의 운치를 그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쓸쓸해 보이는 그런 밤이었다. 문득, 그곳에 한 남녀(男女)가 보였다. 천하절색의 미여인, 한데, 그 옆의 사내는 보기에도 섬뜩한 무심(無心)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혼(魂)이 없는 듯한…
절색의 미여인은 가슴에 비파(琵琶)를 안고 있었고, 중년의 사내는 얼굴에 심한 검상(劍傷)이 나 있었다. 신비천녀! 무영초객! 바로 그들인 것이다. 신비천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영초객!"
"…"
무영초객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신비천녀도 역시 그를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당신은 정말 마음이 없나요?"
무영초객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것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신비천녀는 계속 물었다.
"당신은 혹 나를 죽이고 싶지 않은가요?"
무영초객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신비천녀는 그러한 그를 측은한 듯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요. 당신은 노예죠. 전에도 말했지만 전 그것을 자꾸 잊어 버려요."
그녀의 표정은 쓸쓸해 보였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누가 노예인지…"
그녀는 밤하 늘로 시선을 던졌다.
"저는 어머니의 노예, 당신은 또 나의 노예… 그리고… 그리고 어머님은…?"
그녀는 문득 말을 끊었다가 한숨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사실은 노예에 불과할 거에요. 그 무엇인가의… 불쌍한 사람들이죠. 우리 모두…"
그녀는 무영초객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모르겠어요. 모두 다… 내가 한 일이 어떤 것이었는 지도…"
무영초객은 마치 돌과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어떠한 말이 흘러나오더라도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을듯이…
"될 수만 있다면 전 당신의 금제(禁制)를 풀어주고 싶어요. 하나 나로서는…"
문득, 신비천녀의 눈에 얼핏 물기가 스몄다. 이 독랄 하고 잔인한 여인의 눈에…
"어머니…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녀는 청백한 몸을 가지고 있더군요."
"…"
"전 잊을 수 없어요… 표리천영, 그와 그의 수하들의 마음을… 정(精), 그러한 마음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일순 그녀는 말을 끊었다. 하나의 유성(流星)이 꼬리를 물고 암천(暗天)을 가지고 지나갔다. 바로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데… 하나, 그녀는 아무런 소원을 빌 것이 없었다.
꿈도 희망도 사랑도 없었기에… 엄격한 교육과, 강해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환상천계에서 자랐기에 그녀는 그 외의 것을 알지 못했다. 한데 지금.. 지금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어째서 자꾸만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인가.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모조리 앗아간 내가… 밤(夜), 밤이 깊었다. 그녀의 마은은 이 밤보다도 더욱 캄캄했다. 별 하나 없이…
× × ×
오늘은… 운명(運命)의 십이월 초하루였다.
항산(恒山)---! 수 많은 봉 우리를 이룬 거악(巨嶽)이었다. 그 중 가장 높은 제일봉(第一峯), 높이 솟은 봉우리를 칼로 자른 듯한 공지(空地)가 있었다. 방원 백 장 정도, 평원을 보는 듯 매우 넓은 곳이다. 한데, 이 넓은 제일봉이 발 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로 매어지고 있었다.
유독 중앙 만큼은 이십 장 정도의 공간이 있었으니, 바로 그곳에, 당대를 풍미한 마천제황 표리천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둥에 등을 대고 묶여 져 있었던 것이다. 영준한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하나, 타고난 영웅(英雄)의 기질과 준수한 본색만큼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 앞에서는, 지금 열띤 논쟁이 길어지고 있었다.
"흥! 그의 단죄를 무영초객에게 맡긴 처사는 불공평한 것이오."
패천왕검 단목경의 말에 팽문세가의 팽호가 나섰다.
"단목대협의 말이 지당하오. 마천제황은 무림의 공적이므로, 어느 누구라도 그를 단죄할 자격이 있는 것이오."
천각대불사가 나직이 불호를 외우며 끼어 들었다.
"아미타불.. 이는 마땅히 대소림이 맡아야 하는 것이오."
단목경이 눈에 불을 켰다.
"장문인의 말에는 어폐가 있소. 어째서 대소림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오. 이는 반드시 우리 단목세가가…"
일순, 천도진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무량수불… 이 일은 개인적인 원한과 연결지어 선 안될 것이오. 그러니 당연히 우리 무당이…"
그는 단목경의 아들이 표리천영에 의해 팔이 끊어진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단목경은 얼굴을 붉히며 열을 올렸다.
"장문인, 어째서..?"
이때,
"…"
표리천영의 수심에 찬 시선은 그들의 얼 굴을 흩고 지나갔다. 구파일방과 무리세가의 가주들과, 그밖의 군소 방파들의 주인들과 무림의 명숙들… 그들은 지금, 모두가 자신의 목을 탐내는 것이었다. 표리천영의 입가에 얼핏 자조의 웃음이 스쳤다.
(후후.. 어쩌면 그것도 영광이겠지…)
그는 군웅들 쪽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순간,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검모후 금월나경… 그녀가…?)
수만에 이르는 군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검모후 금월나경이 보였던 것이었다. 검모후 금월나경, 여왕천미루에서 표리천영과 뜨거운 관계를 맺었던 여인… 정(正)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 겠다고 떠난 여인이었다. 한데,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야위었으며 슬픈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검모후…)
그는 차마 그녀를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저… 들은…?)
표리천영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걸인(乞人), 그들은 중상을 입은 듯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뿐이랴. 그 중 하나는 팔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얼굴까지도 형체를 알아보기 불가능 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데,
(왠지 눈에 익다… 누굴까? 원수…? 아니면…?)
표리천영은 그러다가 문득 실소를 터뜨렸다.
(후후… 하나 그것이 다 무슨 소용 이 있는가? 부모님의 한(恨)도 갚지 못한 채 죽을 놈이…)
그는 쓸쓸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문득, 한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났다.
(어머니…)
어머니! 그녀가 이렇게 한없이 그리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때였다.
"비켜라! 맹주님 행차시다!"
소리에 이어 돌연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
"맹주님이 시다!"
"신비천녀께서도 타고 계신다!"
"와… 아…!"
수많은 사람들이 양 옆으로 쫙 갈라지며 하나의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 사이를 뚫고, 두두… 두두두… 한 대의 팔두마차(八頭馬車)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은빛을 번쩍이는 화려한 마차, 그 위에는 정천(正天)이라고 묽게 쓰여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마차의 주위에는 십팔명의 위사가 호의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는 표리천영이 있는 중앙의 공지에 이르러 멈추었다. 십팔 인의 위사들은 문 앞으로 나란히 도열한채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덜컹! 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나타났다. 순간,
"아…!"
중인들은 탄성을 토해내었다. 두 여인, 하얀 면사를 쓴 두 여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향긋한 방향만 맡아도 사지가 후들거렸다. 면사를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갸름한 얼굴의 윤곽과, 그녀의 쭉 빠진 몸매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늘씬 한 키에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몸매는 중인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천상오미(天上五美)…! 그 명성은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먼 발치에서라도 본 적이 있었던가?
"…!"
"…!"
중인들은 그녀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서 저 마다 목이 빠지도록 고개를 쳐들었다. 두 여인… 모두 백의(白衣)에 면사를 걸쳤으나 중인들은 두 여인을 구분할 수 있었다. 신비천녀는 한손에 비파(琵琶)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십전성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표리천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때였다. 단목경이 그녀에게 다 가가며 볼멘 소리로 물었다.
"맹주, 저놈을 무영초객에게 넘겨주는 의도가 무엇이오?"
팽호 또한 지지 않고 나섰다.
"그렇소. 그건 천부당 만부당한 처사이오."
천각대불사마저도 나직이 불호를 외우며 끼어 들었다.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맹주, 무림의 공적을 단죄하는 것은 마땅히 정천혈맹에서 맡아야 하는 것이오."
천도진인도 천각대불사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천각대불사의 말이 지당한 듯 하오이다. 맹주."
신비천녀는 아무런 말도 않고서 사면초가에서 서 있는 십전성녀를 주시햇다. 한데, 십전성녀는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사실, 그녀는 정천혈맹의 맹주라는 사실 그 자체에 짙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
던 것이다. 십전성녀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를 단죄할 수 있는 인물은 무림에 대해 그만큼 공원을 한 동기있는 자라야 마땅할 것입니다."
"…"
"한데, 여러분은 마천루(魔天樓)가 창궐할 때에는 숨을 죽이고 있더니 이제 마천제황 이 쓰러지자 그를 짓밟으려 하는군요."
십전성녀는 잠시 말을 끊고는 중인들을 흩어 보았다. 이어, 탄식처럼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도 마천제황을 죽임으로 인하여 얻어질 작은 명예에 대한 허영심 때문에… 아직도 할 말이 있으신가요?"
"…"
중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나, 그들의 표정에는 아직도 불만이 엿보이고 있었다. 십전성녀는 중인들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본맹은 마(魔)의 온상이었던 마천루(魔天樓)의 제황을 단죄함으로 인하여 전 무림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합니다."
그녀의 음성은 별로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산제일봉 전역에 울려 퍼졌다.
"금후 무림은 오늘의 일을 거울 삼아서 차후로는 이러한 마(魔)의 무리가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할 줄로 압니다."
십전성녀는 말을 끝마치고, 표리천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천제황, 할 말이 있나요?"
표리천영은 고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무영초객은 어디에 있소?"
신비천녀가 앞으로 나서며 대신 대답했다.
"마차 안에 있어요."
표리천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주시하며 물었다.
"내 아내들을 죽이라고 명한 사람 은 누구요?"
"아내들을…?"
십전성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신비천녀를 주시했다. 허자, 신비천녀는 그녀의 따가운 눈길도 아랑곳없이 태연히 대꾸했다.
"그래요. 그건 제가 명령한 거에요. 또 무슨 할말이 있나요?"
표리천영의 두 눈은 일순 불을 뿜어낼 듯 하였으나 이내 허탈한 자조의 기색으로 바뀌었다.
"없소… 후후후… 그대들 같은 위선자에게 내가 무슨 할말이 있겠소?"
그의 말이 끝 나도록,
(이… 이건 잘못 된거야! 뭔가…)
십전성녀는 넋을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후회와 미련, 아쉬움 등이 뒤얽힌 묘한 표정이었다. 이때, 신비천녀는 그러한 십전성녀를 힐끗 주시한 후 마차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영초객, 시작하세요."
마차의 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무영초객이 나타났다. 일순,
"…!"
"…!"
표리천영과 무영초객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탈한 시선과 무심한 눈, 하나, 두사람은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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