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은 나 중심의 복, 나를 강화시키는 복이고 팔복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복,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복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니라” 핍박을 받는 자라고 미래형이나 현재형으로 말씀하지 않고 "핍박을 받은 자" 완료형으로 썼다. 예수를 믿으면 핍박은 필수다. 그래서 ‘예수로 살았다’라는 증거가 ‘핍박을 받은 자’다. 수영을 하면 몸이 젖는다. 연탄을 나르는데 몸이 검어지지 않을 리가 없다. 예수로 살았다는데도 핍박을 받은 적이 없다면 가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셨다. 우리가 핍박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의를 좋아한다. 내 공로나 행위가 드러나는 걸 좋아한다. 교회도 변질해서 자기 의를 드러내는 쪽으로 교회를 디자인하면 사람들이 더 모일 수도 있고 열심히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가짜다. 우리 의가 산산조각이 났을 때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은혜를 받는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정도 연륜이 되면 다시 또 죽었던 내 의가 살아나 내 행위와 공로를 인정받길 원한다.
우리 머릿속에는 인과 관계로 똘똘 뭉쳐 있다. 내가 뭘 했기 때문에 잘 된 것이고, 구원받은 건 내 공로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공로를 쌓고 행위를 해 봐야 그게 그거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들을 영접하고 믿어야 산다. 믿는 자가 의인이고 안 믿는 자가 악인이다. 그런데 이걸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것에 반발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달라서 부끄러운 일이 더 많다. 그런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 부끄러워할 것 같은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소금을 지렁이에게 뿌리면 괴로워 몸부림을 친다. 농도가 약한 지렁이의 수분이 소금으로 옮겨가니까 통증을 느껴 괴로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은 지렁이다. 그러니까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소금은 세상을 살리는 것인데 다르니까 거부하는 것. 빛도 마찬가지다. 땅에 있는 바위나 물건을 들춰보면 벌레들이 괴로워 빛을 피해서 도망간다.
우린 본질이 소금과 빛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렁이가 소금을 좋아하게 만들고 어둠이 빛을 좋아하게 만들겠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거절당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핍박받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벧전2:21). 본회퍼도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고난을 받으라고 부르심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으라고 부르셨다'고 말한다(딤후3:12).
요즘은 옛날보다 핍박이 적다. 제대로 사는 게 아닐 수 있다. 최전선에서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한다면 마귀가 혈안이 돼서 공격할 것이다. 가짜를 누가 공격하겠나? 가짜는 관심도 없다. 가짜 가방이나 시계도 가치가 있는 명품을 베끼는 것이다. 다이소에서 파는 5,000원짜리 물건을 카피하겠나? 누군가 공격을 많이 당한다는 것은 제대로 믿는 사람이다. 전에는 감옥에 집어넣고 때리고 죽였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11) 욕하고 악한 말을 한다는 건 언어적 핍박이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 세대는 이걸 못 견딘다. 악플 달고 말로 공격하거나 아니면 위축돼서 아무것도 못 한다. 전에는 예수쟁이라고 욕하며 돌을 던졌다. 그래서 어떤 분은 신문지에 성경을 싸서 교회를 다녔다. 그땐 선량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다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사람이 많았다. 배후에 마귀가 있는 것이다.
의 때문이다. 적당히 섞이면 핍박이 없다. 핍박이 없다는 건 내가 제대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제자로서 핍박받는 건 세상과 다른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핍박받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12). 신앙은 해석의 힘이 아니다. 우리는 끝을 다 본 사람이기 때문에 해석을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정체성. 핍박을 받은 자는 주님께 속한 자다. 예수님은 믿음을 굳건하게 세우고 핍박을 이기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신다(빌1:29).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시에 오는 고난도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다니엘 같이 우리도 좁은 길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은혜로 굳건한 믿음에 서고, 죽을 상황이 오면 순교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체성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이질적이고 세상과 다르기에 핍박이 있다.
두 번째 그래서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이다. 박해가 계속되면,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한다(롬5:3-4). 핍박은 우리에게 무장하는 힘을 준다. 핍박은 숨겨진 복이다.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지 기대가 된다. 평탄하게만 쓰임 받는 사람은 없다.
세 번째 핍박받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핍박을 받는 자의 결론은 천국이 저희 것이다. 주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 우리가 많은 순간에 힘이 없는 이유가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으면 아무도 흔들 수 없다. 주님을 만나면 갈등도 없다. 핍박을 경험한 자는 주님의 임재를 반드시 경험한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갈 때 하나님의 임재가 그 자리에 있다. 돌을 던지는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을 본 게 아니라 보좌에 서서 도움을 주시고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래서 핍박을 받는 자는 임재 체험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고 선교하면 가정에서도 핍박이 있고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핍박이 있다. 그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주님의 임재가 있다. 주님의 임재가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를 다 살린다. 그가 지성소다.
네 번째는 하늘의 상급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2). 영원한 시간이 있는데 이 땅에서 70, 80년은 1초도 안 된다. 1초도 안 되는 일에 왜 그렇게 연연하나? 이 땅에서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우리가 받는 환란은 잠깐이라고 말씀한다(계2:10). 죽도록 충성하면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충성하라. 적당히 살지 말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자. 최선은 죽을 각오로 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는 열매가 없다.
우리는 하늘의 상급을 얻겠다고 뛰는 사람들인데 몇 년 더 살겠다고 세상 연연하지 말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마음이 부유해져서 세상일로 바쁘면 하늘의 상급은 없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 천국이 그의 것이다. 주님의 임재가 있다. 핍박받는 복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