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람 난 구름
산야초 몰아경(沒我境)에 볼 찢긴 줄 모르다
우연히 머리 드니 창공에 혈흔(血痕) 점점
구름은 봄바람이 나 벚꽃으로 날리고
* 무명산(無名山 614.2m); 경기 양평 청운면 몰운리 삼각점. 주민은 몰운산(沒雲山)이라 부른다. 인적이 드물어 산나물이 많고 구름이 좋다. 동행한 40대 여인은 봄나물 뜯는데 열중한 나머지 나뭇가지에 얼굴이 찔려 피가 난 줄도 모르고 있고, 무심한 산벗꽃만 흩날린다. 산에서는 꼭 모자를 써야 한다.
* 《마포문학》 제2호 2005년 시조 5수.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 부제 산음가 산영 1-195(178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12. 삼준산(三埈山) 회포(懷抱)
세월이 나이 들면 산 주름은 펴지는데
이마의 살 주름은 나이테로 늘어가네
굴곡진 삶의 뒤안길 마음 주름 깊어가고
* 삼준산(490m); 충남 서산 홍성. 삼신사 터 석간수 맛이 일품이고 서해가 잘 보인다. 가을억새가 괜찮다. 수억 년의 세월이 흐르면 잘 잡혀있던 산 주름이 펴져 구릉(丘陵)으로 바뀌겠지?
* 산준(山皴-산 주름), 상준(顙皴- 이마 주름), 심준(心皴-마음 주름)을 모조리 펴 버리자!
* 《마포문학》 제 2호 2005년 시조 5수.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 부제 산음가 산영 1-313(255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13. 갈화작운(葛花作雲)
솔바람 몰려오는 암봉을 베고 눕자
득음(得音)한 할미새가 백수건달 놀려대니
칡꽃은 보라구름을 몽글몽글 피워내
* 수암봉(秀巖峰 395m); 경기 시흥, 한남정맥 표고점. 글자그대로 빼어난 암봉으로, 일명 견불산(見佛山)이다. 국도변에서 위로 쳐다보면 단숨에 무너져 내릴 듯 긴장감을 주지만, 마루금에서 조망하면 가리개처럼 시커멓게 보인다. 암봉을 덮은 칡꽃은 화려한데, 생산성 없는 등산으로 시간만 죽이는 놈은?
* 갈화; 칡꽃은 주독을 풀거나 혈변(血便)을 다스리는데 쓰며, 술로 담그기도 한다. 여름 무리지어 핀 모습은 마치 한 무리의 자운(紫雲)을 떠올리게 한다.
* 《마포문학》 제 2호 2005년 시조 5수.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299면.
14. 산백정(山白丁)의 묘술
옥비늘 벗겨보니 장타던 산 별게 아녀
살점은 저며저며 금천계(金川溪)에 헹궈놓고
산백정(山白丁) 용 잡는 솜씨 금시조(金翅鳥)가 당하랴
* 장룡산(壯龍山 656m); 충북 옥천. 천연기념물 어름치가 사는 푸른 격류의 금천계곡을 끼고 있고, 남쪽을 향해 똬리를 튼 젊고 힘센 용의 기상이다. 왕관바위, 구멍바위, 병풍바위 등이 아름답다.
* 금시조;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괴조(怪鳥). 머리는 새, 몸은 사람을 닮고, 날개는 금빛인데, 부리로는 불꽃을 뿜으며 용을 잡아먹는다고 함. 가루라(迦褸羅)또는 묘시조(妙翅鳥)라 부름.
* 인동초를 닮은 멋진 여류산악인 이순홍(李順紅) 여사와 첫 인연을 맺다. 졸작 연화초(戀花抄) 제10번 ‘인동초’ 시조 참조.
* 《마포문학》 제 2호 2005년 시조 5수.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359면.
15. 강심에 뜬 달
컵으로 달을 건져 단숨에 들이켜고
국자로 강을 덜어 수통 그득 채워보련
또 하나 송편 달 머리 강심 위로 뜨리라
* 월두봉(月頭峰 450.8m); 경기 가평, 강원 춘천. 일명 달머리봉이라 하며, 북한강변 춘성대교 북쪽에 우뚝 솟아있다. 강에 비친 송편 달과 북두칠성의 매혹적인 자태는 항아리에 담고 싶을 게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345면.
16. 위세 부린 색골바위
하트 잎 음양곽(淫羊藿)은 옹녀(雍女)의 색정으로
하마 절정일까 끙끙대며 맛본 찰떡
골샌님 야코를 죽인 저 앙팡진 바위여
* 문안산(文案山 536.1m); 경기 남양주. 한양을 바라보듯 문바위는 야무지게 생긴 흰 차돌바위로 탁자를 닮아 전망대로 알맞다. 정상이 가까운데도 좀처럼 잡히지 않아, 변강쇠도 쌕쌕거린 후 오를 만큼 약을 올린다. 산길 옆 음양곽(삼지구엽초)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는데, 주의 깊게 살펴야 눈에 띤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184면.
17. 속절없는 정욕(情慾)
동기(童妓)의 유방일까 바르르 떠는 파동
지긋이 애무하면 터질듯 한 연꽃망울
아미타(阿彌陀) 빙그레 웃곤 부질없다 이르셔
* 현성산(玄城山 965m); 경남 거창, 일명 거무산이다. 따보고 싶은 전망 좋은 연꽃바위, 잠수함바위 등이 아름답고, 암릉에 부채살을 펼친 듯 소나무군락이 빼어나다. 매표소 200m 쯤 와폭(臥瀑)인 미폭(米瀑)은 글자그대로 쌀뜨물을 풀어놓은 듯 색깔이 곱고 유연해, 마치 아미타부처가 편히 누워 미소를 짓고 계신다. 흰 화강암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세미크라이밍 코스도 두어 곳 있다. 모산(母山)은 금원산(金猿山 1,352m)으로, 같이 등산해도 무방하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441면.
18. 호수에 잠긴 옷자락
은사(隱士)의 소매 끝에 일렁이는 솔파도
마고자 단추 꿸까 주렁 달린 호박바위
찢겨진 비단옷자락 청풍호에 잠기다
* 가은산(可隱山 575m); 충북 제천. 금수산(錦繡山 1,015.8m) 주능선과 말목산(765m) 사이 801.5봉 분기점에서 서쪽으로 가치 친 산이다. 여맥(餘脈)을 아름다운 청풍호로 떨어트려, 가히 은둔의 산이라 할만하다. 암릉길 바위와 소나무가 근사하고, 둥지봉까지 등산하면 금상첨화다.
* 해동문학 2005년도 사화집 원고 5수 중.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49면.
19. 뭣 벌려 앉은 아이
갸름한 살구눈에 반지르 흐른 이마
꽈리 문 입언저리 코 후비며 윙크하는
맹랑한 뻘때추니가 소문(小門) 벌려 앉은 폼
* 맹동산(萌動山 807.6m), 명동산(明童山 812.2m); 경북 영덕, 영양. 앞의 산은 마루금에서 살짝 비껴 앉았고, 뒤의 산은 낙동정맥으로 군용삼각점이 있다. 이름이 좀 헷갈리나, 엄연히 다른 산이다. 둘의 산세가 비슷한데다, 영락없이 ‘아이가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라, 본 시조는 편의상 함께 다룬다. 전자(前者)는 주위 산보다 높아 나무는 자라지 않고 풀만 자라, 소위 민둥산을 “민둥 맨둥” 부르다가 음이 변해 ‘맹동’으로 바뀌었다. 후자(後者)는 옛날 산 아래 ‘두뇌가 명석한 아이가 살았다’는 데서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뻘때추니; 제멋대로 짤짤거리고 쏘다니는 계집아이.
* 소문; 여자의 음부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 해동문학 2005년도 사화집 원고 5수 중.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172면.
20. 늙어도 마음만은
왕년엔 천리 길도 하루에 달린 준마(駿馬)
노둔(老鈍)타 구박해도 성정정일(性靜情逸) 못 버린 터
늙은 말 콩 마다하랴 뭐 하나 쯤 줘보세
* 노기산(老驥山 473m); 경기 양평. 글자그대로 늙은 천리마의 기상인데, 정상은 볼품없고 고분고분 하지 않다. 육산이지만 길 찾기가 쉽지 않고, 능선의 기복이 심하다.
* 성정정일; 품성(稟性)이란 본디 안정(安靜)한 것으로 고요하지마는, 정욕(情慾)은 분주하고 방일(放逸)한 것임.
* 세간(世間)의 준마는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달리기 시작하는데, 늙은 말은 사료만 축내니? 뭘 주란 말이냐? 이성(異性) 아니면, 일거리? 차라리 산을 통째로 줘버릴까 부다.
*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의 지혜) 사자성어가 은근히 떠오른다.
* 해동문학 2005년도 사화집 원고 5수 중.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부제 산음가 산영 1-101(115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