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난주정도에 올려놓았던 저의 수필. "-얀,s 칼럼-"은
원래 8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사건이 시간에 순서에따라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입니다.
여기다가는 그중 1,2,3 편 만을 올려놓았고요.
9편은...전혀 새로운...
사건을 토대로..
지금 이순간 처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얀,s 칼럼-(외전)
3박 4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여행이라는 것을 다녀왔다.
이전까지의 여행과는 전혀 틀린,
나...자신만의 여행을.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일.
처음 목적지인 공주로 향하는 차를 탔을때.
하늘은 온통 끈적이는 푸른색으로 덮여있었다.
마치.. 파란색 물감이 물도 안바른 채 캔버스에 뒤덮여 있는 것처럼.
고속버스가 고속도로를 지나 천안으로 가는동안.
정말 난 무미건조한 시각으로 주위의 풍경들을 쳐다볼수 밖에 없었다.
그 어떠한 생각이나 가슴속에 떠오르는 상상도 없이.
그저 방안의 벽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선.
차가 공주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신음을 터뜨렸다.
여기는 공주. 백제의 회한이 담겨 있는 장소.
지금까지 한번도 도달해본적 없는 낮선 공간에.
나 혼자만이 발을 딛고 서 있을때의 그 심정.
새로우면서, 어딘가 낮설지만은 않은 그런 감정.
여행을 기획했을때의 원래 계획에 따라,
제일 처음 발길을 돌린곳은 무령왕릉.
사학도인 내게 있어 역사란 중요한 것이였고.
아직 관심에 비해 많은 지식을 쌓지못한 백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바라볼수 있다는 사실에.
먼저 1회용 카메라를 샀다.
친구한테 빌리지도 못한채.
나름대로 답사라는 형태로 이곳에 왔는데.
증거라도 남겨가야 하지 않겠는가.
매표소 아줌마와 버스아저씨들에게 물어물어보며.
간신히 도착한 송산리 고분 제 4호 무령왕릉.
아는 사람 하나없이 이곳을 찾은 나를 반기는건.
1500년전 한 사람이 묻혔던 작은 벽돌무덤 하나.
흘러간 시간은 덧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아니다.
천년이 넘는 긴 엉겹의 시간동안 잠자던 영혼이여.
그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왕과 왕비-생전에는 정답게 지냈는지 그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지금 이순간 반듯이 누워있다.
뼈는 풍화되고 부셔져 그 형체나 있으련지 모르겠다만.
재현된 왕릉의 내부도 앞에서.
목침과 발베게를 나란히 한 벽돌무덤 속은.
1500년 동안 어떤 분위기였을까 생각해본다.
가지고 왔던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마지막 가장높은 1호 고분까지 일부러 올라온 순간.
늦은 오후 관광객도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각.
마음속에서 깊숙히 숨겨져 있던.
아니, 여행중에서만은 별로 꺼내고 싶지 않던 감정으로 말이암아.
무덤속의 적막을 깨뜨리는 사자후를 발하였다.
내려오면서 관광안내소의 팜플렛을 받아들고.
다음 목적지를 고미나루(곰나루)로 잡고 내려가던중.
재미있는 것을 보게되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요즘 국위선양의 상징이자 TV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온 국민의 영웅 세리 pak의 동상하나.
그제서야 그누나가 여기 출신이였다는 사실을.
기억속 한구석에 잘 숨어있는 공간서 찾아내고 상기하게 되었다.
우습기도 하지.
살아 있는 사람.
나이도 얼마 많지 않는 그녀가,
자신의 동상을 보게되면 어떤 생각을 떠올릴까?
어쨌든 신기해서 지나가던 한 젊은 관광객이 사진을 찍을 정도니까.
공주사람들, 관광코스 하나 따로 잘 만든거라 할수 있겠다.
관광안내소에서 준 지도 하나 달랑들고.
원하는 장소 찾는다는건 쉬운일만은 아니다.
지도에 축적도 표시안될때는 더더욱.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곰나루를 물어보니.
걸어서 가기는 너무 힘든 당신이다.
히치....라는걸 고등학교이후 처음으로 해보았다.
친구들과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것. 혼자하려니 쑥스럽군.
차가 한 열대? 그냥 지나가 버린후.
고맙게도 봉고차 하나가 브레이크를 밟아주었다.
운전자 아주머니. 어디 간다고 말하기도 전에 곰나루먼저 묻는다.
나야 그저 좋은 거지 뭐.
차 안의 아줌마들.
알고보니 오늘 그곳에 축제가 있었고.
이들은 오늘 첫 공연을 담당한 사물놀이 패들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구경거리 하나 더 생기는 순간이였다.
충정남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는 웅비탑과.
옆에 곰나루가 있는 터를 끼고 달리는 것은.
1500년전 한반도 삼대국의 한축을 담당하는 백제보다도.
우리들 작고 연약한주제 교만하기만 한 인간들의 역사보다도.
긴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나 결코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흐르는,
영겁의 세월이 덮혀묻힌 금강.
웅비탑을 찍고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가족단위로 소풍을 나온 듯이 보이고,
발빠른 장사꾼들은 아이들을 상대로 아이스크림과 풍선, 장난감을 팔기 바쁘다.
공연은 7시부터. 지금 시각은 6시 반.
지금까지 상당한 발걸음을 하며 지친 몸을 애서 이끌고.
금강의 자태를 구경하러 갔다가.
그만 아껴써야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버리고 말았다.
산을 뒤로하고 유유하게 흐르는 금강.
도심속의 한강과는 그 색채가 다른.
아래 백사장에서 걷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곰나루 관광공원에 들어서니.
김건모씨의 노래가 나온다.
나중에 알고보니 더블이라는 곡이라고 하더군.
오프닝으로 어린 아이들이 주여하는 패션모델 쇼를 보다가,
아까 타고왔던 아주머니들의 공연이 중반쯤 되었을무렵 자리를 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개가 이지역의 가족들이고 차도 있지만,
난 타지에서 아무것도 없이 홀로온 여행객이란 말이다.--;
걷다가. 일찍 돌아오는 차들에게.
다시한번 히치를 시도했다.
이제 슬슬 경력이 붙기 시작한다.--;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데.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못해 그냥 시청을 이야기했다.
시청이 있으면 대충 도심가가 아닌가.
oops... 이 동네 시청은 도심보다 한참 남쪽에 위치해 있음을,
차에서 내려 지도를 본 후에야 알게되었다.
사실 아까 무령왕릉가는 버스에서도 본 건물인데 말이다.--;
때는 저녁. 늦은 밤.
빈 뱃속이 울린다.
별로 먹고싶은 기분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생각아래.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라는,
극히 평범하고 개성없는 식사를 하게되었다.
달랑 가방하나 들고 와서 자장면이나 한그릇 달라는 청년이.
아무리 봐도 이동네 사람하고는 틀릴 수밖에.
어디서 오셨냐고 묻기에 서울에서 왔는데,
역사를 전공하는 관계로 유적지 보러 홀로 왔노라고 했더니,
고맙게도 자장면을 듬뿍준다.--;
공주인심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였다--;
(문제는 맛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도 어디냐--;)
어디를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
이제 잠자리를 찾아야 할 때이다.
여관? 그건 여행 최고의 사치다.
돈도 넉넉치 않게 가져왔는데 얼어죽을 여관.--;
1순위로 생각한 것은 역시 동네 교회.--;
이야기 말하고 하룻밤 자게해달라고 하면,
안들어줄 교회 어디있겠냐 하는 계산으로.
oops...이쪽 동네는 서울과는 달리.
개척교회가 거의 정도가 아니라 아예없다.
전부다 왠만큼 클뿐 아니라.
문제는 그 교회들이 몽땅다 닫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제7일 안식일교회...(기독교계에서 이단이다.) 같은데서는 못자지--;
암튼 교회들 찾고 문닫힌 것 확인하느라고,
그날 밤 결국 난,
거의 서울의 한 區(구)만한 공주시내의 남쪽 절반 거리의 지리를 외울수 있었다--;
(그걸 다 걸어서 돌아다녔다..라고 생각해보라.)
공주 침례교회인가? 거기는 3번씩이나 돌았다.
결국 잠을 청한곳은 공주시내의 한 게임방.
정말 돈 한푼이 아깝기에.
여관은 도저히 안되겠고, 결국 5000원 내고 하룻밤 끓었다.
빈 자리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 있는 내모습을 쳐다보며,
괴로운 생각이 다시 내머리를 강습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내려 했었다.
아직 많지도 않은 나이인데,
고뇌가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지.
정말 절망을 만나게 된다면.
난 어떻게 더 이상 살아갈수 있을지.
숨이 막힐것만 같은 답답함.
송산리 고분군 위에서 질렀던 사자후에 담긴.
그러한 심정이 날 지배하였고.
결국 별로 다루기 싫던 컴퓨터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리고 그곳 의자에 걸터앉아,
낮선 객지에서의 첫 잠을 청하였다.
일어난 시각은 오전 9시.
이제 가야할 시각이다.
온 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 마음은 이보다 훨씬더 욱신거리는데.
겨우 육체 따위가 편하게 지내면 안되지.
일어나 씻지도 못하고 눈을 비비며 도착한 공주 공산성.
옛적 백제의 수도와 왕궁이 있는 터.
역사에 웅진이라 불리우는 그곳.
내가 굳이 여행코스를 공주와 부여쪽으로 잡은 이유.
더 정확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 말하겠지만.
내가 보고싶었던 것은.
"백제" 라는, 너무 슬픈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의 초라한 모습.
북으로는 고구려에 밀려 수도까지 내어주고,
잠시 강성한적도 있었으니 신라의 배신으로 인해,
위례에서 웅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망치듯 서울을 바꾼 비운의 나라.
3국중 가장 화려하고 우아한 예술생활과,
온순한 민족성을 지니고 있던 문화강국이,
고구려와 신라에 가려.
결국 후세사람들에게까지 가장 멸시받고 인정 못받는.
비운의 국가 백제의 모습.
그것을 난 공주 공산성에서 다시금 재확인 했다.
너무나 통렬하게.
아름다운 능선에 깔려있는 성벽.
1500년의 세월이 담긴 주춧돌.
내가 가장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던 공간은.
옛 백제의 왕궁 터.
위례성에서 공주까지 피신하느라 정신도 없었을터인데.
정말 너무나도 초라하고 이제는 터만 남아버린 궁궐터.
그냥 커다란 저택 한채크기도 안되는 궁궐터에서.
백제인들의 슬픔이 그대로 내게 감염되었다.
이제는 비둘기 몇마리만이 날아 다니는 조그맣게 줄쳐진 잔디밭 앞에서.
난 다시 한번.
어제 무령왕릉에서의 사자후를.
외쳐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어째 계속된다..;;)
그대는 아는가.
백제인들의 슬픔을.
한 없이 착하고 바른 민족.
가만히 있었어도 아버지 고주몽의 뒤를 이어,
대제국 고구려를 이어받을수 있었건만.
갑자기 나타난 배다른 형 유리.
하루아침에 한 나라의 왕자에서.
개척자들, 아니 도망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버린.
비류와 온조 형제를 그대는 아는가.
쓸쓸히 인천 앞바다에서 숨이 다한 형 비류.
하남 위례성에 겨우 근거지를 정하고,
마한 54개국의 틈바구니에 겨우 끼어들게 되었던 아우 온조왕.
원래 살던 나라를 버리고,
겨우 한나라의 모습을 갗추었건만,
옛 형제나라의 침략에 휩쓸려.
수도를 2번이나 옮겨야만 했던.
백제인들의 슬픔을 그대는 아는가.
공산성을 내려와서,
이번에는 공주 국립 박물관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물론, 걸어서 말이지.
박물관안에 진열된 무령왕릉에서의 출토물들.
화려한 왕과 왕비의 왕관과.
청동거울. 왕릉을 지키는 석수.
원래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몰래 사진을 계속 찍었다.
여기서 물러날수는 없지.
이렇게 중요한 기록들이 많은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관을 보게되면.
현재의 세공기술로도 불가능한 작고 세밀한 장식이 느껴진다.
내가 금속공예에 대해 문외한이라 하지만,
그 세밀한 금속조각품들은.
1500년의 혼이 녹아들어갔다고 밖에 표현할수 없다.
아주 조그마한 귀걸이 하나.
돋보기로 쳐다보아야만 겨우 나타나는 조각과 유려한 선의 띠들.
당시의 기술력과 과학은.
우리가 잃어버린 지금보다 더 뛰어난 예술.
한참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령왕이여, 편히 잠드소서.
공주에서의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었다.
돈좀 아끼느라고,
여행 내내 두끼 이상을 먹은 적이 없었다.
이제 부여로 가자.
이번 여행 최고의 목적지가 있는 곳.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떠나가자.
한낮에 도착한 부여.
찌는 듯한 더위.
어디로 가기에 앞서 목욕탕 먼저 갔다.
어제 잠도 제대로 못잤고.
온몸이 더럽고 땀도 많이 났기에.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야할 것 같았다.
한적한 시골목욕탕.
있는 사람이라고는 욕탕에서 장난치는 꼬마하나.
지친 몸, 욕조에 몸을 담그며.
가만히 누워 있는데.
슬픔과 비애는 떠나지를 않는다.
난 어린애들을 어려워하는 편이다.
아기들은 울음소리 때문에 짜증도 잘내고.
그런 내가 그날따라.
거기 있던 아이에게 자꾸 말을 건네며 말좀 붙이려 했다.
6살짜리 꼬마 남자애.
이곳에 사는 데 이모부따라 왔나보다.
내가 서울서 왔다고, 서울이 어딘지 아냐고 묻자,
고개를 도리도리 휘젓는게 재미있다.
물장구도 쳐주고.
괜히 한번 아이한테 웃어보이고는,
더럽혀진 내 몸을 씻으러 나왔다.
너무 피곤했다.
며칠간 피로가 겹쳐서.
도저히 제대로 목욕을 할 상태가 아니였다.
그냥 비누칠만 몇번 하고서는.
탕 밖으로 나와 잠깐 쉬었다.
욕탕 밖 휴게실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부여에 대해 물어보며.
(갈곳이 어디어디 있는지..등등)
혼자 있다는 외로움을 지우려 애썼다..
풋...... 이렇게 온 여행.
아직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언가를 얻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미치도록 외로운 나의 마음을 붙잡고 계속 남아있기를 원했다.
돌아가면...... 지금보다 더할거야... 차라리 여기가 더 나아.
아는 형한테 받은 지도도 있고해서.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찾기란 생각보다 쉬웠다.
국보 제 9호.
이름이 아깝지 않게 장관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석불여래좌상.
이것도 보물 108호인데.
보수공사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능 하단다.
일하시던 아저씨들에게 사정을 구했다.
사학과 학생이 답사차 서울서부터 이거 보려고 왔다고 했더니.
통과 시켜 주었다. 휴우~
풍화되어 이미 한쪽 팔과 가슴의 절반이 날아간채.
윤곽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석불의 얼굴.
1500년이란 긴 시간.
강산이 150번도 더 바뀌어버린 시간.
백제가 있던 곳.
통일신라가 있던 곳.
후백제가 있던 곳.
고려가 있던 곳.
조선이 있던 곳.
일제의 더러운 발굽이 존재 했던 곳.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는 나.
한숨 밖에................. 나올수 없었다.
다음 이동장소 궁남지.
백제때 만들어진 최초의 궁궐 뒤 연못.
여기까지 걷는 데 정말 너무 힘들었다.
공주와 달리 세워주는 차도 없었다 --;
그래도 연못은 멋졌다--;
예전에는 이 3배의 규모였던걸.
지금은 큰 학교 운동장크기로 축소시켜 놓았다고 한다.
연못위에 떠있는 작은 정자 하나.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작은 나무다리.
그 안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한쌍.
1500년전 그곳을 거닐던 왕과 왕비의 모습.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2개나 찍었다.
한쪽에는 또다른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연잎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통재라. 연꽃들은 이미 다 지고 안남아 있다고 한다.
좀더 일찍 올걸 그랬나..
하긴..좀더 일찍왔으면..했지.
정말 시의적절한때의 여행이였으니.
지도를 보니 궁남지 바로옆에 망해정이 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세운 화려한 정자.
주색잡기에 미쳐있을 때 이 건물을 짓자.
사비성 백성들이 이렇게 말했다나 어쨌다나.
"망하려니까 망해정이지!"
근데 물어보니 한참전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씁쓸했다.
걸어서 다시 부여 국립 박물관으로.
내 다리에 내가 대견해 했다.
이곳이 자랑하는 문화재는 국보 287호 백제 금동대향로.
알고보니 지난주 중앙일보에 이넘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한다.
음...아무리 봐도.
백제인들의 문화감각은 탁월한데가 있다.
삼국의 다른나라와고는 달리 도교를 널리 수용했던 백제.
금동대향로도, 백제의 기와나 망새도.
도교풍임을 새삼 느낄수 있다.
도교라면....상선약수 어쩌고 인데....
shit..난 아무리봐도 도교체질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옥과 유리로 만든 막대모양의 장신구..
(이름을 까먹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이 장신구가.
그렇게 이뻐보일수가 없었다.
중요문화재도 아니고 해서 사진도 못찍었는데.
(이미 이때 사진기를 거의 다 써버렸다--;)
정말 저거 몆개만 훔쳐서 애들한테 선물로 주고싶다는 생각이--;
기념품전시실에서 잠깐 구경을 했는데,
정교하게 만든 실물크기 금동대향로 복제품의 가격이,
자그만치 6,500,000원이라고 한다.
(실물은 60cm크기다..)
차라리 차한대를 사고 말지.--;
근데 복제품이라도,
저렇게 보니 정말 너무 멋있기 짝이 없다.
계속해서 쉬지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부여읍이 작은 촌동네라지만.
문화재들이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에워싸고 있는 이상.
각 유적지마다의 거리는 장난아니게 되어버린다.
버스도 잘 안다니길래.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아깝길래.
걸...었...다...
자..이제 부소산성.
그리고 내가 가장 원했던 장소. 그 자리.
洛花암.....
부여에서 준 관광 안내도에 이런 말이 있다.
금강이 부여에와서만 백마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지.
낙화암을 보면서 느끼시라고...
부소산성에는 볼게 참 많다.
부소산성 정문에서 낙화암까지 거리가 3km정도인데.
(산길이다....;;)
암자나, 절, 백제 유적지들.....
그중 삼충사라는 곳이 있다.
백제의 마지막 충신.
성충, 홍수, 그리고 그 유명한 계백장군의.
3충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란다..
성충...보통사람들은 거의다 백제때 충신이라면 계백밖에는 모르지만.
계급은 이사람이 더 높다.
성충은 좌평(백제 16관등중 1위)이고,
계백은 그 밑에 달솔(16관등중 2위)거든.
의자왕의 실정을 보다못해 진심으로 충언을 수십차례 올렸지만.
의자왕은 그를 무시하고 끝끝내 성충을 내버렸다.
성충이 옥중에서 죽으면서 남긴말.
만약 해군이 쳐들어오면 탄현을,
육군이 쳐들어오면 기벌포만을 방어하신다면.
백제는 결코 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마저 무시한 우리의 의자왕.
만약 이 간언이 받아들여 졌다면.
김유신과 계백과의 싸움.
승자는 달라졌을거라고 한다.
하긴..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둘수 없지만.
우리네 현실이 이런것처럼.
홍수.
성충의 사위(맞나? 기억이 가물..--;)이자 제자.
역시 충신으로 할말 다하다가.
노한 의자왕에게 결국 죽고 만 비운의 충신.
계백.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거든.
아니, 대학가기 위해서 공부했다면.
이 사람 모르기도 쉽지 않겠지.
부연설명은 하기도 싫다.
올라가면서 물이 없어 고생하기도 했고.
장사꾼들의 호객행위에 짜증도 났고.
무엇보다 지칠대로 지친 다리로.
이 산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에,
짜증과 고통이 밀려왔다.
정말 낙화암이 아니였으면 내려갔을 것이다.
결국 도착한 백화정.
그리고 낙화암.
나오는 것은 오로지 감탄사.
아! 낙화암!
저녁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금강의 물결.
험준한 바위위에 외롭게 세워져 있는 백화정과 낙화암.
3000궁녀의 슬픈 전설이 묻힌 이곳에서.
형언할수 없는 감정이 들끓어 오른다.
괴로웠다.
이곳에서 어떤 말 할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괴로워서 어쩔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 해야하는 말. 그 어떤 표현도 할수 없이.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하늘과 바위.
그리고 그 밑을 유유히 흘러 건너가는 백마강의 모습.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세월의 유구함을 자랑하며 흘러가는 백마강.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메어버린 목은 괴상한 끓는 소리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그림도.
이보다 더 생생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진을 찍긴 찍었지만.
이곳에는 사진으로 찍을수 없는.
그 무엇이 담겨져 있는 것만 같다.
3000궁녀를 따라 내려가고 싶은 그 루트를 못따라간 것은.
구차한 변명없이 그대로 말해서 용기가 없었기 때문.
아무말 할수 없이.
짧은 시간밖에 할수 없었던 낙화암을 등지고.
고란사쪽으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려왔더니 이제 선착장이 보인다.
백마강을 건너 구드래공원으로 가는 유람선이 있는데.
마침 구드래 공원도 열람목적지에 끼어 있었고.
지금까지 올라왔다 내려왔던 길을 다시 걷자니 앞길이 까마득해져서.
비싼 돈 내고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
그래도 작은 위안은.
이 배가 막차인지라.
구드래 나루터로 갈 때 배안에 탄 관광객은.
오로지 나 혼자뿐이란 사실이지.
유람선 한 대를 전세내서 강을 건너는 기분.
배를 타고가다가.
익숙한 장면,
사진에 수없이 나오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석양뒤에 낙화암과 그앞을 흐르는 백마강을.
필름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셔터를 정신없이 눌렀다.
낙화암.
낙화암.
낙화암.
낙화암.
그 이름속에 담겨져 있는 슬픔.
그 이름속에 담겨져 있는 애환.
그 이름속에 담겨져 있는 괴로움.
그 이름속에 담겨져 있는 진실.
의자왕은 대개가 포악하고 주색잡기에 정신없는 왕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그의 어릴 때 모습을 본 중국사신들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동방의 해동성자가 나타나셨다.
영민하고 총명했던 의자왕의 태자 생활.
왕위에 올라섰을때도 처음에는 그 치리함에 있어서 해동성자에 걸맞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변했다고 한다.
나, 지금은 칼럼인지 기행문인지 모를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본다.
의자왕은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뀌어 버릴수가 있던 것인지를.....
난 역사학도, 과거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추정할수 있는 생각을 하기에,
부끄럽지 않을수 있는 자리에 있다.
의자왕이 어떤 생각으로,
백제를 다스려 왔는지는,
고증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 진실을 완전히 알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 생각하며 추측을 던져본다.
그 영명한 의자왕의 치세가,
망국의 왕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스러져 가는 모국의 운명을 예감했기에,
자포자기 했던 것은 아닐는지....
자포자기 하여 모든 희망을 던져버린 채,
결국 주색에 빠져 나라를 그르치게 되었던 것은 아닐런지....
역사의 순응과 도표를 위해서 말이다...
구드래 나루터와 구드래 조각공원.
생각보다는 그리 볼것이 많지 못했다.
공주의 곰나루공원과 비교해 보았을 때,
부여의 그것은 규모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지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딘지 모르게 눅눅한 분위기.
슬픔이 담겨 있는 듯한.
과거에는 찬란한 고대왕국의 수도.
이제는 대한민국 조그마한 읍행정 구역의 한 변두리.
부여의 현 주소를 말해주는 듯 한곳이.
바로 이곳 구드래 나루터와 낙화암 주변이였다..
그때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여의 하늘색. 정말 잊기 힘든 그러한 색깔이였다.
붉은 태양의 노을빛과.
거의 스러져가는 연한 하늘빛.
그리고 그 둘을 하나로 혼합시켜주는 회색빛 구름이 뒤엉킨 하늘.
붉은 빛도 아니고,
푸른 빛도 아니며,
쟃빛도 아닌, 표현하기 힘든 색깔의 하늘에.
이름을 붙여 보았다.
"절망색"이라고...
다시는 과거 백제의 영광을 누릴수 없는 부여는,
저 하늘빛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이렇게 둘러보고 나니...
이미 밤이 늦었다.
밤이 되면 유적지도 문들을 닫으니.
나도 잠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아, 그전에 일단 무얼 먹어야지 살지--;
식당을 찾는데 갑자기 "어라하"라는 식당이 보인다.
왠지 낮설지 않아서 관광 안내책자를 보니,
향토 특색 음식점이라고 소개가 되어있는 식당이다.
홍삼영양 돌솥밥 이라는 엄청난 메뉴가 있기에,
먹는 것도 관광이라는 기분으로 무턱대고 쳐들어 갔다가.
지금까지 아끼고 아낀 돈을 몽땅다 날려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돌솥밥 한끼 7000원.
지금까지 내 한끼식대가 2500원~3000원임을 생각해볼 때,
이건 사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암튼 잘 먹었다.
이런곳도 명소라는데, 한번쯤은 가보는 것도 좋지.
"부여장로교회"라는 곳을 찾았다가.
저녁예배만 보고 나와버렸다.
역시 내가 잘곳은 pc방밖에 없나보다.
우이씨..
이 동네는 왜 이리 비싼것인지--;
하룻밤에 8000원이라는 거음을 주고,
컴터앞에 앉았는데,
아무리 졸려도 돈이 아까워서 내가 컴을 하지..;;
반가운 사람중 하나를 컴으로 만났다.
여행중이라고 하니까 상당히 놀라워 했다.
그것도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하니 더더욱.
....이야기를 했다.
나보고 그만좀 정신차리란다.
나, 그러기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내게 닥친 절망이란 것은,
정말 끓을수 없는 강철사슬인가 보다.
정말 20~30km는 돌아다녔을만한 하루.
스르륵 눈이 잠기더니.
결국 책상위에 고개를 쳐박고 자버렸다.
일어나 보니 아침 7시.
더 있다가는 추가비용 내기전에,
서둘러 돈 지불하고 버스터미널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말이다.--;
평일인데 터미널의 아침은 매우 부산스러웠다.
이미 개학을 한 교복입은 학생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아줌마들과 할머니들도 어디를 가시는지.
한주의 시작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도 서울에 올라간다면 저럴수 있을까..
나는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기 위해 한참을 고심했다.
공주와 부여를 제외하면,
확실한 자료가 있는 곳이 내게 없었고,
그냥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니다.
여행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고심 끝에 고른 곳이 전주.
전주 이씨. 내 본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전라북도 No,1의 도시를 한번쯤 보고싶기 때문에.
원래 공주에서 송산리 고분군을 보았으니,
부여에서도 그와 비교 대상인 능산리 고분군을 구경했어야만 하는데,
읍내에서 좀 많이 떨어진 공간이기에,
그곳을 못보고 떠나는 것이 약간 안타까웠다.
버스안에서 밀린 잠을 보충하다가.
결국 버스터미널이 아닌 이상한 곳에서 내리고 말았다.
잠이 덜깬 탓이다.--;
전주.
조선 500년의 역사를 보았을 때,
이곳을 빼놓고서 어떻게 조선왕조를 생각할수 있으리요.
내 핏줄의 원류가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했지만,
별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약간 무덤덤하게 도착한 전주.
간신히 파출소 앞에서 지도를 찾고,
종이 박물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워낙 한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보니.
종이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고 해도 이상할거 하나 없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 데,
박물관까지 걸어가려면 너무 멀다고 다들 버스를 추천한다.
근데 버스를 세우고 물어봐도 거기 간다는 차가 없길래.
그냥 무턱대고 걸어걸어 갔다.
이미 공주부터 걷는데는 이골이 났고,
전주가 아무리 크다해도 서울만큼이나 하겠냐.
내 생각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역시 전주, 큰 고장이니 만큼.
적어도 내 고장 일산보다 2~3배쯤 커다란 이 도시안에서,
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 엄청 애써야 했다.--;
5km넘게 걸었나?
그 동안 몇번 길을 잘못들어 고생하기는 했지만,
결국 한솔 종이 박물관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난 한숨과 함께 힘이 쭉빠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렇다...
월요일은 국가 공공기관들이.
문을 닫는 날이라는 것을 미쳐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전주에서 대충 이 종이박물관과,
전주 국립 박물관을 제외하면 별로 볼 것 도 없던데,
데체 이 동네 왜 온거지?
결국 SOS를 타전해야만 했다.--;
전주에 사는 아는 이가 하나 있어서,
연락를 했더니 마침 회사도 쉰다고 한다.
잘됐다~ 내 도우미 좀 해줘 T.T
(예림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고맙다는 소리를 하고싶구나 ^^;)
전동성당이라는 곳으로 오라고 한다.
역시 물어물어,
이번에는 실수 없이 버스 잘타고 내려갔다.
종이박물관은 전주 북쪽끝부분에 있는데,
전동성당이라는 곳은 남쪽 끝부분에 있었다.
걸었다면.. 정말 돈 아깝지 않게 버스 잘탔다고 생각한다.
(서울 역삼동에서 신촌까지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면 알수 있지..)
전동성당 도착.
알고보니 여기도 유적지다.
200년 천주교 성당이 세워졌고.
지금 이 성당 본당역시 사적지에 해당된다.
도우미(?) 오기전에 성당안에 들어가보았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안에 서 있는 그 엄숙함이,
프로테스탄트의 그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낳고 있었다.
중세 고딕양식 풍의 성당 내부.
좌우편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성상.
성상 자체는 별로 맘에 안들긴 하지만.
정말 누구라도 엄숙감에 젖을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한몫하고 있었다.
성수가 남아 있길래.
잠시 약간 떠서 손을 씻었다.
그 쪽 사람이 보았을 때 나쁜 일이라면 사죄를--;
오늘의 도우미 이예림양 출현.(--;)
계속 혼자서 다녔던 여행에,
처음으로 동행인이 있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전동성당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진을 찍었다.
이런 예술품. 그냥 지나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깝기에.
전주 경기전을 둘러보고.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 영조와 철종의 초상등을 구경했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쯤 되는 분들.
과연 나란 놈한테 저 조선 500년 왕조의 피는 얼마나 남아 있을지?
옆에서 가이드(내쪽 말고--;)가 철종을 소개하면서 강화도령...등등을 말할 때,
그 뜻이 생각나 피식 웃고 말았다.
강화도령.. 철종은 원래 왕손중에서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당시 외척들의 권력 투쟁이 빛어낸,
우연히 뽑혀버린 왕이다.
강화도에서 나무캐고 다니던 10대 총각이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다는,
그런 동화속 이야기가 100년전 우리나라에서는 현실로 있던 사실이다.
그 강화도령, 국왕폐하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소설책에서는 부인했던거 같은데 실제로는 혹 모르지.
일단 때도 되었으니 다시 점심먹고,
(아침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하나로 때웠다..어제 그 바가지의 여파가 너무 컸다--;)
여행길을 향해서 떠났다.
생각해보니 전주에 왔는데 전주 비빔밥도 못먹었다.
아무래도 어제 부여에서 난 사기당한 것 같다.--;
관광자료를 얻기위해서 전라북도 도청까지 가는 쇼를 벌였는데,
친절하게끔 도청에서 2청사로 가는데 셔틀버스까지 태워준다.
이번여행으로 얻은 새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우리나라 공무원들, 생각보다 친절하다.
전주와 전라북도에 관한 유적과 관광자료들을 한아름 얻었는데,
이런..도우미도 모르는게 엄청 많았다.--;
그러나 중요한 정보를 얻을수 있었다.
관광자료에 나와 있는 사진들.. 거의다가 사진빨이라더군.--;
하긴...우리학교 모 기념관도 사진만 본다면,
우리학교 정말 넓다고 착각할수 있는 것이 사진빨이니...;;
조선시대 귀빈들을 접대하던 전주객사도 구경하고,
이동네의 시민공원인 덕진공원을 찾아갔다.
아마도 일산의 자랑 호수공원도.
이보다는 아기자기하게 꾸미지 못하는 것 같다.
부여에서 본 궁남지를 연상케하는 정자와 호수.
그리고 그 주변 연못을 가득메운 연꽃잎들의 천국.
이미 꽃은 거의다 지고 말았지만,
홍련 몆개가 때늦게 봉우리를 피운 것을 보기도 했다.
홍련보다 백련이 더 개체수도 적고 희귀종이라지만,
어떠냐, 꽃이 이쁘면 장땡이지.--;
6~7월쯤에 오면 공원 전체가 연꽃으로 뒤덮혀 있는 것을 볼수있다는 도우미의 말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오는 길에 향토기념품 판매점에 잠깐 들렸는데,
친구들 주려고 뭘사려해도 너무 비싸기 짝이 없다.
싼것들은 몽땅다 조잡하고 싸구려 티가 팍팍나기에,
(돈도 다 떨어가는 시점이였다.--;)
그냥 나중에 잘해주기로 하고 아쉽게 나와야 했다.
전주 이고장도,
역시 큰동네 인지라 볼게 생각보다 많았다.
도우미는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젓지만.--;
역시 작은 동네는 절대 아니다.
더 볼것이 많았지만 박물관들이 몽땅다 볼수 없게 되어서,--;
역시 지방 명물(?)인 전북대학교로 쳐들어 갔다.
전북대...그래도 지방 명문 국립대중 하나 아닌가.
얼마나 멋있는지 한번 구경좀 해줘야지.
학교..이뻤다.
특히 평지라는게 너무 맘에 들었다.--;
잠깐 학생회관 종교분과 CCC방에 들어갔다가,
잠시 인사만하고 나와버렸다.--;
(도우미옆에 두고 나혼자만 이야기하기가 좀 그랬다.--;)
99학번 선배라는 사람이 음료수 두캔을 사다주었는데,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다시 볼날이 있겠지.
이 학교는 이미 개학을 한지라,
바쁘게 움직이는 학생의 수가 무척이나 많았다.
나 역시 이제 곧 저 사람들처럼 바쁘게 움직이겠지.
마지막...
학생에게 모든 방학이 그렇다지만,
이번 방학은 정말 너무 아까운 세월이였다.
수업을 듣기 위해서,
동아리방으로 가기 위해서 걸음을 옮기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내 발걸음과 달리 너무나도 경쾌하고 가볍기만 하다.
박물관과 향교건물을 못보아서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한채,
도우미와 작별인사를 한후 곡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제 곡성이다.
여행 3일만에 전라남도,
우리나라 육지의 끝까지 홀로 내려왔다.
딴 여행지들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달리 볼것이라고는 없다.
아니 단 하나 내가 이곳에 관심이 있는 것은,
우리 어머님의 생가가 바로 이곳에 있다는 사실정도 일테다.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지금까지 내가 왔던 모든 여행지를 통틀어,
가장 시골이면서 외진 곳.
아직도 5일장이 존재하는 가운데,
같은 산골마을이면서 유서깊은 동네인,
구레, 하동보다 훨씬더 외지고 알려지지 않은 장소.
언덕위를 덮은 계단식 논들과,
학교 밑에 있는 조그마한 버스정류장, 그리고 도로옆에 늘어서 있는 논밭.
그 어떤 곳보다 더 쓸쓸한 이곳.
우리 어머니께서 자라오셨던 이곳.
쓰러져 가는 폐가와 마을의 정자들.
강씨 성을 지닌 이들이 유난히 많은 집성촌.
(우리친척들은 강씨없다.--;)
어디서 유래해 왔던 것인지.
우연히 자리잡고 살아가던 이들에게 있어,
결코 꿈에도 벗어나지 못할.
조용하고 한산한, 그러나 을씨년스럽지는 않은.
그러한 곳이 전라남도의 한 산골마을 곡성이라는 곳이였다.
4년도 더된 기억을 바탕으로 찾아온 외조부의 집.
우리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사일을 나가셨는지,
집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열려 있으나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친척의 집이라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객이 혼자 들어설수는 없고,
가방과 가져온 선물을 들고 서있기를 한 20분.
밭일 갔다 돌아오신 할머니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친 외할아버지는 아니시다. 설명하기 힘듬.)
이제는 편히 쉬시고 자식들에게 의지해도 좋으련만,
아직도 끝없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이 고장에 대한 애착으로 오늘날을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
이들의 사랑이 우리 어머니들에게,
그들의 사랑은 다시 나와 우리들에게,
그리고 나의 사랑은 과연 어디로?
몸은 상당히 불편했지만,
남은 일들을 아주 약간 도와주고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많은 이야기 다 하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 가운데 내가 누워 있는 방은,
나의 이모들이 학생시절을 보냈던 바로 그 장소.
그리고 언젠가, 30년도 더 오래되었을때에,
우리 어머니께서 누우셨을 그러한 장소.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가.
나의 유래는 어디서 부터인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피곤한 가운데서도 잠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밀려오는 생각뿐.
그리고는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두다리 쭉 펴고 잘 수 있다는 것, 정말 사치이자 행복이였다.
더 많이 자고 싶은 생각 굴뚝같지만,
어떻게 타지에서 온 손님이 주인보다 늦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좀 더 자도 괜찮을텐데 왜 일찍 일어났냐고 하시는 할머니의 관심.
아침을 틈타 잠깐 밖으로 산책을 나왔다.
초등학교 시절 여기 놀러왔을 때 생각들.
마을위 저수지에서 마음 껏 낚시도 즐기고,
지금은 안양에 살고 계시는 삼촌과 함께 읍내에 나가서 놀기도 하고,
마을 길 우물가에 들어가 목욕을 하기도 하고,
밤중에 밖에 나가는 것이 너무나 무서워 했던 이유는,
집 밖에 서 있는 폐가의 모습이 너무 을씨년스럽기 때문.
어렸을 때 거의 내키 절반만했던 고드름을 가지고 칼싸움도 하고,
삼촌의 도움을 받아 대나무로 만든 활을 가지고 활쏘기도 해보고,
리어카 혼자타다 그만 엎어져 논 한바닥에 쳐박히기도 해보았고,
화장실 가기 무서워 꼭 이모를 불러 같이 나가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변하여 건물도 좀더 현대식으로 개조했고,
외양간 옆의 화장실도 이제 따로 분리되어 청결하고.
동구 밖 도로길은 깨끗이 포장되어,
남은 것은 예전에 붐볐으리라 생각되는,
조그마한 정자가 세워졌던 그 터.
아무도 없는 논 한가운데.
세월의 흐름에 잠시 내몸을 내어 맡기고만 싶은데,
왜 시간은 점점 나를 괴롭게만 만들어 가며,
왜 상황은 내가 가장 예측하기 싫은 방향대로만 흘러가야 하는 것인지.
가늘고 긴 소리.
상처입은 마음에서 뿜어나오는 함성이 아닌,
어찌할지 몰라 방황에서 나오는 한숨소리 아닌,
고통속에서 부르짖는 한 마디 사자후가 아닌,
순수하게 목을타고 흘러나오는 긴... 소리 하나.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
그증 가장 자연에 가까운 소리.
그러한 소리를 내어보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이상주의자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그만 탁해져만 버렸구나.
아침을 먹고, 바로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께서 자꾸 집에 머물다 가라고 하셨고,
나 역시 그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기 짝이 없건만.
가야만 하는 길.
두 노인네들만을 남겨두고 떠나는 나의 여행길.
다시 난 혼자가 되어.
이 길의 마지막을 장식하러 떠난다.
다시 읍내로 돌아온후 군청을 찾았다.
문화재나 역사유적지, 관광코스를 찾는데 있어서,
청사보다 더 좋은 자료 얻는데는 정말 드물지.
군청 공무원 아저씨의 도움으로 상당량의 자료를 얻었다.
사학과 2학년 학생이 혼자서 왔다니까 놀라는 눈치더군.
하긴, 이런 볼것도 얼마 없는 시골마을에 혼자서 여행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행책자를 보았더니,
볼게 예상외로 많음에 놀랐다.
국가 보물도 4개나 되고,
그러나 어쩌랴, 이제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
마지막 내 행선지는 전라북도 남원.
공주-부여-전주-곡성을 거쳐.
대한민국 국토의 서쪽 절반을 돌아 도착한.
내 여행의 종착지가 될 지점.
남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정리가 잘되있는 동네라는 것이다.
도착한 순간 깨끗한 도시의 환경과 정돈된 환경들에 놀랐다.
그리고 이 마을을 대표하는 것.
그것은 그 유명한 성춘향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가 있는.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도시. 남원.
춘향전의 원래 이야기를 혹시 알고 있는지?
춘향이란 여인이 살았다는 것은 거의 정설인 것 같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야기속에 춘향이와 실체로 추정되는 춘향의의 미색은,
거의 하늘과 땅차이로 비유할수 있는 것이 다른점이라고 해야하나.
너무나도 못생겨서 시집도 못가고 늙어죽은 처녀귀신.
남원 부사의 꿈속에 나타나 자신의 원한을 풀수 있도록.
자기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는 협박에 시달려.
지어낸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는 뒷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춘향전의 진실이다....
실제 성춘향이라는 인물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낸다.
그래...그렇게 해서,
죽은 뒤에라도 만족할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이번에도 자느라고 버스 정류장을 잘못 내렸는데,
천만다행이도 이번에는 내린 곳과 광한루가 아주 가까웠다.
광한루쪽으로 가니 정말 이걸로 돈벌어 먹을수 있을만큼,
내가 여태까지 들린 어떤곳보다도 더 주위 환경과 치장에 힘썼음을 알수 있었다.
아무래도 남원은 관광수입이 시 수입의 절반은 될 것 같다.
여기에도 유감없이 존재하는 것은 매표소.--;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그 꽃을 뿌리고 다닌다.
그래도 이렇게 투자가 있기에 여기를 제대로 구경할수 있는 것이겠지.
옥황상제가 있는 옥경을 표현한 완월정.
춘향전을 소개한는 동시에 해학으로 가득찬 월매집.
옆에 있는 그네와 널뛰기 판은 관광객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끔 꾸미었으며.
한때는 조랑말에 태워서 성춘향과 이몽룡흉내도 내게끔 했나보다.
월매집에 있는 정한수.
서울로 떠난 서방 이몽룡이 부디 장원급제해서 돌아오게 해달라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장소에서 손과 손수건을 씻고서,
설치되어 있는 조그마한 방안에는,
행랑채에서 밥먹는 방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아, 향단이는 옆에 부엌에서 밥짓고 있고.
춘향관이라는데 들어가서 춘향전의 줄거리를 요약해놓은 삽화를 보는데,
매우 익숙한 싯귀 하나가 보인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춘향전을 누가 지었는지는 정말 작가 미상이다.
그러나 그가 양반출신이 아닌 이상.
이 싯귀만큼 당시 백성을 잘 이해하는 글도 없을 것이다.
광한루.
보물 제 281호.
황희 정승때부터 지어졌고.
인조 4년때 마지막으로 재건되어 400년 가까이를 존재해온,
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방자데리고 놀러왔다가,
옆에서 그네타는 춘향이를 보고 반했다는 바로 그 장소.
춘향전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집어치우고서라도.
광한루의 멋과 누각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사를 발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기를 다 써버린 것이 너무나도 후회가 될 정도로.
주심포 양식에 따라 지어진 늘씬한 지붕의 처마선과.
서까래를 연결시킨 절묘한 조선시대 건축의 예술.
건물이 너무 오래되어 관계자 이외에는 출입불가능 하다는 것이 아까웠다.
광한루 옆에 있는 오작교.
남녀가 서로 1년에 한번씩만 지나가면 금슬이 좋아진다나 어쨌다나.
주위 연못에 떠 다니는 내 다리통만한 잉어떼를 보면서,
오작교를 혼자 지나갔다.
아니, 그때 내옆에 있던 것은,
아마 절망이 아니였을까.
그러면 별로 보기 싫은 애인인데.
광한루도 보았고.
잠시 점심대용품으로 빵한조각, 우유하나 사가지고.
만인의총을 향해 떠났다.
만인의총. 정유재란때 왜적에 맞서 항거한.
남원시민 만여명이 몰살당해 함께 묻혀져버린 묘비.
여기까지 오자,
솔직히 별 감흥이 없어져 버렸다.
기타 유적지들에서 느낀 생각이나 감정들은 별로 들지 않고,
조금 귀찮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인의총이 계속 올라가는 계단위에 설치되어 있어서인지.
나를 이기지 못해 그냥 되는대로 있는 것인지.
박물관과 의총비를 구경하고 내려가는 길.
마지막으로 아무생각없이 짧은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관광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다행이였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남원에 좀 더 볼것이 많았지만,
극도로 지친 이 여행에서,
더 이상의 시간도, 돈도, 의지도, 능력도 떨어진 상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 남원역으로 향했다.
돌아올때는 기차를 탄다니 그나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남원역.
내가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만 바로 그곳.
기차시간이 한시간이나 남았지만,
기차 플랫폼과 철로가 보고싶어져 밖으로 나왔다.
전형적인 시골의 역사.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
돌을 만지니 마치 불에 구운 철덩어리인 듯 뜨겁게 달아올랐고.
난 가방을 한구석에 내려놓은채 기차길을 바로보았다.
아! 기차길 옆에 피어있었던,
철로의 자갈돌 위에서도 자라났던 그 꽃들이.
너무나 미칠 듯이 내려붓는 태양의 뜨거운 복사열을 받다못해.
푸른 잎사귀들을 그대로 간직한채 뿌리까지 드러내고 말라죽어 있는 모습이란.
화가 났다.
말이 자갈이지 작은 바윗돌을 연상시키는 철로바닥의 돌들 위에서.
그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피어오른 한 포기의 풀과,
그 안에서도 일어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아주 작은 피다 만 꽃 한송이.
왜 그 한송이를 내버려두지 못하고,
저 태양의 끝도 없이 내려쬐는 저 빛앞에.
광합성은 둘째치고 말라죽어가는 저 풀 한포기한테,
한 순간의 그늘과 비를 얼마나 몸서리치게 원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소용없이.
저 도저히 생물이 살아갈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철길위에서 피어난 가녀린 꽃.
결국 더 살지 못하고 햇빛에 못 이겨 죽었음을 알았을 때.
내 눈에서는 약간의 습기,
H2O 분자의 덩어리들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역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너무 슬퍼서인지도 모르겠다.
저 잔인함.
겨우 핀 한송이 꽃.
겨우 핀 한포기 풀.
그 많은 역경을 딛고 간신히 그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
이 불볕 더위가.
이 쉬지않고 내려 붓는 고통의 열기가.
바위를 이겨내고.
그 바로옆을 지나치는 기차의 소음소리와 매연을 이겨내고,
전혀 양분이라고는 있지도 않은 그 돌 더미속을 이겨내어.
간신히 이제 이름모를 꽃 한송이를 피어내려 하는데.
왜, 태양은 그토록 가혹하게.
단 한순간의 비를 허락하지 못하고.
쉼 없는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이름모를 풀 한포기가.
온갖 희망을 잃어버리고, 뿌리까지 드러낸채.
전혀 시들지 않은, 그 있던 모습 그대로.
앙상히 말라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얼마나 소중하게 핀 꽃인데.
얼마나 괴로운 과정중에서 자라난 풀인데.
왜 그걸 봐주지 못한채.
이를 스러지게 만드는가.
나의 작품 "생각 6"에서.
난 전화박스 위에 핀 꽃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그보다 더 지독한 고통을 겪은 이 풀한포기앞에.
나는 소리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앞에.
남원 역사를 강타하는 태양빛을 전신으로 받으면서.
풀을 집어 들었다.
조용히.
화장하고 가루가 된뼈를 강가에 뿌리듯이.
그 풀을 손바닥으로 잘게 비벼.
철길을 향해 조금씩 날렸다.
그 순간 난 보았다.
이렇게 죽어간 풀들이.
역사의 철로위에 군데군데,
내 눈앞에서만 해도 수십포기가 넘게.
흩어져 있음을.....
기차는 곧 왔다.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도중 창밖을 보면서.
그간 돌아다녔던 여행지들을 잠깐씩 회상하다가.
그마저도 의미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얀,s 칼럼에서는.
경수필 뒤에 오는 결론을 통해서 나를 표현했다.
그러나 내가 칼럼을 8편에서 마무리 지었듯이.
그 외전의 성격을 띄고 있는 이 9편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