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4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루가 9,22-25)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에 이르는 길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신다. 생명의 길은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길을 제시하신다. 그 길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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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멍에’를 메고 따르라고도, ‘짐’을 지고 따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까? ‘멍에’나 ‘짐’을 지고 가는 이라면 농부나 장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죄인 중의 죄인, 곧 사형수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금 새겨보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죄인으로 취급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날이 죄인으로 취급되며 사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형틀을 메고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 살아가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를 풀어서 말한다면, 세상의 논리 안에서 인정받는 삶이 아니라 복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스스로 버림받고 소외당하며 손가락질받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꺼이 죄인으로 취급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의인으로 인정받고자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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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신 적이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인도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구경을 갔습니다. 지옥에 들어가니 마침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지옥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탁을 보니 놀랍게도 음식이 풍족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삐쩍 말라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그들의 팔은 곧아서 그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는 천국에 가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곳 사람들의 팔도 구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식탁의 음식을 보았더니 지옥의 것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은 살이 찌고 모두 평화롭고 행복에 차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그들은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의 입에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상대에게 음식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함께 먹여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만 살려고 하면 결국 나도 죽고 너도 죽습니다. 너를 위해 나를 죽인다고 할 때에 비로소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어머니에게서 보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버립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식을 살립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며 이미 인류도 이 지구상에서 없어졌을 것입니다. 사랑은 뺏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써 남을 살리고 자기 자신도 살리는 구원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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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는데, 너는 왜 아까운 생명을 포기하려고 하는 거니?” 높은 산벼랑 위에 서 있는 나무가, 삶의 의미를 잃고 생을 마감하려고 산에 올라갔던 ‘우종영’ 씨에게 건넨 말입니다. 농사일마저 실패하고 서른 살이 되도록 제대로 한 것이 없다며 삶을 놓아 버리려고 하던 찰나, 나무가 그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숙명처럼 평생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나무,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무, 겨울의 추위를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초연함을 가진 나무. 나중에 ‘나무 의사’가 된 우종영 씨는 늘 우리 가까이 있는 한 그루 나무에게서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의 가치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모든 피조물에게는 이렇게 숙명처럼 살아 내야 할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나무들이 비록 척박한 땅일지라도 처음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살아 내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때로는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안고 살아야 할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 십자가를 지고 ‘제 갈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명처럼 지고 사는 삶의 어려움들을 예수님 안에서 바라보며 그 의미와 가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벗어 버리고 싶은 삶의 십자가가 그분 안에서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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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에 우리는 부활을 준비합니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음을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순 시기는 ‘내 몫의 십자가’를 찾는 기간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는 연습’을 하는 시기입니다. 내 생각보다 다른 이의 생각을 우선해 보는 훈련입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부활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입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신비입니다. 체험이 없었다면 올해 사순 시기에는 겪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 보십시오. 부활에 대한 빠른 접근은 잡은 것을 ‘놓아 보는’ 연습입니다. 물질이든 사람이든, 사상이든 취미든 한 발자국 물러나 보는 시도입니다. ‘정말 놓아서는 안 되는지?’ ‘정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자꾸만 돌아보는 것이지요.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재를 받았습니다. 그 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의 수요일’ 예식은 다짐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한 줌 재가 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언약입니다. 이 마음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첫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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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로, 본래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쌓인 저주의 나무였습니다. 일반 사형수는 간단히 죽였지만 십자가형은 달랐습니다. 사형수는 먼저 채찍으로 반쯤 죽도록 맞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회복되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했습니다. 형장에 도착하면 군인들이 산 채로 손발에 굵은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고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아 놓았습니다. 일주일 가까이 숨이 붙어 있는 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수치의 나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형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죽음을 체험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인지요?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반전’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늘의 이끄심’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온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비참한 상황’을 극복해야 부활의 현실을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의 희망으로 지는 십자가가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의 의미
-주요한 신부-
어떤 가게나 상점에 들어갔을 때 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아, 이 집 주인이 신자구나!’라고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차를 타도 차 앞에 붙은 십자고상을 보면 차 주인이 또는 택시 기사가 우리 교우인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가정의 벽이나 탁자에, 아니면 차 안에 십자고상 하나씩은 다들 갖고 계실 것입니다. 불상 가지고 계신 분 없죠?(웃음)
그런데 십자고상을 아무 의미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어놨는데 치우기 귀찮아서 모시고 있다면, 이건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고상의 용도가 “내가 성당 다닌다. 우리 집안사람들이 성당을 다닌다. 세례를 받았다.”라는 표시로만 사용되고 있다면,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이 좀 섭섭하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통 받고 숨을 거두신 그 모습이 단지 우리가 성당 다닌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 안에서 나 자신을 버리기보다 먼저 챙기기 쉽습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보다 버리고 싶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늘 잊지 않고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가 십자고상을 집이나 차에 모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괴로워하고 팽개치는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잘 지고 따를 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성당에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를 보면서 그리고 우리 가정에 모신 십자가를 보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도 부활하기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이, 우리가 십자가의 신비를 사는 것이 바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신비
- 김미자 수녀-
고통?·?배척?·?죽음은 우리가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배척?·?죽음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고통을 피하고 안전하게 살려고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9)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주십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의 순간이 왔을 때,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갈 때 부활의 은총은 동녘 하늘에 아침 해가 떠오르듯 그렇게 밝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성녀 소화 데레사는 “고통은 은총의 전주곡이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신앙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더 높은 곳에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저희 수도회 설립자 무아 방유룡 신부님은 ‘십자가가 귀찮다고 내던지면 더 큰 십자가가 오고, 희생정신으로 참아 받으면 고객의 길동무가 되네.’?라고 영가에서 말씀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도 하느님이 주신 십자가를 잘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합시다.
어떤 장군이 적군에 패해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수치심을 느꼈지요. 왜냐하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거든요. 따라서 이렇게 적군에게 등을 돌려 도망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자살을 위해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칼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바로 앞에 자신보다도 큰 먹이를 물고 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고 가다가 먹이를 놓치고 또다시 먹이를 물고 가다가 또 놓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를 느낀 장군은 자살할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개미를 계속해서 따라갔습니다. 개미는 먹이를 자그마치 79번이나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80번째에 개미굴로 먹이를 들고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장군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 번 밖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저 하찮은 미물인 개미도 79번이나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성공했는데, 단 한 번 실패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개미를 통해 용기를 얻은 그는 다시 돌아갔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고통과 시련으로 큰 좌절감에 빠지신 분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좌절감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귀한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귀한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에 걸맞게 살아가는 방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닮은 삶,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에게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몇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이 십자가를 팽개쳐서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 십자가 건너편에 구원의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잘 짊어질 수 있도럭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시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깨닫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셨으면 합니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를 스스로 자각하라.(몽테뉴)
참 생명
-김성웅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가져오는 세상의 세력들을 멀리하고 생명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 이맘때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워낭 소리>의 몇 장면들이 스쳐갑니다. 불구가 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늙은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 주인공 할아버지의 모습, 옆 논에서 탈곡기로 추수를 하고 농약을 뿌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낫으로 추수를 하고, 소에게 먹일 풀이 오염될까봐 농약을 쓰지 않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다리를 절며 김을 매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새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언뜻 보기에 할아버지와 늙은 소는 변화되는 세상의 흐름을 외면한 채 애써 쇠락한 몸으로 삶의 십자가를 청승맞게 지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장면들을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할아버지와 소는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는 동반의 여정을 걷는 것이 보입니다. 특별히 사순 시기를 맞이하면서 지난 시간과 현재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애써 얻고자 하는 세상의 세력은 무엇이며 나 자신과 형제들의 참 생명은 제대로 배려되고 있는지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관상, 그것은 외면에서 직면으로
-김찬선신부-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설마 주님께서 생명 아닌 죽음을 내놓으시고 더 더욱이 축복 아닌 저주를 우리 앞에 내놓으실까?
사실 하느님께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주라는 것도 없으십니다. 빛이신 하느님께 어둠이 없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어둠이 나오지 않는데 우리에게 어둠이 있음은 우리에게 빛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빛이 없음은 하느님께서 빛을 거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로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생명과 축복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죽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죽음이 있음은 우리 존재가 생명에 잇닿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렇게만 하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대로 하면 축복을 받아 살게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이 바로 저주가 되어 죽게 됩니다. 우리의 저주는 축복을 거부해 받지 못함이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오늘 우리가 들은 신명기에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주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을”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인가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6번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 수치와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착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할 때의 “바라봄”은 라틴말로 “attendo”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저 단순한 봄이 아니라 ‘향하여 봄’, ‘직면하여 봄’, ‘집중하고 정신 차려 봄’입니다. 다른 것에 기웃거리면서 흘깃 보는 것이 아님은 물론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그리고 직면하고 정면해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을 그렇게 보라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주님을 그렇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이 너무도 끔직하여 그 수난이 보기 싫고 그리고 보고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아예 안 보거나 마지못해 보는데, 그래서는 안 되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서 주님의 양들처럼 이 주님을 따라야 함을 얘기합니다.
주님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생명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그들의 수없는 불순명 만큼 도처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불순명의 징벌인 죽음의 불 뱀을 매달아달고 살려면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올려다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외면한 대가로 죽게 되었음을 깨달아 알았다면 늘 죽음을 직면함으로서 주님을 대면하라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십자가를 관상함도 이런 것이겠지요. 십자가를 더 자주 관상하는 사순시기여!
“제 십자가를 지고”
-전삼용신부-
한번은 설교를 아주 잘 한다는 개신교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들어보았습니다. 무언가 배울 것이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했던 이야기 또 하는 것을 느낄 만큼 거의 다 들어보았는데 결국 괜히 시간낭비 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유명하신 분들도 다 “주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지만, 믿지 않으면 힘든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서 그것을 안 내면 집에 당장 우환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국 믿고 십일조를 내면 당장 부자가 될 것처럼 믿게 만듭니다. 물론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더 많은 것으로 다시 되돌려 받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받은 것에 대한 ‘감사’로 바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이 있다면 십일조를 바쳐도 더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보며, 심하게 말하면, 사기 쳐서 사람들을 모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즘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을 보며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정말 자랑스럽고 ‘고생들 많이 했겠다.’ 싶습니다. 단 몇 초를 달리기 위해서 했을 피나는 노력 때문에 더욱 감동스럽습니다. 그들의 고생은 기쁨의 눈물로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금메달의 영광만 강조하고 그 오랜 숨은 고생은 간과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가르침이겠습니까? 만약 그 힘든 훈련의 과정을 생략하고 그 운동만 한다면 금메달을 딴다고 사람들을 꾄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기 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절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모으지 않습니다. 먼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를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스승의 미래가 이렇다면 그 제자들의 미래는 어떻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제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가시밭길이 뻔히 보이는 삶인데 어떻게 가족을 만들어 함께 고통을 당하게 하겠습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서의 영화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가난하셨고 부자가 당신 나라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임도 일러주시기는 하지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길은 꽃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임을 미리 일러주셨습니다.
한 번은 박지성 선수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는 역할을 잘 했다가 감독이 결승에서 이름을 빼는 바람에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메달은 결승에 뛴 선수들만 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과정을 다 뛰었어도 결승에서 제외되었기에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잘 져서 스스로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분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하나의 영광을 향한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 받지 않으셨다면 그 영광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구원의 영광은 그 십자가 희생에 동참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아무에게나 나누어주시지 않고 그 고통의 자리에 우리가 참여할 몫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으로 우리가 그 영광에 참여합니다.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어서 그 희생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듯이 우리도 그분의 희생에 참여함으로써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아와 조각조각 나누어 귀중한 곳에 보관하도록 여러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조각들이 합쳐지면 하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저보고 ‘당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제가 진 십자가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온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십자가를 결합하여 예수님 십자가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면 돈도 잃을 수 있고 가족도 잃을 수 있고 직장, 명예, 혹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일부분이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리스도를 따르시겠습니까? 그럼 오십시오.
<오징어 덮밥 3인분>
양승국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 점심때까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단히 각오를 했기에 점심때까지는 아예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었지요.
점심식사도 최소한 간단히 요기만 했습니다. 계속 식탁에 앉아있으면 유혹이 생길 것 같아 빨리 일어섰지요. 그런데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식욕이 없었는데, 하필 오늘따라 왜 그리도 입맛이 당기던지 신기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아야했지요.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사탄의 소행인지 갑자기 고봉으로 가득 담긴 밥 한 양푼이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따라 국물이 걸죽한 오징어 볶음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3인분은 족히 될 밥에 국물이 "왔다!"인 오징어 볶음을 넣어 열심히 오징어 덮밥을 만들었지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징어 덮밥 3인분은 이미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아침의 굳은 결심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징어 덮밥이란 유혹 앞에 완전히 제 정신을 잃은 제 모습이 한심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자기를 버리기
2. 매일 제 십자가를 지기
3. 예수님 뒤를 따르기
자기를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사순기간 우리가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 안에 형성시키기 위해 어제의 낡고 닳아버린 우리 자신과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릇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릇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고급 향유가 가득 담긴 그릇은 향유 못지않게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개밥을 담는 그릇은 사람들의 발길에 자주 차이면서 홀대받는 개밥그릇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 하실 때 우리 역시 덩달아 가치 있는 사람, 존엄성 있는 인간, 아름다운 그릇으로 평가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는 각별한 새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 위해 낡고 퇴색되어 초라해진 우리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일입니다.
목숨이 붙어있음을 하느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표시로 여기는 일, 다시금 우리의 몫을 살아내는 일, "내 몫이려니"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어느 날 동물원의 관리직원들이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다.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캥거루가 자꾸 밖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원인을 분석한 결과 우리의 높이가 너무 낮기 때문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지요. 그래서 우리의 높이를 5미터에서 10미터로 높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캥거루가 또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 높이를 15미터로 높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캥거루는 여전히 밖으로 나와 관리직원들을 긴장시켰습니다. 그들은 다시 20미터짜리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얼마 뒤 기린과 캥거루 몇 마리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린이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사람들이 우리의 높이를 또 높일 거라고 생각하니?”
그러자 캥거루가 이렇게 대답했데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문 닫는 것을 또 깜빡한다면 말이야.”
캥거루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높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와 밖을 연결하는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근본적인 것을 고치지 않는 한 캥거루는 계속해서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것이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인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어떻게 보면 짧은 삶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말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날마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순교로 생각하는데, 이 순교는 단 한 번 일어나는 일회적인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을 본받는 일은 단 한 번 하면 그만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날마다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과 시련을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지상의 삶을 편하게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이는 짓이다. 말하는 자와 험담의 대상자, 그리고 듣는 자이다.(마드리쉬)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양승국신부-
<어서 빨리 따뜻한 봄날이>
이 어려운 시기,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해나가고 있는 분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 ‘희망’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서 빨리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 꿈결 같은 봄날을 맞이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 매서운 경제 한파가 지나가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넉넉한 순간이 오기를, 어서 빨리 이 무덤 속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 환한 광명의 땅으로 들어서기를...
간절히 꿈꾼다면, 끝까지 희망한다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한다면, 많은 경우 꿈은 현실화됩니다. 춥다고, 힘들다고,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화창한 봄볕이 온통 우리 인생의 창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미리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느껴질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우리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향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로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살아가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메고 있는 갖은 멍에를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 각자가 축복받은 행복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내 능력, 내 긍정적 측면, 내 성공 때문이 아니라 나란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유일한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 업적, 내 위치, 내가 하고 있는 일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지긋지긋하게, 때로 한시적으로, 때로 평생 따라다니는 수많은 유형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며 왜 이렇게 많은 십자자를?’하며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친히 당신 손으로 우리 어깨 위에 얹어져 있던 십자가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실 것입니다.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우리는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너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보내시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보다 큰 선에로, 결국 구원에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축복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무게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보다 큰 도약, 보다 큰 기쁨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박철현신부-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명량대첩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에게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전쟁터의 긴장감과 비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이와 같은 말을 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있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고 동시에 구원을 향한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영적인 투쟁입니다. 40일간 광야에서 단식을 하고 공생활을 준비한 그분은 단호하고 명백하게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반대자들의 미움과 시기를 가져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가만이 온전히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예수님의 비책이었던 것입니다. 악과 선전포고를 한 이상 대충 죽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작전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다 보면 반드시 부딪치게 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을 바라지 않는 세력과의 충돌입니다. 신앙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만일 신앙인이 사회의 온갖 부정과 부패의 문화에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신앙인 또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고통도 각오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살자면? -김찬선신부-
살자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살 수 있는 길이 나에게 있기는 하는가? 단전호흡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열심히 하면 건강 뿐 아니라 생명까지 얻을 수 있는가?
生卽必死 死卽必生이란 말이 있지요. 살려하면 반드시 죽고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산다는 말씀인가요? 여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면 싸우기도 전에 죽음에 의해 죽지만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게 된다는 뜻이 있겠고, 생명에 집착을 하면 육신 생명에 갇히는 자 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죽음을 초월해 영원생명을 누린다는 뜻도 있겠고, 小我가 살려하면 소아 안에서 眞我가 죽지만 小我가 죽는 순간 眞我가 살게 된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루하게 사느니 사람답게 사는 것, 죽음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롭게 사는 것, 이 세상에서 자기라는 유한성을 초월해서 사는 것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얘기가 없고 현세를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얘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세상을 넘어서는 생명,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하느님 誡命에의 順命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자어의 命에는 두 가지 뜻이 있지요. ‘목숨’이라는 뜻과 ‘명령’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목숨, 生命이라는 것은 본디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결과라는 것이 이 말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잘 얘기해주듯 모든 생명은 생기라는 하느님 명령대로 된 것입니다. 생기라는 명령을 거스를 주체도 없었지만 생기라는 명령을 거슬러 생겨난 존재도 없습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이 이러한 것이기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순명하는 것, 즉 하느님의 명령, 계명을 잘 지키는 것뿐이라고 오늘 신명기는 얘기합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얘기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앞의 말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려고 하면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조금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밖에서 누가 생명의 끈을 건네 건져주지 않으면 혼자 거기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늪에 더 빠져들어 죽게 되니 부질없이 혼자 살려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뒤의 말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살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을 하시고 목숨을 바치는 매우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관계성과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위해 자기가 죽는 거기에 하느님께서 사시게 되면서 하느님 생명과 사랑으로 연합한 神化한 나는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종합하면 자기 좋을 대로 살지 말고 하느님 명령대로 살고, 혼자 살려들지 말고 관계 안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십자가란?
-전삼용신부-
매년 이맘땐 유럽에선 축구 클럽별 대항인 챔피언스 리그를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습니다. 작년 이맘때도 박지성이 뛰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우승을 하였고 박지성은 한국인 처음으로 클럽 챔피언의 일원이 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박지성은 작년 결승전까지 중요한 개임을 연달아 뛰면서 맨체스터의 다크호스로 부상하였고 이태리 팀과의 경기에서도 중계 아나운서가 박지성 선수를 경계해야 한다고 자주 말할 정도로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내는 선수였습니다. 실제로 박지성은 맨체스터가 결승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박지성이 당연히 챔스 결승에서 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막상 결승 날 박지성은 후보 명단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영국 언론까지 놀랄 정도로 이 사실이 크게 보도 되었고 한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감독 퍼거슨이 결국은 박지성을 이용해 먹은 것처럼 비난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었습니다.
결국 맨유가 우승을 하였지만 우승 메달은 결승에 출전한 사람들만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고생하고 큰 공헌을 했던 박지성은 우승 메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감독은 박지성이 골을 넣지 못하는 선수이기 때문에 작전상 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결국 그동안 그렇게 고생하고도 우승의 영광을 그 동안 거의 뛰지도 않았던 벤치 후보 선수들에게 양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박지성이 수승메달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공을 잘 못 차서가 아니라 다만 결승에 참가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잘 져서 스스로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분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하나의 영광을 향한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 받지 않으셨다면 그 영광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구원의 영광은 그 십자가 희생에 동참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아무에게나 나누어주시지 않고 그 고통의 자리에 우리가 참여할 몫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으로 우리가 그 영광에 참여합니다.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주어서 그 희생에 자신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듯이 우리도 그분의 희생에 참여함으로써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고통은 우리가 영광을 차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통을 받는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고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려는 누구도 제외시키시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십자가의 조각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아와 조각조각 나누어 귀중한 곳에 보관하도록 여러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조각들이 합쳐지면 하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저보고 ‘당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제가 진 십자가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온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십자가를 결합하여 예수님 십자가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민 고민하지 마
- 이인옥-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순간순간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면 좀 더 힘든 것, 좀 더 어려운 것, 좀 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선택해라.”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늘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편안함을 찾기보다는 남이 하지 않는 일, 새로운 일, 힘든 일에 도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성경봉사자를 해보겠느냐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주일학교 교사를 하라는 부름에도,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갈 때도 수많은 갈등 속에 용기를 냈다. 때로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가?’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병이 들었을 때도 새로 컴퓨터를 배워 매일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아픈데 그걸 왜 하느냐?’는 핀잔도 들었지만, 그런 침울한 때일수록 생산적인 일을 했기에 지금 그 덕을 많이 보고 있다. 예수님도 우리를 힘겹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신다. 당장은 어렵지만 후일에는 좋은 길, 당장은 힘들지만 후일에는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작은 목숨을 버려 후일에 큰 목숨을 얻으라고 그 길을 기필코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제는 자식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면 좋겠느냐고 수시로 묻는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매번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마다 편안하고 쉬운 쪽보다는 조금은 어려운 길, 조금은 힘든 길,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에 도전해 보길 권한다.
매일 자기를 버리는 것... -강정웅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전제를 다십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과 ‘매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당신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의 죽음에 맡기셨고, 그것도 모자라 매일 우리들의 밥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아낌없이 다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말로서가 아닌 행동으로서 이렇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체험한 우리는 이제 그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수적으로 따라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버리는 것,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있도록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 내킬 때에 어쩌다가 한 번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지속적이고 항구하게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고 행복할 때에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라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길, 고난의 십자가 길을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오직 한 분이신 스승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 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그대로 본받으려 합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로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몫이 ‘자기를 버리는 것’과 ‘매일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신앙 공동체에게 주어진 몫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올바른 길, 주님을 따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주장만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신명 30,19-20ㄱ).....모세는 오늘 우리 앞에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복과 저주를 내놓습니다. 생명과 행복과 복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죽음과 불행과 저주를 택할 것인지 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선택은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써 생명과 행복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내세우고 매일 제 십자가를 내팽개치는 삶으로써 죽음과 불행을 얻을 것인지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시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희망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인은 결코 요란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봄을 알리는 새싹이 드러나지 않게, 아무도 모르게 새 생명을 시작함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은혜로운 사순 시기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 임종필 신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고,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건강이 필요하고, 외로운 이들은 사랑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감옥에 갇힌 이들은 자유가 그리울거고, 바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정의와 평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다 채워지면 나는 어떻습니까? 살맛나는 세상이 되고 한마디로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을 찾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때론 변덕이 심하기도 하고, 또 인간은 병들고 죽고 마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는 물질에 희망을 겁니다. 그러나 돈이나 재산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되고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찾지만 참된 행복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불평과 불만으로, 삶의 푸념을 늘어놓으며 하루하루를 그냥 덧없이 보내곤 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묻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행복과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이 다를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참된 행복을 주님께 걸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고,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곧 천국은 영원한 행복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과 영원히 죽지 않고 함께 살게될 영원한 행복인 천국을 얻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버릴 때 가능하다.
또한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자기 욕망을 채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우리 인생의 목적이자 목표인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참 약은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이라면, 타인의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선 내가 배불러야 되고 내가 잘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익이 되는거다 싶으면, 눈에 불을 키고 그것을 쟁취하려 듭니다. 그리고는 꼭 움켜쥐고 내어놓을 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없어질 가치에 우리의 행복을 걸지 않도록 합시다. 점점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한 줄기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서로를 비춰주며 서로에게 녹아드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며,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얼마 전, 지하철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피곤했기에 빈자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퇴근 시간인 그 시간대에 빈자리를 기대한다는 것은 커다란 사치였지요. 결국 저는 일찌감치 그런 기대는 포기하고 붐비지나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안고서 전철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다른 칸은 모두 꽉 차있는데, 제가 타려는 칸에만 빈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전철을 타자마자 비어있는 자리를 선택해서 앉았지요.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은 뒤에 저는 왜 이 칸에만 빈자리가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냄새 때문이었어요. 그 자리에 누가 무엇인가를 흘렸는지 심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냄새를 피해서 다른 칸에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냄새보다도 자리에 얼른 앉아야 한다는 생각에 빈자리를 선택해서 앉았고, 그 선택은 저를 곧바로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여유를 가지고 그 자리에 들어섰다면 사람들이 피하는 안 좋은 냄새도 맡을 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빈자리만 바라보다보니 그 냄새를 맡지 못하고, 남들이 피하는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섣부른 판단을 통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즉,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생각하다보니, 올바른 길, 나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제시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분명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쾌락을 추구하는 것, 재물과 명예를 쫓는 것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마치 제가 편안하게 앉아 갈 생각만 하다 보니 안 좋은 냄새를 맡지 못했던 것처럼, 결국은 후회할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라고 그렇게 힘주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선택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요? 혹시 후회할 선택을 어리석게도 계속하는 것은 아닌가요?
자리를 양보합시다.
추종하는 삶
-김훈일 신부-
어느 부부가 사순절에 유명한 수난극을 관람했습니다. 연극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큰 감흥이 밀려왔습니다. 공연 후에 그들은 예수 역을 한 배우를 만나려고 무대 뒤로 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남편은 배우가 극중에서 지고 갔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남편은 부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찍어 줘요.” 그는 소품인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배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속이 빈 것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겁죠?” 배우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주님의 삶은 그저 감동을 주고자 하는 연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꼭 살아야 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비하’(自己卑下)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짧은 생각이나 유익 또는 영광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며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비록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매일의 삶을 십자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박기석 신부-
◆“어떤 사람이 목적을 추구해 가는데 다른 사람이 들어서서 방해를 하면 그의 목적 달성이 좌절된다. 이 방해 과정을 갈등이라고 한다.” 신학을 공부한 사제이지만 세상일에 대해선 뭔가 부족하다는 마음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특별히 지난 학기에는 ‘조직행위론’이란 과목을 공부하였는데, 중간시험 문제가 ‘내가 속한 조직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사제가 속한 조직은 교회 공동체 아닌가? 군종사제이니 군대 안의 신앙생활까지 고려한다면 답을 쓰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갈등의 원인은 쉽게 밝혀냈지만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데는 사제이기 전에 사람의 마음이 앞서 쩔쩔매고 말았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루카 9,`1017),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겪고 버림을 받아 죽게 된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곧 루카복음에 나오는 첫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다. 어쩌면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사순절 기간 내내 듣고 갈등하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할 모든 성경 말씀의 초석이요 집약이라 하겠다. 영광스런 기적 장면 뒤에 바로 수난과 죽음을 언급하시는 예수님. 또 그것을 보고 듣게 되는 제자들의 갈등은 바로 지금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추구하셨던 목적과 그 달성을 위해 필요했던 십자가는 첫 순간부터 제자들의 몰이해라는 방해로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은 고통과 슬픔의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죽음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런 십자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 곧 부활을 낳게 하는 영광과 기쁨의 십자가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갈등 처리방식에는 강요·순종·타협·협조·회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갈등 해결 방안은 ‘자신을 버리고 매순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음을 마음에 새겨본다.
십자가의 길
-강영구신부(2004-02-26)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9,23-25)
예수님, 사순절 40일은 당신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시간입니다. 당신이 지고 걸으셨던 십자가, 그 위에 매달려서 고통스럽게 숨져갔던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縱線), 너와 나를 만나게(橫線) 해줍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너와 내가 만나는 그곳에 구원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저희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서로는 한 형제가 되었기에 저희들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당신은 죽음이 곧 삶이며 부활이라는 사실을, 십자가의 패배가 승리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 자기 버림과 비움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당신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22,42) 당신은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욕망의 소리보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뜻에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희들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저희들에게 깨달음을 주십시오. 십자가 뒤에 감추어져 있는 부활과 승리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하늘의 뜻을 따르고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버리고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하여 영광스럽게 당신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십시오.(一明)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양승국신부-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
외국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다보면 다들 큰 호기심을 가지고 제게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십자가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저게 다 교회가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땅에는 정말 십자가가 많더군요. 여기 저기, 50미터 100미터도 못가서 나타나는 교회들, 그 교회의 꼭대기에는 다들 보란 듯이 십자가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恨)으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점철된 ‘십자가의 민족’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십자가는 왜?’ ‘고통은 왜?’ 라는 질문은 인간 역사 안에서 늘 되풀이되어온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시편작가들도 고통의 연속인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 빠져나가듯이 평생토록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통 앞에 시편작가는 차라리 체념하고 수용하는 게 더 낫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대답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 특히 원죄에 대한 경고이자 징벌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보약입니다.”
‘고통은 왜?’란 질문 앞에 지금까지 교회가 제시한 전형적인 답안이었습니다.
물론 고통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일취월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 십자가에 대한 도에 넘치는 수동적, 소극적인 자세는 최선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라는 당부는 힘에 겨우니 체념하라는 말, 어쩔 수 없으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을 더욱 크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난관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매일 와 닿는 고통과 악, 병고와 불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지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라. 그러나 퇴치할 수 있는 고통은 마땅히 퇴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거슬러 투쟁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이를 없애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으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멸시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에 겨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갖은 고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십자가는 미리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은 각고의 노력을 다해 극복해야만 합니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과장, 부장, 사장, 그 다음은...
- 이찬홍 신부-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소년은 산과 바다와 들에서 뛰놀며 아름다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진정, 근심, 걱정과 욕심이 없고 한없이 기쁜 생활이었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음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함께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직합니다.
그 때부터 어른이 된 소년은 앞만 보며 달려갑니다.
경쟁 사회라는 이유로... 남보다 앞서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이유로.. 계속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입사한지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업무 성과가 인정되어 과장으로 승진합니다. 과장이 되니, 은근히 부장자리가 욕심이 납니다.
그 욕심 때문에, 휴일에도 직장에 나가며 달리고 또 달려, 목표했던 부장으로 승진합니다.
부장이 되고 보니, 다시 사장이 되고픈 욕망이 온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 때부터 직장 동료나 선후배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경쟁상대로만... 밟고 넘어서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지게 됩니다. 점점 동료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시기, 미움이 깊어질 때쯤에 사장이 됩니다.
사장이 된 기쁨을 한 참 누리다가, 회사원으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지위에 서고 보니, 어느 덧 내려가야 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바로 ‘송장’임을 알고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눈을 감고 어린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그러면서 ‘내 어린시절은 어디가 버렸는가? 왜 어린 시절을 계속 키워나가 못하고 이렇게 잃어 버렸는가? 왜, 남보다 더 많이 앞서려고 그렇게 욕심을 내며 달려왔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묵상하다보니, 예화의 소년뿐만 아니라, 작년에 인기 있었던 ‘장보고’라는 드라마에서 ‘자미부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은 후, 절규하며 외친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자미부인 : “대체 뭐가 잘못 잘못된 거요? 내가 이룬 부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야. 천신만고 끝에... 내가 각고의 애를 써서 만든 것이야. 헌데.. 어찌 이리 허망하게 무너질 수가 있단 말이오. 말해보시오.
이 모든 것이.. 장보고 그놈 때문이야. 내 진작 그놈을 죽였어야 했어... 그놈을 죽였어야 했어....”
능창 : “부인을 모신 것만으로... 제 인생은 더 발랄 것이 없습니다. 한 가지 한이 되는 것은... 부인께서.. 가시는 위험한 길을 제가 막아서지 못한 것입니다. 부인이 손에 움켜쥔 부와 권세가... 모래알 같은 것임을... 그래서 언제라도 허망하게 빠져 나가는 것임을... 진작 말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돌이키기에는.. 위험한 길을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부인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정화의 심정이... 지금 제... 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해신 48회 대본 중에서...)
그렇습니다.
자미부인이 남을 시기하고, 남에게 많은 해를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잘못이 자미부인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곧, 자신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허물어 버리는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권력, 부 그 자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올인해 버린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온 마음과 열정을 쏘아 부은 것.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 권력에 대한 애착이.. 과도한 욕망이 자미부인을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앞의 예화의 소년도 마찬가지 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며 살아간 사람을 어찌 나쁘다..헛살았다..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승진. 진급에만 욕심내다보니.. 자신의 모든 정성, 에너지를 쏟다 보니, 다른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승진을 최고의 목표로 삼다보니...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신의 승진에 방해되는 사람으로만... 앞길을 막는 사람으로만 여기게 되어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사람이 온 세상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 어떤 권력, 힘, 명예, 재물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 얻고자 하는 것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목숨을 잃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삶을 소극적으로 사시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인생 뭐 있어! 그 까이거 대충~~~~~’ 이란 마음으로 생활하시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여정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순간에, ‘아.. 왜 이렇게 살았을까?’ 라고 반성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무엇을 얻으러 온 마음과 힘과 열정을 기울입니까?
나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어, 주님을 편히 쉬게 하지 못하게 하는 애착은 무엇입니까?
그 헛된 욕망과 그릇된 애착을 버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보내고 있는 사순시기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우리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아 버려, 주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그것을... 헛된 애착을... 버리게 해주기에, 버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에, 이 시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요, 은총의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멘
복되어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 -이기양 신부-
어제부터 시작된 이 사순절은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우리 삶의 무게들과 함께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동안의 대부분의 복음과 독서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3-24)
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온 것은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요. 또 우리는 목숨을 살리고 싶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십자가를 매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이해하기 힘 든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인도의 유명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입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지방 강연을 가려던 간디가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안타까워하며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아마도 아쉬움은 계속해서 남아있을 터이고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한 짝마저 던져 주었을 때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서 고생을 하고 사서 고민을 합니다. 따져보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 즉, 자녀, 돈, 건강, 학업, 사업 등에서 기인하는 대부분의 걱정들은 90%가 스스로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걱정은 10%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실제로 일어나는 일보다는 스스로 만든 생각 속의 걱정으로 속을 끓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정신 훈련 전문가인 샤르마 박사는 사업가들이 염려하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통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사업가들이 갖고 있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의 세계를 분석해 보니 그 가운데 54%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요, 26%는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 행동에 대한 것이요, 8%는 그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견해나 비판에 대한 것이요, 4%는 그들이 즉각 해결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6%만이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실제적인 걱정거리였던 것입니다.(송봉모,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98쪽)
그렇습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하는 걱정은 거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걱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혼자서 이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태산같은 한숨을 몰아쉬면서 걱정만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간디의 예화에서 보듯이 걱정할 필요 없이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얼른 잊어버리든지 남은 한 짝을 빨리 던져주든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부딪혀지는 문제들은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풀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모세의 유언이 나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유언으로 신명기 내용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내려다보이는 요르단강 바로 앞까지 와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어가며 모세는 이러한 유언을 합니다. 유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신명30,15-18)
우리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성공한 것 같이 여기지만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고 모세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볼 것 같지만 바로 그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오늘 제1독서는 말합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30,19-20)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질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간디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극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또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걱정이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고, 실제로 관심을 가져야 될 문제는 아주 적은 분량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적극적으로 지고 따를 때 풀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그것이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면서 근심과 걱정이 앞서는 일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그것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출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바로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부활의 길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의 여러 걸림돌들, 잘못된 습관이나 지나친 욕심, 또 이웃 간의 단절을 불러오는 악행들을 고치고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부활이 좀 더 큰 결실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몸소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법칙
-박상대신부-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루가 9,18-21)이 있은 후,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고 십자가 추종에의 초대를 선포하신다. 수난예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공관복음 모두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루가 9,28-36)의 도입부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메시아이자 야훼의 종인 당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내다보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배척과 고난과 죽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다 이루어지면 반드시 부활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함께 내다보고 계신다. 부활을 향한 그 날까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을 위해 스승은 서서히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수난예고와 함께 예수께서는 제자들 또한 스승의 길을 그대로 따라오기를 원하시면서 추종의 기준을 제시하신다.
추종의 기준을 보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살리려 하는 자는 오히려 잃고, 잃는 사람은 되려 얻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일방적인 자기비하(自己卑下)나 겸손을 뜻하지 않는다. 이 모든 ’자기를 버림과 잃음’은 철저히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는 예수를 위하여, 그리고 예수 옆에 머물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삶을 내어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내어놓는 것이며, 이는 곧 하느님께서 죽어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국은 예수께서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이 죽음을 이길 수 있도록 생명을 죽음에 부치시는 것이다.
오늘 스승이 제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스승이 앞으로 당해야 한다는 일도 그렇고, 그런 달갑지 않은 일을 대비하도록 제시하는 추종의 기준도 그렇다. 명사(名士)들은 통상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지지(支持)와 따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다. 강도나 도둑들의 두목도 동업자에게 획득한 전리품에 대한 정당한 배분과 몫을 약속하는 법이다. 이 경우 약속된 것은 거의 달콤하고 좋은 것이다. 그런데 약속된 것이 기다린다고 그냥 주어지는가? 아니다. 많은 어려움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할 때도 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가지 다른 것은 약속의 내용이다. 예수라는 스승이 자기 제자들에게 약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함께 죽자는 것이다. 사실은 죽음 후에 주어질 부활이 함께 약속되었지만 제자들의 머리로 부활을 깨닫기는 아직 멀었다. 아무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법칙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법칙이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는 것, 이는 게임(game)과도 같은 것이며 하나의 내기(betting)와도 같다. 말도 안 되는 게임 같지만 이기면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추종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도 초대되었다. 누구든지 마지막까지 예수와 연대(連帶)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버릴 때, 진실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기쁨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가 9,23-26)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에 우선 주목하자. 그렇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비록 어느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더라도 그 말씀의 대상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마태28,19)이며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사도행전 1,8) 해당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에 바로 나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인생이란 내가 개척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올바로 알아듣고 그 말씀에 순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내 인생의 설계도는 이미 예수님에 의해 그려져 있고 나는 다만 그 설계도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자들도 이 간단한 진리를 알아듣고 올바르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어디까지나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강제적으로 누구에게나 강요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이 있다.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한 가지 한 가지 사항을 살펴보자.
첫째, 세례성사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 그리스도신자는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23절) 둘째, 자기 목숨을 구하려면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24절) 셋째,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25절) 넷째, 그리스도 신자는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십자가 없는 영광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26절) 다섯째, 하느님의 나라는 죽은 다음에만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도 볼 수 있다.(27)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하고, 매일 미사 참례를 하고, 하루에 묵주기도 십 오단을 바친다 하더라도 오늘 복음에서 제시한 삶을 구체적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즉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제시한 삶을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실천하지 않으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이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한 마디로 하늘 나라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제시하신다. 이 조건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이 길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이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래서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우리는 이런 어려운 길을 걸으면서까지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로3,3)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속에 숨겨 있기 때문이다.
"나를 따라야한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신자가 늘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이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인가? 그 생활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 조건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다.
세 가지 조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하자. 첫째, "자신을 버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기를 원한다. 항상 자기 생활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다. 하느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자기가 있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항상 하느님은 뒷전에 계시고 자기가 우선권을 갖고 자기를 위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생활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을 하려면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가능하지가 않다. 그래서 자기를 버리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라는 말이다.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늘날 십자가란 무엇일까? 어떤 어려운 것이라도 내가 좋아서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절대로 십자가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쉬운 일이고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한다는 것은 바로 나에게 커다란 십자가이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내가 비록 하기 싫어도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라면 하라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결코 자유는 아니며 반드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나를 따라야 한다." "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제시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활 속에서 그분이 제시한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끝나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그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동반해주신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분을 따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눈을 떼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그리고 들어야할 그분의 음성은 바로 복음이다. 복음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당신을 따라야 하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