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이에 따라 수입물가가 상승하고
수출경쟁력이 약화되어 수출이 부진했고 , 1980년 5.17 군사정변 이후 정부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경제체제의 안정성이 흔들려, 투자 심리가 위축되는 등 다양한 요인이 겹쳐서 198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대한민국 제 1의 에너지원이었던 석탄 ...그 중심에서 있었던 정선 동원탄좌는 당시 국내 석탄 생산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지만
광부들은 자신들이 모여 사는 탄광촌을
13도 공화국이라고 부르며 전국 13도에서 모여든 오갈 데 없는 뜨내기 인생들이 지하 일천 척의 어둠 속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태백산맥의 높고 가파른 고개인 강원도 삼척·정선·영월 3개군에만도 크고 작은 70개의 석탄광이 들어서 있다.
크게는 5천 명을 거느린 대규모의 탄광에서 작게는 1백 명이 원시적 작업을 하고 있는 덕대 광산까지 국영 5개소, 민영 65개소의 탄광에 3만 8천여 명의 광부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이 캐내는 석탄은 연간 1천3백80만t. 우리나라 석탄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60년대 초 석탄 개발과 함께 형성된 황지·사
철암·도계 등 탄광촌들은 이제는 인구 5만∼10만을 헤아리는 도시로 바뀌었다. 신작로가 뚫리고 석탄을 실어 내는 전철이 개통되고 초라한 화전민의 굴피집 대신 양옥 사택과 상가가 들어섰다.
이러한 외형적으로는 좋은 모습으로 개선되었지만 광부들의 작업환경, 저임금, 자녀 교육, 복지후생 문제는 아직도 2O여 년 전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광부들의 일터인 채탄막장은 낮은 곳이 지하 1천 m이다
광부들이 탄을 뒤집어 쓰고 땅속을 헤집고 다니는 두더지가 되어 꿈틀대며 언제 다칠지 모르는 붕괴사고 등 재해의 불안 속에서 하루 6∼8시간의 중노동을 한다.
칠흑 같은 암흑의 막장 , 섭씨 30도 눈금을 오르내리는 地熱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가빠지는 굴속은 폭파 때의 硝煙과 석탄가루로 이마의 電池등을 비춰도 자기 손이 안보일 정도다.
석탄가루를 마시지 않기 위한 방진마스크가 있긴 해도 작업중 숨이 차기 때문에 잘 이용하지 않는다.
엉금엉금 기어서 곡괭이질을 하고 갱목을 운반하고 동바리를 세우는 엄청난 중노동이다. 쉴 곳이 따로 없어 못 견딜 만큼 지치면 그대로 주저앉아 잠시 숨을 돌린다.
그래도 하루 6t의 할당된 작업량을 맞추기 위해선 곡괭이질을 계속해야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허리춤에 차고 들어간 도시락을 꺼내 아무데나 주저앉아 먹는다. 전등이 있지만 있으나 마나다. 더욱이 갱내 작업조건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경력 20년의 베터랑인 광부는 처음 광부로 시작할 때 삽·곡괭이이던 것이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씁쓸해 한다.
물론 통풍·산소 공급 시설들은 석탄공사 탄광을 비롯해서 일부 민영 탄광에서도 이뤄졌지만 작업환경이 크게 개선되지는 못한 것이 현장이다. 수직 3Om당 섭씨 1도 씩 오르는 지열과 지압, 분진·소음 등 심층 채탄으로 치닫고 있는 작업조건은 채탄층이 깊어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진폐 발생률은 외국에 비해 턱없이 높다.
갱내 생활 5년이면 규폐증(규폐증)에 걸려 현재 罹患率 ,
광부 10명당 1명꼴. 5년 전의 5명당 1명에 비해서도 무려 1·5배나 높다.그래서 광부의 직업 수명은 10년을 크게 넘지 못한다.
산소결핍, 석탄가루 등에 건강이 배겨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탄광마다 탄광 불황을 메우기 위한 경비 절감을 내세워 임금이 싼 임시부를
밀어 넣어 재해율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같은 임시부는 정식 광부 월급의 절반선이다.올 들어서만도 강원도내에서 70명의 광부가 숨지고 지난 한해 동안엔 사망1백98명,4천1백명이 다쳐 하루11명이 넘는 재해율이다.
이는 석탄 1백만 t 생산을 기준으로 일본의 4명보다 2·4배, 영국의 0·5명에 비해서는 22배나 되는 높은 수준이다.
석탄 먼지로 얼굴이 새까만 광부는 당장에라도 이 직업을 팽기치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고 푸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