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항산맥(太行山脈)
2015. 10. 30. - 11.3. 금계
톱머리에 다다르자 방파제 밑에 차들이 줄줄이 서 있다.
“이게 다 낚시질 나온 사람들이여.”
“그래요? 그럼 잠시 구경하고 갑시다.”
차를 톱머리 어귀에 세우고 방파제로 걸어간다. 처남이나 나나 낚시질을 끔찍이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낚시질을 이십 년 전에 접었고 처남은 아직도 현역이다.
지난 봄철 나는 처남을 따라 장흥 관산으로 낚시질을 갔다. 이십여 년 만에 찌르르 손맛을 봤다. 그 때의 긴장감을 잊을 수 없다.
처남은 꾼들의 바구니를 조사하기 위하여 아래로 내려가고 나는 둑길 위에서 사진을 찍는다.
“많이 잡었습디여?”
“아직 바구니도 물에 안 담궜데.”
40년 전에 처남은 목포 시외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중화요리 집을 차렸다. 그 때가 호시절이었다. 식사 때면 넓은 식당 가득 손님들이 넘쳐났다.
중화요리 집을 운영한 인연으로 처남은 목포요식업조합 지부장을 꽤 오래 하다가 전남 지회장을 또 꽤 오래 했다. 그 인연으로 시군 지부장들과 친목 모임 ‘한마음회’를 만들었다.
2년 전 나는 ‘한마음회’를 따라 장가계를 구경했다. 이번에는 두 번째로 ‘한마음회’를 따라 태항산 구경 길에 나섰다. 나는 태항산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가서 보니 태항산은 그냥 산이 아니었다. 광대한 산맥이었다.
북경 가는 아시아나 항공을 탔다. 금호그룹에서 운영하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면 나는 늘 세월의 아이러니에 쓴웃음을 짓는다.
우리 어렸을 적 국민학교 앞 신작로에는 광주여객 코빵뺑이 버스가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질주했다. 그 전 버스들은 코가 불쑥 튀어 나왔는데 버스 앞면이 무 잘리듯 싹둑 잘린 신형차를 코빵뺑이차라고 불렀다. 앞 버스의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금성여객 코빵뺑이 차가 나타나 광주여객 꽁무니를 바짝 뒤쫓아 갔다.
결국 금성여객은 무너지고 광주여객은 전남의 도로를 독점해서 승승장구했다. 광주여객은 금호고속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금호고속은 아시아나 항공을 설립하여 대한항공의 독점을 깨뜨렸다. 지상의 도로를 독점한 회사가 하늘의 독점을 무너뜨린 셈이었다.
아시아나 여객기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의 섬과 바다로는 늦가을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려왔다. 나는 가만히 맘속으로 ‘돌아오라 소렌토’를 흥얼거렸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사무쳐서 잊을 길이 없어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나는 지금 비행기 위에서 늦가을 오후의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다도해 섬과 바다를 구경하며 감탄하고 있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소렌토로 돌아갈 수 없다. 어차피 인생은 빛살무늬의 책갈피에 끼인 한 페이지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 것.
틀에 박힌 일상에 얽매인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 나는 해직되고서야 깨달았다. 교단에 서있을 적에는 기껏해야 홍도로 직원 여행 간 것이 전부였는데 전교조 탈퇴 않는다고 해직 당한 덕분에 안좌도, 장산도, 비금도, 도초도, 임자도....... 다도해의 여러 섬들을 두루 돌아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구름을 뚫고 바다로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십 몇 년 전 나는 저 섬의 어느 백사장 구석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4년 반의 해직은 밋밋한 일상을 탈출하는 멋진 여행이었다.
북경 공항에 내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정거장으로 가서 신향(新鄕) 가는 고속열차를 두 시간 넘게 탔다. 내가 살아생전에 철의 장막이 걷힌 크레믈린 궁을 구경하고 죽의 장막이 걷힌 천안문을 구경할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오늘날 중국은 몇 십 년 전 우리가 불렀던 군가 속에 나오는 ‘무찌르자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다.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유인우주선을 띄워 올리고 올림픽을 개최하고 고속철도를 속속 건설 중이다. 벌써 고속철 기술을 외국에 팔아먹고 있단다. 삼성이 세계를 상대로 가전제품이나 핸드폰을 팔아먹을 날도 얼마 많이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가이드 후 씨. 연변족 조선인 3세. 조상의 고향이 안동이라던가. 북경대학은 아니고 북경에서 대학을 나왔단다. 패키지여행을 다니면 가이드가 갑이고 관광객이 을이다. 가이드를 잘 만나고 가이드를 잘 사귀어야 한다. 고속열차가 어느 정거장에서 멈추어 선 2분 동안 가이드와 나는 플랫폼으로 나와 부지런히 담배를 빨아댔다.
가이드 말로는 중국 사람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등소평이란다. 인민들 밥술깨나 뜨게 만들어준 사람이 등소평이기 때문이란다. 건국 초기에는 나라의 기틀을 잡은 사람 다음으로 기틀을 다지는 사람이 필요하다. 마오쩌뚱은 기틀을 잡은 사람이고 덩샤오핑은 나라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다. 공산주의는 이제 일당독재의 정치체제로만 남아 있다. 속살을 들여다보면 미국보다 훨씬 지독한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중국인들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일이기도 하다. 검정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등소평의 지론이 오늘날의 중국을 일으켜 세웠다.
가이드가 중국 남자들의 비참한 삶을 소개해준다. 하루 종일 일터에서 일하다가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그날 먹을 것을 사가지고 귀가한다. 부인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남편은 행주치마를 입고 요리를 시작한다. 부인은 이것이 맛없느니 어떠니 트집을 잡는다. 식사가 끝나면 발 씻을 물을 대령한다. 설거지가 끝나면 부인의 발을 씻겨준다.
하이고!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겄다. 하기야 우리나라도 요즘은 나처럼 집안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가는 이혼을 수백 번 당해야 할지 모른다.
중국에서는 운전 면허증을 따려면 세 대학을 나와야 한단다. [빵빵대] [들이대] [돌려대]. 아닌 게 아니라 버스를 타고 다녀보니 빵빵대지 않고 들이대지 않고 날쌔게 돌려대지 않으면 운전이 불가능하게 생겼다.
한 번은 술이라도 한 잔 걸쳤는지 맛이 간 가이드가 꽥꽥 노래를 불러 젖힌다.
“우리 집에 테레비 샀어요. 엄마도 보지요, 아빠도 보지요. 우리 집에 침대 샀어요. 엄마도 자지요, 아빠도 자지요.”
태항산맥의 남쪽 언저리에 자리한 도시 신향(新鄕)의 천복온천대주점(天福溫泉大酒店)에서 두 밤 묵었다. 호텔마다 주점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중국 사람들은 여관 잠자리 들기 전에 반드시 술을 마셨던가 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모텔이지 값비싼 호텔에서 자본 일이 한 번도 없다. 또 국내에서는 안마를 받아본 일이 한 번도 없다. 발리에서, 파타야에서, 그리고 중국 여러 곳에서 안마를 받았다. 아방궁에 든 진시황처럼 외국 여인들의 나긋나긋한 손길에 몸뚱이를 맡기고 깨끗한 대형호텔로 들어가 샤워하고 코 골고 대형 벽화가 그려진 식당에서 입에 맞는 음식을 골라 담아서 아침 배를 채운다. 중국 여행 나가면 안마 받는 재미, 호텔에서 거드름 피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천복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구련산(九蓮山)으로 갔다. 연꽃이 아홉 송이 핀 모양이라던가. 깊은 골짜기가 탄성을 자아냈다. 산이 솟아오른 게 아니라 침식작용으로 깎여서 봉우리와 골짜기를 빚어냈단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묻는다.
“태항산 어떻게 생겼습디여?”
“응,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고 이리 와서 사진 한 번 보시게나.”
“아따, 좋소 잉?”
십여 년 전에 아내랑 장백산맥 백두산도 구경하고 두어 해 전에 계림 장가계도 다녀왔지만 다른 곳은 다른 곳대로 좋고 태항산은 태항산대로 좋다. 계림처럼 미끈하게 빼어난 것도 아니요, 장가계처럼 뭉툭하면서 웅장한 것도 아니지만, 아름답다기보다는 조금 거칠고 제멋대로고 황량한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씩씩하고 거칠 것 없이 시원시원하게 흐르는 산세가 호방하고 현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월출산처럼 산봉우리 몇 개가 들판에 떠 있는 것이 아니요 산의 중첩과 포개짐이 끝도 갓도 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行은 가다, 다니다 할 때에는 ‘행’이고 줄기일 때에는 ‘항’으로 읽는단다.
산동성 산서성과 호북성 호남성 경계에 남북으로 걸친 태항산맥은 길이 600킬로, 폭 200킬로에 달하는 대형 산맥으로 거의 남한과 맞먹는 면적이 아닐까 싶다.
구련산 서련사(西蓮寺).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향불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다.
오른쪽이 장흥에서 식당을 한다는 ‘한마음회’ 재정부장. 이번 여행을 준비하고 추진한 담당자란다. 외모부터 남달리 강인하고 든든한 느낌을 준다. 장가계 여행 때는 봉우리 하나를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다리를 절뚝이는 나를 걱정스럽게 보살펴주었다. 불교를 신실하게 믿는가 보다.
가운데가 강진에서 식당을 한다는 ‘한마음회’ 총무. 이번에 영암군 행사 관계로 불참한 회장을 대신하여 일행을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날더러 형님 형님하면서 미안할 정도로 살갑게 굴었다. 사람에게 다가서고, 사람들을 아우르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아리고, 남을 잘 배려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지인 중에 스님도 많고 신부님도 많다 한다. 앞으로 ‘세계 대통합 종교’ 교주를 한다면 걸맞을 것 같았다.
<다음호로 이어짐>
첫댓글 여의치 못해 잠시 접어둔 여행길
함께한 듯 합니다.
꼭꼭 들어와 들여다 보고 싶습니다.
바쁘단 이유로 게으른 여행길
언제고 나비처럼 날고 싶어요.
착한 사람과 세 가족이면 좋겠다 싶었던
상상의 여행도 아직은 숙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