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뉴스타파>아직도 세월호 침몰이 미스터리라 믿는 당신에게
제1부 “세월호”의 비밀
제가 오늘 퇴근하다보니 대로변에 “4ㆍ16참사 9주년, 기억, 책임, ……”라는 플랜카드가 여러 곳에 붙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9주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527억 원의 세금을 쓰고도 아직 제대로 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채 조사가 끝난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마침 『주간 뉴스타파』에서 “아직도 세월호 침몰이 미스터리라 믿는 당신에게”라는 탐사 보도를 냈기에 세 번에 나누어 싣고자 합니다.
<세월호 참사 9주기를 맞는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그날 세월호가 어떻게 쓰러져 침몰했는지에 대한 공인된 설명을 정립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실상 마지막 국가조사기구인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지난해 활동을 마치면서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애매모호한 결론만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해양 전문가들과 세월호 참사 연구자들은 2018년 선체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과학적·합리적 설명이 대부분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그 설명이란 어떤 것인지, 그럼에도 아직껏 적지 않은 이들이 세월호 침몰 원인을 ‘미궁’으로 여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취재했다.
‘세월호, 쓰러질 준비가 되어 있던 배’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쓰러져 침몰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 이전의 세월호가 어떤 배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도입한 중고선이었다. 일본에서의 선명은 ‘파도 위’라는 뜻의 나미노우에호. 1994년 4월 마루에페리사가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조선소에서 만든 카페리선이었다.
나미노우에호는 여객과 화물을 싣고 가고시마와 오키나와 사이를 왕복 운항했다. 2011년 마루에페리사는 나미노우에호의 운항을 선령 18년 차인 2012년 9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신형 여객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미노우에호를 중고 선박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
이 낡은 배를 사겠다고 나선 것은 청해진해운이었다. 이미 2003년에도 마루에페리사가 14년을 운항한 중고선을 사들인 적이 있었다. 청해진해운은 이 배를 개조한 오하마나호를 1주일에 3차례씩 인천과 제주 구간에서 왕복 운항시키고 있던 상태였다.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를 사들여 인천-제주 항로에 추가 투입해 매일 왕복 운항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경쟁사가 이 항로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방어할 방법이 필요했던 터였다. 마침 이명박 정부가 그때까지 20년이던 연안여객선의 선령 제한을 30년으로 완화시켜 줬다.
나미노우에호를 146억 원에 사들여 10년 이상 운항하면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 매입을 결정한 2011년부터 여러 차례 임직원들을 일본에 보내 배의 상태를 살피며 개조 방향을 논의했다.
2012년 10월 8일, 당시 오하마나호 선장이던 이준석과 1등 항해사 신보식이 일본에서 나미노우에호를 몰고 한국으로 왔다. 그때 일본 선사의 항해사는 나미노우에호가 4번, 5번 평형수 탱크는 늘 채우고 다녔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온 배는 곧장 전남 영암의 CC조선에서 개조 공사에 들어갔다. 선수 오른편 카램프(화물칸 출입문)를 철거하기로 했다. 선수 갑판에 컨테이너를 더 많이 싣기 위해서였다. 선미 4층과 5층에 객실을 증축하기로 했다. 더 많은 승객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개조 장면을 지켜보던 신보식 항해사는 안기현 공무이사에게 우려를 전했다. 오른쪽 카램프를 철거하면 배의 좌우 균형이 틀어지고 객실 증축은 배의 무게중심을 높여 복원성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 이사는 “위에서 하는 일”이라며 일축했다.
이 배의 새 이름도 ‘위’의 결정에 따라 세월호로 붙여졌다. 개조가 끝난 뒤 한국선급이 승인한 완성복원성 계산서에 따르면 세월호의 무게중심은 신보식의 우려대로 일본에서보다 51cm 높아졌다.
2013년 3월부터 세월호 운항이 시작됐다. 선장은 이준석이었다. 신보식 1등항해사는 견습 선장으로 동승했다. 5개월 뒤 이준석이 정년퇴임하면 신보식이 선장직을 이어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 차례 운항 만에 신보식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무게중심이 51cm 높아진 배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기울어지고 너무 늦게 복원됐기 때문이다. 신보식은 이준석에게 4번, 5번 외에 2번 평형수 탱크도 항상 채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배의 복원성은 그다지 좋지 않게 느껴졌다.
이유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감사원의 감사 결과, 한국선급이 승인해준 세월호의 무게중심 계산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오류를 바로잡으면 무게중심은 일본에서보다 62cm 높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무게중심을 계산하는 과정이 엉터리였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2013년 1월 28일 목포 삼학도 부두에서 경사시험을 진행했다. 경사시험은 새로 만든 배나 세월호처럼 개조를 많이 한 배의 경하상태(배가 텅 빈 상태) 중량과 무게중심 높이를 측정하는 절차다. 배에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상태일 때의 무게중심을 알고 있어야 얼마나 무거운 중량물을 어느 높이에 싣느냐에 따라 최종 무게중심을 계산해낼 수 있다. 이것이 실제 배의 복원성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세월호는 경사시험을 받을 당시 아직 개조 공사를 다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 설비들은 아직 장착되지 못했고 나중엔 치워져야 할 각종 공사 장비와 쓰레기 등이 선내 곳곳에 들어차 있었다. 배 밑바닥의 연료와 평형수 등 액체류 탱크들도 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미완성 상태인 배도 경사시험을 할 수는 있다. 일단 경사시험을 실시해 무게중심 높이를 구한 뒤 미탑재물(원래 있어야하는 중량물)과 추가 탑재물(원래 없어야 하는 중량물)을 보정 계산하면 텅 비어 있는 완성 선박의 무게중심을 산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경사시험을 하기 전에 미탑재물과 추가 탑재물의 중량과 위치(높이)를 일일이 측정해 기록해 둬야 한다. 특히 배 밑바닥에 위치한 평형수와 연료, 청수 탱크 속 액체류의 중량은 조금만 다르게 측정되어도 최종 보정 계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세월호의 경사시험을 주관한 것은 청해진해운의 용역을 받은 ‘신성’선박설계회사였다. 경사시험 당일, 신성선박설계 직원은 미탑재물과 추가 탑재물들을 미리 측량해 표로 기록해 놓은 뒤 시험을 감독할 한국선급 검사원을 기다렸다. 오후에 한국선급 전종호 검사원이 도착했다. 그는 신성 선박설계가 미리 작성한 미탑재물과 추가 탑재물 목록과 중량, 위치가 정확한지 검증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탱크 속 액체류에 대해 거의 확인하지 않고 경사시험을 진행시켰다. 참사 이후 그 검사원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세월호는 정확한 무게중심 높이를 영원히 알 수 없는 배가 되어버렸다.
화물과 승객을 더 싣기 위해 개조한 세월호는 결과적으로 화물은 덜 싣고 평형수를 더 실어야 하는 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해진해운은 제주까지 한번 왕복하는데 6천만 원 넘게 드는 배를 그렇게 운항할 수 없었다. 수익을 올리려면, 아니 적자라도 면하려면 승객보다 운임이 훨씬 비싼 화물을 최대한 빼곡하게 실어야 했다.
화물을 과적하면 배가 아래로 가라앉아 ‘만재흘수선(국제적인 협정 아래 화물선에 화물을 실을 수 있는 한계를 표시한 선)’보다 깊이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불법이다. 그래서 평형수를 빼내서 만재흘수선을 맞췄다. 그렇게 하면 겉에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배처럼 보였다. 하지만 밑바닥이 가벼워진 배는 늘 휘청이며 다닐 수밖에 없었고 선원들은 늘 불안에 떨었다.
결국 크고 작은 사고들이 속출했다. 2013년 11월 29일 제주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회도 부근 해상에서 4미터짜리 파도를 맞고 배가 왼쪽으로 15도 기울었다. 화물칸 1층 컨테이너 위에 ‘로프’로 대충 묶어 올려둔 화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양주와 벽돌 등이 깨졌다.
2014년 3월 10일, 제주항에서 화물을 실은 지게차들이 뒤쪽 카램프로 들어가 우현 벽면을 따라 이동하자 배가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바깥쪽 승객용 계단이 부두에 부딪히며 찌그러졌다. 신보식 선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세월호가 6,825톤짜리 배인데 복원성이 오죽 나쁘면 지게차 몇 대 다닌다고 기울어졌겠느냐”고 말했다.
선사에 보고하지 않은 사고도 있었다. 참사 당일 승객들에게 ‘대기하라’는 방송을 반복했던 ‘강혜성’은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2013년 늦여름쯤 제주에서 인천으로 올라오는 도중 군산 부근에서 배가 오른쪽으로 20도 가까이 넘어졌고 힐링펌프를 돌려 30여 분만에 간신히 일으켜 세운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신보식 선장은 배가 너무 불안하니 화물량을 줄여달라고 회사에 몇 차례 요청했다. 그러나 물류 담당인 남호만 부장은 “화물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앉아서 가니 더 안전한 게 아니냐”는 황당한 대답을 했다. 신 선장은 “그렇게 하면 복원성이 더 나빠지는 것”이라고 재차 말했지만 “화물을 많이 싣는 게 좋은 것”이라는 대답만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신보식 선장은 자구책을 만들어야 했다. 배가 기우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조타수들에겐 변침 구간에서 한 번에 방향을 틀지 말고 미리부터 조금씩 여러 번으로 나눠서 타를 쓰라고 신신당부했다.
화물이 너무 많거나 기상이 좋지 않은 날엔 운항 도중 평형수를 조금 보충시켰다. 보통 파도가 높은 때에 펼쳐서 배의 좌우 요동을 줄여주는 핀 안정기를 언제나 펴고 다니도록 했다. 폭이 좁고 조류가 센 ‘맹골’수도를 운항할 때는 반드시 조타실에서 직접 지휘했다. 어쩌면 그토록 복원력이 나빴던 세월호가 참사 이전 1년 1개월의 운항 기간 동안 대형 사고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던 이유였는지 모른다.>주간 뉴스타파. 김성수 기자
출처 : 『주간 뉴스타파』. 아직도 세월호 침몰이 미스터리라 믿는 당신에게
세월호는 대한민국에서 운행을 시작한 날부터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던 배였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이 배 자체에 대한 참사위의 결과 보고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 즉 미국 잠수함과 충돌해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쪽으로 계속 주장을 끌고 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 같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