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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용 경장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 후 훈련 준비 중. 어디선가 “여객선이 침몰한다. TV 틀어봐라”는 소리에 TV를 틀었고, 뉴스를 통하여 현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형여객선이라 아주 천천히 전복되어 탑승객을 모두 구조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팀장님과 대원들은 모두 뉴스에 집중하게 되었다.
구조장면이 나오면서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나왔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 대통령이 현장으로 긴급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팀장님을 비롯하여 특공대 10명이 잠수장비를 싣고 출동차량 2대를 이용하여 출발했다.
우리는 출동차량 안에서 실시간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였고, 전원 구조됐는데 복귀 지시가 내려오겠지 라는 말을 나누며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하던 중 여객선 안에 탑승객이 200명 이상 있다는 긴급속보가 나왔다. 믿기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고, 바로 현장으로 쉴 새 없이 달렸다.
9시간쯤 쉬지 않고 달려왔을까. 목적지 팽목항에 도착하였을 때 여기저기서 통곡하는 소리, 고함지르는 소리, 실종자 가족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관부처 공무원들이 끌려 다니며 욕을 먹고 있는 모습, 이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전국에서 모인 민간인과 국가기관의 구조 세력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못해도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해경 P정을 이용하여 팽목항에서 1시간 가량 현장으로 이동하였고, 3009함에 승선하였을 때 잠수작업을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여기저기 누워있는 군․경, 그리고 대략 200여명이 넘어 보이는 잠수 인력들로 복잡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와 계속되는 구조작업 회의로 정신이 없었다.
4월 17일=누구도 말하지 않고 침묵만 흐르다
각 지역별 구조대원을 나누어 분산 배치를 하여 나를 포함한 동해특공대 10명은 3001함으로 배치됐다.
고속단정을 이용 해상수색을 실시하며 수중수색에 대비하고 있었다. ‘맹골수로’ 流速(유속)은 울돌목 다음으로 빠르다. 시야도 나쁘다, 여객선은 뒤집어진 채 船首(선수)만 떠있다. 내가 수중으로 들어간다면 내 자신의 안전조차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료들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만 흐른다.
4월18일=屍身(시신)은 너무 어리고, 차갑고, 딱딱했다
이날 나는 3001함 고속단정을 이용하여 6시부터 12시까지 해상 수색을 했다. 단정에는 3001함 구난팀장과 나를 포함 경장 김연종, 장준호가 동승했었다. 해상수색 중 사고지점에서 남성으로 보이는 屍身(시신) 1구가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떠올라 우리가 수습했다. 시신은 너무 어리고, 차갑고, 딱딱했다.
3001함에서 쉬고 있는데 언론에서는 ‘에어포켓’이 이슈가 되고 있다. 뉴스에서는 자기네들 입맛에 맛는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입을 맞추고 원하는 답을 얻어내고 있는 중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국민들과 실종자 가족들은 동요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에어포켓이 있다 한들 세월호 객실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누구도 이런 사실을 언론이나 유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할 수가 없다. 여론이 제 멋대로 흘러가게 될 것 같다.
4월19일=숙달되지 않은 장비를 사용
깊은 수심과 빠른 유속으로 스쿠버 장비로는 더 이상 船體(선체) 진입을 하여 장시간 작업 할 수 없다. 팀장님이 팀원들을 불러 모은 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는 말씀하신다.
“표면 공급식 잠수장비로 잠수할 수 있는 사람은 지원 부탁한다.”
순간 팀원간에 정적이 흐르고 서로에 얼굴만 쳐다보며 눈치를 살핀다. 나와 조민수 경장이 어렵지만 조심스럽게 지원했다. 표면공급식 장비는 스쿠버 장비와 다르게 공기공급 호스를 이용하여 공기를 공급하는 시스템이며 우리 팀원들은 표면공급식(일명:후카) 장비에 대해서 교육을 받거나 착용해본 적이 없는 장비였다. 숙달이 되지 않은 장비로 수중 작업하는 것을 우리는 禁忌(금기)처럼 여긴다. 水中에서 위급상황 발생시 대처하거나 위험을 모면할 수 없다. 수중 30m 이상에서 사고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월21일=의식 잃은 UDT 대원을 돕다
해상에 UDT 보트가 많이 보인다. 보트와 보트 사이에 하잠줄을 연결하여 수중수색을 하고 있었다.조민수 경장과 함께 수중수색을 위해 잠수장비를 착용했다. 그런데 우리가 入水 직전, 20m 정도 떨어져 있는 UDT 보트 사이에서 UDT 다이버가 급상승하여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의 오른손에는 의식을 잃은 다이버가 붙들려 있었다.
보트 위에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도와주기에는 힘들어 보였고, 순간 조민수 경장과 함께 잠수장비를 벗고 물로 뛰어들어 수영으로 접근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이버가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며 보트 위에선 그의 목덜미만 간신히 잡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나는 의식 잃은 다이버의 웨이트 벨트와 BC자켓을 분리했고 뒤따라 도착한 조민수 경장과 온 힘을 다해 보트 위로 의식 잃은 다이버를 올리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올릴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다이버 다리가 보트와 보트 사이에 연결해 놓은 하잠줄에 걸려 있었고 강한 流速으로 몸이빨려 들어가다시피 하는 상태였다.
내가 水中나이프를 이용해서 하잠줄을 끓으려 안간힘을 썼다. 줄 하나가 느슨하게 풀어질 무렵에 간신히 다리가 빠져나와 올릴 수 있었고 긴급히 후송되었다. 그날 저녁 의식 잃은 UDT 대원에 건강에 이상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안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4월24일=視野(시야)는 30cm도 보이질 않는다
언딘 바지에서 쿵! 쿵! 쿵! 쿵! 소리와 함께 컴프레서가 돌아가고 긴장감이 바짝 조여온다. 처음 착용해 보는 표면공급식 잠수장비마저 압박감을 준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수가 시작됐다.
수중으로 내려간다. 아니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하잠줄을 잡고 내려가던 중 강한 외부 압력이 느껴지고 몸이 휘청거리며 날아가는 기분을 느낀다.
1노트가 넘는 강한 유속이었다. 마스크가 벗겨지려 한다. 視野(시야)는 30cm도 보이질 않는다. 이런 잠수는 해 본 적이 없다. 산업잠수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월호 철판의 일부분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상태로는 작업이 불가하여 바로 상승하였다.
5월1일=끝까지 屍身을 포기하지 않은 金 순경
언딘 다이버와 김동완 순경이 1조로 入水하였다. 내가 언딘 바지에서 김동완 순경의 공기공급선을 잡고 텐더(안전)를 보던 중이었다. 언딘 다이버가 수중통신기로 屍身을 발견해서 김 순경에게 인계하여 상승시키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언딘 다이버는 상승했지만 먼저 출발한 김 순경은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수중통신기로 김동완 순경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불길하다. 작업을 지휘하는 언딘의 김천일 이사가 나를 향해 큰소리로 공기 공급선을 힘껏 당기라고 지시한다.
유속이 빨라져 호스를 당기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물속에서는 김 순경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나를 도와 두 사람이 호스를 함께 당겼다. 호스를 거의 끝까지 올릴 때쯤 김 순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구명복을 입은 屍身을 꼭 부등켜 안고 탈진한 상태로 물 속에서 끌려나오는 김 순경이 보인다. 끝까지 屍身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했고 존경스러웠다. 힘들고 위험하면 시신을 놓고 올라왔을 것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5월3일=둘째가 급성폐렴과 고열로 아프다는 전화
현장에 온 지 벌써 18일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바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집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와 둘째가 급성폐렴과 고열로 아프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올라가고 싶었고 곁에 있어주고 싶다 하지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5월4일=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언론
왜? 언론과 정부는 해경을 왜곡하는가? 현장에서 해경, 해군, 언딘은 사고 발생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여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각 언론사 취재기자, 장관, 대통령까지 방문하셨다. 허나, 언론과 방송에 보도되는 모습은 해군과 민간잠수사만이 나올 뿐 단 1초라도 해경이 구조작업을 한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구나…
5월 5일=年暇(연가) 허락
전화를 하는데 집사람이 울음을 터트리며 너무 힘들어 하고 있다. 고민 끝에 조심스레 박상호 팀장님께 집안 사정을 말씀드렸다. 팀장님께서 R․T(Rescue Tower·3009함 지휘부)에 보고 후 조심스럽게 개인 年暇(연가) 허락을 하시며, 당부사항으로 언론들이 해경을 타깃으로 안 좋은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으니 개인행동과 이곳 현장에서 나가는 것조차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 가족을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전쟁터에서 나만 빠져나가는 것 같아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몸조심하고 또 몸조심 하세요.
5월12일=집사람, “저기 다시 가야 돼?”
둘째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고, 집사람 얼굴도 밝아졌다. 뉴스에서 ‘민간 잠수사 작업 중 사망’ 이라는 긴급속보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집사람이 현장으로 안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기 다시 가야 돼?”라고 물어본다.
“안 가도 돼~ 하지만 내가 안 간다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도, 먹지도 못할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안아주며 귓가에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사랑해.”
5월15일=매순간 최선을 다하자
언론을 통해 실종자 가족의 행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누가 자식 잃은 슬픔을 알겠는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식이 죽었더라면 나는 더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 누가 우릴 비웃고 욕을 한다 해도…매순간 최선을 다하자.
5월16일=매일매일 屍身(시신)을 본다는 것
매일매일 屍身(시신)을 본다는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상당한 일이다. 그것도 陸上(육상)이 아닌 수중에서 시신을 마주하며 그 시신을 가슴으로 안고 상승한다는 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고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이 日常(일상)이 돼 버렸다.
우리는 이런 환경 속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누구 하나 우리를 알아 달라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왜곡된 보도와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해경을 질타하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게 언제쯤 가능하게 될지….
5월19일=국가에 배신당한 기분
대통령께서 해경해체 발표를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진상은 파악하지 않고,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보도 자료만을 믿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모습에 국가에 배신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해경이 창피하다며 명예퇴직하는 직원들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가족들의 전화가 여기저기 들려온다.
“여보 해경 해체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통령과 국회부터 해체하라”고.
5월21일=싸우지 않는 해경의 首長(수장)
해경해체 발표 후 청장님에 대한 원망의 글이 내부망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다. 지금이라도 현장이 아닌 본청으로 올라가서 대응해야 한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하지만 청장님은 현장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염을 기른 채 의자에 앉아 있다. 청장님이 오셔도 유족 중 누구 하나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해경의 首長(수장)이라면 왜곡된 언론과 해경해체 발표에 적극적으로 부딪쳐 싸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5월22일=똑같은 생활의 반복
다이버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남자 120명. 한정된 공간에 장기간 가둬두고. 반복되는 일상으로. 정해진 순번에 맞춰 수중수색 작업을 한다. 매일 눈을 뜨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된다. 무료해지고, 의욕이 떨어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경은 3개 조로 나뉘어 1개 조가 8시간씩 언딘 바지에서 대기하며 停潮 타이밍에 맞춰 수중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수중수색 작업 외에는 바지에서 대기한다. 언딘 다이버들과 해군 다이버들은 전용 컨테이너에서 휴식을 하고 있다. 해경은 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사이에 로프를 연결해서 천막으로 하늘을 가린 채 바닥에 종이 박스나 돗자리를 깔고 쉬고 있다.
5월23일=휴식이 필요한 시기
수색이 장기화되면서 잠수사들이 하나 둘씩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수색과 매일 접하는 시신들로 인한 정신적 압박이다. 수중에서 고된 작업으로 인한 피로누적, 체력저하, 심리적 상처들…휴식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 같다. 하지만 누가 이런 말을 꺼낼 수나 있는가?
5월 30일=민간 잠수사 사망
민간잠수사가 수중수색 작업 중 원인미상의 사고가 발생했다. 수중통신기로 신음소리만 반복되었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보조다이버가 긴급 투입되어 상승할 수 있었지만 헬기로 긴급 호송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벌써 두 번째 잠수사 사고였다. 이번 사고로 사고 발생시 환자 후송체계의 문제점이 도출되었고 보완되었지만…수중에서 다이버 사고는 목숨이 걸려 있다. 오히려 잠수사들의 마음만 무거워진 것 같다. 얼마나 더 잠수사 사고가 발생해야 수색작업이 중단될 수 있을까??
5월31일=추측성 기사, 이젠 신물이 난다!
동해청 특공대원들은 부재자 투표를 하기 위해 경비정을 타고 진도 서망항에 내려 면사무소로 향했다. 투표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 후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던 중 ‘민간잠수사 치료 후 아픈 몸을 이끌고 현장으로 복귀‘라는 타이틀과 투표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경비정으로 가는 우리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 실려 있었다.
우리가 민간 잠수사인가? 우리가 치료 후 아픈 몸으로 현장에 복귀하는 중인가? 아픈 몸으로 잠수해서 죽으란 말인가? 언론이란 확인 없는 추측성 기사로 잘못된 정보를 전하여 이슈거리를 만드는 집단이다. 이것은 범죄가 아닌가? 이런 추측성 기사. 이젠 신물이 난다! 대통령은 왜 저런 언론은 해체시키지 못할까.
6월25일=실종자 가족이라는 감투
실종자 가족이라는 감투를 쓴 채 우리의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작업현장 어디에서도 핸드폰, 캠코더로 실시간 촬영하고 電送(전송)한다.
가족 중 어머니 같은 한 분이 우리에게 수박을 잘라 갖다 주시며 “정말 고생 많습니다. 저는 제 아이를 꼭 찾기보다 잠수사님들 안전이 더 걱정이 되내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주셨다. 실종자 가족들 그 모두가 감투를 쓴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았다. 눈가가 따뜻해지고 마음이 울컥거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6월27일=살아있으면 좋은 경험, 죽으면 사고가 되는 것
선체 외부에서 작업 중 라이트가 꺼져버렸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수중에서 방향감각이 상실되어 두려움이 커져 갔다. 침착하려 노력했고 제자리에서 스텐바이 다이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고 점점 환해지며, 스탠바이 다이버를 만날 수 있었다. 인도줄을 따라 하잠줄까지 이동한 후 상승신호와 함께 상승했다.
상승중 수심 11m 지점에서 더 이상 상승할 수가 없었다. 선체 어느 부위에 내 공기 공급선이 걸렸던 것이었다. 나의 공기호스를 풀기 위해 스탠바이 다이버가 하강과 상승을 반복했다. 평소 작업시간이 30분이지만 다이빙 컴퓨터를 보니 벌써 4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줄을 풀기 위해 다소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나는 올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올라갈 수 없었다. 수중에서 무엇인가가 나를 잡아당기는 듯한 공포…천천히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공기공급선을 분리하고 보조 공기통을 이용해서 비상 상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스탠바이 다이버가 올라오며 상승해보라고 수신호를 했다.
조금씩 몸이 상승하기 시작했고…드디어 수면에 도착했다.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담담한 표정만 지었을 뿐이다. 살아있으면 좋은 경험이 되는 것이고, 죽으면 사고가 되는 것. 오늘은 죽지 않았으므로 좋은 경험이었다. (정리=이동욱 기자)
고담용 경장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 후 훈련 준비 중. 어디선가 “여객선이 침몰한다. TV 틀어봐라”는 소리에 TV를 틀었고, 뉴스를 통하여 현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형여객선이라 아주 천천히 전복되어 탑승객을 모두 구조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고 팀장님과 대원들은 모두 뉴스에 집중하게 되었다.
구조장면이 나오면서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나왔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 대통령이 현장으로 긴급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팀장님을 비롯하여 특공대 10명이 잠수장비를 싣고 출동차량 2대를 이용하여 출발했다.
우리는 출동차량 안에서 실시간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였고, 전원 구조됐는데 복귀 지시가 내려오겠지 라는 말을 나누며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하던 중 여객선 안에 탑승객이 200명 이상 있다는 긴급속보가 나왔다. 믿기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고, 바로 현장으로 쉴 새 없이 달렸다.
9시간쯤 쉬지 않고 달려왔을까. 목적지 팽목항에 도착하였을 때 여기저기서 통곡하는 소리, 고함지르는 소리, 실종자 가족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관부처 공무원들이 끌려 다니며 욕을 먹고 있는 모습, 이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전국에서 모인 민간인과 국가기관의 구조 세력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못해도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해경 P정을 이용하여 팽목항에서 1시간 가량 현장으로 이동하였고, 3009함에 승선하였을 때 잠수작업을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여기저기 누워있는 군․경, 그리고 대략 200여명이 넘어 보이는 잠수 인력들로 복잡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와 계속되는 구조작업 회의로 정신이 없었다.
4월 17일=누구도 말하지 않고 침묵만 흐르다
각 지역별 구조대원을 나누어 분산 배치를 하여 나를 포함한 동해특공대 10명은 3001함으로 배치됐다.
고속단정을 이용 해상수색을 실시하며 수중수색에 대비하고 있었다. ‘맹골수로’ 流速(유속)은 울돌목 다음으로 빠르다. 시야도 나쁘다, 여객선은 뒤집어진 채 船首(선수)만 떠있다. 내가 수중으로 들어간다면 내 자신의 안전조차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료들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만 흐른다.
4월18일=屍身(시신)은 너무 어리고, 차갑고, 딱딱했다
이날 나는 3001함 고속단정을 이용하여 6시부터 12시까지 해상 수색을 했다. 단정에는 3001함 구난팀장과 나를 포함 경장 김연종, 장준호가 동승했었다. 해상수색 중 사고지점에서 남성으로 보이는 屍身(시신) 1구가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떠올라 우리가 수습했다. 시신은 너무 어리고, 차갑고, 딱딱했다.
3001함에서 쉬고 있는데 언론에서는 ‘에어포켓’이 이슈가 되고 있다. 뉴스에서는 자기네들 입맛에 맛는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입을 맞추고 원하는 답을 얻어내고 있는 중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국민들과 실종자 가족들은 동요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에어포켓이 있다 한들 세월호 객실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누구도 이런 사실을 언론이나 유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할 수가 없다. 여론이 제 멋대로 흘러가게 될 것 같다.
4월19일=숙달되지 않은 장비를 사용
깊은 수심과 빠른 유속으로 스쿠버 장비로는 더 이상 船體(선체) 진입을 하여 장시간 작업 할 수 없다. 팀장님이 팀원들을 불러 모은 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는 말씀하신다.
“표면 공급식 잠수장비로 잠수할 수 있는 사람은 지원 부탁한다.”
순간 팀원간에 정적이 흐르고 서로에 얼굴만 쳐다보며 눈치를 살핀다. 나와 조민수 경장이 어렵지만 조심스럽게 지원했다. 표면공급식 장비는 스쿠버 장비와 다르게 공기공급 호스를 이용하여 공기를 공급하는 시스템이며 우리 팀원들은 표면공급식(일명:후카) 장비에 대해서 교육을 받거나 착용해본 적이 없는 장비였다. 숙달이 되지 않은 장비로 수중 작업하는 것을 우리는 禁忌(금기)처럼 여긴다. 水中에서 위급상황 발생시 대처하거나 위험을 모면할 수 없다. 수중 30m 이상에서 사고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월21일=의식 잃은 UDT 대원을 돕다
해상에 UDT 보트가 많이 보인다. 보트와 보트 사이에 하잠줄을 연결하여 수중수색을 하고 있었다.조민수 경장과 함께 수중수색을 위해 잠수장비를 착용했다. 그런데 우리가 入水 직전, 20m 정도 떨어져 있는 UDT 보트 사이에서 UDT 다이버가 급상승하여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의 오른손에는 의식을 잃은 다이버가 붙들려 있었다.
보트 위에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도와주기에는 힘들어 보였고, 순간 조민수 경장과 함께 잠수장비를 벗고 물로 뛰어들어 수영으로 접근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이버가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며 보트 위에선 그의 목덜미만 간신히 잡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나는 의식 잃은 다이버의 웨이트 벨트와 BC자켓을 분리했고 뒤따라 도착한 조민수 경장과 온 힘을 다해 보트 위로 의식 잃은 다이버를 올리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올릴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다이버 다리가 보트와 보트 사이에 연결해 놓은 하잠줄에 걸려 있었고 강한 流速으로 몸이빨려 들어가다시피 하는 상태였다.
내가 水中나이프를 이용해서 하잠줄을 끓으려 안간힘을 썼다. 줄 하나가 느슨하게 풀어질 무렵에 간신히 다리가 빠져나와 올릴 수 있었고 긴급히 후송되었다. 그날 저녁 의식 잃은 UDT 대원에 건강에 이상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안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4월24일=視野(시야)는 30cm도 보이질 않는다
언딘 바지에서 쿵! 쿵! 쿵! 쿵! 소리와 함께 컴프레서가 돌아가고 긴장감이 바짝 조여온다. 처음 착용해 보는 표면공급식 잠수장비마저 압박감을 준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수가 시작됐다.
수중으로 내려간다. 아니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하잠줄을 잡고 내려가던 중 강한 외부 압력이 느껴지고 몸이 휘청거리며 날아가는 기분을 느낀다.
1노트가 넘는 강한 유속이었다. 마스크가 벗겨지려 한다. 視野(시야)는 30cm도 보이질 않는다. 이런 잠수는 해 본 적이 없다. 산업잠수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월호 철판의 일부분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상태로는 작업이 불가하여 바로 상승하였다.
5월1일=끝까지 屍身을 포기하지 않은 金 순경
언딘 다이버와 김동완 순경이 1조로 入水하였다. 내가 언딘 바지에서 김동완 순경의 공기공급선을 잡고 텐더(안전)를 보던 중이었다. 언딘 다이버가 수중통신기로 屍身을 발견해서 김 순경에게 인계하여 상승시키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언딘 다이버는 상승했지만 먼저 출발한 김 순경은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수중통신기로 김동완 순경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불길하다. 작업을 지휘하는 언딘의 김천일 이사가 나를 향해 큰소리로 공기 공급선을 힘껏 당기라고 지시한다.
유속이 빨라져 호스를 당기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물속에서는 김 순경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나를 도와 두 사람이 호스를 함께 당겼다. 호스를 거의 끝까지 올릴 때쯤 김 순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구명복을 입은 屍身을 꼭 부등켜 안고 탈진한 상태로 물 속에서 끌려나오는 김 순경이 보인다. 끝까지 屍身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했고 존경스러웠다. 힘들고 위험하면 시신을 놓고 올라왔을 것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5월3일=둘째가 급성폐렴과 고열로 아프다는 전화
현장에 온 지 벌써 18일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바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집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와 둘째가 급성폐렴과 고열로 아프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올라가고 싶었고 곁에 있어주고 싶다 하지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5월4일=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언론
왜? 언론과 정부는 해경을 왜곡하는가? 현장에서 해경, 해군, 언딘은 사고 발생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여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각 언론사 취재기자, 장관, 대통령까지 방문하셨다. 허나, 언론과 방송에 보도되는 모습은 해군과 민간잠수사만이 나올 뿐 단 1초라도 해경이 구조작업을 한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구나…
5월 5일=年暇(연가) 허락
전화를 하는데 집사람이 울음을 터트리며 너무 힘들어 하고 있다. 고민 끝에 조심스레 박상호 팀장님께 집안 사정을 말씀드렸다. 팀장님께서 R․T(Rescue Tower·3009함 지휘부)에 보고 후 조심스럽게 개인 年暇(연가) 허락을 하시며, 당부사항으로 언론들이 해경을 타깃으로 안 좋은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으니 개인행동과 이곳 현장에서 나가는 것조차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 가족을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전쟁터에서 나만 빠져나가는 것 같아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몸조심하고 또 몸조심 하세요.
5월12일=집사람, “저기 다시 가야 돼?”
둘째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고, 집사람 얼굴도 밝아졌다. 뉴스에서 ‘민간 잠수사 작업 중 사망’ 이라는 긴급속보가 화제가 되고 있었다. 집사람이 현장으로 안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기 다시 가야 돼?”라고 물어본다.
“안 가도 돼~ 하지만 내가 안 간다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도, 먹지도 못할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안아주며 귓가에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사랑해.”
5월15일=매순간 최선을 다하자
언론을 통해 실종자 가족의 행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누가 자식 잃은 슬픔을 알겠는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식이 죽었더라면 나는 더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 누가 우릴 비웃고 욕을 한다 해도…매순간 최선을 다하자.
5월16일=매일매일 屍身(시신)을 본다는 것
매일매일 屍身(시신)을 본다는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상당한 일이다. 그것도 陸上(육상)이 아닌 수중에서 시신을 마주하며 그 시신을 가슴으로 안고 상승한다는 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고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이 日常(일상)이 돼 버렸다.
우리는 이런 환경 속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누구 하나 우리를 알아 달라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왜곡된 보도와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해경을 질타하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게 언제쯤 가능하게 될지….
5월19일=국가에 배신당한 기분
대통령께서 해경해체 발표를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진상은 파악하지 않고,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보도 자료만을 믿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모습에 국가에 배신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해경이 창피하다며 명예퇴직하는 직원들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가족들의 전화가 여기저기 들려온다.
“여보 해경 해체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통령과 국회부터 해체하라”고.
5월21일=싸우지 않는 해경의 首長(수장)
해경해체 발표 후 청장님에 대한 원망의 글이 내부망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다. 지금이라도 현장이 아닌 본청으로 올라가서 대응해야 한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하지만 청장님은 현장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염을 기른 채 의자에 앉아 있다. 청장님이 오셔도 유족 중 누구 하나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해경의 首長(수장)이라면 왜곡된 언론과 해경해체 발표에 적극적으로 부딪쳐 싸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5월22일=똑같은 생활의 반복
다이버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남자 120명. 한정된 공간에 장기간 가둬두고. 반복되는 일상으로. 정해진 순번에 맞춰 수중수색 작업을 한다. 매일 눈을 뜨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된다. 무료해지고, 의욕이 떨어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경은 3개 조로 나뉘어 1개 조가 8시간씩 언딘 바지에서 대기하며 停潮 타이밍에 맞춰 수중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수중수색 작업 외에는 바지에서 대기한다. 언딘 다이버들과 해군 다이버들은 전용 컨테이너에서 휴식을 하고 있다. 해경은 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사이에 로프를 연결해서 천막으로 하늘을 가린 채 바닥에 종이 박스나 돗자리를 깔고 쉬고 있다.
5월23일=휴식이 필요한 시기
수색이 장기화되면서 잠수사들이 하나 둘씩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수색과 매일 접하는 시신들로 인한 정신적 압박이다. 수중에서 고된 작업으로 인한 피로누적, 체력저하, 심리적 상처들…휴식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 같다. 하지만 누가 이런 말을 꺼낼 수나 있는가?
5월 30일=민간 잠수사 사망
민간잠수사가 수중수색 작업 중 원인미상의 사고가 발생했다. 수중통신기로 신음소리만 반복되었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보조다이버가 긴급 투입되어 상승할 수 있었지만 헬기로 긴급 호송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벌써 두 번째 잠수사 사고였다. 이번 사고로 사고 발생시 환자 후송체계의 문제점이 도출되었고 보완되었지만…수중에서 다이버 사고는 목숨이 걸려 있다. 오히려 잠수사들의 마음만 무거워진 것 같다. 얼마나 더 잠수사 사고가 발생해야 수색작업이 중단될 수 있을까??
5월31일=추측성 기사, 이젠 신물이 난다!
동해청 특공대원들은 부재자 투표를 하기 위해 경비정을 타고 진도 서망항에 내려 면사무소로 향했다. 투표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 후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던 중 ‘민간잠수사 치료 후 아픈 몸을 이끌고 현장으로 복귀‘라는 타이틀과 투표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경비정으로 가는 우리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 실려 있었다.
우리가 민간 잠수사인가? 우리가 치료 후 아픈 몸으로 현장에 복귀하는 중인가? 아픈 몸으로 잠수해서 죽으란 말인가? 언론이란 확인 없는 추측성 기사로 잘못된 정보를 전하여 이슈거리를 만드는 집단이다. 이것은 범죄가 아닌가? 이런 추측성 기사. 이젠 신물이 난다! 대통령은 왜 저런 언론은 해체시키지 못할까.
6월25일=실종자 가족이라는 감투
실종자 가족이라는 감투를 쓴 채 우리의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작업현장 어디에서도 핸드폰, 캠코더로 실시간 촬영하고 電送(전송)한다.
가족 중 어머니 같은 한 분이 우리에게 수박을 잘라 갖다 주시며 “정말 고생 많습니다. 저는 제 아이를 꼭 찾기보다 잠수사님들 안전이 더 걱정이 되내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주셨다. 실종자 가족들 그 모두가 감투를 쓴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았다. 눈가가 따뜻해지고 마음이 울컥거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6월27일=살아있으면 좋은 경험, 죽으면 사고가 되는 것
선체 외부에서 작업 중 라이트가 꺼져버렸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수중에서 방향감각이 상실되어 두려움이 커져 갔다. 침착하려 노력했고 제자리에서 스텐바이 다이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고 점점 환해지며, 스탠바이 다이버를 만날 수 있었다. 인도줄을 따라 하잠줄까지 이동한 후 상승신호와 함께 상승했다.
상승중 수심 11m 지점에서 더 이상 상승할 수가 없었다. 선체 어느 부위에 내 공기 공급선이 걸렸던 것이었다. 나의 공기호스를 풀기 위해 스탠바이 다이버가 하강과 상승을 반복했다. 평소 작업시간이 30분이지만 다이빙 컴퓨터를 보니 벌써 4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줄을 풀기 위해 다소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나는 올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올라갈 수 없었다. 수중에서 무엇인가가 나를 잡아당기는 듯한 공포…천천히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공기공급선을 분리하고 보조 공기통을 이용해서 비상 상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스탠바이 다이버가 올라오며 상승해보라고 수신호를 했다.
조금씩 몸이 상승하기 시작했고…드디어 수면에 도착했다.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담담한 표정만 지었을 뿐이다. 살아있으면 좋은 경험이 되는 것이고, 죽으면 사고가 되는 것. 오늘은 죽지 않았으므로 좋은 경험이었다. (정리=이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