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실학훼밀리 역사기행-4)
[아계 이산해 묘]
10.7.(,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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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李山海, 1539년 7월 20일 ~ 1609년 음력 8월 23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이며 성리학자, 교육자, 화가이다. 본관은 한산, 자(字)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죽피옹(竹皮翁)·시촌거사(枾村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의 종고손이 된다.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명종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벼슬을 한 조선시대 학자,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친 당대의 세도가이자 문장가이다. [1]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서훈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으로, 동인 당의 주요 수뇌부이자 전략가이기도 했다.
1558년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장력을 인정받아 명종의 명을 받아서 경복궁 대액을 썼던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그 무렵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질 때 북인의 영수로서 정권을 장악했다.[2] 이산해는 정여립의 기축옥사 무렵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1590년에는 광국공신 3등으로 책록되어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2] 기축옥사의 참혹함을 보고 서인에게 원한을 품고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 된다.
1591년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내부의 여론이 나뉘었을 때는 정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으며,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에는 북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1590년과 1591년, 1592년, 1599년과 1602년 세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화가 이산보의 형이며, 토정비결의 저자인 문신 겸 역술인 이지함은 그의 숙부이기도 했다. 토정 이지함, 남명 조식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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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1539 기해년) 음력 윤7월 20일 오시 출생
20세 (1558 무오년) 진사
22세 (1560 경신년) 성균관의 제술에서 1등
23세 (1561 신유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
25세 (1563 계해년) 12월 사가독서
33세 (1571 신미년) 승지로 부임 당시 부친의 병세 악화로 남산 밑을 요양처로 삼고 모심
37세 (1575 을해년) 부친상. 3년상 치룸.
39세 (1577 정축년) 한음 이덕형을 둘째 사위로 맞이함.
40세 (1579 무인년) 작은아버지 토정 이지함 사망
43세 (1581 신사년) 모친상
50세 (1588 무자년) 우의정. 북인의 영수로 활약
51세 (1589 기축년)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 시작. 곤욕을 겪음.
52세 (1590 경인년) 54세까지 영의정
53세 (1591 신묘년) 기축옥사에서 동인을 숙청한 좌의정 정철을 계략으로 유배 보냄.
54세 (1592 임진년) 임진왜란 발발.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오름
55세 (1593 계사년) 서울을 떠난 죄를 이산해에게 물어 2년간 강원도 유배
57세 (1595 을축년) 해배
61세 (1599 기해년) 영의정
64세 (1602 임인년) 영의정
70세 (1608 무신년) 선조 사망. 소북의 음모를 차단하고 옥쇄를 광해군에게 넘겨줌
71세 (1609 기유년) 봄 둘째 손자 이구의 사망으로 상심이 큼. 같은 해 음력 8월 23일 사망
토정 이지함이 이산해 선생의 작은아버지. 이산해 선생의 아버지 이지번은 아이를 산해관에서 잉태하는 태몽을 꾸어서 아들 이름을 이산해로 지었다고 하고, 이산해가 태어나서 하는 첫울음을 들은 이지함이 그가 가문을 이끌 후손이라고 하였다 함. 6세 때부터 글을 쓰고 이지함이 태극도를 가르치니 바로 천지음양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는 천재. 소년기에 대과 응시 자격을 얻었으나 과거시험은 뒤로 미루고 이지함으로부터 계속 수학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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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신도비 - 蔡濟恭(蔡濟恭)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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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이 마모되어 작은 글씨는 형태조차 없다.

수령 약 300년된 느티나무로 한신이씨 문중에서 관리





아계선생(鵝溪先生) 사당(祠堂)













수당(修堂)기념관장 이문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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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김시업(실학박물관장), 道馬 최성교(성균관 전학(典學), 이성무(실학뤠밀리회장),
정해민(나무정씨안산교리공파종회장)



사당에는 맞대지붕, 재실은 팔자지붕

한산이씨 [석루유고(石樓遺稿)]를 출간 후 처음으로 방문객 살학훼밀리에게 나누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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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계(鵝溪)/이산해(李山海) 영정(影幀)




신위를 싼 보자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72자의 직함의 정교한 세필로 쓴 붓글씨체





다산 종부 이유정, 박지원 종부 강인숙, 순암 안정복 종부 권영자 외 1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