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녀 클라라 >

1. 프란치스칸 성인록
◈ 8월 11일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동정, 2회 > 축일...ofmkorea 홈피
· 성녀 클라라는 1193~4년에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직 젊은 나이에 그리스도께만 속한 사람이 되기 원하여 같은 아시시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따라 복음적 이상을 살기 위하여 세속을 버렸다.
성 프란치스코 그의 자신이 그녀에게 거친 수도복을 입혔고,
성 다미아노의 작은 성당곁에 클라라의 동생 아녜스가 들어왔고, 아시시의 다른 여러 고귀한 젊은 여성들이 들어온 작은 거쳐를 마련했다.
어머니와 여동생, 조카들도 뒤따라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생전에 이미 많은 수도원이 국내외에 생겨나 성녀와 같은 생활양식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여인들” 후에
클라라회라고 불리우는 프란치스코 2회가 탄생되었다.
클라라는 철저한 가난과 관상생활 안에서 평생을 성 다미아노에서 살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매들을 돌보았고 쉬지 않고 일했으며 온 영혼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성체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1240년과 1241년 아시시를 사라센으로부터 보호했다.
오랜 병상 생활 끝에
1253년 8월11일 산 다미아노에서 선종했고,
무덤은 Santa Chiara에 있다. 1253년 세상을 떠났고, 교황 알렉산드로 4세께서 시성하셨으며, 그녀의 시신은 그녀를 위해 마련된 아시시의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성녀 클라라 탄생 800주년'에 쓰신 서한 > ...ofskorea 홈피
“두 분 성인(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은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프란치스칸 본래의 이상을 증거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성녀 클라라와 자매들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보속의 관상생활로
복음을 생활화함으로써 서로를 보완하였습니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 성 프란치스코 안에서 자신을 보고 스스로 성인을 반사한 성녀였지만,
성녀에 대한 생각과 그 기도에 대한 확신이 성인에게 용기를 주었듯이
같은 영으로 결합된 성녀의 가난과 순결의 빛은
아시시의 가난뱅이의 얼굴을 더 밝고 따뜻하게 비추어 주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서로의 복음적 소명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성녀 클라라를 새로이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피합니다.
이는 교회의 삶과 생존에서 아주 중대한 안건입니다.”
ㅡㅡTㅡㅡ
2. 가톨릭 성인록
성인명 : 클라라(Clare)
축일 : 8월 11일
성인구분 : 성녀
신분 : 설립자
활동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연도 : 1194-1253년
같은이름 :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 T ♧♧♧ T ♧♧♧♧
성인설명 :
·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귀족인 오프레두치오와 오르톨라나디 피우미의 딸로 태어난 성녀 클라라
(Clara)는 용모도 뛰어나서 12세 때 혼인을 서두르는 부모들의 강권을 물리쳤으며,
1212년 사순절 때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고 수도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녀는 성지 주일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서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자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바스티아 근방 성 바오로(Paulus)라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그녀가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므로 끝까지 항거하다가,
산 안젤로 디판초로 옮겼는데
그 얼마 후에 15세 된 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12명의 장정을 무장시켜 아녜스나마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의 힘에 의해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성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들을 위한 생활양식을 써줌으로써 가난한 부인회가 탄생된 것이다.ㅎ 이 회가 잉글랜드(England)에서는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클라라회이다.
클라라는 1215년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얻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애긍에 의존해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클라라는 이 특권을 유지하는데 늘 고심하였고,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었다.
클라라회의 수녀들은 당시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하였다.
그러나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 그녀는 약 40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였지만 늘 건강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클라라회는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보급되었고 교황과 추기경 및 주교들의 자문 역할로써 떨친 그녀의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기적으로 더욱 영광스럽게 되었는데,
1241년 그녀의 기도로 프레데릭 2세의 난폭한 군인들로부터 아시시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253년 8월 11일에 아시시에서 운명하였는데,
2년 후에 곧바로 시성되었다.
클라라는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고 문장(紋章)은 '성체 현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