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4:7 – 4:15 하나님 사랑의 절정, 예수 그리스도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7-10)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도 알게 됩니다. 머리로 알던 하나님 사랑을 가슴으로 알게 되며, 입술로 사랑하던 사람들이 신천으로 상할 수 있게 합니다. 참 신앙은 사랑의 가시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가시성이 사라지면 가식만 남습니다.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7-10)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상대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형제간에 사랑에 대해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형제 사랑(7-8)
‘자랑하는 자들아’는 요한1서에서 저자가 성도들을 향해 자주 부르는 호칭입니다(2:7; 3:2,21; 4:1,7,11). 이 구절에만 특화된 호칭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 저자는 자신이 수신자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수신자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자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합니다(7).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일서에서 두 번 등장합니다(4:8,16).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이라 합니다.
요한문헌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 생활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요한복음 4:24). 또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요한1서 1:5).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아는 자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⑵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9-10)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그가 그의 아들 독생자를 화목재물로 보내셨다는 데 있습니다(9-10).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을 묘사하는 두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독생자’이고(9), 다른 하나는 ‘화목제물’입니다(10).
‘독생자’는 요한복음에 세 번 등장하지만, 요한1서에는 한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하고 존귀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자명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참고 요한복음 3:16).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셨습니다. 독생자의 희생은 화목제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화목제물 삼으셨습니다.
‘화목제물’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2:2), 하나님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던 대속죄일의 완성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자기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 만드신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 사랑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신도 사랑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왜곡된 사랑이 넘쳐납니다. 감정만 자극하는 사랑,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과 자기 비하, 그릇된 애국심, 심지어 타인에 대한 혐오까지, 다 사랑을 말하지만 거기 진짜 사랑은 없습니다.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모든 말을 다 듣지 말고 하나님께 속했나 분멸하여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1-21절 사랑이 이루는 담대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에, 언제까지나 ‘공기는 눈에 안 보이지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안 보이시지만 존재한다.’는 식상한 답변만 되풀이 될 것입니까! 성도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볼 뿐 아니라, 그 세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하나님과 상호내주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1-15)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원수끼리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교회 안에 이루어질 때 세상은 그 안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목도합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교회는 언제쯤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1-15)
예수님을 세상의 주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자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주장은 세상의 핍박과 오해를 피할 수 있는 묘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 예수처럼 죽음의 순종으로 아버지와 사람을 사랑한 사람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서 윤리적 가현주의를 조장하는 ‘하책’입니다.
⑴ 사랑을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1-13)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은 요한복음 3:16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아들을 속죄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같이 나타났은즉,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1).
물론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지만,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마땅하도다’(11)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구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나타나지만, 또한 그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12).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형제 사랑을 통해 온전히 성취된다는 말입니다(2:5). 또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형제 사랑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2).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요한복음 1:14,18). 이러한 사상은 요한일서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1:1; 2:1-2; 3:8, 16:42, 9-10,14). 그러나 또 다른 한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합니다(4:12; 요한복음 17:21-23).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하나님 임재의 표시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⑵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4-15)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습니다(14).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고 구주를 보내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구원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라보기보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17, 2:2; 4:2,10; 5:6). 구주 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상호거주가 일어납니다(15).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진정 그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2:22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했다면,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요한일서의 대표적인 대적자인 가현설주의자들(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반대로 예수님의 인성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그의 신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의 신성을 온전히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요한일서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나님과 신자의 상호거주(reciprocal indwelling) 개념입니다.
요한일서는 상호거주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에스겔 11:20, 37:23,27; 예레미야 31:33, 스가랴 8:8; 고린도후서 6:16; 히브리서 8:10).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사귐 가운데 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3:24; 4:13,16), 요한일서는 상호거주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에스겔 11:20, 37:23,27; 예레미야 31:33; 스가랴 8:8; 고린도후서 6:16; 히브리서 8: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사귐 가운데 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