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 고운당필기 > 고운당필기 제1권 > 최종정보
고운당필기 제1권
용골대〔龍骨大〕
[DCI]ITKC_BT_1550A_0010_000_0180_2021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우리나라에서 이르는 용골대(龍骨大)는 곧 영아이대이고, 마부대(馬夫大)는 곧 마복탑이다. 《팔기통지》 〈영아이대전(英俄爾岱傳)〉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영아이대는 달음포 백부의 손자인데, 나면서부터 지략이 많았고 용감하여 전투를 잘했다. 천총 10년(1636)에 몽고의 여러 패륵(貝勒)과 팔기의 패륵은 태종의 공덕이 날로 성대하므로 황제의 칭호를 의논하여 정하려고 하였는데 모두 마땅히 조선국 왕과 의논해야 한다 하였다. 그래서 각각 글을 써서 영아이대와 마복탑 및 이감으로 하여금 내외 여러 패륵의 사자를 인솔해 조선에 가서 회의를 하게 했다. 조선에 이르러 국왕을 만나 보기를 청했지만 끝내 접견하지 않았고, 재내(在內) 여러 패륵 및 외번과 몽고 여러 패륵의 글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평소의 예가 아니었다. 영아이대 등이 의정부에 가서 일을 의논했는데도 군사를 풀어 밤낮으로 막아 지켰다. 영아이대 등은 크게 의심하여 곧 도성 안에서 여러 사자를 인솔해서 백성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성문으로 돌진해 탈출했다. 조선국 왕은 답서를 가진 사람을 보내 영아이대 등을 따라가 전하게 하는 한편 또 세 통의 편지를 변방 신하에게 보내 변경을 굳게 지키라고 하였다. 영아이대 등은 이 편지를 모두 빼앗아서 보고했다. 숭덕 원년(1636)에 태종이 조선을 칠 때 영아이대는 남아서 수도를 지켰고, 2년(1637) 12월에 대군이 개선하자 영아이대와 마복탑이 나와서 맞이했다. 호부 상서로 발탁되어 성실한 마음으로 일을 맡은 지 10여 년이었다. 다라요여군왕(多羅饒餘郡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라액(多羅額) 부마가 되었는데, 직책을 수행하는 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으며 일을 맡아서는 명민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순치 5년(1648) 2월 정묘일에 죽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인 이도(伊圖)가 공(公)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우리 조정의 척화(斥和)라는 대의는 저들의 기록으로 살펴보더라도 늠름하다 할 만하다. 또 〈영아이대전〉을 살펴보면 병자호란 때 용골대와 마부대는 실상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고, 남아서 그 수도를 지키거나 마중 나와 대군을 맞이했다. 〈삼전도비(三田渡碑)〉에는 “영아이대와 마복탑 같은 여러 대장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서로 잇달아 왔다.”라고 했는데, 이 글은 《청일통지(淸一統志)》에도 실려 있기는 하지만 〈영아이대전〉의 내용과 맞지 않으니 의심해 볼 만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용골대와 마부대에 대해서만 실컷 얘기하고 이감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으니 어째서일까? 송나라 사람은 올출을 미워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용골대를 미워하는데, 각기 그 열전의 기록으로 보자면 종필이나 영아이대나 모두 침착하고 굳센 대신이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용골대가 우리나라를 엿보려고 승정원의 사령(司令) 노릇한 지 3년에 이해 못한 것은 사알(司謁)을 부르는 소리였다고 한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개국방략》을 보면 영아이대가 영고이대(英固爾岱)라 되어 있고 병자호란 때 과연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니 《팔기통지》의 오류를 알 수 있다.
참고 : 승정원 사령 - 승정원에 소속된 사령은 해당 관사나 관원에게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알司謁 궐 안에서 왕명의 전달이나 알현 등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대전 사알 2명 가운데 1명씩 돌아가면서 근무
[주-D001] 영아이대(英俄爾岱) :
1596~1648. 만주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타탑라씨(他塔喇氏)이다. ‘타타라 잉굴다이’로 발음하지만 조선에서는 ‘용골대’로 불렸다. 1631년 조선에 사신 왔을 때 조선으로 도망친 만주인을 붙잡아 심양으로 호송하기도 했다. 이후 매년 조선에 파견되어 주요한 외교 업무를 관장했다. 정묘호란 때 청 태종을 따라와 조선과 강화하는 전 과정에 참여했다. 《淸史稿 英俄爾岱列傳》
[주-D002] 마복탑(馬福塔) :
?~1640. 청나라 만주족 정황기(正黃旗) 사람으로 납라씨(納喇氏)이다. 1631년에 호부 참정에 제수되었고, 1634년에는 호부 승정 영아이대와 조선에 와 교역하였다. 이후 누차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주-D003] 팔기통지(八旗通志) :
청나라의 팔기 제도를 상세하게 기술한 책으로, 옹정 연간(1723~1735) 편찬되었다.
[주-D004] 달음포(達音布) :
?~1623. 타탑라씨이다. 대대로 찰고목(札庫木)에 거주하다가 후에 만주 정백기로 귀부하였다. 1621년 청 태조를 따라 명을 정벌할 때 선봉장이 되어 공을 세웠고, 몽고 부족을 토벌할 때에도 선봉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주-D005] 이감(尼堪) :
1610~1653. 청 태조의 손자이다.
[주-D006] 올출(兀朮) :
완안종필(完顏宗弼, ?~1148)로, 본명을 올출 또는 알철(斡啜), 알출(斡出)이라고 표기한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넷째 아들로, 명장이자 금나라 개국 공신이다.
[주-D007] 개국방략(開國方略) :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으로, 청나라 건국의 역사를 기술한 32권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건륭 연간(1736~1795)에 아계(阿桂)와 화신(和珅) 등이 엮었다.
국역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6권 > 隆熙 元年 丁未(續)(1907년) > 76. 太皇帝의 播遷說
76. 太皇帝의 播遷說
太皇帝가 東海로 播遷하였다는 유언비어가 있었다.
파천 播遷
첫댓글 고맙습니다
고종의 播遷說은 말 그대로 당시의 흉흉했던 민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유언비어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