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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호숫가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Wondam:원담
Dzongsar Khyentse Rinpoche on the “outdated” Tulku system in Tibetan Buddhism
종사르 켄체 린포체가 티베트불교의 구태의연한 환생자 제도에 대하여 발언하다.
August 22, 2016 by Justin Whitaker 2016년 8월22일 저스틴 위태커 기자
Dzongsar Khyentse Rinpoche 종사르 켄체 린포체(1961~)
In a long (4000+ word) post on facebook yesterday, the Buddhist teacher and filmmaker, well known for his wit and sense of humor, speaks about the need for reform in the system of reincarnated teachers in Tibetan Buddhism known as tulkus.
위트와 유모어 감각으로 유명한 불교지도자이면서 영화감독(그는 영화 컵Cup과 여행자와 마술사Travellers & Magician를 감독했다)인 분이 어제 페이스북에 4000단어나 되는 긴 장문으로 티베트불교에서 ‘툴쿠(환생자)’라고 알려진 환생자 제도가 개혁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다.
Titled “Time for radical change in how we raise our tulkus,” the document has eight sections. Excerpted here are those sections with key points and quotations.
‘툴쿠를 키우는 우리들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때’라는 제목의 문서는 여덟 개의 장으로 되어있다. 그중에서 요점이 되는 부분과 인용문을 여기에 발췌한다.
The document itself was prompted by the choice of Jamgon Kongtrul Rinpoche to leave his role as a tulku, writing, “with a difficult heart, I have chosen a different lifestyle and will study and pursue my dreams of becoming a doctor.” The young tulku wrote “How long will you hide all this?”
문서는 잠곤 콩툴 린포체가 툴쿠로서의 역할을 버리기로 선택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다른 생을 살기로 선택했습니다. 의사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얼마나 오랫동안 숨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젊은 환생자는 썼다
Jamgon Kongtrul Rinpoche 잠곤 콩툴 린포체(1995~)
Now I have reached a state where it’s unbearable, I have been restricted to fulfill my dreams and have not been allowed to take responsibility and stay in peace and I feel I am a burden to all.
나는 지금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내 꿈을 실현하는데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내 삶을 책임지며 마음 편히 사는 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에게 짐이 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I have made this choice as the last resort and I had tried every possibilities to avoids this choice but now I am tired of all these problems repeating and them using the same excuse over and over again! I doubt you all will understand my choice but I hope you do.
나의 마지막 수단으로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이런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온갖 가능성을 찾아보았으나, 늘 이런 문제는 반복되었으며 똑 같은 변명을 또 하고 또 하게 되는 것에 이젠 참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선택을 이해해주리라는 걸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해해주기를 희망합니다.
Dzongsar Khyentse follows his mention of this event by comparing the life of the tulku in his day, which consisted of a list of deprivations, “eating nothing but rice and potatoes for up to a year, travelling on India’s cheapest public transportation, sleeping on railway platforms, having no more than 10 rupees in our pockets for six or seven months.” By comparison, he writes,“our present generation of tulkus is utterly spoiled and has the easiest ride.”
종사르 켄체(지금 50대 스님이다)는 자기 시대 툴쿠들의 삶과 비교하면서 이번 사건에 대한 그의 언급을 이어간다. 그들(예전의 환생자들)은 빈한한 삶을 살죠, 일 년 내내 쌀과 감자만 먹고, 인도에서 가장 싸구려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기차역 대합실에서 자기도 하고, 칠팔 개월 동안 수중에 10루피도 없이 살았습니다. 지금 세대의 환생자들은 완전히 버릇없이 자라면서 최고로 편안한 차를 타고 다닙니다.
However, Dzongsar Khyentse recognizes that life is still not easy for the contemporary tulku and that current conditions in some ways are much worse. They live in a faster paced world with a brighter spotlight (read Dzongsar Khyentse’s Social Media Code of Conduct), meaning a reassessment of the tulku system and training is in order.
어째든, 종사르 켄체는 툴쿠로서의 삶은 아직도 쉬운 일이 아니며, 지금의 환경은 어떤 면에서 옛날보다 더 나빠졌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들은 더 많은 각광을 받으며 더 빨리 달리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는 툴쿠 시스템을 재평가해야 하며 훈련과정이 정비될 것이 요구된다는 걸 의미한다.
Why our young tulkus need training
우리들의 어린 환생자들에게 왜 훈련이 필요한가
Here Khyentse explains that tulkus, while believed to be reincarnations of a previous master, still need to be brought up in the fundamentals of life in the contemporary world.
여기에서 켄체는 환생자(툴쿠)가 전생의 스승이 환생했다고 믿어지더라도 현재의 세계에 있어서 삶의 기본 틀 안에서 길러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They may possess lifetimes of spiritual knowledge, but, “Moving from one life to the next is not like moving from one room to another. There have been tremendous changes over time, which require new forms of training if tulkus are to manifest their true nature and qualities. Blind student adoration, often arising from cultural preconceptions, conceals from us the need to re-examine the training these young tulkus actually need.”
그들이 전생에서 가지고 나온 지혜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하나의 방에서 옆방으로 이사 간다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므로 엄청난 변화가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툴쿠들이 가진 자질과 덕성을 발현하도록 하려면 새로운 형태의 교육이 요구되는 것이죠. 맹목적인 숭배는 문화적인 선입관에서부터 종종 생겨나는 데 그것은 어린 환생자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훈련을 다시 검토해보아야 할 필요성을 은폐하고 맙니다.
He notes that this applies to those who are “genuine reincarnations” as opposed to those who may have been given the title for different reasons. In either case, he concludes, good training is needed.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해서 환생자라는 타이틀이 주어지는 경우와 다르게, 진짜 환생자인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도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Fundamental flaws in current pedagogy
현 교육의 근본적인 결함
Khyentse follows here with more specific problems – including those of the past that have been remedied over time, “if merely because teachers could today go to prison for the way they used to raise us. There may be no beatings today, and there may even be weekend holidays, plenty of family visits, and lots of toys.”
켄체는 여기에서 문제를 더 명확히 한다-여러 번 고쳐왔던 과거의 예를 포함하여 “스승들이 예전부터 해온대로 교육한다면 오늘날에는 감옥에 가있게 되겠죠. 오늘날에는 체벌이 없습니다. 주말 휴가도 있고, 속가 방문이 많아졌으며, 장난감이 많아졌습니다.”
However, turning again to the way that Tibetan Buddhism, and with it the young tulkus, has been thrown into the international spotlight, Khyentse says that the expectations of so many people becomes a pressure like no other.
어째든 티베트가 방향을 바꾸어야한다는 것과 어린 환생자들에 대하여 국제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게끔 되어버렸다. 켄체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다른 것도 그렇지마는-압력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This, he says, can make tulkus, “end up isolated and imprisoned in one of the loneliest and most alienating zones imaginable.”
이런 상황은 툴쿠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독하고 소외된 곳으로 외톨이로 쳐 박히거나 유폐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고 말한다.
Misguided focus on image and wealth – a formula for pressure
이미지와 부에 대한 잘못된 집중-압력의 공식
Khyentse here notes the “world’s growing materialism and affluence” which have “found their way into our monasteries” and the lives of young tulkus.
켄체는 여기에서 세상에서 범람하는 물질주의와 풍요가 사찰과 어린 툴쿠들에게 들어오고 있다고 말한다.
Countering this he proposes no radical asceticism, but rather modes proposals such as re-examining Tibetan Buddhist behavior during winter gatherings in Bodhgaya, a site holy to Buddhists from around the world.
여기에 대항하려면 급진적인 금욕주의를 고집하기 보다는 전 세계 불교도가 모이는 성지인 보드가야 겨울 집회에서 티베트 불교도의 행동윤리에 대해 다시 검토해보자고 제의한다.
“I often wonder what other Buddhists, like the Theravada practitioners, think of our lamas sitting on thrones that may even be higher than some of the Buddha statues.” Bodhgaya, he continues, “would be a good place for our lamas to start practicing simplicity and humility!”
나는 불상보다 더 높게 법좌를 설치하고 그 위에 올라앉은 티베트 라마들을 남방스님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가끔 궁금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보드가야는 라마들이 소박함과 겸손함을 다시 실천할 좋은 장소가 될 것입니다라고 덧붙인다.
“In short, besides inadvertently turning our young tulkus into spoiled brats, the current focus on wealth and privilege as part of tulku training is anathema to Buddhist pedagogy and its core values.”
간단히 말해서, 어린 환생자들이 본의 아니게 버릇없는 녀석들로 바뀐 것 외에도 환생자 훈련과정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부와 특권에 대한 현재의 관심집중은 불교교육과 그 핵심가치에 대한 저주이다.
The prison of privilege 특권의 감옥
Tulkus can become “attractions” at monasteries, used to attract practitioners and thus coming to be seen as “assets to monasteries.” The titles and adoration come without responsibility.
툴쿠는 사원의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수행자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사원의 자산으로 여겨지게 된다. 타이틀과 숭배는 책임감 없이 굴러온다.
“With so much wealth, privilege, and adoration as the prize, it’s no wonder we now find so many parents eager to have their kids enthroned as one high lama or another. Little do they know how much their children will suffer.”
상 받는 것처럼 얻어진 많은 부와 특권과 숭배가 따라오기 때문에 자기 아이들이 고위 라마나 그 비슷한 인물로 권좌에 오르기를 열망하는 부모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지 못한다.
This suffering, Khyentse writes, comes from their lack of normal human development, including the trials of dealing with hormones and other worldly realities.
이런 고통은 호르몬(이성교제와 성문제)과 그밖에 다른 실제 세상을 대하며 일어나는 시행착오를 포함하는 보통 인간의 발달과정이 없는 데서 일어난다고 켄체는 썼다.
Breeding ground for hypocrisy 위선의 온상
This mixture of outer adoration and inner suffering leads to various types of hypocrisy, including the imposition of celibacy on them from a young age.
밖으로는 숭배 받지만 안으로는 고통 받는 것이 뒤섞인 채, 어린 나이 때부터 독신의 짐을 지는 것부터 여러 종류의 위선으로 이어진다.
Khyentse points out that it is not permissible to impose this on another person and that even the Buddha only became a renunciant -by choice- after having a wife and child.
켄체는 한 인간에게 이런 짐을 지우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며, 부처님조차도 부인과 아들을 가진 다음에 선택에 의해 출가자가 된 것이지 않는가라고 지적한다.
Pedagogy for today’s world and for the future
오늘날의 세계와 미래를 위한 교육
This is where Khyentse’s writing becomes clearly prescriptive, pointing out concretely what needs to happen next, from the basics of sharing to more complex activities.
켄체의 글을 명확한 처방전과 같은데 기본적인 나눔에서 시작해 더 복잡한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짚어낸다.
“When they are served and offered everything, many of these tulkus never learn even the simple human knowledge of sharing, and end up ill-equipped to live in the world. They not only need leadership training, but need a basic course in human relationship.”
환생자들이 대접받고 여러 가지를 받을 때 그들 대다수는 나눔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양식조차 배우지 못하여, 세상 사는 데 준비가 충분히 되지 못하는 것으로 끝맺고 만다. 그들에게 지도자 훈련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의 기본과정도 요구된다.
Just regular child rearing skills are often missing in monasteries, a fact that should be remedied in the years to come. Secondly, a reverence for the teachings -and elder teachers- seems to have been lost of late (again, in the place of superficial ceremonies and high thrones and attracting the faithful).
아동을 돌보는 일반적인 기술조차도 사원에서는 종종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그런 것들은 앞으로 개선되어야만 한다. 두 번째로 스승에 대한-노 스승에 대한 존경심 근자에 잃어져가고 있다. (그 대신 피상적인 의식과 높은 법좌, 신도들의 인기를 끌어들이는 것이 대신하고 있다)
Social and cultural barriers to a genuine tulku training pedagogy
환생자들 위한 진정한 교육을 가로막는 사회적 문화적 장벽
Here Khyentse writes that “a large for the situation can be attributed to traditional societies like the Tibetan and Bhutanese, which are a complex mixture of heartfelt devotion and outdated cultural baggage.”
켄체는 이렇게 썼다. 문제가 되는 상황의 대부분은 티베트와 부탄과 같은 전통사회구조 때문이다. 그것은 가슴에 우러나오는 신심과 구태의연한 문화적 유물이 뒤섞인 복합물이다.
“There’s even an eastern Tibetan saying that was used to scold me when I was growing up, that lamas should be like a gold statue – meaning we should sit very still, not look right or left, and act more like a precious object than a human being.
내가 자라난 동 티베트에서는 라마는 금불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 하게 하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보물단지 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지 못한다고 꾸중을 듣곤 했죠.
There’s another saying that a snow lion must remain as a snow lion in the high mountains, because if he comes down to the ground, he will be mistaken for a dog.
눈사자(스노우 라이언, 히말라야 설산에 산다는 하얀 털의 사자)는 높은 산속에 있어야 눈사자이지 땅으로 내려오면 개로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These two idioms really say it all, revealing not only how lamas are actively discouraged from mingling with ordinary people but also how obsolete is our traditional pedagogy for raising lamas for a contemporary society.”
이런 말들이 사실을 모두 말해준다. 라마들이 세상 사람들과 섞이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으며 라마들이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전통교육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In opposition to this, Khyentse suggests that lamas (teachers) need to become aware of contemporary society, with its particular forms of suffering.
여기에 반해 켄체는 라마들은 특수한 형태의 고통이 있는 현대사회를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This way he (or rarely she) can better teach those who are suffering and he can understand the need to change or look past the superficial aspects of the tradition.
그럼으로써 남성 환생자(드물지만 여성 환생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분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전통의 외피를 넘어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Stuck in a time warp 굴곡진 시간에 갇혀서
Khyentse suggests that the training system of today is stuck in the 1930s or 1940s, out of touch with the realities of the 21st century.
켄체는 현 교육체계가 1930년대 내지 1940년대식이어서 21세기의 현실과는 교섭이 되지 않는다고 암시한다.
This is a systemic problem that results in tulkus having needlessly difficult lives.
현재 환생자들이 어려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Aspiration for our upcoming tulkus 이번의 툴쿠들을 위한 기원
Finally, Khyentse offers praise for Jamgon Kongtrul’s decision insofar as it could serve the survival of the tradition in ways that a tulku in monks robes could not.
마지막으로 켄체는 환생자가 승복을 입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전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한 잠곤 콩툴의 결정에 칭찬을 보낸다. (잠곤 콩툴은 승복을 벗었으나 의사가 되어 환생자로서의 서원을 실천하고 살아갈 것이므로)
In fact, he says that he instructs teachers and friends not to encourage non-Tibetans to wear Tibetan clothes.
사실 그는 스님들과 친구들에게 티베트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티베트 옷을 입으라고 권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Seeing Buddhists “in army uniform, suit and tie, or other normal dress sends the message that Buddhism can be practised by everyone.”
불교도가 군인 복장을 했던지, 신사복과 넥타이를 했던지, 아니면 보통 옷차림을 했던지 간에 불교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The dressing up of converts in Tibetan clothing he identifies with “a cultish atmosphere” and describes it as “introverted exclusivism.”
티베트 복식으로 갈아입는 것은 컬트적인 분위기(끼리끼리 뭉치는 것, 사이비 종교처럼)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내향화된 배타주의이라고 표현한다.
*페이스북에서 옮겨와 원담이 번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