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세 번째)
<울산 정자해변→구룡포, 2017. 4. 22∼23>
瓦也 정유순
“처얼석∼ 쏴아∼♬ 쓰르륵∼♩” 밤새 어둠을 삼키며 새벽을 몰고 온 파도는 무슨 사연이 그리 많은지 정자해수욕장의 몽돌 위에 부서지며, 짧은 이별을 서러워하는 연인처럼 속삭인다. 당산(堂山)을 지키는 곰솔도 그 자리에 그냥 서있는데, 야구공만한 것부터 쥐눈이콩만한 몽돌들은 함께 모여 파도와 사랑 놀음을 하며 북으로 올라가려는 발목을 부여잡는다.
<정자몽돌해변>
<몽돌>
정자해안 북단은 강동해안으로도 불리는데, 가장자리에는 대포 2문이 두 눈 부릅뜨고 동해를 향해 바라본다. 바로 위에는 <강동 화암 주상절리>가 있다. 울산광역시기념물(제42호)인 이 주상절리는 단면이 육각형 내지 삼각형으로 된 긴 기둥모양의 바위가 겹쳐져 있는 특이 지질의 하나이다. 또 동해안 주상절리 가운데 용암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상(柱狀)체 횡단면이 꽃모양 같아, 이 주상절리가 있는 마을 이름이 “화암(花岩)마을”이다.
<동해를 향한 대포>
<강동화암주상절리>
울산 북구 신명동을 지나면 경북 경주시 양남면 지경리가 나온다. 땅(地)의 경계(境界)가 되어 지명이 “지경리(地境里)”가 되었나 보다. 뭍에서 흘러나오는 개여울이 경계를 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징검다리를 만들려고 큰 돌을 어렵게 놓으면 물살은 비례하여 더 빨라지고 커진다. 어렵게 개여울 건넌 마을 어느 수족관에는 큰 홍새우(大紅鰕)가 가득하다.
<개여울 넘기>
<큰 붉은새우(大紅鰕)>
바위마다 절경을 이루어 눈은 자꾸 해찰을 하여 걸음이 더뎌진다. 갯바위를 절벽 타듯 기어오르면 철책이 가로막혀 없는 길을 찾아 헤맨다. 나그네가 가는 길이 어디 따로 정해져 있었던가? 막히면 돌아가고 없으면 찾아가는 게 나그네의 발걸음인 것을 이 또한 길을 가는 재미가 아니던가. 큰 길로 나갔다가 다시 해안으로 접어드는데, 현대식 2층 건물로 지은 해월사(海月寺)가 평소에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찰의 개념을 확 깨버린다. 부처의 힘으로 바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길 없는 길>
<해월사>
해월사가 있는 수렴1리는 임진왜란 때 수병의 병영이 있는 곳이라 하여 수영포(水營浦)라 하였으며, 매년 정초 어민들이 무사고를 기원하며 제사를 올리던 영험(靈驗)한 바위가 있는 마을을 영암(靈岩)이라고 불렀는데, 두 마을을 합하여 수렴으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 중앙에는 두 장승이 지키고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할매바위가 마을을 지켜 주듯 자리하고 있다.
<할매바위>
<무장공비 전적비>
수렴리를 지나면 양남면사무소가 있는 하서리가 나온다. 하서리는 신라 육부촌(六府村) 때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陀)공이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내아(乃兒) 등을 통치하였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하서리에는 하서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공원 내의 하서 솔밭은 200여년이 넘는 곰솔들이 숲을 이루어 해풍을 막아주는 방풍림 역할과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서해안공원>
빨간 풍차가 돌아가는 카페를 지나면 하서천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도교가 놓여 있고 다리 중앙에 있는 원형 돔을 지나면 동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양남면 읍천리 주상절리대(柱狀節理帶)가 나온다. 그리고 주상절리로 가는 길목인 율포·진리항에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 사랑의 열쇠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풍차>
<사랑의 열쇠>
주상절리는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 이상의 뜨거운 용암이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표면과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에서부터 빠르게 냉각하여 수축하는 과정에서 오각형 또는 육각형 모양의 틈(절리, 節理)이 생기게 되는데, 수축작용으로 생긴 틈이 수직방향으로 발달하면 기둥모양(柱狀)의 주상절리이고, 장작을 쌓아 놓은 것처럼 수평으로 누워 있는 절리를 와상절리(臥狀節理)라고 한다. 또한 와상절리 중 부채꼴로 된 선상절리(扇狀節理)도 있다.
<주상절리와 소나무>
<와상절리>
특히 이곳의 주상절리는 지금으로부터 약2,000만 년 전 현무암질의 용암이 흐르고 식으면서 다양한 모양의 주상절리가 발달한 암석이 형성되었다. 이곳처럼 수직·수평·부채꼴의 3가지 형태의 주상절리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로, 용암의 냉각과정과 동해(東海)의 형성과정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귀중한 우리의 자연유산(自然遺産)이다.
<부채꼴 주상절리>
주상절리의 매력에 빠져 해안 아래위로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왕 벚꽃이 활짝 핀 읍천항을 지나면 월성원자력발전소가 해안 길을 가로막는다. 우회하여 갈 수 있는 길이 있지만, 이를 건너 뛰어 양북면 봉길리 대왕암으로 이동한다. 신라시대부터 어업의 중심지인 읍천(邑川)은 오발산에서 발원한 계곡이 고을을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들어가 읍내포(邑內浦)로 불리다가 읍천으로 되었다.
<월성원자력>
<왕벚꽃>
대왕암(大王岩, 사적 158호)은 문무왕의 산골처(散骨處) 또는 수중릉으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면 갈매기가 넘나드는 평범한 바위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에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모양으로 세워진 모습이다. 못 안의 물은 바위를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 수로를 통하여 동쪽에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 나간다.<네이버 지식백과 ‘대왕암’에서 발췌>
<대왕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은 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 문희이다.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시키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실질적인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룬 왕으로 신라의 국격(國格)을 다시 바로 세워 새로운 나라의 틀을 다졌다. 그러나 사후에 매장(埋葬)이 되어 수중릉이 되었는지,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이 뿌려진 산골처(散骨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주민들은 문무대왕의 영험(靈驗)을 기다리며 용왕제(龍王祭)를 지낸다.
<대왕암 용왕제>
대왕암에서 다시 조금 올라오면 대종천(大鐘川)이 나온다.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나가는 지방하천(2급)이다. 1238년(고려 고종25년)에 몽골군의 약탈로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완전히 소실(燒失)될 때, 49만근의 황룡사 대종을 배에 싣고 대종천에 띄우자 폭풍우가 불어 침몰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조의 기록에는 동해천(東海川)으로 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서 대종천으로 했다고 한다.
<대종천 하구>
대종천 하구 대종교를 건너 이견대(利見臺)로 간다. 사적 제159호로 지정된 이견대는 대왕암이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이 죽은 후에 용이 되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한다. 이곳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2016년 9월 경주지역의 지진피해로 복구공사 중이어서 먼발치로 바라만 보고 지나친다.
<이견대에서 본 대왕암>
동해안 해파랑 길 탐방 데크를 따라 촛대바위를 지나고 전촌몽돌해변과 솔밭해변을 지난다. 고운모래해변이 있는 감포읍 나정리 상정마을에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파정(萬波亭)을 지었다는데, 정자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터에서는 조선시대 백자파편과 옹기파편 등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건립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바위와 소나무>
전촌항을 지나 언덕 솔밭 길을 힘겹게 넘으니 감포항이 멀리 손짓한다. 해안의 제방은 꾼들의 낚시터가 되었고, 감포항의 사각등대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면마다 형상화 하였다. 출어를 기다리는 어항에는 “바다모래 퍼 나르면 어족자원 말살된다”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바다 밑의 모래는 어패류의 산란장으로 마땅히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 바람에 씻겨가는 해수욕장의 모래를 보충하기 위해 바다 속을 마구 휘젓는 것 같다. 자연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촌항>
<감포항 등대>
<모래채취 반대 현수막>
저녁에는 경주시내의 야경을 위해 세계유산경주역사유적지구로 이동한다. 국보 제31호로 1962년 12월에 지정된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건립되었다. 작년에 일어난 “지진피해 안전조치공사”로 인해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한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으며, 30㎝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며 신라시대 석조물로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보수 중인 첨성대>
첨성대에서 남쪽으로 계림(鷄林)이 야간조명에 눈이 부시다. 계림은 경주 김 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이다. 닭 울음소리에 찾아간 숲속에서 발견된 금궤 안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그의 후손이 신라 13대 미추왕이 된다. 이는 신라지역으로 유입된 신진세력의 모습을 설화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계림 옆에는 제17대 내물왕(奈勿王)의 능이 있다. 야간조명이 신라 탄생의 역사를 간직한 비밀스러운 장소는 오늘의 여독을 풀어주는 꿈의 세계로 젖어든다.
<계림 야경>
<내물왕릉 야경>
아침 일찍 일어난 도반들은 숙소에서 가까운 불국사를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주변을 산책하다가 뒷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가 경비관계자에게 혼이 났으면서도 다보탑과 석가탑 등 경내의 볼거리들은 다 본 것 같다. 늦잠으로 못 가본 나로서는 석굴암 가는 길목의 청마 유치환시비도, 불국사의 경내도 잘 있는지 더 궁금해지는 것은 노파심인지 욕심인지…
<청마시비>
<불국사>
조반 후 감포로 가는 길목인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에 있는 감은사지(感恩寺址)를 찾아간다. 감은사는 신라를 통일한 후 왜구의 침략이 잦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문무왕이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절터만 남겨 놓고 금당자리 앞에는 동서 좌우로 커다란 삼층석탑이 우람하게 서있다. 신라 사찰의 전형적인 ‘쌍탑 일금당’ 형식을 취한다. 이중(二重) 기단 위에 삼층의 몸돌을 쌓은 모습으로 처마 밑은 받침이 5단이며,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신라 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감은사지>
<감은사지 삼층석탑>
탑의 상륜부 중앙에는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다른 오래된 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찰주는 탑 꼭대기의 장식물을 지탱하는 버팀대이다. 1960년대 서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안에서는 정교한 모양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도 1996년 보수를 위해 해체할 때 3층 지붕돌의 상면 사리공에서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발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금당 아래 석축사이로 큰 공간이 비어있는데, 동해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용왕이 된 문무왕이 오던 길이 아닌 가 생각해 본다.
<감은사 금당터>
<감은사 터를 지키는 곰솔>
곰솔 세 그루가 지켜주는 감은사지를 뒤로하고 감포읍 오류리 연동마을로 이동한다. 방파제로 둘러싸인 연동항은 스카이라인이 아침부터 손님을 기다리고, 포구 앞 당산목(堂山木) 곰솔이 바다의 안녕을 기원한다. 마을 뒷산에는 동해의 바람을 가득 안고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를 힘껏 돌리고, 아침 햇살을 머금은 바다도 물비늘 반짝이며 오늘의 장도를 격려해 준다. 연동마을을 벗어나자 포항시 남구 장기면 두원리가 나온다.
<스카이라인(집라인)>
<당산목-곰솔>
<풍력발전기>
<동해의 아침>
마을의 완두콩은 하얀 꽃을 피워 토실한 콩을 기다리고 대륜사 앞 도로는 자동차가 쌩쌩 달려 걷기가 좀 불편하다. 동해안 남부지역은 지금이 미역수확이 제철이다. 겨울 내내 찬 바다 속에서 자란 미역이 자연의 영양을 듬뿍 안고 사람의 손길을 기다린다. 젊은이는 다 떠난 어촌에는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가 장대 끝에 나무갈고리를 달아 해변으로 밀려오는 미역을 끌어들이기가 바쁘고, 물질하여 걷어 올린 미역을 저울에 무게를 달아 사각 틀 안에 맞춰 말리기가 너무 바빠 누가 옆으로 지나가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래도 경상도 아지매가 미역 귀 하나 건네 준 것을 입에 오물거리니 짭짤한 맛이 정겹다.
<장대갈고리로 미역채취>
<해녀의 미역채취>
<채취된 미역 손질>
<미역건조>
철 이르게 홀로 핀 해당화는 진한 향기로 응원하고 어느 펜션단지가 있는 언덕을 넘으면 <손재림문화유산전시관>이 나오는데 출입문이 잠겨있어 그냥 지나친다. 계원마을 고샅길을 빠져나와 다시 양포해안으로 접어든다. 백사장 중간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造船所)가 있는지 배를 바다에 진수할 때 이용하는 철길이 바다로 향해 있다. 또 해변에는 오토캠핑을 나온 자동차 지붕 위에 사다리텐트를 치고 망중한을 즐긴다. 길가의 가로등 꼭대기도 반딧불이모형으로 한껏 멋을 부린다.
<해당화>
<손재림문화역사전시관>
<선박진수용 철도>
<오토캠핑>
<반디불이 모형의 가로등>
신창2리 어촌체험마을을 지나 송화가루 날리는 해변에는 물매기를 볕에 말리는 건조대가 줄을 서고, 해변 끝에 다다르면 장기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육당 최남선이 선정한 조선10경중의 하나인 <장기일출암>이 머리에 천년 송을 이고 장기천 하구(河口)를 지킨다. 경치가 아름다운 일출암은 장기천을 따라 내려오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는 바위로, 옛날부터 생수가 솟아난다고 하여 ‘날물치’ 또는 ‘생수암’이라고도 불린다. 바위에 붙은 소나무와 어우러지는 일출은 일품일 것 같다.
<송화>
<장기천 하구와 일출암>
양포 아구탕으로 점심을 하고 오후는 장기초등학교와 장기면사무소로 이동한다.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修身爲正(나를 닦아 바름을 세우다)라는 개교 100주년 기념탑이 학교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옆에는 우암 송시열의 사적비와 다산 정약용의 사적비가 서있다. 이 두 사적비는 우암과 다산이 장기로 유배를 와서 장기인들에게 최고의 학문을 배우게 하고 고매한 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는 행운을 받게 되어, 그 음덕을 기리고 후세에 이어가고자 비를 세웠다고 한다.
<기장초교 개교100주년 기념탑-수신위정>
<우암 송시열선생 사적비>
<다산 정약용선생 사적비>
바로 옆 장기면사무소 정문 우측에는 옛날 장기현의 현청(縣廳)이었던 근민당(近民堂)이 있다. 현청 옆에는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 서양사람 을 배척하고 경고하기 위해 세운 척화비(斥和碑) 전국의 척화비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때 분실되었다가 1951년 4월에 다시 찾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외세의 배척이 아니라 내부의 힘을 기른 후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 같다.
<옛 장기현청-근민당>
<근민당 내부>
<장기척화비>
신창리 어항에도 어선들은 한가롭고, 길가의 등나무도 꽃을 활짝 피운다. 신창리 해변을 벗어나면 산길로 접어들어 데크사다리를 여러 번 오르고 내려 숨이 가빠 오를 때쯤 되면 대진리해안과 모포리해안에 도착한다. 해안에는 윈드서퍼들이 제철을 만난 양 바람에 하늘을 나는 연(鳶)줄에 의지하여 바다 위를 질주한다. 모포항을 돌아 재를 넘으면 구룡포읍 구평리가 나오고 해변을 따라 올라가면 장길리복합낚시공원 앞에서 세 번째 장정을 마무리 한다.
<칡꽃>
<모포리 해변>
<윈드서핑>
<장길리복합낚시공원>
<귀경길의 석양>
|
첫댓글 와야, 여전하시군요. 그대의 건각이 부럽소. 주상절리의 소나무...왕벚꽃... 다 우리나라의 보물입니다.
잘 계시죠~?
세상을 걸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우리의 자연은 우리의 자산이고 자원입니다.
소중하게 관리해서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