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 제작 / 국내미개봉 / 119분>
감독 :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출연 : 실바나 만가노 & 프랑코 시티
=== 프로덕션 노트 ===
파솔리니는 그리스 신화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널리 알려진 '에디푸스 왕' 이야기의 배경을 모로코로 옮겨와 영화화했다. 파솔리니에게 에디푸스의 여로는 진실을 향한 탐구의 과정이었으며, 자신의 삶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유럽과 아프리카 문화의 혼재가 새로운 이미지를 직조해내는 이 작품에서 <아카토네> 이래 파솔리니의 페르소나로 불린 프랑코 치티가 에디푸스 역을 열연하며, 실바나 망가노, 알리다 발리, 카르멜로 베네 등이 출연한다. 운명의 장난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고대 그리스의 에디푸스 비극을 재해석하여 이데올로기와 신화의 관계를 탐구한 이 작품의 감독 파솔리니는 네오리얼리즘에 영화의 출발점을 두고 있지만 후기작에서는 신화, 전설, 민담의 세계로 관심을 옮겼다. <마태복음>(1964) 이후에 만들어진 파솔리니 최고의 대표작인 <에디푸스 왕>은 황량한 사막풍경, 독특한 의상, 다양한 비서구 음악을 사용한 사운드 트랙이 특정한 시간, 공간을 초월한 신화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한다.
고전을 영화로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대로 옮겨 영상화의 기쁨을 맛보거나, 아니면 각색해 창작자의 입맛대로 변형할 수도 있을 겁니다. 파솔리니는 에디푸스 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은유했습니다. 파시스트였던 아버지를 혐오하고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어머니를 추억하며 결코 주류가 될 수 없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내적 고민을 그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립 속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어둠을 통해 빛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진실을 기만하는 파편이 덕지덕지 붙은 혐오스런 세상에서 진실은 감긴 눈 속에 비춰지는 한없는 어둠 밖에는 없습니다. 에디푸스는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오만하고 잔인하며. 천성의 천박함도 모르고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지 못합니다. 결국 스스로의 눈을 찌르는 그는 삶이 밟아버린 후에야 운명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또 아이러니하게 거기에 길이 보입니다.
파솔리니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오이디푸스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마치 이탈로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진실을 퍼올리듯 그 역시 카메라를 도구로 보이지 않는 진실을 역설해냅니다. 영화의 시작, 카메라는 구름과 나무의 흔들림을 주목하다 어느새 에디푸스의 어머니에게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관객(카메라)를 응시합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에겐 눈썹이 없습니다. 표정을 완성시키는 표식없이 그녀는 기묘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접근합니다. 그것은 흡사 여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비극적 운명을 알지만 신탁, 약속에 의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순식간에 관객을 압도합니다. 스크린과 관객의 거리는 일정하지만 스크린 속 피사체들은 관객에게 닿기 위해 거칠게 요동칩니다.
이 영화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충실하지 않고 그래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대화는 상실되어있고, 인물들의 행동이나 서사엔 개연성이 무시되며 완급조절 역시 되어있지 않습니다. 신탁과 코러스는 문자화되어 등장인물들에게 반응하고 일부 면에서는 흡사 브레히트를 연상시킵니다. 자신의 서사극에서 각 막이 오르기 전에 요약본을 텍스트화해서 관객에게 보여준 브레히트처럼 파솔리니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둘의 목적은 보는 이가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는데, 파솔리니는 에디푸스의 경이로움을 스크린 위에 부활시켜 수동적인 관객에게 능동적인 의식을 일깨운다. 그리고 동시에 유산계급인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프롤레타리아 출신인 어머니를 사랑한 자신의 삶을 반영해냅니다. 파솔리니에게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관객들이 처한 상황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연출은 정말 영화 같습니다. 시간대는 파괴되고 배경은 야만과 문명을 오가며 형이상학적인 성질을 부여합니다. 에디푸스가 신탁을 받은 그 이후를 생각해 볼까요. 귀를 찌르는 음악은 내면을 날카롭게 긁어내고 역광은 관객의 시야를 방해해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거부와 그럼에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신탁의 어지러움을 몸소 체험시켜 줍니다. 스핑크스의 질문은 어떤가요. 과감한 생략과 압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질문이 나올 새도 없이 스핑크스는 에디푸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결국 그 자체가 어둠 속을 헤매는 에디푸스를 가리키고. 질문과 답의 정형성은 파괴되며 감독의 입맛대로 신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쓰여 집니다.
영화는 비극의 목적에서도 이전의 극과는 차별화 됩니다. 급전과 발견, 파토스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감정의 배설구였다면 현대의 에디푸스는 삶의 진정성을 획득하기 위해 비극을 거칩니다. 영화의 마지막, 두 눈을 잃은 에디푸스는 그 깨달음을 안고 현대의 문명시대로 복귀합니다. 파솔리니 에디푸스가 던지는 이 자조와 성찰의 메시지는 어둠조차 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함을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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