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도 전국 어디라 할 것 없이,
모처럼 길을 떠나 등산로 입구의 식당에서 원투펀치 외식은 닭백숙과 닭도리탕이다.
닭이 더 맛있어서? 에이 설마.
내 짐작으로 닭고기 문화는 그게 태어날 때는 '어쩔 수 없는' 조건에서 벌어지는 최적화였다.
그러나 지금도 닭요리를 팔고 먹는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내려오는 '관행'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산동네에서 언제부터 닭을 먹었고 왜 먹었을까' 라는 게 더 또렷한 의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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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지금은 커피숍 '쉼터'로 탈바꿈하기 전 백무동 입구의 유명한 '한양식당'의 90년경 모습
간판에 적혀 있는 메뉴는 위에서부터 '송어회. 도토리묵. 두부 백숙' 으로 육고기는 닭이 있다.
지금의 백무동 식당가 메뉴판은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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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에 관한 두개의 속담, '닭쫓든 개'와 '꿩대신 닭'은 닭이 맛이 없다는 걸 방증한다.
'닭쫓든 개' 신세는 닭이 새에 가까워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육질이기에 닭이 먹거리로서는 '꿩대신 닭'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야생 꿩고기를 먹어본 입장에서 보자면, 방목한 닭보다 꿩이 더 포동하고 맛있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육식으로서는 소고기와 돼지 등 네발달린 동물을 좋아했고 닭이나 오리는 후순위였다.
유산문화가 완비되어 있었을 금강산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시대 양반들은 무엇을 자시면서 금강산에들 가셨나 ㅁ1, ㅁ 2 를 보면 닭이야기는 없다.
사실 닭고기의 육질이 그리 맛스럽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닭고기를 왜 산에서는 좋자고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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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에 산에들에 놀러간 이들이 미리 정육점에서 준비해간 육고기는 닭이 아니라 '불고기'였다.
다들 고기를 좋아했으니까 말이다.
ㅁ 1930년대 대표적인 까도남 이효석의 1939년 등산과 불고기 추억 --> 여기를
ㅁ 산에서 최고로 인기 많았던 불고기의 모든 것 --> 여기를
ㅁ 북한의 등산로 입구에서 불고기는 이렇다 --> 여기를
ㅁ 1960년대 산에서 즐기든 돌기의 전모는 -->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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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산입구에서 돈받고 음식을 팔아야 하는 식당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지 않다.
언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지도 몰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냉장 시설이나 보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제일 큰 제약조건이었다.
따라서 '소는 누가 키우는데가 아니라 소는 왜 키우는데'가 될 것이다.
그런까닭에 민속학계의 태두인 송석하는 1940년 8월,
조선 최고의 비경인 설악산 등산을 하고 오색으로 내려오는데,
5시반에 오색약수에 도착하다.
연계백숙(軟鷄白熟)에 탁주 몇잔이 선미(仙味)같다....
이렇게 겨우 '백숙'을 즐기고 만다.
'연계 또는 영계'라는 표현은 보통의 닭고기가 엄청 질기다는 걸 반증하고 있다.
왜 설악산 정상에서 위스키를 즐길 정도의 재력있는 경성의 멋장이들이,
고기 맛을 보고 싶은 오색에서 뜻깊은 하산주 안주가 기껏 닭이었을까?
그건 냉장시절이 없던 시절이라 즉석에서 장만 가능한 육고기는 뜰앞의 닭말고는 있었을까.
이는 신대륙 탐험때 신선한 고기맛을 원했던 선원들이 대형거북이를 배에 싣고 다닌 것과 똑같다.
거북이는 먹을걸 안주어도 되었고, 그 결과 대형거북이 멸종의 한 원인이 되었다.
중간결론을 내리자면,
산에서 내려올 때 고기를 '사서' 먹으려는 유한계층에게 대접할 것은 닭 뿐이었고,
따라서 닭이 산동네 대표얼굴이 된 건 근대등산이 생겨날 때와 궤를 같이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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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등산이 다시 붐이 인 것은 1960년경으로 볼 수 있다.
그떄도 여전히 냉장시설 또는 육고기 유통시스템이 없었기에 산아래 식당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서울 근교의 관악산 자락 '안양 유원지'는 다시 새롭게 개발된 관광지라 하겠다.
막 붐을 이루기 시작한 1970년 전후의 구술담 통해 당시 무엇을 팔고 샀는지 볼 수 있다.
'닭을 주로 파시는 이유가 있었을까요?'
라는 질문을 던진 이는 아마도 '돼지나 소'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허나 당시에는 냉장 시스템이 완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물적 조건을 염두에 두지 못한 질문일 것이다.
1970년 경 과자나 팔고. 원하면 닭한마리도 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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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하의 설악산 글에서 그는 부드러운 육질의 ' 연계백숙'을 먹었다고 하고 있다.
지금은 산에서는 질긴 닭 - 토종닭이라는 이름의-을 찾는 거와 정반대라 하겠다.
시내에서는 부드러운 닭으로 만든 치킨을 먹다보니 그렇겠지..
입맛도 변하고.. 물적 토대도 변하고.. 지리산 백무동 식당가는 이렇게 변했다.
백무동을 대표하는 초가집과 옛고을가든 모두 돼지고기인 삼겹살이 맨 위에 있다.
이렇게 된 계기는 마천면 백무동이 최근엔 흑돼지로 유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요리가 다양한 토종백숙, 닭도리탕. 옻닭 등을 보면, 메인은 여전히 닭으로 보인다.
오늘날 어느 곳이든 명승지에는 도로가 좋아 드라이버객을 위한 다양한 먹거리들도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역사로 인해 우리 개념속에는 닭이 먼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냉장고도 있고, 입맛도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먹거리도 요리도 바뀌도 좋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첫댓글 원래 백무동이 흑돼지로 유명한 것은, 남원에서 지리산을 가는 길목의 인월고원에서 키우던 꺼먹 똥돼지에서 기인한다. 지금도 둘레길 시종착인 인월에는 꺼먹돼지 음식점이 주말이면 도회지의 유명 음식점 처럼 붐빈다. 꺼먹 돼지는 어디나 있지만 제주도를 제외하고 똥돼지를 키우는 곳은 육지에서 이 인월고원이 유일하다. 예전에 돼지우리 위에 층을 만들어 볼 일을 보았다. 어쩌다 돼지 몸통에 실례를 하면 돼지가 몸을 부르르 떨어. . .ㅎㅎ 왜 인월고원에서만 똥을 먹혀 돼지를 키웠는지는 나도 모리고 아무도 모린다. ㅋㅋ
그러고보니 선배님의 고향이시군요...
저도 슬슬 궁금해지는데 한번 파헤쳐 봐 주세요..왜 그렇게 키웠는지^^
언제 인월쪽 지리산에 인문산행을 가게 되면 꽤 흥미로울 소주제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