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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05
#. 혜진의 집 거실
피아노 연주곡이 단조롭게 흐르고 있다.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진공청소기. 벽에 걸린 그림.
혜진 : ...
고개를 갸우뚱 바라보고 있다. 좀 삐뚤어졌다.
그림을 잡고 균형을 맞추는 혜진. 다시 본다. 이번엔 반대쪽이 기울었다.
심통을 부리듯 손바닥으로 그림을 툭 쳐서 아예 삐뚤게 걸어버리는 혜진. 그리곤 싱긋 웃는다.
돌아서는데 그 눈에 들어오는 거실 커튼.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팔랑이는 커튼.
#. 동. 나리 나래의 방 안
그림이 그려져 있는 노란색 커튼.
#. 동. 부엌
역시 열려있는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팔랑이고 있는 커튼.
#. 동. 안방
문에 기대 방안을 바라보는 혜진. 창문을 가린 커튼.
혜진 : (소리) 핑크색으로 바꿔 버릴까? 봄인데 뭐, 밝고 좋잖아. (히죽 웃으며) 섹시하고.
#. 동. 거실
소파에 벌렁 누워버리는 혜진.
혜진 : (소리) 그림두 모두 바꾸고 (벌떡 일어나서) 가구두 다 바꿔버려? 그럼 좀 나아질까?
#. 동. 세탁실
세탁감을 세탁기 안에 마구 처넣는 혜진.
세탁기 문을 닫고 스위치를 콱 누르는 혜진.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세탁기.
스위치 조절을 다시 하는 혜진. 멈췄다 돌아갔다 요란한 시그널 소리.
미친 듯이 스위치 버튼을 눌러대는 혜진.
#. 동. 거실
낡은 엘피판이 돌아가고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흐느적거리는 노래 소리.
#. 동. 부엌
찻잔 우두커니 앉아있는 혜진.
“이게 웬 전축이야?”
#. 동. 거실 (회상)
전축 옆의 엘피판의 겉표지를 살펴보고 있는 동원.
혜진 : (소리) 인터넷 쇼핑몰에서 샀어요. 옛날 전축이랑 판들이 있다고 해서.
동원 : 이 껍데긴 다 갖다 버려. 곰팡이에 이거 원 더러워서.
자켓 안에서 판을 꺼내는 동원.
혜진 : (오며) 조심하세요, 여보. 그거 귀한 판이에요. (동원의 손에서 판을 살짝 뺏으며) 들어 보실래요.
판을 전축 위에 올려놓는 혜진.
동원 : (자켓 표지 보며) 빌리홀리데이?
직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빌리홀리데이의 노래가 흐르기 시작한다.
혜진 : 기억 안나요?
동원 : 뭐?
혜진 : 당신이 날... 그렇게 하던 날.
손가락으로 자빠뜨리는 시늉하는 혜진.
눈만 껌벅이는 동원. 베시시 웃는 혜진.
혜진 : (정색) 기억 안나요?
동원 : 뭐?
혜진 : 신주쿠의 재즈바에 갔다가.
생글거리며 동원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어리광부리듯 히프를 흔들며 브루스를 추는 혜진.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와 노래를 흉내 내며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며 춤춘다.
혜진 : (노래처럼) 난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주고 싶었어요. 그것이 내 인생이 끝이라고 해도...
그래요. 그날 밤 나는 너무나 황홀했었답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지요...
#. 동. 부엌 (현실)
가만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혜진. 거실에서 들려오는 빌리홀리데이의 노래.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두 손으로 감싸 쥐는 혜진. 문득 그 눈가에 치솟는 물기.
혜진 : (소리)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여자였다. 내가 다 망쳐버린 것일까.
그까짓 것.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잖아. 세상 남자들의 반이 넘게 바람을 피우며 산다는데.
#. 어느 마트 안
카트에 닥치는 대로 식료품을 집어넣고 있는 혜진.
코너를 지날 때마다 쌓이는 식품들. 이윽고 산처럼 쌓인다.
그것도 모르고 식품을 집어 카트 위에 올려놓는 혜진. 그 바람에 위에 겨우 쌓여있던 물건 몇 개가 바닥에 떨어진다.
얼른 집어 다시 카트 위에 올려놓는 혜진. 서두르는 바람에 위에 놓였던 물건들이 한꺼번에 밑으로 떨어진다.
당황해서 미친 듯이 밑에 떨어진 물건들을 집어 카트 위에 올려놓는 혜진.
두 손으로 여기저기 쑤셔 넣고 물건의 균형을 취하려다가 물건들이 다시 와르르 카트 밖으로 떨어져 내리자
그만 울음이 터져 버리는 혜진.
#. 혜진의 집 부엌 (밤)
포크와 나이프로 식탁을 두드리며 합창하는 나리와 나래. “스, 파, 게, 티. 스, 파, 게, 티.”
혜진 : (돈까스 튀기며) 미안해. 엄마가 깜박 잊고 스파게티 소스를 안 사왔어.
나리 : 아침에 약속했잖아. 저녁에 스파게티 해 준다구. 그치, 아빠.
동원 : (웃으며) 맞어. 엄마가 순 엉터리다. 그치?
나리 : 그래.
혜진 : (돈까스 가져오며) 야, 맛있겠다. 엄마가 만든 특제 돈까습니다.
나래 : 스, 파, 게, 티.
포크와 나이프로 식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나래.
혜진 : 엄마가 내일 해 준다고 했잖아. 스파게티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짜증을 내는 혜진.
#. 동. 나리 나래의 방 안 (밤)
잠든 나리와 나래.
혜진 : ...
마음이 아프다. 이불 잘 덮어주고 나리와 나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심 밖으로 나가는 혜진.
#. 동. 거실 (밤)
혜진 나온다.
TV를 음소거로 만들어놓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TV를 끄고 리모콘을 옆 소파에 던지는 동원.
동원 : 왜 애들한테 짜증이야.
혜진 : 애들한테 짜증 낸 거 아녜요.
동원 : 그럼? (본다)
혜진 : ...
동원 : 나야?
혜진 : 나한테 짜증이 나서 그래요.
동원 : (내지르듯) 그 얘긴 끝난 거잖아. (벌떡 일어나 서재로 가는데)
혜진 : 무슨 얘기요.
동원 : ...
혜진 : ...
바라보다 무너지듯 숨을 내쉬고 부엌으로 가는 혜진.
동원 : 하자구 그럼.
혜진 : (멈춘다)
동원 : 어디서부터 할까?
혜진 : 그만 두죠.
부엌으로 들어가는 혜진.
#. 동. 부엌 (밤)
싱크대로 가서 수돗물 확 트는 혜진. 설거지 시작한다.
동원 : (와서) 누굴 좋아하게 됐는데.
혜진 : (고개 반 쯤 돌려 보며)
동원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혜진 : (수돗물 잠그고 돌아서며 터진다) 거기서부터 하면 안 되죠.
동원 : (흠칫)
혜진 : ...
울먹이며 다시 돌아서 수돗물 튼다.
동원 :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혜진 : (난폭하게 그릇 딸그락거리는)
동원 : 아주 처음부터 시작할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혜진 : ...
싱크대 움켜잡고 고개 푹 숙이는 혜진.
동원 : 말해봐. 언제부터 시작하고 싶은 건지.
혜진 : (고개 숙인 채) 당신 나 사랑해요?
동원 : (이죽거리듯) 뭘 해?
혜진 : (돌아서며)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매달리니까... 내가 가엾어서 그래서 결혼한 거냐구요!
동원 : ...
가만히 바라보다 참는다는 듯 한 숨 푹 내쉬고 거실로 간다.
#. 동. 거실 (밤)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벌렁 누워버리는 동원.
부엌 수돗물 소리 그치고 혜진 들어온다.
혜진 : 얼마나 깊은 관계예요?
동원 : ...
흠칫해서 혜진 쪽 보다 팔로 손등을 가리고 반듯이 누워버리는 동원.
혜진 : 네, 거기서부터 시작해요.
동원 : ...
혜진 : 말해봐요.
동원 : 그래서.
혜진 : 뭐가 그래서예요.
동원 : (벌떡 일어나며 버럭) 그래서 같이 바람을 피웠다 그거야.
흥분해서 부르르 떨던 동원이 당황해서 애들 방 쪽을 본다.
나리가 졸린 눈 부비며 방문 앞에 서 있다.
혜진 얼른 달려가 나리를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 동. 서재 안 (밤)
들어와 컴퓨터를 모두 켜는 동원.
#. 동. 나리와 나래 방안 (밤)
바닥에 앉아 나리를 꼭 껴안고 얼굴을 부비고 있는 혜진.
혜진 : 미안해, 나리야. 엄마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래. 미안해 나리야.
#. 동. 서재 안 (밤)
화면마다 해외 증권뉴스가 진행 중이다. 그 화면에 혜진의 모습.
동원 : 당신 나하고 이혼하고 싶어?
혜진 : ...
동원 : 아냐, 그래?
혜진 : (머뭇거리며) 당신은요.
동원 : 내가 묻고 있잖아 당신한테.
혜진 : ... (꿀 먹은 벙어리)
동원 : (한 숨 푹 쉬더니) 나중에 얘기하자. 요즘 회사 일 골치 아퍼.
혜진 : (겨우)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동원 : 옮길지도 몰라.
혜진 : (놀란 척) 왜요? 당신 덕분에 먹고 살면서.
동원 : 더 큰 데로 옮겨볼까 그래.
혜진 : 오래요? 더 큰 데서.
동원 : 집이나 옮길까.
의자에 몸을 눕히며 두 팔로 머리 뒤에 깍지 끼는 동원.
혜진 : 스카우트... 같은 거 받은 거예요?
동원 : 애들한테 짜증부리지마. 나이가 몇인데.
다시 컴퓨터 두드리는 동원. 바라보고 서 있는 혜진.
동원 : (고개 돌리며) 또 왜.
혜진 : 한 가지만.
동원 : 나중에 하래잖아.
다시 컴퓨터.
혜진 :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요.
동원 : ...
혜진 : ...
동원 : (한 숨 내쉬고 돌아앉는다) 사랑한다면 뭐.
혜진 : 그렇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데.
동원 : (막으며) 정말 생겼어?
혜진 : ...
동원 : 참 이 여편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걸 내가 믿겠냐?
혜진 : ...
동원 : 어느 여편네가 나 바람피웠다고 실토를 하겠냐. 당신 나 약 올리려고 해 본 소리 아냐, 안 그래?
혜진 : 그래서... 화 안 내는 거예요?
동원 : ... (뭐라고 하려다 가만히 보는)
혜진 : 사랑하지 않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든 말든 바람을 피웠든 말든 상관없다는 게 아니고 말 같지 않아서... 그래요?
동원 : (한 숨 푹 쉬며) 또 시작하자는 거야?
혜진 : 알고 싶어서 그래요.
동원 : 뭘.
혜진 : 날 사랑해서 이혼하자는 말 안하는 거냐구요.
동원 : 그만해라 좀.
혜진 : 좋아하는 여자 있잖아요, 당신은.
동원 : ...
혜진 : ...
동원 : 그걸 알고 싶은 거야?
혜진 : ...
동원 : 알아서 어떡하려고.
혜진 : ...
동원 : 알고 있네.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물어봐. 구질구질하게.
오히려 기가 막히다는 듯이 비웃고 있는 동원.
#. 동원의 새 사무실 안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 강 너머 강변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동원 : ...
바라보고 서 있다.
현필 : (소리) 책상을 창가로 옮길까요.
현필이 석환이와 책상을 들어 옮길 기세다.
주방을 정리하던 대진이 손짓한다.
대진 : 그 쪽엔 헬스기구 들여올 건데. (동원에게) 우리 회사 매니저 사무실엔 헬스기구들을 배치해 놓거든요.
회장님 방침이 그러세요. 사무실에서 운동하고 식사하고 샤워하고 낮잠 자고 밤두 세우고.
현필 : 죽여주네.
대진 : 옛날이 그리워질 거다. 대충대충 시간 때우던 때가.
컵과 그릇들을 부지런히 닦는 대진.
신중호 : (문 열고 얼굴 디밀며) 대충 정리했냐? (둘러보더니) 하형, 회장님이 좀 보자는데.
#. 동. 복도
신중호를 따라가는 동원.
신중호 : 당분간 눈총 꽤나 받을 거야. 몇 장이나 받고 왔는지 모두 궁금해 죽으니까.
#. 혜진의 부엌
혜진 : 당분간 매일 좀 와줬으면 좋겠어요.
파출부 : 저야 뭐. (웃어 보이는)
혜진 : 부탁 좀 할게요. (거실로 나가서) 참 아줌마 스파게티 만들 줄 알죠?
파출부 : 저번에 사모님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혜진 : 저녁때 해먹게... (하다가) 재료만 챙겨놔요. 내가 들어와서 만들게요.
파출부 : 네, 사모님.
혜진 나간다.
파출부 : 늦으시면 제가 대충 만들어 놓을까요?
대답 없이 현관으로 가는 혜진.
#. 동원의 새 회사 회장실 앞
안에서 나오는 신중호와 동원.
신중호 : 좋아하시네. (고개 짓으로 회장실 가리킨다)
동원 : (본다) ...
신중호 : 우리 회장님은 맘에 들면 말이 없으셔. 몇 마디 하기 시작하면 뭔가 못마땅하다는 뜻이지.
(동원의 어깨 탁 치며) 반은 현찰 반은 스탁 옵션 됐지?
또 한번 동원의 어깨 툭 치고 가는 신중호.
동원 : 고마워, 신형.
신중호 : 고마워 할 것 없어. 하형 빼와서 내 크레딧두 올라갔으니까.
손 흔들고 가는 신중호.
#. 애완견 미용실 앞
쇼윈도 안에서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하는 새끼 강아지들.
혜진 : ...
보고 있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더 난리치는 강아지들.
안으로 들어가는 혜진.
#. 동. 안
주인 : 어서오세요.
혜진 : 얘 종류가 뭐예요.
주인 : 시추요.
혜진 : 귀엽네.
주인 : 원래 시추는 점잖은데 얘는 까불이에요. 잘 안 짖어서 아파트에서 기르기 좋은 종류죠.
혜진 : 저흰 그냥 단독주택인데.
주인 : 그러세요. 마당 있고 그러면 좀 큰 개가 좋죠. 슈나우저나.
혜진 : ...
강아지 본다. 주인 카운터로 간다.
발딱 발딱 서 보이는 강아지. 손가락 흔들며 놀려보는 혜진.
“고 녀석 사실 거예요?”
천천히 돌아보는 혜진. 순간 숨이 멎는다.
다애 : 어디 보자.
강아지 한 손으로 집어 드는 다애.
다애 : 이쁘네 요놈. 아줌마, 얘 암컷이에요 수컷이에요?
주인 : (안에서 힐끔 보며) 암컷일걸요.
다애 : 아이구 이뻐라.
강아지를 볼에 마구 부비는 다애.
숨이 막힌 채 서 있는 혜진.
다애 : 얘 찍은 거 아니죠.
혜진 : ...
뭐라고 하려는데 말이 안나오고 마른 침만 삼키는 혜진.
다애 : 고맙습니다.
혜진에게 웃어 보이고 카운터로 간다.
다애 : 요 녀석 내가 데려갈게요. 얘한테 필요한 것 좀 아줌마가 골라서 싸주세요.
떠벌리다 힐끔 뒤돌아보는 다애. 가게 문 열고 고꾸라지듯 밖으로 나가고 있는 혜진.
다애 강아질 안느라고 정신이 없다.
#. 커피숍
현필 : (눈치 보며) 고생 좀 하겠는데요. 회사 분위기가 찬 바람이 쌩쌩 부네요.
동원 : 남의 돈 몇 천억 움직이는데 거저먹겠어.
현필 : (바싹 디밀며) 얼마나 받으셨어요?
동원 : (기막히다는 듯)
현필 : (재롱부리듯) 부장님.
동원 : 받을 만큼 받았다.
현필 : 최고라는데요 부장님이. 스카우트 사상.
동원 : 그래?
현필 : 휴. 난 언제나.
동원 : (속주머니에서 봉투하나 꺼내 던진다)
현필 : (얼른 잡아들고) 이게 뭐죠?
동원 : 쪼그만 차 한 대 사라. 다음엔 집 사줄게 임마.
현필 : 아이구 부장님. (봉투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일어나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쎼쎼. 아리가토. 땡큐.
절을 해대는 현필.
웃기는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웃어대는 동원.
#. 거리
애완용 물건을 사들고 강아지 안고 가는 다애. 이뻐서 어쩔 줄 모른다.
#. 다애의 원룸 앞
오는 다애. 이층 계단으로 올라간다.
혜진 : ...
골목에서 보고 있는 혜진.
다애가 이층 복도에서 현관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라보는 혜진. 다애가 방안으로 들어가려다 뭘 떨어뜨렸는지 돌아서 허리를 굽힌다.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벽 뒤로 숨는 혜진.
혜진 : ...
가쁜 숨. 겨우 진정하고 다애의 방을 바라본다.
다애 안으로 들어갔나 보다.
혜진 : ...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는 혜진. 그 자리에 쪼그리고 주저앉는다.
#. 동원의 새 사무실 안
헬스기구를 들여놨다.
주방 옆 탁자에 모여 앉은 동원과 현필, 대진, 석환.
동원 : 주문은 누가 냈어?
석환 : 저요. (손든다)
대진 : 얘 조금 조심해야 돼요.
동원 : 왜.
대진 : 얘가요.
석환 : 형.
대진 : 우리 회사 전설적 인물이에요. 신입 때 밀리는 주식을 하한가에 내고 모두 던지라고 했는데요.
흥분해가지고 매수에다 대고 삼십만 주를 친 거 있죠.
현필 : 근데 멀쩡하게 살아있네.
대진 : 근데 상한가를 치자마자 삼백만 주가 매수로 뜨더라구 그러고 나서 한 달 동안 계속 상한가야.
동원 : (웃으며) 보너스 좀 받았겠네.
대진 : 보너스가 뭡니까. 그 한 달 사이에 딴 사골 여러 건 쳤거든요.
(석환에게 놀리듯) 야 너 혹시 색맹 아니야. 매도는 까만색. 매수는 빨간색.
핸드폰 벨소리. 동원 얼른 일어나 핸드폰 받으며 창가로 간다.
동원 : (전화) ... 네... 네... 아니 문자는요... 말씀 하세요.
전화 받으며 주방 쪽 본다. 장난치고 있는 현필과 대진과 석환.
동원 : (전화) 내 말이 맞았죠? ... 네... 고맙습니다.
전화 끊고 주방으로 가는 동원.
동원 : 우리 펀드 고객 중 VIP골라서 명단 줘. 내일부터 인사 다니게.
휙 나가버리는 동원.
대진 : (고개 짓하며) 어때 성격?
현필 : 크레무린이지 한마디로.
#. 다애의 원룸 앞 길
혜진 : ...
우두커니 서서 다애의 방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 문득 쓸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힘없이 돌아서 가는 혜진.
차 소리. 힐끔 뒤돌아보던 혜진이 휘청거리듯 돌아선다. 동원의 차가 와서 멎는다.
혜진 : ...
숨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서서 본다.
동원이 차를 세우자마자 차에서 내려 계단으로 뛰어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혜진 : ...
미소와 어이없는 웃음이 울음처럼 서서히 치민다.
#. 다애의 원룸 안
강아지 안고 강아지 기저귀를 두드리며.
다애 : 여기다 눠야지, 피피. 아무데나 막 누면 어떡해. 너 아무데나 피피하면 도루 갖다 준다.
다시 벨소리.
혜진 : (문 보며) 잠깐만 명자야.
기저귀 걷어서 치우는데 강아지 도망간다.
다애 : 어딜 도망가. (가서 잡으며) 피피 아무데나 하면 안돼. 피피 몰라? 오줌 싸는 걸 영어로 고상하게 피피라고 하는 거야, 피피.
벨소리.
다애 : 간대두.
소리치고 강아지 내려놓고 문으로 간다. 또 한번 벨소리.
다애 : 기집애 급하긴.
문 연다. 동원이 서 있다.
놀라는 다애. 문을 도로 닫는다. 그 문을 밀고 들어오는 동원.
얼른 안으로 달려가서 강아지 끌어안는 다애.
동원 : ...
다애 : ...
동원 : ... (기가 막히다는 듯 웃는)
#. 거리
혜진의 차가 간다.
#. 동. 차 안
혜진 : ...
그저 멍한. 갑자기 깜짝 놀라서 브레이크를 밟는 혜진. 앞에 차들이 멈춰있다.
겨우 충돌을 피하고 멈추는 혜진. 기진해서 시트에 머리를 기댄다.
#. 혜진의 의식
테라스에서 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펴고 있는 다애. 그 싱싱한 육체.
크랙션 소리.
#. 동. 차 안 (현실)
앞차가 안 보인다. 뒤에서 크랙션 눌러대는 차.
혜진 얼른 차를 몰아 옆 차선으로 빠진다.
요란한 크랙션 소리와 함께 옆 차선의 차가 혜진의 차를 비켜서 달려간다.
놀라서 핸들을 꺾는 혜진. 급정거 한다.
순간 뒤차가 받히는 소리.
#. 길가
혜진의 차와 뒤차가 서 있다.
앞 범퍼를 살펴보는 사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혜진.
사내 : 아 어디다 정신을 팔고 운전을 하는 거예요.
혜진 : 미안해요.
사내 : 범퍼가 안으로 쑥 들어갔네.
혜진 : (기웃 범퍼를 살펴보며) 찌그러진 덴 없는데요.
사내 : (눈 부라리며) 쑥 들어갔잖아요. 범퍼가 안으로.
혜진 : ...
사내 : 어떡할 거예요. 보험 처리 할 거예요.
혜진 : 보험 든 거 보여드릴게요.
사내 : 아주머니, 이거 보험 처리 하시면 아주머니가 더 손해예요. 오십 만원 넘으면 할증 안 되죠. 자손 오만원 물어야죠.
잘못하면 경찰서 불려가서 조사 받아야죠.
혜진 : 돈으로 물어드릴까요.
사내 : 돈 있어요?
혜진 : 계좌번호 불러주시면.
사내 :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해요. 내가 빨리 브레이크 안 밟았으면 아주머니 차 박살 났다구요.
겁주고 생색내는 사내.
#. 다애의 방안
앉은뱅이 소파에 파묻혀 두 다리 뻗고 앉아있는 동원.
침대 위에 강아지 안고 가부좌하고 앉아있는 다애. 동원: 언제 돌아왔어? 다애: 안 갔었어요. 동원: 왜? 다애: ... 동원: 밀라노하고 파리로 쇼핑 간다고 하더니. 다애: (강아지 가리키며) 얘... 밥 먹을 시간 됐거든요. 동원: 먹여. 다애: 밥 먹이고 가게 나가봐야 돼요. 동원: 가겐 집어치웠다면서. 다애: 그냥 해요. 동원: 달라진 거 하나두 없네. 다애: 아저씨 이러는 거 별루 보기 안 좋거든요. 동원: (흉내 내서) 나두 이러고 싶지 않거든. 다애: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해요? 동원: 뭐. 다애: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게. 동원: (피식 웃는다) 다애: 대체 아저씨가 비참할 게 뭐 있어요. 비참한 거 따지면 나죠. 그러고 산 나요. 동원: 어떻게 살았는데. 다애: (기막혀 웃는) 동원: 서로 원하는 걸 주고 받았는데 그게 뭐 비참하구 말구 할 게 있어. 바닥에 손 짚고 일어나는 동원. 따라서 침대에서 일어나는 다애. 다애: 강아지 알레르기 있다면서요. 동원: 그래서 강아질 산거야. 다애: 거기까진 생각 안하고 샀어요. 지금 생각 난 거죠. 동원: (주머니서 차 키 꺼내 던지며) 차 헬스 주차장에 세워놨어. 다애: 문이요 현관문 밖에서 닫으면 그냥 잠기거든요. 문 꼭 닫고 돌아가세요. 현관으로 가는 다애. 그 팔을 낚아채 끌어안는 동원. 다애: (강아지 더 끌어안으며) 얘, 숨 막혀요. 더욱 끌어안는 동원. 다애와 동원의 사이로 밑으로 떨어지는 강아지. #혜진의 부엌(밤) 식탁에 스파게티. 포크 든 채 들여다보고 있는 나리와 나래. 파출부: 왜 안 먹어. 아줌마가 맛있게 만들었는데. 나리: ... 나래: ... 파출부: 배 안고파? 나리: 고파요. 파출부: 그런데 왜 안 먹어? 나리: 맛이 없어요. 파출부: 니 엄마가 가르쳐 준대루 똑같이 만든 거야. 나리: 색깔부터 틀려요. 파출부: 까다롭긴. (젓가락으로 자장면 먹듯 입에 처넣더니) 맛있기만 하네.(나래에게) 나래두 맛없어서 안 먹니? 나래: (놀라서 고개 젓는다) 그리고 얼른 스파게티 먹기 시작하는 나래. 파출부: 아이구 이뻐라. 나래는 잘 먹네. #다애의 원룸 안(밤) 구석에 엎드려 잠이 든 강아지. 침대 위에 무릎에 턱 괴고 앉아있는 다애. 욕실에서 수건으로 머리 말리며 나오는 동원. 동원: 한국두 점점 일본 닮아가나. 욕실이라고 원 콧구멍만 해가지고. 다애: 원래 샤워 안 하잖아요. 동원: (멈추고 본다) 다애: 샤원 집에 가서 해야죠. 그리고 히죽 웃는다. 자조적인. 동원: 상관없어. 앞으론... 서로 상관하지 않고 살기로 했으니까. (소파에 주저앉으며) 맥주 좀 줘. 다애: 없어요. 동원: ... 일어나 냉장고 문 연다. 동원: 텅 비었네. 이것저것 뒤져보더니 냉수 꺼내 병째로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뚜껑 닫아 냉장고에 넣는다. 동원: 이사부터 하자. 니 이름으로 집 사줄게. 다애: (비로소 본다) 동원: 회사 옮겼어. 지들끼리 수군대는데 펀드매니저 스카우트 사상... 최고루... 다애: 이런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 동원: 뭐가. 다애: 어차피 깨진 바가진데 흠집하나 더 났다고 달라질 게 뭐냐구요. 동원: 그럼 싫다고 하지 왜. 다애: ... (가만히 바라본다) 동원: 죽은 듯이 누워 있은 게 싫다는 말이었나. 다애: 흥. 고개 돌린다. 동원: 토할 것 같다? 다애: ... 동원: 내가 역겹다 그거지? 다애: 역겨운 건 나예요. 동원: (뭐라고 하려다 멈춘다) 다애: ... 고개 돌린 채 눈물 삼키고 있는 다애. 바라보는 동원. 더는 못 참고 손으로 눈물 닦는 다애. 동원: ... 미안해... 오늘 일은 사과할게. 다애: ... 동원: ... 다애 옆에 가서 침대에 걸터앉는다. 다애: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동원: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어떻게 산 지 알아? 이게 끝인가 싶으니까... 고개 돌려 동원 보는 다애. 마른침 삼키는 동원. 다애: (눈물이 흐른 채) 내가 그렇게 좋아요? 동원: ... 다애: 날 위해선 모든 걸 버릴만큼... 그 만큼 날 좋아하냐구요. 동원: ... (가만히 끄덕인다. 또 끄덕이고 또 끄덕인다) 다애: (웃으며) 내가 이혼하라고 그러면 어떡할 거예요. 동원: ... 다애: 할 거예요? 동원: 니가 원하면. 다애: ... 물끄러미 보더니 쿡 웃으며 곧추세운 무릎에 다시 얼굴 파묻는다. 동원: 원하면 할게. 다애: 그런 식이죠. 묻기는 내가 물었는데 대답은 나한테 돌아오는. 동원: 다애야. 다애의 어깨에 손을 얹는 동원. 다애: 됐어요.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가는 다애. 동원: 달라진 거 없는 거지? 다애: ... 천천히 돌아선다. 동원: ... (애원하듯 본다) 다애: ... (바라보는) 동원: ... (끄덕여 보이는) ... 다애: ... 가만히 끄덕인다. 동원이 달려가 다애를 와락 끌어안는다. 잠들었던 강아지가 짖어댄다. 동원의 품에 안긴 다애의 두 눈에 흘러넘치는 눈물. #혜진의 부엌(밤) 스파게티 만들고 있는 혜진. 혜진: 아줌마가 만들어 준 스파게티가 그렇게 맛이 없었어. 나래: 응. (고개 크게 끄덕인다) 나리: 거짓말 마. 넌 많이 먹었잖아. 나래: 아줌마가 미워하면 어떡해. 엄만 밤낮 늦는데. 혜진: ... 멈추는 손길. 나리가 나래를 손짓으로 핀잔을 준다. 목을 쏙 파묻는 나래. #달리는 동원의 차안(밤) 기분 좋은 동원. 핸들을 손으로 두드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혜진의 안방(밤) 양복 벗어 혜진에게 건네는 동원. 동원: 애들은. 혜진: 자요. 동원과 눈 안 마주치려고 애쓰는 것처럼 얼른 양복 받아 옷장에 거는 혜진. 동원: 저녁에 뭐 해 먹었어? 혜진: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스파게티요. 안 드셨어요? 동원: (넥타이 풀어 주며) 뭐든 좀 줘. 여기저기 인사 다니느라고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넥타이 푼다. 고개 숙인 채 넥타이 받아 옷장에 넣는 혜진. 동원: 당신 어디 안 좋아? 혜진: (힐끔 보며) 아뇨, 와이셔츠는 벗어 놓으세요. 세탁하게. 옷장 문 닫고 문으로 가는 혜진. 동원: (와이셔츠 벗으며) 당신 어디 아픈 얼굴이야. 나가는 혜진. #동. 부엌(밤) 나물을 이것저것 집어 먹는 동원. 동원: 밥두 새로 했어. 먹다 남은 스파게티 있으면 그냥 주지. 혜진 찌개를 가져와 식탁에 놓는다. 동원: 이게 뭐냐. 버섯탕 아냐. (한 모금 맛보고 맛있다는 얼굴로 고개 저으며) 이래서 집이 좋다는 거 아냐.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동원. 비로소 동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동원: (먹으며) 자식들, 쩨쩨하게 나오더라구. 십억은 현금이고 나머진 스톡옵션으로 받으라는 거야. 회사에 발 들여놓자마자 말이 달라지더라구. 혜진: 돈으로 다 받으면 뭘 해요. 괜히 엄한데 쓰죠. 동원: 집이나 넓혀 갈까 했더니. 차두 바꾸고. (보며) 당신 차 바꿔줄까? 혜진: (눈길 마주치자 당황하며) 아직 새 찬대요 뭐. 싱크대로 간다. 동원: 당신 왜 그래. 혜진: (힐끔 돌아보며) 한 눈 팔다 뒤차한테 받혔어요. 동원: 다쳤어? 혜진: 아뇨, 뒤 범퍼만 조금 긁혔어요. 동원: 당신 괜찮냐구. 뒤에서 받히면 목 삐끗하잖아. 병원 가봤어? 혜진: 괜찮아요. 동원: 그래두 병원에 가봐야지. 혜진: (괜히 물 틀어놓고 설거지하며) 오십만 원이나 뜯긴 거 있죠. 뒤차 주인이 막 겁을 주더라구요. 그럴 때 침착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큰일 난 거 같애서 보험처리 못하고 돈으로 줘버렸어요. 미안해요. 동원: 잘했어. 차사고 나서 실랑이하다가 더 큰 사고 치지. 혜진: 무슨 큰 사고요? 동원: 신문두 못 봤어. 여자가 운전하는 차만 골라서. 혜진: 어이구 누가 나 같은 걸 잡아가요. 동원: 돈 푼 꽤나 있어 보이는 유부녀만 납치해서 돈 뜯어내는 놈들이 있대잖아. 다시 밥 부지런히 먹는 동원. 혜진: ... 설거지 하던 손 멈추고 가만히 뒤돌아보는 혜진. 허겁지겁 밥 먹고 있는 동원. #동. 안방(밤) 불 끈- 혜진: ... 고개 돌려 옆을 본다. 엎드려 자고 있는 동원. 혜진: 잠들었어요? ... 일 안하고 일찍 자두 돼요? 움직이지 않는 동원. 그런 동원을 바라보는 혜진의 서러운 눈길. #다애의 원룸 안(밤) 소파에 이불 깔고 누워 강아지 어루만져주고 있는 다애. 명자: (침대 위에서) 야, 너 강아지 못 키워. 걔네들이 얼마나 사람 손길 타는데 낮에 집에다 혼자 놔두는 거 그거 못 할 짓이다 너. 다애: ... 명자: 너 강아지 안고 다니려고 그러니. 다애: ... 한 숨 쉬고 강아지 놔 준다. 쪼르르 구석으로 가서 처박히는 강아지. 명자: 야, 니가 딱 잘라. 니가 결심하고 딱 자르면 되지 뭘 고민을 해. 다애: 내가 싫어. 소파에서 돌아눕는다. 명자: 왜? 다애: ... 명자: 니가 딱 못 잘라서? 다애: (벌떡 일어나 앉으며) 내가 싫다구 내가 싫어. 악쓰듯 내뱉는 다애. 명자: (놀라서) 기집애. 다애: 생각 중야. 내가 왜 거절 못 했을까. 정 때문에? 그래두 정 들어서 그 사람 얼굴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진 거다. 아냐, 그런 건 아냐. 그 사람 싫어하지두 않지만 좋아하는 건 더 더욱 아냐. 그 사람 덕분에 좋은 차 타고 돈 걱정 안하고 편하게 사니까 날 팔아넘긴 거야. 명자: 복잡하게 나오네. 다애: 그러고 사는 게 싫어서 그만둔 건데... (등 돌리고 소파에 눕더니) 불이나 꺼. 명자: 알았어. 내가 지켜 줄게. 낮엔(강아지 가리키며) 쟤가 보초 서고 밤엔 내가 여기 와서 자면 되잖아. 일어나 불 끄고 침대에 눕는 명자. 움직이지 않는 다애. 명자: 참, 낮에 성구씨 왔었어. 너 가게 나올지 모른다고 했더니 몇 시간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잠깐 화장실 갔다 왔더니 가버렸더라. 다애: ... 명자: (벌떡 일어나 앉더니) 둘이 연애한 거 아니니. 성구씨 하고 너. 다애: ... 명자: 서로 좋아하면서 왜들 그러냐. 벌렁 누워 버리는 명자. 다애: ... 소파에 얼굴 파묻고 등 돌리고 누운 다애의 모습. #거리 강아지 안고 까불거리며 오는 다애. #다애의 액세서리 가게 안 강아지 안고 등으로 문 열고 들어오는 다애. 흠칫 멈춘다. 준수: 강아지 샀네? 다애: (얼른) 아직 이름을 못 지었거든. 뭐가 좋을까. 준수: 해피? 다애: (피식) 준수: 쫑? 다애: (더 웃는다) 준수: 암놈이야 수놈이야? 다애: 암컷. 준수: 복순이. 다애: 복순이? 명자: (안에서 나오며) 복순이가 뭐니 복순이가. 촌스럽게. 다애: 얘 촌스럽게 생겼잖아. 복순아. 번쩍 들어 안아 올리는 다애. #어느 카페 다애: (바라보는) 준수: ... 와인 잔 컵 위 둘레에 물을 묻혀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는 준수. 묘한 소리가 난다. 그 컵 위를 손가락으로 눌러 멈추게 하는 다애. 가만히 손을 빼는 준수. 다애: 뭐라고 불러줄까. 준수: ... 다애: 성구씨, 준수씨. 어는 쪽을 원해. 준수: (비로소 본다) 다애: 이름은 상관없겠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그게 더 문제겠지. 준수: 언제 알았어? 다애: 어떤 사람이 날 찾아와서 강성구란 사람 아느냐고 물어보드라. 안다고 했더니 언제 봤냬. 며칠 전에두 봤다고 했더니 놀래는 눈치야. 그러더니 사진을 꺼내서 이 사람이 맞냐고 물어보는 거야. 준수: ... 다애: 왜 그랬어? 준수: ... 다애: 왜 이름을 바꾼 거야. 준수하고 성구하고. 준수: 이름이 중요한거 아니잖아. 다애: 또 하나. 준수: ... 다애: 수정일 그 꼴로 만든 게 누구야. 내 옆에 앉아있는 준수씨야 아니면 준수라고 우기는 성구씨야. 준수: 그게 중요한 거 아니잖아. 다애: 그럼 뭐가 중요한 거야. 준수: ... 다애: 또 있어. 날 두고 내길했다면서? 준수: 하나씩 설명해 줄게. 다애: 한꺼번에 대답해. 뭐가 진실인지. 격해서 내지르는 다애. 준수: ... 같이 격해지려는 감정을 억누르는 준수. 다애: 그만둬. 준수: 설명할게. 다애: 알고 싶지 않아. 준수: (화나서) 방금 물어봤잖아. 다애: 그럼 한 가지만 대답해. 날 데리고 논거야? 준수: ... 다애: 날 꼭두각시처럼 조정한거잖아. 이쪽저쪽 날 움직이고 싶은 대로 줄을 잡아당기면서. (기가 막히다는듯 웃으면서) 재미있었겠다. 그치? 참 재미있었겠다.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다애. 준수: 한달만... 다애: ... (기다리다) 한달만 뭐. 준수: 어쩌면 두 달... 아니면 더 짧을지도 모르구. 다애: 또 말 빙빙 돌린다. 준수: (절박하게) 한 달이나 두 달 정돌 거야. 더 이상은 아냐. 그 전에 다 끝난다구. 다애: 뭐가. 준수: ... 다애: 뭐가 끝나는데. 준수: 그냥 그렇게 알고. 다애: 인생 끝나는 것처럼 말 해놓고 그냥 그렇게 알라는 게 뭐야. 준수: ... (바라보는) 다애: (보더니) 죽어? 준수: ... (바라보는) 다애: 준수씨 죽냐구. 준수: 그건 아니구. 다애: 근데 왜 폼 잡아. 한두 달 밖에 못 사는 시한부 생명처럼. 준수: ... 한 숨 푹 내쉬고 의자에 등 기대고 앉는다. 다애: 좋아. 죽든 뭐든 한 달이나 두 달 동안 뭐. 준수: ... 다애: (재촉하듯) 뭐. 준수: 그냥 나 좀 만나달라구. 다애: ... 기막혀 웃는다. 준수: 그럴래? 다애: 그럼 정체부터 밝혀. 준순 누구고 성군 누구야. 준수: ... (물끄러미 본다) 다애: 그게 그렇게 힘든 대답이야? 준수: 지나간 일은 다 잊어버리면 안돼? 다애: (기막혀 웃으며) 잊으래. 숫제. 준수: 널 두고 내길한 건 내가 아냐 성구지. 내 친구 성구. 다애: 재밌으니까 같이 장난친 거 아냐. 준수: (안타까워서) 뭐가 재밌다구. 다애: 그 짓하는 재미로 살잖아. 여자들 골려먹는 재미로. 그래서 수정이가 죽은 거구. 준수: ... 다애: (고개 돌리며) 성구씨가 얼마나 부자야? 하긴 양수리에 그렇게 큰 별장 가지고 있으면 어마어마한 부잣집이겠지. (보며) 그래서 준수씨 성구씨한테 붙어먹고 산 거야. 준수: (뭐라고 하려는데) 다애: 강아지 밥 줘야 돼.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간다. 움직이지 않는 준수. 다시 오는 다애. 다애: 죽는 거야? 준수: ... 다애: ... 준수: ... (가만히 고개 젓는다) 다애: 겁주지 마. 또 그러면... 멈추고 준수 본다. 환하게 웃고 있는 준수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얼굴에다 대고 손가락질 하는 다애. 다애: ... 뭐라고 하려는데 문득 목이 메듯 말이 안나와 계속 손가락질만 해대는 다애. #길 버티고 앉아있는 강아지. 개 끈을 잡고 노려보는 다애. 다애: 걸어. 왜 안 걷는 거야... 할딱거리는 강아지. 다애: 고거 쪼금 걷고 힘들어서 혓바닥을 내놓으면 어떡해. 개 끈 잡아당긴다. 꼼짝 않는 강아지. 다애: 정말 안 걸을 거야. 나 너 못 안고 다녀. 이게 얼마나 비싼 옷인 줄 알어? #어느 카페 안 준수: ... 빈 술잔. “플라토닉 러브야.” 성구의 목소리. 준수: ... 괴롭게 한 숨 내쉬며 몸을 뒤로 젖힌다. 그 얼굴 위에- “처음 만난 날 해치웠어야지.” 성구의 목소리. 준수: ... 옆자리를 본다. 성구가 앉았다. 성구: 시간을 끌수록 여잔 도도해 지는 거야. 준수: 차와 집 별장두 모두 거짓말인 걸 알면. 성구: 누가 연앨 하래? 그저 하룻밤 상대로 데리고 놀아보라는 거지. 준수: ... 성구: 뭐야, 좋아하는 거야? 어이없다는 듯 웃어대는 성구. 준수: ... 보일 듯 말 듯 준수의 눈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분노 같은. 성구: 좋아, 나한테 맡겨. 여잘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본보길 보여줄게. 준수: 성구야. 성구: 두고 보라구. 내일 아침이면 내 여자가 돼 있을 거니까. 재밌다는 듯 웃어대는 성구.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준수. #동. 앞. 나오는 준수. 문득 하늘을 본다. 쏟아지는 햇빛.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리는 준수. 그 얼굴에. 준수: (소리) 건드리지 마. 그 앨 건드리면 널 죽이고 말 거야. 아니, 성구야... 빌게. 그 앨 가만히 놔둬. 빌게, 성구야. 가쁜 숨 내쉬며 고개 드는 준수. 멍하니 거리를 바라본다. #다애의 원룸 앞 강아지 안고 오는 다애. 다애: 또 집 잃어버릴까봐 그랬어? 그래서 안 걷는 거야? 뽀뽀하고 난리치며 온다. 그러다 멈추는 다애 혜진이 다애의 원룸을 바라보고 서 있다.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다애: 어디 찾으세요? 혜진: ... 돌아보다 멈춘다. 다애: (반갑게) 안녕하세요. 어저께 얘 먼저 사려던 분이시죠. 혜진: 아. (웃으려다 못 웃는) 다애: 얘가요. 유기견이래요. 어이구 불쌍해서. 뽀뽀해 준다. 혜진: 그래요? 다애: ... (빤히 본다) 혜진: (어색해서 눈길 피하는데) 다애: 얘 키우실래요? 혜진: (본다) 다애: 사실은 저 혼자 살거든요. 집에다 두고 다니려니 가엾고... (웃으며) 얘 데려다 키우세요. #길 달리는 혜진의 차. #동. 차 안 운전하다 조수석 보는 혜진. 엎드려 자고 있는 강아지. 혜진: ... 그만 웃고 만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꾸만 웃는다. #다애의 원룸 안(밤) 열심히 군것질 먹어대는 명자. 명자: 변덕은. 그렇게 이쁘다더니 왜 남 줬어. 다애: 정들까봐. 명자: 정 붙일 데 없어서 강아지 키우는 거 아냐. 다애: ... 말없이 창으로 가서 커튼 젖힌다. 마당이 보인다. 다애: ... 명자: 오늘도 오겠니. 어저께 왔다갔는데. 다애: ... 명자: 야 그냥 그러고 살어. 시집 갈 때까지. 다애: ... 바라보는. 어두운 마당. 명자: (소리) 난 꼬시는 놈두 없어. 돈 많고 명 짧은 홀애비나 하나 만났으면 좋겠구먼. 다애: ... 화석처럼 굳어있는. 그 얼굴에서... #다애의 빌라 거실(새벽)(회상) 조깅복 갈아입고 있는 동원. 다애: 집에서 정말 몰라요? 동원: 쉬이... 손가락으로 입 가리고 조용히 하라는 동원. 다애: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죠. 새벽마다 한 시간씩 어딜 갔다 오는데. 동원: 조깅. 앉아서 두 팔 앞뒤로 저어보이는 동원. #혜진의 집 앞(회상) 나리와 나래 데리고 나오는 혜진. 좋아서 팔짝 팔짝 뛰는 나리와 나래를 차에 태우는 혜진. 화사한 모습이다. 부근 차 안에서 보고 있는 다애. 혜진의 차 떠난다. #다애의 원룸 안(밤) (현실) 다애: ... 창문을 활짝 열고 힘껏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 다애. #혜진의 거실(밤) 들어오는 동원. 동원: 나 왔어. 혜진: (부엌에서 일하며 내다보며) 늦었네요. 일찍 들어온다고 하더니. 동원: VIP고객을 좀 만나고 오느라고. (둘러보며) 애들 자? 혜진: (부엌에서) 자는 게 뭐예요. 강아지 때문에 난리예요. 동원: 강아지? 애들 방에서 강아지 안고 도망쳐 나오는 나리. 나래: (쫓아 나오며) 내가, 내가 데리고 잘 거야. 나리: 안돼. 얘가 너 싫대잖아. 나래: 아빠, 언니 좀 봐. 강아지 나 못 안게 해. 동원: 나래 좀 줘라. 나리: 싫어. 방으로 도망친다. 나래: (쫓아가서) 복순아, 나하고 자자. 복순아. 방으로 들어간다. 혜진이 부엌에서 나온다. 혜진: 진즉 강아지 사다줄 걸 그랬어요. 좋아 죽어요. 동원: 복순이? 이름이 뭐 그래. 혜진: 유기견이래요. 그래서 전 주인이 복순이라고 지었대요. 나리: (소리) 어디가 복순아. 애들 방문이 조금 열렸는지 문 열고 강아지가 달려 나온다. 나리: (나오며) 복순아 이리와. 언니하고 자자. 동원: 어어. 이놈 봐라. 동원에게 팔짝팔짝 뛰어오르는 강아지. 보고 있는 혜진. 강아지 안아주는 동원. 동원: 이놈이 언제 봤다구 날 좋아하는 거야. 아 이놈아 그만 핥어. 동원의 얼굴을 핥아대는 강아지. 웃으며 피하는 동원. #동. 서재 안(밤) 컴퓨터와 케이블 티브이 보고 있는 동원. 동원: 찬 바람 들어와. 혜진: ... 방문 열고 문가에 뒷짐 지고 기대 서 있는 혜진. 동원: 방문 닫으라니까. 혜진: 그렇게 그 여자가 좋아요? 동원: ... 돌아보려다가 참고 다시 컴퓨터 두드리는 동원. 혜진: 어디가 좋아요? 젊으니까. 동원: 여보. 터지듯이 내뱉으며 돌아앉는 동원. 혜진: ... 눈물은 흘러내리지만 무표정한 얼굴이다. 동원: (꾹 참으며) 그저 바람 한번 피운 거야. 혜진: 한번이 아니잖아요. 집 얻어주고 차 사주고. 동원: (도로 돌아앉더니) 언제부터 알았어. 혜진: 그게 중요해요? 동원: (홱 돌아앉으며) 깐죽거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혜진: (한숨) 동원: 그만하자. 끝났으니까. 혜진: 끝나요? 동원: 그래서 집 나갔던 거야? 내가 그래서. 혜진: 강아진 거짓말 못 시키지. 당신 알아보고 좋아하는데. 동원: 뭐야? 혜진: 걱정 마세요. 그 여잔 내가 누군지 모르고 강아지 준 거니까요. 동원: 거길 찾아갔었단 말야. 혜진: 그만 두죠. 미안해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이런 거 따지는 내가 어리석죠. 돌아서 나가는 혜진. 동원: 넌 얼마나 깨끗해서. 혜진: ... (멈춘다) 동원: 대체 삿뽀로 가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혜진: ...(그대로) 동원: 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삿뽀로 가서 그 짓하고 돌아다닌 거야. 혜진: ... 동원: ... (씨근대는) 혜진: ... 서글픈 미소가 떠오른다. - 5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