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여행
대구초등학교에서 100주년 기념 체육대회를 한다고 한다
100주년 이라.. 약간은 감회에 젖는다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내려오라고 한다 물회를 준비했다고 그래!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 태어난 고향으로 추억여행을 가는거야
마치 “바람과 함께사라지다“에서 스카렛이 고향인 타라로 돌아가서 힘을 얻듯이 타향살이에
지친 피곤함을 내가 태어난 고향에서 따뜻한 정으로 풀어보는거야
새벽에 알람을 해두고 잤지만 새벽3시부터 1시간간격으로 일어나 시계를 보고 다시 자곤했다 왜일까? 소풍가는 초등학생처럼 잠을 못이루지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대구로 향한다 드디어 대구초등학교에 들어섰다 운동장이 왜이리 작아 보일까 역시 듣던대로 혹불이 없구나 그렇지 여기에 가건물이 있었지 지금은 없지만 이곳이 초등학교 1학년을 보낸 곳이었을 거야 초등학교 1학년에는 생각나는 여자짝이 있었다 참 착하고 말이 별로 없었다는 기억이 난다 내심 내마음에는 편한 아이였다 관심의 표현이었는지 내가 여러가지 괴롭혔던 모양이다 책상에 선을긋고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자나 연필등도 빼앗아 짝은 매우 힘들었던지
어느날 야외수업 그러니까 가건물옆 정원에서 수업을 하는데 내 구두가 없는것이 아닌가
수업도 참석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찾는데 내짝의 가방속에 내 구두 한짝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얼마후 하교를 하려는데 내짝이 나를 이상한 곳으로 이끄는것이 아니가
아니 이럴수가 그곳에는 중학생정도 되어 보이는 내짝의 오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 내동생 괴롭히면 혼날 줄알아”
갑자기 머리가 몽롱하며 충격속에 “네”하고는 기죽어서 집으로 돌아가 누구에게도 아무말 하지못했다
어느날 시험지에 반에서 좋아하는 친구를 적어라는데서 내짝의 이름을 적은것을 보면
내면으로 좋아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 얼굴이 예쁘게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여학생이 내짝이 되었다 나는 그때 그리 성적이 좋지 않아서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부끄럼을 많이 탔다
그때는 검소하셨던 어머니가 부러진 크레용을 깡통같은 상자에 담아서 다니게 하였다
미술시간에 색칠을 하려는데 찾는 색의 크레용이 없어서 용기를 내어 내짝에게 이야기했다
“노란색 크레용 좀 빌려도”
한참 쳐다보던 내 짝이 하는 말 “너거 아버지는 크레파스도 안사주나?” 순간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색이나 들고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집에와서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생긴일을 이야기 하였더니 은성문구사에가서 그때 가장좋은
2단 왕자그래파스를 사주셨다 그기에는 금색과은색도 있었다
그 다음 미술시간에 나는 개선장군처럼 왕자크래파스를 손에 들고 등교를 하였다
내 짝은 수업시간에도 “한번 보자, 한번보자”하고 나를 재촉했다
나는“안한다, 안한다”하고 심통을 부렸다
대구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간다고 요새 말하면 집에서 조기교육도 시키고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구두도 사주고
무릎까지 오는 타이즈를 입혀서 보냈으나 초반기에는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던가 보다
그렇지 저기에는 수양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렇게 더운 초등학교때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삼촌이 사는 태백산 줄기에서 보냈다
버스를 타고 내려 걸어서 10리는 들어가는 곳에 20여호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중에 삼촌집은 마을과 마주보이는 산중턱에 성처럼 버티고 있었다 주위에는 감나무가 둘러싸고 산 밑으로는 시냇물이 흘러내렸다 그곳은 나의 마음의 고향이 되었고 사촌들과 소를 먹이러 산을 뛰어다니고 머루랑 칡등을 먹으면서 약해졌던 몸을 단련한곤 했다
낮에는 아치를 이루는 아카시아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그 속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큰 바위에 누워서 책을 읽곤했다 나의 부모님은 방학때가 되면 문학전집을 가득히 채워서 이곳으로 오게했다 초등학교시절을 이곳에서 나의 자연에 대한 정서와 건강이 단련되고 지금도 산을 잊지못하여 한달에 한두번이면 전국의 산을 찾는다.
아버지는 어릴때 나에게 강한 몸과 마음을 전수해 주시려고 노력하셨던것 같다
공부는 스스로 하게하고 자연속에서 자라나게 자연학습을 시킨셈이지
운동회가 한창 무러익어간다 나는 잠시 학교를 벗어나 내가 살던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대구는 예전에 느꼈던것 처럼 아스팔트가 녹아내릴듯한 뜨거운 했빛이 내리쬐고 있다
내가 살던곳은 공터로 변해 있었다 그렇지 여기에 대청마루가 있었지
어릴적의 우리집은 큰 집에 속했다 특히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어머니는 나를 10살때부터
절에 다니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집에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밥을 먹여보내고
쉬어가게 했던 기억이 난다 인삼장수와 건어물장수는 우리집에 들러 밥도먹고 잠도
자고 가곤했다 아침이면 거지들이 우리집앞에 줄을 설때면 어머니는 누구보다 먼저
더운밥을 주곤하셨다 이런 주는 기쁨을 보여주며 나에게 종교가 뿌리깊게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잡게 했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 흰 목련을 떠올리게 한다
한밤에 달빛 피어 있는 목련은 한참동안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지금은 칠곡군의 공원묘원에 모셔져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이지만
돌아가신후에 칠곡에서 돌아오는 길가에 흰목련이 피어있어 나를 마음을 흔들었다
아마 대구의 시화가 목련이던가 학교로 돌아오는길에 내가 다녔던 절을 찾아보았다 크게 증축을 하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초반에 그렇게 신통치 않았던 나의 초등학교시절은 부모님의 사랑과 교육덕분에 고학년으로 가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키도 크고 건강한 학생으로 변화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에 성공하신 것이다.
고향은 추억이 있고 따뜻한 정이 있기에 누구나 찾아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키워준 부모님의 고향이 아니던가 과연 나의 아들딸에게
이런 사랑으로 교육을 시킬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얼굴과 이름의 기억이 아련하지만
우리들은 고향의 같은 초등학교 동창라는 것만으로도 순수함과 정을 느끼게하는 친구가
있어서 더 좋은 하루였다.
대구초등학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구초등학교에 재직하셨던 부모님께 이글을 바칩니다.
대구초등학교 63회 졸업생 방혜성
첫댓글 모교 100주년의 역사와 더불어 부모님의 사랑을 잘 그려준 글이 눈물겹다. 우리들의 부모님 얼굴이 눈 앞에 스치운다. 짙은 그리움이 베어나는 혜성의 글을 백주년 기념지에 올려 동기들이 모두 공감하며 즐거워지길 기대한다.
아~~감동의글에 향수에 젖어 드는구나... 부모님이 은사님이셨구나? 방혜성아? 화이팅~!!
혜성이가 이렇게 센스있는 친구였구나, 항상 조용한 미소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