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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태근
농촌에 있는 녀동생에게 해마다 돌피쌀을 좀 얻어 보내라고 번마다 부탁하였건만 끝내 서울에 감투 부탁이였다, 해마다 얻어 보낸다고 거짖말만 하는게 괘씸했다, 하긴 지금 같은 약으로 농사하는 세월에 돌피와 잡초를 송두리채 소멸해 버린 논밭에서 돌피쌀을 얻어 보내라는것은 겨울산에서 산딸기를 얻어 보내라는것과 마찬가지로 생억지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한번 돌피쌀로 지은 옛고향의 돌피밥을 먹어보고 싶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세월에 사람있는 곳이면 어디던지 기를쓰고 따라다니던 돌피는 조상들의 손바닥에 퍼런물 들이고 손바닥이 갈라터지게 만든 괘씸한 잡초였다, 한평생 손에서 호미를 놓지못하 게 하였다, 금방 모내기를 끝내고 한전 아시벌 기음도 잡아놓고 처마밑에 호미를 걸어놓을가 하면 또다시 애리애리한 논밭에 달려들어 악착스럽게 가냘푼 벼포기들을 꽉 움켜죄고 기를 못펴게해서 누렇게 가라지밭을 만드는 돌피때문에 또다시 해종일 논밭에서 종아리에 거머리를 달고서 땀동이를 흘리던 어머니와 동네 사원들이 생각난다, 체면이란 전혀 모르는 돌피는 약국에 감초처럼 한전수전 가리지않고 하여간 사람이 발이 닳는 밭이면 어디던지 따라다니며 한번 뿌리를 밖으면 죽을때까지 떠날줄 모르는 소 심줄보다 더 질긴 괘씸한 잡초였다,
돌피때문에 욕먹은 사람이 기수부지이다, 돌피때문에 펀펀한 사람들을 떳떳한 이름을 두고도 억울하게 10부, 9부, 8부 6부라는 예지쁜 이름을 부르며 억울하게 살아가야 했다, 밭기음이던 논기음이던 누가 기음맸던지 사람을 보지않고도 척척알아 맞추는 사원들이 입에 쉽게 오른 부수등별 별명은 한번만 부르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이 모든게 돌피 때문이였으니 한평생 살아가면서 돌피를 원망한 사람이 얼마인지 모른다, 해빛이 쨍쨍 내리쬐는 땡별에는 호미끝에서 훌렁 뽑혀나와서 내 죽었노라고 밭고랑과 밭머리에 힌들 나가 자빠져 있다가도 보슬비만 약간 내려도 해시시해서 살아난다, 돌피와 돌피사춘 가라지 때문에 나처럼 입으로는 영원히 농촌에 한평생 뿌리 밖겠노라고 맹세한 (후썅) 지식청년들이 욕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글쎄 그놈이 돌피가 하필이면 내가 맨 밭고랑에서 비만오면 기지개를 쫙 펴고 살아나서 멀쩡한 나를 8부 팔부로 만들게 뭐람.
한번 잘못 불리운 이름이 개똥돌이 이름처럼 지루하게 따라 다니면서 떨어질줄 모른다. 팔부. 아무일 해도 팔부다 동작이 조금만 굼떠도 팔부요 밥을 좀 더 먹어도 팔부요 맥없이 밭머리에서 입을 하 벌리고 자도 팔부요 자류지를 묵여도 팔부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라는데 집체호 처녀들에게 엉뚱한 련애편지를 썼다고 움물안에 개구리리가 고니고기 먹을 생각하는 완전한 팔부라고 복판에 찍어놓았다. 아침부터 누군가 팔부라고 부른 날이면 재수없이 그날에는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이른 봄에 누군가 팔부라고 부르면 그해는 풍년이 들어도 분홍은 고사하고 종이분배장만 차레졌다.
사람만 윤기( )가 있는줄 알았는데 돌피네 가족들도 윤기가 있었다, 돌피 사춘인 가라지는 변덕도 어찌많은지 조이밭과 지장밭에 척 나서면 조이인지 지장인지 전혀 분간할수 없었다, 온종일 손톱이 물러도록 안따래를 뜯으며 기음맨 조이밭과 기장밭에는 애매한 조이와 지장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가라지만 총총하게 내 세워서 가뜩이나 둘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곰보 대장에게서 한절이나 된욕을 먹으며 챙피를 당하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도 슬그머니 귀뜸해도 모르겠는데 인물자랑이나 한다하는 복실의 앞에서 팔부라고 여지없이 쌔리웠으니 잊어질리 만무했다, 그때로부터 그래도 한때는 입만 여물어서 정치를 한다하면 누구도 담당하지 못하는 나를 가라지와 조이를 가릴줄 모르는 팔부사촌 륙부라고 한급 강직시켰다. 륙부아래로 내려가는 날에는 접시물에 코밖고 죽어야 한다. 그런데 터밭에 한번 똥을 잘못눈 개를 맨날 똥개로 취급하는 세울에 한번 강직당한 이름을 다시 원상태로 회복한다는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더구나 괘씸한것은 우물집 복실이까지 나를 돌피와 가라지로 취급할 줄이야
누군가 동네처녀 무던한줄 모른다고 나를 륙부라고 진심으로 귀뜸해서 며칠밤 자지않고 낑낑거리며 쓴 련애쪽지를 복실이 도시락 보자기에 파묻어 두었다. 눈치고치라고는 전혀없는 복실이가 점심밥 보자기를 풀다가 발견된 쪽지를 제꺽 눈치있게 감출게지 약삭빠른 돌쇠 놈이 손에 들어가서 공개될줄이야 그때로 부터 정말 악의적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나를 <상 팔부> <하 륙부>라고 내놓고 골려주지 않았던가, 하늘만큼 기대했던 그녀까지 나를 가라지 취급하며 륙부라고 부를때 나는 돌피와 돌피가족 가라지와의 전쟁을 끝까지 하리라고 장엄하게 맹세였다, 어찌나 괘씸햇으면 길을 가다가도 돌피만 보면 뿌리채 뽑아서 갈기갈기 찢어놓아야 울화가 내려가는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괘씸해서 이가 갈리도록 미워하던 돌피가 가을이면 어머니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말동무가 될줄을, 어머니는 늘쌍 허리에 깁고 또 깁은 배보자기를 앞가슴에 아이를 밴 임산부처럼 불룩하게 달고 다니였다, 자류지가 범이 새끼칠 지경으로 묵어 자빠지는 데도 아랑곳 하지않고 눈만 뜨면 갯벌에서 채돌피를 하였다. 돌피가 좋다고 이야기 하는지 돌피가 괘씸하다고 욕을 하는지는 몰라도 돌피만 보면 뭐라고 쉴새없이 말하면서 채돌피를 하는 게 이상했다,, 온 여름 기를쓰고 논기음을 맨 논밭에서 또다시 허리를 꼿꼿이 펴고 하늘향해 한점 부끄럼 없노라고 고개를 번쩍쳐든 검실검실한 잘 여문 개돌피 이삭들을 낫으로 모가지를 베서는 배보자기에 기를쓰고 채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넘어 갈때까지 누런 논벌에서 낫을 번쩍이며 논판을 누빌때면 빨갛고 파란 바다잠자리들까지 응원이나 하는듯 어머니의 하얀머리수건에 춤추며 내려않다, 금방 논물을 뗀 논밭에서 발이 빠져서 허우적 거리면서 해종일 뜯은 채돌피를 꼭뒤가 물러나게 헌마대에 절복하게 이고지고 돌아와서는 허리도 펴지못하고 쇠가마에 절복하게 채워놓고 토막불에 푹 쪄낸다, 역겨운 풀냄새가 물씬나는 돌피를 구들목에 쌓아놓고 푹 띄웠다가 앞뒤 마당에 툭툭털어서 널어놓는데 돌피철이면 동네방네 온 집안에 돌피풀 냄새가 푹 배서 온동네가 돌피마을이 되였다, 돌피이삭을 널어놓은 새까만 구름까래는 퍼렇게 물이 들어서 벗겨지지 않았다,
온 여름 뙤약볕이 쨍쨍 내리쮜는 한전 수전밭에서 실큰 맡던 풀냄새를 집안에 까지 끌고와서 맡아야 하는 질기고도 역겨운 그놈이 못돼먹은 돌피썩은 냄새가 어머니는 싫지도 않은지 밤새껏 주무르고도 새날이 밝기바쁘게 이고 지고서 동네 방아간으로 찾아가서 돌피쌀을 만들어낸다, 퍼렇게 돌피물이 오른 갈라터진 어머니 손길아래 푸실푸실한 돌피쌀 감자밥으로 변신했을 때 얼마나 고마웠던지 돌피밥을 먹을때는 돌피에 대한 괘씸한 생각이 봄물에 살얼음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너무나도 힘들었던 우리집 보리고개를 요행 넘겨준 돌피쌀은 조상삼대 땅만 믿고 살아온 농부들의 목숨을 건져준 금싸락이요 어머님의 보배쌀이요 잊을수 없는 세월의 말동무였다,, 험악한 그 세월에 돌피까지 없었더라면 대식품 인민공사 집체식당 생활을 어떻게 넘겼을가 ?
한전밭과 논밭에서 학대받던 돌피는 우리집에서는 량반쌀로 올방자를 틀고 나않았다, 어머니 손끝에서 말쑥하게 변한 돌피쌀도 가마믿굽에 그대로 깔기는 아까워서 맨밑에다 언감자를 얺어놓고 그우에 통옥수수쌀을 주단처럼 펴고 그우에다 돌피쌀을 조심스레 펴놓고 정성들여 지은 돌피밥은 수선먼저 아버지에게 차려졌고 돌피와 강냉이가 섞인밥은 나와 동생에게 그다음 맨밑에 언감자와 통강냉이가 개밥에 도토리처럼 뒤섞여서 번벅이 된 감자돌피밥은 어머니의 이빨빠진 냄비에 얺혀졌다,
남들은 돌피밥이 끈기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웬일인지 돌아않으면 배고파서 헛배만 만지였다 섬이들어도 이렇게 배고파서 보채는 게 철모르는 내가 세상이 뭔지 모르고 밥이 작다고 발버둥질치면 언감자는 골라내고 돌피밥만 변또에 꽁꽁 눌러서 책보에 챙겨준다. 그런데 학교에 가서는 점심 시간이면 다른 애들이 노랗고 새하얀 열콩밥을 펼쳐놓고 먹을때면 그렇게 배고파도 애들이 보는데서 감히 돌피밥을 내놓고 먹지 못하고 돌아오는때가 많았다. 그럴때마다 어머니가 왜서 아까운 돌피밥을 먹지 않았는가고 핀잔하면 래일부터는 밥보다 누룽지를 싸 달라고 청들었다 누룽지는 갓고다니기도 편리했지만 그보다 중간 체육시간에 얼렁뚱땅 넘겨버리면 꽁 먹고 알 먹기라 어머님 좋고 동학들 보기에도 좋은 나 홀로의 <점심에때우기> 였다.
내가 섬이 들어서도 돌피는 나와 전생에 무슨 원쑤진 일이 그리도 많은지 나를 몇번이나 곤역을 치르게 했는지 모른다, 내가 말 잘한다고 정치대장을 맡았던 그해 가을에 상급에다 산량을 보고할때였다. 성실하고 솔찍한걸 빼놓으면 당장 넘어지는 나는 고지식하게 낮은산량 그대로 보고 하였더니 공사당위서기가 한다는 말이 밑에 만근이면 우에 오천근인데 왜서 우에산량을 속이는가고 호되게 비판하는 것이였다, 대채와 호두산까지 무지개 걸렸다는 황홀한 시대라 산량을 좀씩 불구어서 회보하는건 리해되는데 우에 오천근이라는 것은 무슨말인지 도무지 리해되지 않아서 머리를 절레절레 젖는 나를 보고 젊은대장이 그렇게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어디다 써 먹겠는가고 <석두대장 >이 라고 매몰차게 닦아 세우는 것이였다, 알고보니 다른 생산대에서도 모두 웃산량을 낮춰서 보고하는데 웃산량이라는 것이 돌피쌀이였다, 원래는 돌피가 산량으로 취급받지 못하였는데 기끈 일해보았댓자 죽게 일한놈이 빚만 잔뜩 걸머지는 세월이라 아시당초 대충 기음을 매서는 가을에 돌피쌀이나 많이나게 해서 배고품을 달래는게 상책이라고 돌피를 가지고 작간을 부리였다, 이러는 대장들의 나뿐 심뽀를 알아차리고 공사에서는 돌피쌀도 산량으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어느 해인가 과수원에서 이른봄 과수전지를 하던 나는 문뜩 사과나무 밑 뿌리마다 불러진 소발목마냥 나무 밑뿌리가 약하게 올라오다가 뭉특하게 뻗은걸 보고 왜서 그런가고 물었더니 과수원 기술자가 하는말이 사과배는 한반도에서 가져온 사과인데 처음에는 <미츄리>라는 사람이 애목을 가져다가 돌배나무를 잘라내고 접목해서 동북의 악렬한 기온에서도 과일이 열리게 되였단다, 이렇게 사과와 돌배가 접해서 달린 과일을 사과배라고 이름을 달았다는 것이였다, 참 신기한 일이였다 나는 좋고 나쁜 땅을 가리지않고 사람이 살고있는 곳이면 주책없이 어디던지 찾아가서 뿌리밖고 누가 보던지 말던지 억쎄게 건실하게 자라는 돌피에다 벼를 접하면 <돌피입쌀>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산량을 따로 회보하는 번거로운 일도없고 또 악을쓰고 돌피를 쫒아다니며 기음맬 필요도 없고 꿩잡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때는 일거삼득인데 돌피와 벼를 잡교하라고 과수전문가에게 엄뚱한 지시를 내렸다, 하긴 내말을 언녕 우숩게 들었을 그가 나를 원자탄을 만드는 과확가들도 미처 생각지못한 기발한 생각을 했다고 칭찬하며 실천도 해보지 않고 돌피의 벼를 잡교를 시키면 무조건 성공한다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해마다 소불알 떨어지려니 하고 칼도마에 소금알까지 갖춰놓고 기다려도 <돌피입쌀>은 이날 이때까지 구경도 못했는데 논밭에 약을 쳐서 아예 깡그리 소멸해 버렸다고 하니 돌피없는 논밭에 웬일인지 잠자리도 찾아들지 않는게 별일이다,
내가 살던 두메산골에는 먼발치에 작으만한 개밸같은 꼬리논이 있다고 버덕도 아니요 산골도 아닌 반중건중한 젊름발이 쫑발고향이라고 불렀다, 그리운 동년을 함께살아온 원쑤같고 보배같은 괘씸한 돌피쌀을 해해년년 집안의 기둥쌀로 먹으면서 살아온 나는 돌피는 우리 마을에만 그렇게 기를쓰고 자라는가 했더니 한뉘 감자농사로 살아가는 갑산골에서는 벼를 심다못해 짧은 무상기 때문에 해마다 북데기만 차레지자 아예 돌피씨를 그대로 한전밭에 뿌렸는데 생각밖에 체면없이 잘자라서 <피낫쌀>로 유명해졌다, 감자와 돌피 피낫쌀은 이렇게 갑산골에서 사이좋게 만나서 세상에 널리알려진 모양이다, 피낫밥은 돌피와 달리 끈기도있고 먹기도 좋아서 갑산골 사람들은 시골의 이밥으로 간주하고 감자국수에 피낫밥을 배부르게 먹으면서 누구도 이사를 가려고 하지 않았다, 피낫쌀이 지겨우면 보리쌀을 대체해서 감자보리밥을 먹으면서 못하는 일이 없었는데 유독 귀찮은건 방귀가 자주 나가서 녀자들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도 생각해보면 생리는 남자나 녀자가 똑 같은데 여자들은 어떻게 방귀를 참았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돌피밥 방귀는 다행이 쿠리지 않아서 앞마을 왈패 윤과부는 남자들 앞에서 오리궁둥이를 내저으며 방귀를 팡팡뀌여서 <윤퉁재>라고 놀리워 댔지만 윤과부가 없는 논밭은 서리맞은 돌피이삭처럼 썰렁해서 재미가 없었다,
농사군의 다리에 칭칭 감겨서 허리도 못펴게 하며 소심줄처럼 질기게 따라 다니던 돌피가 세월이 갈수록 한없이 그리울줄을 누가 알았으랴 돌피는 잊지못할 추억이요 돌피는 인간을 만든 히망의 씨았이였다, 팔월추석 여름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돌피잎을 떼다가 피리를 불때면 친구들이 함께 부르던 농부가도 좋지만 줄당콩 익어가는 배재굽에 나앉아서 버섯치에 돌피쌀을 찧는 복실이를 들으라고 볼이 메지게 돌피 피리를 부르는데 괘씸한 복실의 어머니가 창가의 석유등잔불을 껐을때 얼마나 상심했던지 그래도 신심을 버리지 않고 개똥불이 반짝일때까지 부르노라면 슬며시 배재굽에 나타나던 복실이가 그리워서 오늘도 고향의 울바자굽에 않아서 돌피 피리를 군 떨어지게 부르고 싶다,
민들레 씨았처럼 락화산을 타고 퍼지는 돌피씨도 아닌데 고향사람들은 세월따라 정처없이 흩어져 버렸다, 돌피와 가라지가 무성한 논벌은 까마귀와 멨새가 보 금자리를 다시 찾았다고 기뻐 날뛰고 쑥대 갈대가 무성한 한전밭에는 노루와 메대지가 빼앗긴 천국을 다시 찾았다고 <동물잔치한마당> 벌린단다, 싱그러운 돌피냄새가 그리워서 돌피쌀밥을 한번 먹어 보겠다는 데 괘씸한 녀동생이 내 심정을 이렇게도 몰라주는게 한스럽다, 언젠가 고향에가서 그리운 친구들과 또다시 풀베개를 하고 흘러가는 구름우에 희망을 실으며 흘러간 옛날을 노래부를 그날이 꼭 오라고 손꼽아 기다렸는데… 주인없는 조상의 산소가 여기저기 흩어진 황량한 숲속에서는 뻑꾹이만 처량하게 옛날목청 그대로 밭갈이 타령을 하는 내 고향이 서리워서 돌피밥을 떠올리는 내가 오망이 아닌지도 모른다,
과확이 고도로 발달해서 우주요 달나라요 별나라를 마음대로 오르내리는 요즘 세월에도 끝내 돌피와 벼를 잡교해서 사과배 나무처럼 든든한 록색곡식을 만들어 내지못하고 무작정 돌피만 보면 논밭에서 떠나지 않는 거마리를 본것처럼 모조리 깡그리 약으로 소멸해서 논밭이 내집 마루장판처럼 깨끗하다고 좋아 야단이다, 신세대 농민들이라 일하기도 좋고 살기도 좋단다, 모내기철이면 도시에서 할일없어 빈들거리는 싹군을 불러다가 모내기를 시키고는 온여름 마작판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가을이면 이거리 대풍이 들어서 설레이는 논밭이 좋아서 살기좋은 새농촌으로 변했다고 신문과 방송에 입이 찢어지게 자랑하는데 돌피없는 논밭에서 자란 벼짚을 소가 잘먹지 않는 비밀을 알기나 하는지? 소도 먹지않는 벼대에 달린 쌀을 사람이 먹으니 날마다 해마다 이름모를 의난병에 걸려서 오늘 래일 죽어가는 가련한 인간들이 도무지 리해안된다,
돌피없는 농촌이 얼마나 그리운지 한번 가슴에 손을얹고 곰곰히 생각해 볼때가도 되였다고 본다, 왜서 그 세월에는 족발안마라는건 어두운밤에 홍두깨 소리요 보고 죽자고 해도 없었고 논밭에 새끼줄치면서 록색기지 밭이라는게 따로 없었고 찜질방 사우나는 더구나 보지도 못했지만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튼튼하고 씩씩하게 오래오래 앉을수 있었다는게 궁금하지도 않는가,? 맨발로 뛰여다니는 돌밭이 족발안마 바닥이요 찌는듯한 논벌이 찜질방이요, 웃도리를 벌렁 내벗어던지고 땀벌창이 되여 먼지가 뽀얗게 내달리는 사래긴 비탈밭이 사우나밭이였다, 돌피가 무성한 비탈밭에 데굴데굴 딩구는 노란오이가 록색인지는 몰라도 밭머리에 심어놓기 바쁘게 쑥쑥 잘자라는 마늘에다 풋고추를 받쳐서 곰취쌈을 먹는게 록색인지는 몰라도 농약이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던 논밭에서 땡땡여문 돌피쌀에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먹는게 록색쌀인지는 몰라도 돌피이삭에 잠자리가 내려앉는 논벌이 그리워서 오늘도 돌피밥 피낫밥을 그리는 나는 누구인지 나도 모른다, …
언젠가는 돌피와 벼가 잡교해서 천만년 변하지 않을 <록색 돌피입쌀>이 세상에 나오기만 기다린다, 이것은 나혼자만이 소원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세세대대로 꿈꾸던 세기적인 소망이다, 돌피없는 논밭에서 잠자리 없는 논밭에서 가라지 없는 한전밭에서 록색유기쌀을 찾는 우리 모두가 백년천년 장수할 <록색인간>이 옳은지 한번 가슴에 손을얺고 곰곰히 생각해 볼때가 되였으련만 …
2008년 9월 백노날 ㅡ2009년 5월11일 수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