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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신학적 의미를 전제하고,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우리의 죽음에 대한 세부적인 면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저도 구입해서 읽었지만,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펴냄)라는 책은 저자가 20년 가까이 예일대학교에서 진행해온 교양 철학 강좌 '죽음(DEATH)'을 재구성한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 매우 오랜 시간 철학적 논증의 도전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며, 다양한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케이건은 분석철학적인 입장에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됐다>는 이원론과 물리주의(physicalism)를 논증의 토대로 삼고 <죽을 수밖에 없는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자살은 합리적 선택인가?> 등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신중한 검토를 마치고 <죽음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라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507쪽) 이처럼 우리가 밀어내 온 죽음은 삶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요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숙고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저와 마찬가지로 케이건의 책을 읽고 난 다음, 심보선 시인은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비존재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비존재라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라는 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또한 비존재는 내가 움켜쥘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죽음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거스를 수 없는 숙명임을 에둘러 지적하면서, 그는 질문을 우회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자살을 앞두고 유서를 쓰는 것 또한 말을 건네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한 후배가 자살에 대한 박사논문을 쓰면서 사람들의 유서를 분석했는데, 제게 들려준 얘기 중에 잊을 수 없는 게 있었어요. 어느 노인 분이 유서에서 큰아들이나 며느리에게, 가족들에게 꼼꼼하게 말을 전했어요. 그러면서 손주에게는 “내 죽음을 기말고사 끝나고 알려줘라”라고 썼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저는 죽는 순간에까지 자기 손주의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이 마음은 대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도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에피쿠로스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지만, 죽은 다음엔 책임감을 느낄 수 없는 마음도 없잖아요. 그런데 죽는 순간에까지 죽은 다음의 일, 손주의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이 마음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이 사람들이 늘 어떤 관계 속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일화를 마치며 "죽음이 어떤 이익을 낳고 어떤 손실을 낳는가 하는 계산법은 죽음에 대해 큰 성찰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관계 속에서 죽음을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능력이라면서 이 능력을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제 신학적-철학적 관점을 전제로 하고 실제적으로, 무엇이 존엄한 죽음인가라는 오마이뉴스 고현종 기자의 2021.9,13 기사 전문全文을 인용합니다. 이 기사 내용은 저의 견해가 아님을 명백히 밝힙니다. 단지 이는 우리가 모르고 지나쳐 버린 세상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전문을 옮겨 실었습니다.
<<"나 좀 죽여줘. 제발 부탁이야." 아내는 일 년 동안 남편인 정씨(80세)에게 부탁했다. 차마 정씨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엄연히 살인이니까. 아내는 20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아내 병세는 조금씩 악화했고 아예 움직이지 못했다. 정씨는 아내 병간호뿐만 아니라 자녀 돌봄도 책임진 다중 간병인이다. 아들은 나이가 50살이지만 몸은 초등학교 1~2학년 수준이다. 키 130cm에 몸무게가 30kg 남짓이다. 아들은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몸과 마음 발달이 더뎠다. 복합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정씨 부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이다. 정씨 아내는 아들에게 물리치료, 재활치료, 음악치료까지 안 해본 게 없다. 그러나 아들의 병은 좋아지지 않았다. 30년간 아들 병시중을 한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부터 정씨는 아내와 아들의 병간호를 도맡아야 했다. 직장도 그만두었다. 모아 두었던 돈도 집도 병원비, 간병비로 사라졌다. 아내는 이런 형편을 알았다. 자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결행했을 텐데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가는 상태인지라 남의 도움 없이는 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 정씨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정씨도 병간호가 너무 힘들어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할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막상 아내로부터 죽여달라는 말을 듣자 아내와 아들을 끌어안고 울기만 했다. 언제까지 간병 문제를 외면할 것인가?
정씨처럼 간병 살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례들이 많습니다. 간병 살인을 한 이들은 주변에서 희생적인 부모이거나 효자, 효부로 불린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끝 모를 간병의 터널에서 결국 무너졌습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다른 가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정에서 돌봄을 받는 환자를 100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20가구 가운데 한 가구는 누군가의 집에서 아픈 가족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가족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을 떠먹이고 욕창을 막으려 체위를 바꾸는 중노동을 일상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죽어서라도 모든 걸 끝내고 싶다'라는 생각을 정씨와 아내는 했을 것입니다. 50세가 된 아들이 죽고, 한 달 후 아내도 죽었습니다. 두 사람을 하늘로 보내고 정씨는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씨는 아내와 아들을 간호하면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사람들을 돌보면서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에 대하여, 2018년 우리나라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본인과 가족의 동의하에 연명하기 위한 치료를 중단할 수 있습니다. 이를 존엄사법이라고도 부르지만 정씨는 진정한 존엄사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다고 하면 자살과 똑같지 않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살은 대체로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또한, 격리 상태이거나 은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로 인해 가족과 친구들은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상처를 평생 안게 됩니다. 그러나 합법화된 안락사는 여러 가지 주변 여건을 숙고한 끝에 행하는 온건하고 평온한 죽음입니다. 가족 구성원의 이해와 도움이 필수적이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협의를 해야 합니다. 정씨는, 자신이 정신은 멀쩡해도 육체 기능이 마비되는 징조가 보이면 안락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안락사처럼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존엄한 죽음이라며 자신을 죽여 달라는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고 합니다.
2019년 서울신문과 비영리 공공조사 네트워크 공공의 창이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 한 결과 80.7%가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 허용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안락사 찬성 이유는 '죽음 선택도 인간의 권리(52%)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병으로 인한 고통을 줄일 수 있기 때문(34.9%)도 안락사 찬성의 이유로 꼽혔다. 정씨가 존엄한 죽음을 맞으려면 스위스에 가야만 한다. 비용도 2천만 원이 든다. 낯선 이국땅에서 죽는 것이 존엄한 죽음은 아니지 않을까. 한국에서 안락사법이 만들어지면 2천만 원이 없어도 굳이 낯선 땅이 아닌, 자기가 살던 곳에서 자신을 알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며 안락사법 제정을 힘주어 주장했다.>>
고현종 기자는 이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존엄사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11월 3일 개봉 예정인 인도 영화 <청원>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마술사인 주인공은 14년 전 공연 도중 사고로 추락해 목뼈가 부러지면서 전신 마비가 됩니다. 몸속의 노폐물을 걸러주는 콩팥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해 정기적으로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14년 동안 방송 활동을 통해 전국의 전신 마비 환자들에게 희망을 줬던 주인공은 몸 상태가 날로 악화하자 법원에 안락사를 청원하게 됩니다. 아들이 안락사를 도와달라고 한다면 어머니로서 돕겠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네 돕겠습니다. 더는 아프지 않게 해주고 싶어요. 이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판사는 마지막으로 주인공에게 말할 기회를 줍니다. 주인공은 마술을 보여주겠다며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나무 궤짝을 가져오게 합니다. 주인공은 60초면 끝난다면서 검사에게 마술의 신세계를 경험해 보라고 설득합니다. 마지못해 궤짝에 들어간 검사는 잠시 후 숨이 막힌다며 비명을 지릅니다. 약속한 60초가 다 되어도 마술을 보여주지 않자 판사가 소리칩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이런 게 마술입니까? 어서 검사를 꺼내주시오." 잠시 후 나무 궤짝에서 나온 검사는 숨을 헐떡이며 "이게 재미있습니까? 숨이 턱턱 막히고 죽을 것 같은데."라고 항의하자, 주인공은 "검사님은 14년간 전신 마비 환자로 살아온 저의 삶을 60초간 체험했습니다. 겨우 60초라고요"라고 담담히 말합니다.>>
1) <존엄사와 논쟁과 웰다잉well-dying>: 우리나라에서 존엄사의 담론의 시작은 2009년 5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 김모 할머니에게 내려진 대법원 판결 이후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하자는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식물인간 상태로, 단지 의료기계에 의존하여 살아오던 고령의 할머니에 대한 연명치료를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우리 사회는 <존엄사와 품위 있는 죽음>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죽음을 논하기 전에 <죽음에 대한 우리의 모름>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앎>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하고 들어가렵니다.
* <죽음에 대한 모름>
1.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름: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시간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아무도 모름: 좋은 자리와 좋지 않은 자리가 있을 뿐이다.
3.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름: 천수를 누리고 아니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 <죽음에 대해 앎>
1. 누구나 죽는다. 태어난 존재는 다 죽는다. 단지 외면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2.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호상好喪은 불편한 관계를 해소한다.
3.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루12,13~21)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4.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고 죽음의 나의 죽음이다. 그래서 내가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5.어느 누구도 경험할 수 없다. 예행 연습이 불가하다. 그래서 간접 체험이 중요하다.
앎을 앎으로 체험하고, 모름을 모름으로 수용하면서 살아갈 때, 죽음을 위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죽음을 삶으로 끌어들여야 하며, 그 순간 삶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전제하고 몇 가지 개념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1. 무의미한 연명 치료중단, 존엄사 혹은 품위 있는 죽음: 죽음에 임박한 환자에게 의도적인 생명 단축이 아닌,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 등 생명 연장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위.
2. 적극적 통증조절(호스피스, 완화 치료): 말기 환자는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기 때문에 희박하지만 부작용으로 생존기간이 단축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통증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행위.
3. 소극적 안락사(연명치료 보류): 식물인간처럼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영양공급 등 생명 유지에 필요한 치료를 제공하지 않아 자연적인 죽음보다 앞서 생명을 마치게 하는 행위.
4. 적극적 안락사: 식물인간이나 말기 환자에게 의사가 직접 치명적인 약을 주입함으로서 환자의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
5. 의사 보조자살: 의사가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 치명적인 약 또는 수단을 제공해 환자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을 도와주는 행위.
*쉬어가면서 생각하기:2019년 7월에 방연된 의학드라마 <의사요한>를 통해서
의사 요한은 환자의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나아가 고통뿐인 삶이 과연 환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지금껏 의학 드라마가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을 던집니다.
중증 근무력증을 앓는 격투기 선수의 사례는 이런 질문들을 다차원적으로 담아낸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일까를 고민한다는 주형우(=하도권)는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일까를 고민하는 차요한(=지성)에게 우리는 닮았다고 말한다. 주형우는 살아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살아있는 게 아니라 고통일 뿐이라고, 하지만 차요한은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링에 올라 싸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 여기는 격투기 선수 주형우는 연명하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자신이 쓰러졌을 때 심폐소생술 같은 응급치료를 하지 말아 달라 요구한다. 그는 <죽음을 앞당기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한때 도저히 손 쓸 수 없어 고통만을 연장시키던 환자를 안락사시킨 경험이 있는 차요한은 그러나 주형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차요한은 주형우가 말하는 <죽을 만큼 괴롭다.>는 그 이야기가 보내는 시그널을 읽어낸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시작해 그가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걸 알아내고 결국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가 생각하는 고통이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시그널이라는 것.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는 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을 사전에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몸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차요한이 주형우가 말하는 그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해낸 것처럼.
그렇다면 과거 차요한은 어째서 환자를 안락사시킨 걸까. 그것은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고칠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사라졌을 때, 과연 통증의학과 의사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줄여줄 수 없는 고통을 없애주려 한 것이었다. 설령 그 선택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의사 요한은 이처럼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도 진지한 질문들을 담아내고 있다. 새로운 에피소드로 등장한 극단적인 두 환자의 사례는 그래서 더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선천적으로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아주 미세한 접촉에도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환자의 대비. 이 에피소드에서 통증은 다만 피하고픈 어떤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증명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을까. 겉보기엔 무통 환자가 훨씬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또 다른 아픔을 전제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의사 요한이 통증의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전하는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아가 병원 밖에서의 우리네 삶에도 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삶에서 느끼는 힘겨움이나 아픔은 우리가 늘 피하고픈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살아있다는 증명이며 나아가 더 큰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기 위한 신호일 수 있다는 것. 의사 역할을 하는 사회가 힘겨움의 신호를 보내는 이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걸 의사 요한이라는 의학 드라마는 마치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2) 존엄사란? : 존엄사는 의학적 치료를 다하였음에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존엄사는 연명치료의 지속과 중단이라는 선택의 문제이므로 이것은 개인의 자기 결정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삶의 최후의 순간에도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는 지켜져야 합니다. 의학적으로 더 이상 무의미한 치료가 계속되고 이때 타인에 의한 강압적인 치료라면, 개인의 삶에 월권을 행사하는 일이며 동시에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하게 됩니다. 존엄사는 경제적 부담 경감, 환자의 고통 경감뿐만 아니라, 식물인간 상태와 같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도 큰 논쟁이 되며 이때는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도 고려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1) 존엄사 논쟁의 핵심은 인간 본연의 가치와 권리에 있어야 합니다. 2) 존엄사에 관련된 많은 요인 중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대책을 마련하여 생명의 가치와 인간 존엄성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는 균형점이 도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웰 다잉(well-dying), 품위 있는 죽음: (1) 웰다잉은 웰빙의 상위개념이다. (2) 웰다잉에 관심은 자연스럽게 ‘품위 있는 죽음’으로 이어진다.(3) 과연 품위 있는 죽음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 3 > 죽음에 대한 반응
가족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에게 많은 말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를 가지고 다가와서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져다줍니다. 시인인 마야 안젤루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을 잊을 것이고, 당신이 한 행동도 잊을 것이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느끼게 했는가는 결코 잊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저를 사랑했고 제가 사랑했던 어머니가 제게 남긴 느낌을 기억하는 것이 지치고 힘들 때 살아야 할 이유가 되고, <누이의 마지막 말>이 제가 이미 시작한 이 삶, 수도 생활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기억(=사랑받음)은 회복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실패는 바로 기억의 실패입니다.
1) 누이의 죽음: 누이의 죽음은 제게 충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다만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누이의 죽음은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그 무덤가에서 저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누이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의 의미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2) 5.18 희생자들의 죽음 :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연대와 참여 그리고 위로 활동의 기회였습니다.
3) 엄마의 죽음: 상실, 죄책감과 외로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며, 저의 신원 위기와 방황의 시간 속에서, 마침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자유로움을 체험하였습니다.
4) 비오 수사의 죽음: 그의 죽음으로 가족과 다른 길동무를 잃은 외로움과 상실감을 강하게 느꼈으며, 한동안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짙은 외로움과 함께 슬픔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산 사람은 죽은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와 길이에 따라 다른 반응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이와 달리 죽음을 앞둔 사람의 관점에서 많은 분들이 여러 관점을 제공합니다만, 저는 표준적인 개념에서 퀴블러 로스의 견해를 따릅니다.
(1) 퀴블러 로스(Kubler Ross)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죽음의 5단계로 압축하였습니다.
부정(denial): 자신의 죽음에 직면한 사실을 수용하지 않고 부정하려함. -- 분노(anger): 다른 사람들은 무고한데 자신만이 죽어가는 것에 대한 분노 느낌 — 협상(bargaining): 죽음이 불가피하며 모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대자나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협상을 하는 단계 -- 우울증(depression):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절망감, 수치심, 죄책감, 상실감, 슬픔을 토로하는 단계 -- 수용(acceptance): 죽음을 수용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 단계입니다.
(2) 유가족이나 사별자들의 반응과 슬픔의 요인
(가) 쇼크: 쇼크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특히 그 죽음이 갑자기 그리고 예기치 않게 일어났을 때 일반적으로 일어납니다.
(나) 부인, 불신:유가족들은 갑작스런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않으려 합니다.
(다) 분노감과 적대감: 분노감과 적대감은 슬픈 반응의 가장 흔한 2가지 반응입니다. 무기력하고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마다 자신의 고통스런 감정 때문에 화가 나거나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 죄책감(=만약에 그렇게 했더라면):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죄책감은 슬픈 반응의 보편적인 특징입니다.
(마) 우울증: 우울증은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장 힘든 슬픈 반응일 수 있습니다.
(바) 수용과 타협: 수용이나 타협은 죽음이 발생했다는 것을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와 같은 반응에 따른 슬픔의 요인은, (가) 애착의 성격: 가장 심하고 힘든 슬픔의 반응은 유족들과 고인 사이의 애착이 매우 강했을 때 나타납니다. (나) 죽음의 방식: 죽음의 방법은 슬픔의 반응에 영향을 미칩니다. 갑작스레 죽음은 사전 경고가 있는 죽음(=예견된 죽음) 보다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어 합니다. (다) 과거 전례: 과거의 다른 이의 죽음을 어떻게 극복했고 그 죽음을 어떻게 잘 해결했는지가 현재의 상실에 대한 반응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라) 개인적 변수: 정서적인 고통과 걱정을 참아내는 개인의 능력, 그리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죽음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 외향적인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표현합니다. 동료와 자신을 지지해주는 집단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 내향적인 사람: 좀 더 고독한 방법으로 슬픔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홀로 있거나 아주 친한 친구 한 명과 함께 있는 것으로 위안을 받습니다. * 감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 울거나 슬픔의 감정들과 접촉하기를 원합니다. * 인지적인 사람: 슬픔을 더 논리적이고 질서 있는 방법으로 슬픔 과정을 겪는 경향이 있습니다.
(3) 사별자들에게 주어지는 4가지 과제
(과제1) 상실을 받아들이기: 이미 일어난 죽음을 부정하는 경향을 넘어서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죽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을 수용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과제2)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기: 슬픔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모든 상실 특히 죽음에 동반되는 고통스러운 정서 반응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제3) 고인이 없는 환경에 적응하기: 시간이 걸리는 과제입니다. 외적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과제4) 정서적으로 이어나가기: 정서적 에너지를 죽은 사람에게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취미생활로 혹은 다른 활동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 성공적인 재배치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4 > 죽음을 통한 삶에 대한 깨달음
(1) 근본적 깨달음: 삶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짐, 지금이란 순간의 중요성을 일깨움,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배움(=인간의 한계 수용하는 자세), 두려움, 자기 비난, 화, 용서에 대한 배움(=사실 죽기보다 용서하기가 어려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과 진정으로 소유하고, 간직하고,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사랑임을 깨닫게 됨.
&&& 예전에 돈 많은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음의 저승사자로부터 죽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염라대왕 앞에까지 함께 동행해 줄 것을 애지중지하는 셋째 부인에게 부탁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달에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보는 둘째 부인에게 부탁하자 그 부인은 살아 온 정도 있고 하니 왕궁 앞까지만 동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돌보지 않았던 조강지처인 첫째 부인에게 부탁하자 그 부인은 기꺼이 함께 염라대왕 앞까지 동행하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애지중지한 셋째 부인은 재물이고 둘째 부인은 자신의 육신이며, 조강지처는 바로 자선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더 진실해지고, 정직해지고, 더 진정한 자신이 모습, 본래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2) 자기 존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려함, 이미 자신 안에 완벽한 자신을 씨앗 형태로 가지고 있음, 가장 자기다운 조각(=조각은 두 가지 행위의 결과물이다. 불필요한 부분을 털어내기와 필요한 분분을 남기는 행위!)해내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나가야 함, 본래의 우리는 가장 순수한 사람이며 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음, 평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
(3) 삶이란 상실이다. 삶이란 會者定離요 生者必滅이다. ‘없음不在’을 통해 비로소 ‘있음現存’의 중요성을 알게 됨.(=배우자는 붙박이 가구가 아니다. 빈자리의 소중함 깨달음),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사라진다. 잃는다는 것(=상실)과 헤어진다는 것(=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수용,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자 할 때, 상실은 극복 불가능함. 이에 대한 치유의 방법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주고받은 사랑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
(4) 상실을 통한 자신의 가치를 깨달음, 임종 때 많은 사람들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다음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나누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주지 못하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을 가장 크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하고 후회한다는 것이지요.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지만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인생이 좀 달라졌을 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며, 또 그러한 나로 인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삶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후회를 통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은 바로 나 자신의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부, 권력, 학력, 명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인생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오늘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앎은 자신이 누구이며,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게 되고, 진정한 내 모습을 보게 되며, 비로소 행복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수업>에서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그녀의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준 공통점은 하나같이 <지금 살아있음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라, 하루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라, 매일 매일을 충만한 기쁨으로 엮어가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행성에 놀러 온 순례자이며, 삶을 누리고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음을 상기시킵니다. 참으로 삶을 삶대로 즐기고,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 5 > 아름다운 마무리
1) 현대인의 죽음: 피할 수 없는 진실은 <누구나 죽는다.>와 <누구에게나 마지막 순간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 진실 때문에 지상에서의 생명을 더 의미 있는 것이고, 삶은 더없이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2)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지혜는, 첫 번째 지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공통된 후회는 <조그만 일찍 알았더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입니다. 두 번째 지혜는삶에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며, 언제 어떻게 이별하게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이 지혜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교훈 삼아야 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이 지혜와 지금 각자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3) 삶의 정원 가꾸기: <1코 13, 1~ 13 사랑의 찬가 >, 아빌라 대 데레사 성녀는 기도하는 영혼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기도가 아니라 덕을 꽃피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원을 돌보는 것은 최대한 아름다운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이듯, 자신만의 인생의 정원에 씨를 뿌리고 돌볼 책임은 자신에게 그리고 그런 노력을 통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삶은 정원 가꾸기와 같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잡초를 뽑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정원에 뿌릴 씨앗은 사랑(=용서), 기쁨, 평화, 포용, 호의, 성실, 온유, 절제, 감사이며 뽑을 잡초는 시기, 교만, 무례, 분노, 앙심, 불의, 어리석음, 후회와 자책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방법은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 운동과 독서 등을 충실히 꾸준히 실천하려는데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생각대로 이승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의 육신이 소멸되는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나비처럼 날아 영원한 하느님 자비의 품 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그녀의 고백은 우리가 자주 들어왔던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연상하게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결국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죽음은 다름 아닌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건너가는 생명의 다리입니다. 아버지의 집, 천국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을 것입니다.
뇌사 상태 7일 만에 살아 돌아온 하버드 대학 신경외과 의사인 이븐 알렉산더는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합니다. 그곳에서 <그대는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소중한 이유는 분명히 천국이 있으며, 천국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게 행복하게 즐기면서 삶을 산 사람은 언제일지 모르는 그때 아름답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바로 기억하는 앞서 죽고 우리와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는 그분들의 바램입니다. <행복하게 살다 와. 내가 없는 빈자리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기 간절히 원해요.> 이를 위해 자신의 상실이나 상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법과 자신과 친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관광객의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가 찾고 있는 해답은 이미 우리 내면에 있었으나 그러한 사실을 단지 잊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봅니다. 융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자아ego>가 아니라, <자기self>가 자리 잡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자기>는 <자아>라는 마부가 끌고 가는 마차에 타고 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승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정 중에 고통과 힘듦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흔들어 깨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잘 띄지도 않았고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이 승객과 점점 친해지게 디고 그 승객은 우리가 마차를 잘 끌고 갈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어쩌면 역설적이니 모르지만 제 누이와 제 엄마와 동료들의 죽음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좀 더 빨리 시작하도록 해준 자명종 소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참 자기로 살 때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두려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긴 시간 무거운 주제로 힘드셨을 텐데, 잠시 숨돌리시면서, <죽으면서 태어나라>는 법정 스님의 목소리에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삶 또한 무의미해 질 것이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낮과 밤처럼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 영원한 낮이 없듯이 영원한 밤도 없다. 낮이 기울면 밤이 오고 밥이 깊어지면 새날이 가까워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열매가 익으면 저절로 가지에서 떨어지듯이 그래야 그 자리에서 새로 움이 돋는다.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날마다 새로운 날을 이룰 때 그 삶에는 신선한 바람과 향기로운 뜰이 마련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지 매 순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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