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무안박씨 무의공파종택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114 14.09.17 18: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무안박씨무의공파종택(務安朴氏武毅公派宗宅)
소 재 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127
건 축 주 :  박선
건축시기 :  17세기
소 유 자 :  박연대
문 화 재 :  시도민속자료 제74호, 1987.12.29 지정

건축 이야기
무안박씨무의공종택(務安朴氏武毅公宗宅)은 가마골[陶谷]의 북방에 있는 야산을 배산하고 안들을 내려다보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무의공종택은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넷째 아들인 박선(朴璿, 1596~1669)이 백형(伯兄)인 박유(朴諭)를 위하여 1644년경에 건축하였다.


건축 구성
건물의 기본적인 구도를 살펴보면 6칸 규모의 솟을대문과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배치되어 있고, 정침 우측 후면에는 무의공 불천위사당(武毅公 不遷位祠堂)이 있으며, 우측 전면에는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문의 우측에는 작은 부엌 1칸과 2칸의 온돌방이 있고 이어서 사랑방과 사랑마루가 연접되어 있는데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1칸을 돌출시키고 하부에는 기둥을 세워 누와 같은 느낌을 들게 하였다. 대청 주위의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주상(住上)에는 익공계로 분류할 수 있는 특이한 초각재로 장식하였다. 대량 위에 포대공을 세워 종량을 받게 하고 그 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5량가이다. 사랑마루 측면의 문틀에는 중간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이 상하틀에 남아 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우물마루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2통칸의 안방과 부엌을 두고 우측에는 상방을 배치하였다.
대청상부가구는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비교적 소박한 모습을 한 5량가인데, 대량을 받는 양봉에는 초각장식을 하였다. 대청 후면의 양개널문 문얼굴의 윗 틀에는 중간 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홈이 중심에서 한쪽으로 약간씩 치우쳐 있어 중수 때에 설주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대문채는 솟을대문간의 좌측에 문간방, 부엌, 마구간이 달려있고 마구간 옆에는 화장실이 있고 대문채 우측에는 문간방, 창고가 놓였다. 창고 우측에는 독립된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祠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초익공계 건물로 전면은 원주를 세웠으며,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문중 이야기
- 경주 복성공신(慶州復城功臣) 박의장(朴毅長)
“하늘이여 늙으신 어머님을 어떻게 하리까?”
61세의 나이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관영인 수영관에서 이와 같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박의장은 영일현감 박세렴의 맏아들로 1555년 9월 20일 영덕군 영해면 원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기개가 크고 소탈함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13살 되던 해 퇴계 선생의 제자인 유일재 김언기 선생에게 글을 배웠다.
박의장의 자는 사강(士剛)이요 호는 청신재(淸愼齋)이며 선조 10년에 세상이 어지럽고 관기가 문란하며 당파 싸움이 날로 심해지자 이 세상을 구제하는 길은 무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과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그리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진해현감으로 부임했다. 중요한 직책을 거치면서 명령이 엄하고 분명하고 일을 잘 판단했으며 공평했다.
그 후 함안현감으로 자리를 옮겨 한편으로 정사를 맡았고 틈틈이 활쏘기를 계속함에 일본의 침략 기미를 알고 국방을 튼튼히 하다가 물러나와 고향에 돌아왔다.
1591년 경주판관으로 제수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 이각(李珏)의 진으로 달려갔다. 이각이 적세가 어머어마하다는 말을 듣고 지레 겁을 먹고 퇴진하였다. 이것을 본 장군은
“당신이 나라의 중요한 책임을 지고 이러한 큰 난리를 당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싸워야 마땅하거늘 어찌 국록을 먹는 사람의 도리냐?”
하고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이각은
“이놈! 나는 성을 지키려고 하는데 네놈이 나를 도망치러한다.”
고 하면서 칼을 들고 죽이려하는지라.
“나의 말은 나라를 위하여 하는 말이었지 나의 사정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당신은 적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죽여 적을 이롭게 할 작정이냐?”
하고 꿋꿋하게 이야기를 하니 부끄러워진 이각은
“지금 적세가 저와 같으니 우리 병영과 성지를 보전하기 어려우니 공은 고히 돌아가서 적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시오. 나도 따라가리다.”
이 말은 이각이 달아날 계획을 세워두고 박장군을 꺼리어 하는 말이었다.
장군이 경주로 돌아오니 왜적은 곧 뒤쫓아 경주에 이르렀다. 성을 지켜낼 수 없음을 깨닫고 백성은 북문을 열어 모두 피난시키고 흩어진 군사를 모으기 위하여 죽장현으로 돌아가서 숨어 있는 군사와 백성을 불러 모으니 그 중 담 있고 뜻있는 사람이 차차 모여드는지라. 이로부터 화살도 만들고 무기를 만들어 용기 있는 사람을 복병시켜 적을 막게 하고 밤에는 산 위에 봉화를 피우고 낮에는 성 밖에 돌격전을 열기로 하였다. 7월에 의병장 권응수(權應銖)와 손잡고 먼저 영천을 회복하였으니 정부에서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벼슬이 내렸다.
나라에서는 이 각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여 박진으로 병마절도사를 대신하였다. 박진은 청도 운문산에서 청송 안덕으로 진을 옮기고 이해 8월 20일 13고을 군사 5만여 명을 동원하여 경주를 탈환하려 했으나 중도에서 적을 만나 도리어 해를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박장군은 이 계획이 이뤄지지 못할 것을 알고 그대로 수비하다가 의병을 곳곳에 모아 유격전을 벌이다가 9월 7일 공이 직접 지휘하여 ‘비격진천뢰’란 신무기를 갖고 적을 크게 무찔러 경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성에 들어가 4만 석이나 되는 곡식을 얻었기에 군사와 백성이 넉넉히 먹고 싸움에 큰 용기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복병과 유격전술로 왜적을 막고 요로를 확보하여 영천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고 또 군사를 보내어 언양, 울산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왜군이 부산과 울산을 통하는 길을 끊어 놓았으니 우리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11월에 군기사정의 벼슬이 내렸고 1594년 3월 10일 대구의 파잠(巴岑)에서 군사를 매복시켜 향우 김난서(金鸞瑞) 장군과 합세하여 수천 명을 전멸시켰다. 또 양산 야짜고개[也嶺]에서 크게 적을 무찔렀다.
5월에 경주부사가 되었고 가을에 중국 장수 오유충(吳惟忠), 낙상지(駱尙志)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주둔하였다. 이때 군량과 군복 등을 준비하여 보급하여 주니 그 계획의 주밀성에 탄복했다. 12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도 전세가 급하여 임종을 못하고 1594년 정월에 기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상주로서 임지에 돌아왔다. 양산에 있던 적병이 갑자기 부남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니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격전을 일으키니 적들이 도망쳤다. 또 임양포(林良浦)의 적들도 경주지경을 침범했으나 모두 장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해 8월에 맏아들 유와 둘째아들 위(瑋)를 창녕 화왕산성 곽재우 의병장에게 보내어 왜적과 싸우게 하고 9월에 팔공산성에 들어가 지키고 29일 영천 창암에서 또 적을 만나 크게 이기고 10월 5일에 안강에서 또 적을 무찔렀으니 적은 울산에 내려가서 다시 쳐들어오지 못했다.
7년 동안 언제나 앞장서서 싸웠지만 실패한 적은 없었다. 1600년 2월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경주에서 영해 집까지 올 때는 말을 타고 몇 시간 만에 오고 갈 수 있을 만치 기마에 능했다. 1604년 선무훈 1등에 기록되었고 그 후 1615년 돌아가시자 나라에서는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지의금부 사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시키고 시호를 무의라고 내렸다.
묘는 백암산을 이어온 독경산 기슭에 있으며 재실인 덕후루 앞에 신도비가 그 공적을 빛내고 있고 또 경주 부민들이 고종 때 그 공을 찬양하여 경주시에 동도 복성비를 건립하여 지금 안압지 앞에 세워져 있다.
- 왜적을 제압한 통신사(通信使) 박홍장(朴弘長)
무안인 영일현감 세렴의 둘째 아들로 1558년 8월 1일 영해면 원구동에서 태어나셨다.
자는 사임(士任)이요 호는 농아당(聾啞堂)이라 했다.
타고난 소질이 총명하고 고상하였으며 모양은 장대하고 마음은 넓고 기상은 엄숙하고 말은 적었다. 젊었을 때 상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큰 장군이 될 사람이라 하였다. 일찍이 제주판관으로 갔을 때는 제주라는 곳이 진기한 보물이 많기로 유명하였지만 한번 묻는 일도 없었고 낮으로는 활쏘기에 전념하고 밤으로는 글을 읽어서 병서와 사기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항상 소학을 즐겨 읽으면서 “이 글은 아버지나 임금님이 주는 글이라”하였다. 서울에 있는 왕자 한 사람이 종을 보내서 제주에서 말을 사 모으는데 백성을 억눌러서 피해가 크나 관에서도 금하지 못하고 있거늘 공이 법으로 다스려서 조금도 사정이 없으니 모두 놀라서 화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더니 마침내 무사하였다.
임진년에는 판관의 임기를 마치고 교체되어 오려 할 때에 마침 난리가 일어나서 조방장으로 제주에 임명하게 되었다. 임금이 피난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울면서 침실에 들지 않고 “임금이 피난길을 떠났는데 신하가 되어서 어찌 편케 거처하랴”하였다.
공의 형인 절도사 의장(毅長)이 그때에 경주판관으로서 처음 전투에 불리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여 “우리의 가정이 대대로 국은을 입어 왔으니 생명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여야 할 텐데 나는 지금 이곳에 얽매여 있고 또 실적을 올리지 못하였다 하니 국은을 갚는 일이 어긋나는구나. 어찌, 하늘의 해를 보리오?”하고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더니 경주를 수복하였다는 소문을 듣고는 칼을 짚고 일어서며 “우리 형님이 과연 이러하구려”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국사가 위급하여 마음대로 돌아올 수는 없고 슬픔을 못 이겨 병이 났더니 특명을 얻어서 돌아오다가 해남에 와서 영암 군수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부임한 지 두 달이 못 되어서 정부에서 대구가 영남의 요충지대니 공을 부사로 보내라 하여 또 대구로 왔다. 서애 류성룡이 장계를 올려서 말하되 “새로 보낸 부사 박홍장은 경주부윤 박의장의 아우인데무장 중에서도 가장 명망이 높은 사람이니 딴 일은 시키지 말고 지방 보호에 전념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라”하였다.
공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병들고 가난한 백성을 잘 보호하고 군량을 산출할 둔전을 마련하여 이웃 고을에 씨앗으로 곡식을 빌려서 씨를 뿌리게 하고 군사들의 먹을 음식을 손수 들고 가서 먹이고 감독하였더니 가을 추수에 3천여 석을 수확하였다. 이것으로써 중국 구원병을 접대하고 굶주리는 백성에게 먹이니 동남방의 큰 도시로서 적의 허리와 목을 누르듯 하였다.
1596년에 풍신수길을 일본의 국왕으로 봉할 양으로 유격장 심유경을 우리나라 사신과 동행시켜서 두 나라의 조화를 서둘러 보겠다고 황신을 상사로 하고 공을 승진시켜서 당상관으로 하여 부사(副使)로 보냈다.
이 때 왜병들이 부산에 머물고 있고 적의 실정이 어려운지라 모두 겁을 내어 가면 죽을 것이요 돌아오기 어렵다 하였는데, 공은 태연히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가 되어서 국명을 받들고 왜국에 나간다면 임금의 사명을 마치지 못할까 걱정이지, 어찌 내 몸의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할쏘냐?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하였다.
오사카에 이르니 왜장 편조신이 관백의 말이라 하고 전하기를 며칟날 사신들을 만나 보겠다 하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말하기를 “우리는 중국과 통하려 하나 조선이 그 뜻을 백방으로 방해하고 왕자를 석방하여 보내도 왕자를 보내지 않고 사례하지도 않으면서 사신을 보내니 이것은 조선이 우리나라를 얕보는 일이라”하고 오만무례한지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서 관백의 앞에 간다면 반드시 죽일 것이니 기다려 하회를 보자 하는데 공이 상사에게 말하기를 “벌써 왕명을 받들고 여기까지 왔으니 비록 한번 죽는 일이 있어도 어찌 의심을 품고 진달하지 않아서 군명을 욕되게 할 것이냐?”하고 상사로 더불어 관백의 곳에 가는데 청정(淸正)이 군사들에게 병기를 들어서 좌우에 늘여 세우고 원문 밖 수 마장 거리를 비단으로 길게 깔아서 번쩍거리게 하였는데 사람들의 간담이 서늘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히 말을 타고 갈 수 없었으나 공이 홀로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들어가는데 흡사 무인지경같이 하니 왜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조선에 사람이 있구나”하였다.
하루는 청정(淸正)이 땅바닥에 숯불을 피우고 사람을 시켜 말하되, “사신을 숯불에 앉히겠다.”하거늘 공이 답하는 말이 “나는 옷을 벗고 앉겠노라”하였다.
수행원이 앞에 와서 말하되 “불태워 죽이는 형벌이 경각에 달렸으니, 어찌하렵니까?”하고 흐느껴 우는지라 공이 성을 내어 꾸짖되 “국서를 전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너는 아직도 죽는 것이 두려우냐?”하고 끌어내어 매를 치니 왜인들이 보고 다 겁을 내더라. 때마침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지라 왜장들이 무슨 재앙이라도 받을까 하여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중국 사신 양방형, 심유경과 우리 사신들을 함께 돌아가라 하고 말하기를 다시 동병령(動兵令)을 내리겠다고 하거늘 공이 중국 사신을 보고 “우리가 국서를 전달도 못하였고 또 들으니 다시 동병령을 내리겠다 하니 이 사실을 본국으로 장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심유경의 말이 “나도 중국에 장계를 올리겠으니 한꺼번에 보내자”하고 머뭇거리니 이것을 심유경이 본디 얕은꾀로써 우리 두 나라를 조정시키려다가 일이 여의치 않으니 중국 정부에 벌을 받을까 하여 고의로 중국 정부에 보고를 올리기를 머뭇거리는 것이다. 공이 굳이 청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중국과 처지가 다르니 하루라도 빨리 알려야 (하루도 빨리) 대비할 것이니 늦출 수가 없는 일이라” 하였으나 심유경은 끝까지 듣지 않는지라 공이 상사로 더불어 꾀하여 “심유경에게 벌을 받을지언정 국사를 그르칠 수 없다.” 하고 몰래 군관을 보내어 적의 실정을 장계로 알리었다. 공이 돌아올 때에 일본에서 선물로 물건을 많이 주었다. 이것을 전부 물리치고 수행원의 행장을 수색하니 일본도 두 개가 있었기에 이것도 청정에게 돌려주었다. 행장에는 다만 일본 지도와 옷과 이불뿐이었다.
공이 대구 있을 때부터 과로로서 몸이 약해졌더니 일본을 다녀온 뒤로는 병이 점점 심하였다. 대구에서 집으로 돌아가서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으나 인망이 바야흐로 높아질 무렵에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니 원근 사람들이 다들 슬퍼하여 나라의 불행이라 하였다.
제주도에 있기를 6년, 대구에 있기를 5년 동안이나 혜택이 흡족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부모같이 여겼고 비를 세워서 그 덕을 송축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는 마판에 말 세필이 있고 장에는 활과 살 두어 상자가 있을 뿐이요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때는 1598년 1월 3일이었다.

관련인물
- 박의장(朴毅長, 1555~1615)
본관은 무안, 호는 청신재(淸愼齋)이며, 부는 영일현감, 의주판관이었던 박세렴(朴世廉)이다. 선조 10년(1577)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으로 있었으며, 경주성 탈환의 공으로 경주부윤이 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 박홍장(朴弘長, 1558~1598)
본관은 무안, 자는 사임(士任), 호는 농아당(聾啞堂)이며, 부는 영일현감 박세렴이다. 선조 13년(1580)에 무과에 급제하여 아이만호, 선전관, 제주판관, 영암군수, 대구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592년 12월 22일에 정사 양방형(楊方亨), 부사 심유경(沈惟敬)을 따라 황신(黃愼)과 더불어 일본에 갔다 왔으며, 이후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 박선(朴璿, 1596~1669)
호(號)는 도와(陶窩)이며, 예(禮)로서 처신(處身)하고, 경학(經學)에 깊었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수(薦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도계정사(陶溪精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 박륵(朴?, 1594~1656)
본관은 무안, 자는 숙헌(叔獻)으로 부는 무의공 박의장이다. 광해 10년(1618)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회령판관, 도총부도사, 도감을 역임하였다.
- 박유(朴瑜, 1576~1618)
본관은 무안, 자는 백헌(伯獻)이며, 부는 무의공 박의장이다.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경주에서 곽재우 창의군에 합류하였으며, 임란 이후에는 4개 군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청렴결백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 관련유물
박무의공비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전에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큰 전과를 거둔 박무의공의 공을 기리는 비이다.

무의공 박의장선생

성명 : 박의장(朴毅長) , 1555년 ~ 1615년
본관 : 무안(務安)
: 사강(士剛)
: 청신재(淸愼齋)
시호 : 무의(武毅)
출생지 :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출신지 :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분묘지 : 영덕군 창수면 수리
입사경로 : 알성별시(謁聖別試) 무과급제
외관직 : 경주부윤(慶州府尹),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증직및기타 : 호조판서(戶曹判書), 선무원종공신(宣武原縱功臣) 1등에 녹훈(錄勳)
어린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하고자 노력하다
무의공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소탈함이 보통사람과 달라 부친과 중부[世賢]의 주선으로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함께 수학한 친분이 깊은 교우로는 옥산 권위(玉山 權暐), 오봉 신지제(梧峯 申之悌), 노천 권태일(蘆川 權泰一)이 있고 교우지간에 신의가 깊었다고 한다. 동생인 홍장(弘長)과 함께 동네 아이들과 죽마(竹馬)를 타고 전쟁놀이를 즐겼으며 몸집이 크고 성격이 엄정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하고자 노력하였다.
무과에 급제하다
공은 무과에 전념하여 1577년(선조 10) 정축(丁丑) 알성별시(謁聖別試) 무과에 급제하였다. 시험관인 강신(姜紳)은 역사와 병서에 대해 능통한 공을 문과 무를 겸비한 과연 대장감이라 칭찬하였다.
임진란을 맞다
무의공은 1579년 훈련원봉사참군(訓練院奉事參軍)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1588년 진해현감, 1590년 경주부 판관으로 재임된 후 1592년 임진란을 맞게 되어 혼란한 시기에 나라와 부민 보호를 위해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주 부윤(府尹), 1598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고 1608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14년 경상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목민관으로 소임을 다해
무의공은 경주판관과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면서 임란을 겪게 되었고 왜군의 침입을 격퇴하는 전투와 난중에 백성을 구휼하는 2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정책은 경주성 수복으로 확보한 4만 석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의 구휼에 쓰고 환곡정책을 시행하여 백성이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593~1594년에 걸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하였으나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노력과 건강한 사람은 군사로 신체 나약한 사람은 농사에 전념하는 병농분리 정책을 통해 자신의 직분에만 전념토록 하여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경주부민은 임기 만료된 무의공을 조정에 3차례나 연임을 청하는 글을 올릴 정도로 목민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해 백성에게 신망을 받는 관리였다.
임지(任地)에서 생을 마감하다
공은 임지에서 부친의 병환을 돌보지 못하고 임종도 하지 못해 슬퍼하다가 홀로 계신 노모를 걱정하며 해직을 원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공에 대한 조정의 신임이 워낙 강하여 경상도수군절도사로 자리를 바꾸어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고자 하는 원을 덜어 주었으나 1615년(광해 7) 을묘(乙卯) 정월 25일 향년 61세로 수관관사(水管館舍)에서 운명하였다.

가족이야기

: 박영기(朴榮基)
생부 : 박세렴(朴世廉)
: 영양남씨
형제 : 박홍장(朴弘長)
충신의 집안에서 태어나다
무의공의 부[世廉]는 1558년(명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573년 봉렬대부(奉列大夫) 영일현감(迎日縣監)과 1578년 행(行) 의주목 (義州牧) 판관(判官)으로 재직하였으며, 영일현감 재직 시에는 청백한 선정을 베풀어 현민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무의공과 동생 홍장을 두었다.
대를 이은 무신(武臣) 집안
무의공의 부친[世廉]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며 선정을 베풀어 아들인 무의공이 부친의 뜻을 이어 무과에 급제하여 임란을 거치면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어려운 시기에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한편 유일한 동생인 홍장은 1580년 23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군관(軍官),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제주판관(濟州判官), 제주조방장(助防將)으로 군비를 정비하는데 노력하였으며, 1594년 영의정 류성룡은 대구의 전략적 중요성을 지적하고 무사 중 명성이 높은 박홍장을 최고 적임자로 추천하여 대구부사로 부임하여 곤궁해진 백성을 진휼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무의공의 맏아들인 유(瑜)는 1593년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장기현감 (長?縣監), 영산현감(靈山縣監), 강령현감(康翎縣監), 거제현령(巨齊縣令)을 지내며 임란 후 민심 수습을 위해 진력하였다.

학문이야기

스승 : 유일재(唯一齋) 김언기(金彦璣)
향사 : 구봉서원(九峰書院)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황경원(大提學), 옥산(玉山) 권위(權暐), 오봉 (梧峯) 신지제(申之悌), 노천(蘆川) 권태일(權泰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선생에게 수학하다
무의공 선생은 젊은 시절에 학문에도 출중하여 부친과 중부[世賢]의 주선으로 유일재 김언기 선생에게 수학하여 경사(經史) 및 제자백가서에 두루 밝았으며 교유 인물로는 황경원, 옥산 권위, 오봉 신지제, 노천 권태일과 같은 인물과 같이 학문하며 교유하였다.
후세교육에 힘쓰다
무의공 선생은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며 임란이 끝난 직후 옥산서원을 배알하고 유생들이 면학에 증진할 것을 당부하는 유시문 “유옥산서원제생문(諭玉山書院諸生文)”을 내렸다.
특히 이 유시문에서 경주는 신라 1000년의 고도로서 수많은 선비가 태어난 고장으로 학문으로서 그 명성을 이어가야 할 것과 어느 집이든 아이가 7, 8세에서 15, 6세까지 글을 배울 수 있는 이는 명부를 작성하여 선비가 책임지고 가르치도록 하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자는 벌을 그리고 우수한 자는 상을 주되 그 지도하는 스승까지 같이 벌과 상을 주도록 하였으니 오늘날의 의무교육과 비슷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전례가 없는 것으로 선생의 후세 교육에 대한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다.

영덕 > 영해축산권 > 축산면 도곡리
- 도곡리
본래 영해부 남면 지역으로 독을 구웠으므로 짓골, 독골, 정신골 또는 도곡이라 하였는데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도곡리의 구성이 상반포(上反浦), 원포리(元浦里), 하반포(下反浦)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효촌, 하반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도곡동이라 해서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에 도곡1동과 도곡2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도계사(陶溪祠)터
도곡1리에 있는 것으로 현 농협 창고 옆에 있는 도계사의 터를 말한다. 숙종 13년(1687)에 창건하여 동몽교관 박선(朴璿)과 지평 권경(權璟)을 배향하였으며, 다음 해에 도계사라 고쳤는데,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다.
- 독골
도곡리를 말한다.
- 망곡(望谷)
도곡2리 망골로 송현이라 한다. 영해부에 신관(新官)이 부임하면 부의 관리들이 이곳에서 신관을 맞이한 고개라 하여 망현 또는 망골이라 하였다.
- 정싱골
복두미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정신골이라 하며, 정절이 있는 부인이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