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 요골 공소
"두세 신부에 의해 설정된 공소"

이곳 요골 공소에
천주교가 전래 또는 시작된 것은 1884년 이전으로 생각된다.
충청도 지방 사목을 전담했던 두세 신부가 아산 공세리 성당에서
공주 공소(현 공주 중동 성당)로 가기 전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렀다 한다.
그러므로 공주 중동 성당의 전신인 요골 공소에 첫 사제로 온 것이다.
이곳에 교우촌을 이룬 것은
이화진 베드로 회장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경기도 고양군 출신으로 군난을 피해 이곳저곳 교우촌으로 숨어 다니다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화진 회장은 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순방하게 되자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삼아 선교사들을 맞이했고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는 교우들을 찾아내어 요골에서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때 이 회장은 전교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였다고 한다.

▲요골 공소 종탑
군란 당시 이곳에는 신자들이 숨어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는데 그 사정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처음의 공소는 배실 쪽 이 회장 댁이었다고 하며
그 후 1913년 김덕기 막시모 회장 때 요골로 공소를 옮겨왔다고 한다.
자신의 집 골방을 공소로 3년간 사용하다가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구자응 씨가 어렸을 때는 공소 판공미사를 3대에서 4대를 드릴 정도로
신자들이 많았고 모두 열심하였기에 성직자와 수도자 성소가 많이 나온 것 같다.

▲요골 공소의 성모상
1883년 프랑스인 두세 신부에 의해 이곳이 공소로 설정된 이후
모든 성직자들이 이곳 신자들의 열심을 교구장에게 보고할 정도였다.
또 1884년에 42명이었던 신자수가 양촌(구합덕) 본당의
퀴틀리에 신부 때인 1890년에 이르러서는 100명이 넘어섰고,
공주 본당의 파스키에 신부 때인 1901년에는 145명,
1915년에는 158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 요골 공소에는 이씨, 김씨, 성씨, 복씨, 구씨 등이 살았고
이들이 차례로 회장을 맡아보면서 공소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들 집안에서는 구전회 신부, 김윤상 신부, 김병상 신부,
구자오 신부, 구자윤 신부, 김영관 신부, 구본만 신부, 구본홍 신부,
구본국 신부가 나왔다.
그리고 이 외에도 여러 집안에서 수사, 수녀, 동정녀들이 나왔다.
이처럼 유서 깊던 이곳 공소도 이제 점차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13세대 가량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신자들은 매주 주일이면 함께 모여
공소예절을 행하고 있으며,
매월 넷째 주일이면 유구 본당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러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주일이면 본당으로 미사참례를 가게 되어
공소에서 구역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출처 : 대전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두세(Doucet, Camille-Eugene) 신부(1853-1917년)
서울교구 부주교, 한국명 정가미(丁加彌).
1917년 4월 19일, 1876년부터 40여 년간, 갖은 박해를 헤치며
한국 교회를 끝까지 지킨 초기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인
부주교 두세 신부를 잃음으로써 한국 교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는 1853년 11월 16일 쉬브롱(Chevron)에서 태어나
1873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76년 12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25일 한국으로 떠났다.

▲요골공소 외부
이 때 한국에는 1866년 병인박해로
두 명의 주교를 포함한 9명의 성직자가 순교한 뒤에도
계속 박해가 끊이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1877년 3월에 만주에 도착한 그는 9월 11일 리델(Ridel) 주교와
로베르(Robert)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 23일 저녁에
황해도 배천(白川) 맞은편 한강 입구에 닻을 내리고,
배천으로 들어가 1878년 1월말에는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서울에서 리델 주교가 체포되자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만나 서로 무사함을 기뻐하였다.

▲요골공소 외부
이어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이북 5도를 돌아다니면서도 전교활동을 멍추지 않았고,
12월에는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도중,
천연두에 걸린 어린이에게 성사를 베풀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5일간 병석에서 신음하는 고통도 겪었다.
1881년 뮈텔(Mutel)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신부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두세 신부는 충청도 지방을 전담하여 근 10년간
이곳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1890년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곧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의 건축을 담당했고,
성당이 준공되자 1892년 초대 약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사망하기까지 25년간 그 곳에서 일생을 바쳤다.

▲요골 공소 설립 120주년 기념 표석
1896년 코스트(Coste) 신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 임명되어,
더욱 바쁜 봉사생활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몸이 노쇠해져
40년에 걸친 그의 헌신적 봉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온양에서 남쪽으로 공주를 향해 25km 쯤 내려가면
오른편 한 모퉁이에 신달리 방앗간을 쉽게 만난다.
방앗간을 오른쪽으로 돌아 2km 정도 따라 올라가면
우뚝 서있는 종탑이 눈에 띈다.
옥(玉)처럼 맑고 깨끗한 데다 고요하기 이를데 없다하여
요옥골(窈玉谷)이라 불렀던 요골마을,
1백년 넘은 신앙역사를 간직한 교우촌,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공주군 유구면 명곡 2리로 되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이곳 요골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마을이었다.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았던’(창세 1,2) 것처럼
하느님이 지금도 여전히 이곳에 자리하고 계시는 것일까.
1938년 공소강당 신축
1884년 초대 이화진(李華鎭 · 베드로) 공소회장이 초가를 장만,
공소로 사용했던 집터에 제5대 구평서(具平書 · 바오로) 회장이
1938년 신축한 공소강당은 이곳 요골 교우촌의 역사를 말없이 간직하고 있다.
강당의 규모는 여느 공소와 다를 바 없이 아담했다.
초겨울 찬바람에 시들은 꽃들이 저들 나름대로 앞마당의 성모상을 에워싸
고 겨울을 함께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조부 이화진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1백 90년 된 십자고상을 들고
십자가의 길 성화를 가리키고 있는 이두병씨.
이화진 회장의 손자인 두병(斗炳 · 88 · 사도요한 · 8대 공소회장)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제가 한 살 때 이 공소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조부께서는 몸소 강론도 하시고 공소예절을 주도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큰 첨례날(대축일)에는 떡도 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온통 잔치분위기였습니다.”
이 고장에 신앙의 씨를 뿌린 이화진 회장은
당초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군난(窘難)을 피해 이곳저곳 피신하다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삼아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는 교우들을 수소문하여
함께 모여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제가 어렸을 적만해도 신부님이 오시면
공소예절을 서너차례 할 정도로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벌을 서가며 교리를 익히곤 했지요.
이같은 불뿜는 신앙열정이 성소의 밭을 일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15대 공소회장 구자응(具滋應 · 68 · 로베르또)씨는
지난날에 비해 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한다.
1884년 약 40여명이었던 신자수가 1915년에는 무려 1백 60명 가까이 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 이 마을 30여호 중에서 15호 정도만 신자로 남아 있고
그나마 젊은이들은 모두 도회지로 떠나 큰 축일 때도
30여명이 모이는 게 고작이다.
더욱이 대부분 한호의 구성원은 60세 이상의
노부부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골의 초기 공소시절 이씨, 성씨, 김씨, 복씨, 구씨 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이 번갈아 가며 공소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돌보아 왔다.
그리고 이들 집안에서 사제와 수도자들이 차례로 나왔는데
구씨 집안에서는 전회(田會 · 바르톨로메오 · 은퇴), 자오(滋五 · 베네딕또 · 대전 유천동 주임),
자윤(滋崙 · 비오 · 대전 옥계동 주임), 본곡(本國 · 베난시오 · 대전 변동 보좌) 신부가,
김씨 집안에서는 윤상(允相 · 베네딕도 · 서울 신림동 주임),
병상(秉相 · 필립보 · 인천 주안 1동 주임),
영관(永官 · 도미니꼬 · 서울 공릉동 보좌) 신부 등이 탄생했다.
그 외에 일곱명의 수녀, 한 명의 수사, 세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켜
요골의 뿌리 깊은 신앙을 입증해주고 있다.
“공소강당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칸막이를 했었지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양반들의 전통을 지키고자
남녀교우가 요즘처럼 함께 앉질 못했습니다.
6 · 25 때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자기네들 회의장으로 쓰기 위해
칸막이를 헐었습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