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신지 33년인가보다.
내가 작은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입원하면서
내 엄마도 속이 거북하시다고 정밀검사를 받기로 하며
난 산부인과에 엄마는 내과에 같이 입원을 하게 되었다.
74년 10월 마지막날에 난 아이를 낳고 엄마는 검사준비로
입원실 아래 위를 오르내려 신생아실에 가보기도 하고
마치도 그 밤은 여행이라도 나온것 같았다.
신생아실에서 갓난아이를 들여다보시며 엄마 하시던 말
그 녀석 참 잘도 생겼다...
간호사가 아이와 엄마를 번갈라보더니
할머니를 꼭 닮았네요...
정말로 내엄마의 모습을 빼닮은 아이로 자라줬지만
그 날이 우리 모녀가 얘기하며 웃는 마지막 밤일줄이야...
다음 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 무서웠던 선고 임파선암이라는 진단과 함께
조직검사 탓인지 신경을 타고 내려와 그 날로 하반신에 감각을 잃으셨다.
큰아이는 낳을적엔 엄마가 안고 병원에서 나왔는데
작은 아이는 언니한테 안겨서 퇴원을 하며 그 안은 모습이 어찌나 불안했던지 지금도 기억한다...
엄마는 넉넉지못한 살림이면서도 서울대학 의과대학생의 뒤를 가끔 봐주곤 하셨기때문에
아들이 없어도 의사아들을 둔 가족처럼 우리는 의사진들과 항암치료에 대해서 의논하여 집으로 퇴원시키기로 했다.
멀쩡히 걸어 들어간 병원에서 침대에 실려 엄마가 집으로 오시던 스산한 날이었다.
구급차에서 침대가 내려지자 흐린 날씨였는데 누운채 그대로 얼굴에 쏟아지는 빛이 싫으셨던지
아니면 동네 아는 얼굴들의 기웃거림이 싫으셨던지
침대에 바싹 붙어 엄마손을 잡고 골목 끝 우리집으로 걷고있는 나에게 얼굴을 가려달라 하셨다.
그 분의 대쪽같던 자존심같은게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듯
지금도 가슴에 싸아 해지는 느낌으로 남아있는
영보야~ 얼굴 좀 가려줘...
그 길로 당신 방 안방에 누워 앓다가 떠나가신 내 엄마...
난 해산구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엄마곁에 있고 싶다고 남편에게 청했고
그런 나를 남편은 측은히 여겼는지
일하는 아이의 도움으로 네 살 짜리 큰아이와 갓난 아이를 받아안았다.
퇴근하면 내가 있는 친정으로 또 서둘러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이렇게 나를 엄마에게 내어주었던 남편에게 고마움을 마음에 새기며
엄마곁에 누워 책을 읽어주기도 하면서
모유는 나오지 않도록 가슴을 꽉 조이게 하고서도
아가가 궁금해지면 데려오라해서 한 번 안아보곤 했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환자는 자기생명에 대해서 본인이 알 권리가 있어야하고
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알리지 않아
가야만 할 때가 가까이 온것도 모르고 갑작스레 떠나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그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고.
그래서 난
건강할 때에 남편이랑 아이들과 이런 말을 나누기도 한다.
남편 역시 나두...하면서 동의하여
우리는 떠나기 임박한 시간에라도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싶으니 그리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세상 살면서 잠시 빌려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몸뚱이
건강관리 잘 해서 흙이 되기전에
누군가에게 쓰여진다면
누군가에게 빛이 될수있다면
누군가에게 소용이 되는건 모두 가져가게 하라고 이른다.
너무 노쇠해져 아무곳에도 쓸모가 없도록 내가 살게 되거들랑
의학도들에게라도 쓰이게 하라고 이른다.
그러구서도 남는게 있으면 재로 만들어 내 엄마있는 곳 흙속에 함께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좁은 땅에서 사람마다 제 묘지에 묻히어 산을 온통 묘지로 만드는건 후손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궁색한대로 납골당이다 수목장이다 하지만
단지안에 넣어 보관하는 번거로움도
심어놓은 나무가 잘못될까봐 간수해야하는 번거로움도 덜어주고 싶다.
한줌의 재가 되어 비가오면 씻겨내려가 흙들과 섞이고 싶다...
남편도 나와같이 그리하는게 좋겠다고 하는데도 아들놈들은 말이 없기에
내가 대답을 재촉했더니
난 엄마를 두 번 죽게할 수는 없어... 싫어... 안 하고 싶어...
그런다.
가엾기도 하고... 하는수없어 며느리에게 눈빛을 보냈다.
며느리가 눈으로 답하더니
네... 하고 작은 소리를 내어 말해주었다.
이젠 자알~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
내 영혼이 내 몸을 떠난 뒤의 일은
내 일이 아니니 어찌되든 그들에게 믿고 맡기는수밖에...
나 어려
집안일 도와주는 언니를 고아원에서 데려오는 날 늦은 밤이었다.
엄마가 물으셨다.
이름이 뭐니...?
아가다예요...
난 잠자리에서 얼굴만 내밀고 듣고 있다가 얼른 이불속으로 얼굴을 감췄다.
아가다..ㅋㅋ
별 이상한 이름도 다 있네...
백치아다다도 아니고 아가다가 뭐람...이러면서 말이야.
그 아가다는 성녀 Agatha였다.
세례명이었던거고 카톨릭 고아원에서 데리고 온 아이였다.
난 그 착한 아가다를 언니 언니 부르며 많이 따랐고
성탄 밤 자정미사를 드리러 가면서 혼자가기 무섭다하면 불쌍해서 따라가 주며
성당이라는데를 처음 들어가보았다.
그게 내안에 있는 측은지심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심이었구나.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순이랑 친해지고
정순이 오빠가 신부님 그것도 우리동네 혜화동성당에 보좌신부님으로 부임 하시면서
내 교리공부는 1:1 개인레슨으로 시작되었다.
가시나무새처럼 그 신부님을 어린 내가 어찌나 좋아했던지...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교리공부 마치고 세례를 받겠다니까
종교도 아닌 그저 비는 마음이시면서도
혼자가기 멀쓱해서 나를 데리고 그래도 가끔 절에 가 법문도 들으시고
납치된 아버지와 오빠들의 생일불공을 드리시던 엄마는
나의 입교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하는 수 없지 뭐... 버텨야지...하며
불도 때지 않은 냉방에서 훌쩍거리며 울고 앉았는데
한참 지나 언니가 방문을 홱 열더니
얘~ 세례 받으랜다 받으래...하며 문을 꽁 닫았다.
언니는 내가 엄마 속을 썩인다고 못마땅했나보다.
아무렇게 닫았던지 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 성당으로 달려갔지.
한참이나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있은 일이지만
그 언니를 우연한 기회에 친구 오빠의 친구...길기도 하다.
형숙이 오빠가 유명한 한국대표 축구선수였는데
그 오빠의 친구 중에 제일 착실하다는 이호영이라는 사람은 루카였고
형숙이랑 둘이서 재미로 언니와 만나게 해준것이
우리언니도 루시아로 세례를 받으며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그 아가다로 인해 내가...
내가 언니... 그리고 가시는 엄마의 차례가 된것이었다.
식구들은 아픈 엄마에게 모두들 병을 감췄다.
암이라는 병명을 말해주는건 가혹하다고 생각들 했다.
그렇지 않다고 외쳐도 난 막내딸이라 말빨이 안서니
엄마가 가장 사랑했던 동생 내 외삼촌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계시어
엄마의 자존심을 좀 버텨주는 존재였는데
그 외삼촌을 부추켜서 알리기로 했다.
저녁을 일찍 먹어 치우고 앉은 어느 날 병문안 오신 외삼촌이 말하시던 소리.
누님~ 고치기 어려운 병이 드셨어요...
외삼촌도 엄마도 우리도 모두 소리를 죽여 흐느끼면서 침착하게 알려드렸다.
그때 엄숙하리만치 처연한 자세로 죽음을 받아들이던 내 엄마의 모습은
내 가슴 한켠에서 늘 나를 지키고 있다...지금도.
잠시 눈을 감으셨다 뜨시더니
그 날부터 만나지는 엄마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두 덕담같은 유언을 한마디씩 남기기 시작하셨다.
그저 두 손모아 천지신령님께 가족들의 무사함을 비는게 엄마의 신앙이었던 종교지만
서랍을 열라하시더니 자식따라 가겠다며 천수경 불경책을 한지에 곱게 싸서 방 밖으로 내어놓으라 하신 엄마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시어 하느님을 받아들이시고 주변을 정리하셨다.
엄마가 아끼시며 좋은 날이나 귀한 손님이 오신 날에 상을 차리시던 반상기
그 중에서 몇개를 그 때 내게 주셨다.
깨어질세라 싸놓기만 했는데 언제부턴가 부억에 꺼내놓고
가끔 엄마가 그리워지면 깨끗히 닦으며 엄마가 닿았던 손길을 감지하려 한다.
그러다 드는생각...
이건 엄마가 내게 들려주는 음성일게다.
아... 그렇구나...
엄마는 이렇게 내가 엄마처럼 아끼기만 하고 보기만 하는거 반기실까?
매일 아침 시어머니 문안드리러 가는 남편에게
이 뚜껑있는 그릇은 여간 쓸모있는게 아니다.
타파보다 락앤락보다 환경홀몬도 없고
큰 그릇엔 노란 호박죽을 담으니 곱기도하고
작은 그릇엔 볶음 고추장을 담으니 앙징맞다.
곱게 무우채를 썰어 파래무침은 중간 그릇에 담았다.
가지를 쪄서 나물을 해 담으니 그릇 그릇 채워지는 엄마 그리움이 서러워져
살아계실동안 내 엄마에게는 이런 진지 한 번도 안해드렸는데...하며 목이 메인다.
여자는 어려서보다 젊어서보다 나이들어 늙어가며 어머니를 가슴으로 안고 사는거같다.
시어머니 살아계시듯 내 엄마도 조금 더 사셨더라면...엄마를 기리며
오늘은 엄마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해야겠다.
디-카라는게 생겨 이리도 편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여기에 찍어 올려본다.
첫댓글 누군가 그러더군요... 그리울때 찾아가볼곳을 남겨놓고 가야한다고... 난 아이들 마음에, 가슴에 사랑의 기억으로 남고 싶어요. 내 친정엄마의 묘소를 돌아보며 그 곳에서보다 엄마의 손길이 남아있는 그릇 몇 개가 더 엄마를 느끼게 하듯이 모두 다 없어져도 사랑했던것만은 남으니까요... GOD IS LOVE
우리 작은 애(아들) 때 이담에 엄마 죽으면 화장해라 했더니 "그럼 엄마 강물에 뿌려 엄마 보고 싶을 때 강으로 나가볼래" 하던 말이 생각나네요. 전 아직 친정 부모님 계시기에 그리움 모르고 싫은 소리도 해가며 사는데... 엄마의 그리움이 콧잔등 시큰하게 하네요.율리아나 부구역장님 마음 잠시 엿보았습니다. 편한 밤 되세요. 저도 GOD IS LOVE
이 글을 보니 저도 10여년 전 가신 친정 엄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저희 엄마도 제 나이 마흔 엄마 나이 63세에 암으로 하늘나라에 가셨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대세를 받고 마리아로 다시 태어나서 천국으로 떠났지요.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못 해 드린 것이 회한으로 남습니다.
아파하지 마세요... 그만큼을 내리사랑으로 살고 있는 여자들이니까요...차 한잔 마주 놓고 앉아 우리... 엄마 생각하며 훌쩍여볼까요...
엄마 생각...한동안 분주함에 밀려 하지 못했던 엄마생각....한동안 갈것 같아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 정갈한 그릇과 함께 ... 또한 글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아요. 혹시 수필가는 아닌지요? 어떤 분일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저는 용마 2구역 오난숙 안젤라 입니다. ^^* 눈이 하얗게 내렸어요. ^^* 내마음에도 ... 정갈한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 김장김치 언져 먹는 상상을 해봅니다. ^^* 좋은글 또 기대 됩니다.
한동네 이웃하고 계시네요^^ 용마5구역 부구역장 최영보 율리아나예요. 안젤라자매님이 본인소개를 하셔서 예의에 벗어나지 않으려 여기에 답하다보니 조금 쑥스^ 성탄 지나 한가로워지면 마실오세요...성당에서 파는 가래떡 후다닥 궁중떡볶기 만들고 오뎅국 끓여 갓 지은 밥에 맛있게 익은 김치 얹어 마주보고 웃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