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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눅23장34)
성경본문: 누가복음23:34
34…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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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그 삶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가장 명확하게 예수님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고, 몇 주간의 시간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부활의 의미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알려진 몇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는 탁월한 예견력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임종하면서 화석정 곳곳에 기름칠을 잘 해두었다가 모년 모월 모일에 불을 지르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나라를 생각하며 <임진왜란>을 준비하며 죽어갔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임종 직전에 친구 아리스톤에게 “파우스한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으니 자네가 대신 갚아 달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최후까지 자기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원했던 성실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는 임종의 순간에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일평생 신에 대한 지적인 반항으로 일관해 온 그의 삶이 절망으로 마무리되는 임종의 순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눔이라는 부자는 죽으면서 “오늘은 얼마 벌었느냐?”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돈이 이 사람의 가치관 전부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익살스러운 죽음의 얘기도 있습니다. 어떤 장의사 주인은 임종하면서 “우리 집 매상 내가 올릴 차례다.” 그러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농담이겠지만,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상업적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 프랜시스는 임종을 앞두고 태양의 송가를 부르면서 “나의 자매 죽음이여 나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자매여!”라고 부르면서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무디 임종하는 순간에 “하늘나라가 열리고 있다.”라고 기뻐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남기셨을까요? 오늘은 가상칠언 첫 시간으로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믿음의 고백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강남의 모 교회에서 폭행 사고가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부목사에게 폭행을 당해 얼굴 뼈가 함몰된 사건입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제 아내가 저에게 한 말이 “부목사들에게 잘해!”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가장 창피했던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래요,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감정이 상해서,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때리고 맞을 수 있다고 합시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그 교회가 내놓은 성명입니다.
“그 사건에 연루된 부목사들을 처벌하겠습니다.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용서해야지요!”
사실 때린 사람이 더 상처가 있는지, 맞은 사람이 더 상처를 받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 나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은 “용서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이 당하는 억울한 일들 당연히 우리가 당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님도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인 것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수 없이 하나님의 가슴에 못 박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좀 비장하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용서가 아니라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신앙,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용서가 어려운 이유
우리의 삶을 가장 고민스럽게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용서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분명히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 구분이 아주 모호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용서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7개의 말씀을 가지고 나누게 될 터인데, 가만히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정말 십자가 위에서 하기 어려운, 아니 우리가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을 십자가에서 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종종 살아가면서 해보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어!”
자식을 키우면서, 남편과 아내에게,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용서”해 보셨나요? “체벌, 교정, 훈계….” 그런 것 말고 진정한 용서 말입니다.
우리가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위해”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 성경읽기?
기도? 전도? 예배? 봉사? 헌금? 이것도 힘들기는 하지만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하기 어렵고, 아니 죽기보다 하기 싫은 것은 다름 아닌 용서가 아닐까요?
아마도 오늘 십자가 위에서 처음으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 정말 나쁜 사람을 만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고의로 하지는 않습니다.
저들이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인 줄 모를 뿐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이 가장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어떻게 욕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권한이 있습니까? 그들은 단지 명령에 따르는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명한 사람들이 잘못한 것인가요? 그들의 위치에서 어쩌면 정치적인 고려로 누군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나름의 논리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담임목사로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 순간에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인지,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내려야 하는 결정이 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 혹은 억울함이 누군가의 “악한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지는 않나요? 그런데 어떠한 형태로든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한,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아픔을 주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닌가요?
우리가 이렇게 이성적으로, 믿음으로 생각하면 용서라는 것이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데, 이 “용서”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결단과는 별개로, 당한 것 이상으로 앙갚음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용서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힘든 용서를 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에게 용서하기 어려운 존재는 로마 병정이나 빌라도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며 환영하던 자들이 광기 어린 폭도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할 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제자들이 그 십자가 아래에 없었을 때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용서는 죄를 행하는 자들보다 함께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을 진정 힘들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 적이 되었던 자들이 아니라 당연히 나의 편이 되어야 할 사람이 나의 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사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상처가 아물어야 하고,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한 마음의 여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는 지금 이유 없는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용서라는 말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용서는 하나님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아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아니 아무나 할 수 없는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용서는?“용서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용서를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용서는 무의미하며, 정의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상대방과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인 “선포”를 하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성경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로마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어떤 상담하던 신자에게 원로 목회자가 대답한 멋진 말이 있습니다.
“용서란?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항복이란? 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승리란? 마지막 목표의 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표를 향해 반대편과 싸워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뢰란? 남들 따라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둔 골짜기라도 신뢰의 대상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남들이 줄 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이 주지 않을 때 주는 것입니다.”그런데 이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글쎄 이것을 실천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해한다!’라는 영어 단어가 (under+ stand)라는 합성어가 아닙니까?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신을 신어보지 않고는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잠깐 언급한 내용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주님은 그들이 몰라서 그렇게 했다고 이해하셨습니다. 이 이해 위에서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교회 목회를 하면서도 깊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욕을 먹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영광과 권리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비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 이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영국의 저술가인 브라운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를 하나님께서 벌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용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도록 기도할 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용서하며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는 기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것이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과연 좋아서 그 일을 하고 행복해하겠는가? 말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구제역’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축을 당해 피가 흘러 넘쳤습니다. 그것을 보는 농부들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축을 죽이는 일을 군인들에게 시켰더니, 밥도 못 먹고 부모들이 부대로 전화해서 왜 군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무원들이 그 일을 모두 합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시위를 합니다.
그리고 신문에 보니까. 누군가 구제역이 창궐하는 베트남이나 중국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 때문에 감염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베트남이나 중국 사람들은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죽여도 보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항생제를 먹여서 키우다가 그냥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그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가요?
결국, 모든 일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고,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대가를 받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슬에 얽혀 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누군가는 먼저 용서하고 그 고리를 끊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사과 카드”를 나눠 드립니다. 직접 여러분의 손으로 써서 용서의 위력이 드러나도록 하셔야 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여러분의 손으로 쓰는 수고가 있어야 기도가 됩니다.
힘들게 쓰는 만큼 기도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사순절을 지나가면서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예수님의 용서를 경험한다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리고 정말 놀라운 일은 “용서”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것이 위대한 일이지만, 진정한 용서를 받은 사람을 통해 일어나는 또 하나의 용서의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참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용서가 될 수 있었을까요?
용서의 기적
그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예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못 박는 자들을 다 물리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기적과 능력은 베푸는 자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것도 가장 추악한 죄를 지은 양편 강도 사이에서 벌거벗긴 채 수치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사실 로마 병정들이 용서를 받아들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묵상하며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용서의 사건이 아닌가요?
용서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바꿔 놓는 기적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었기에, 잘못이 가장 크게 부각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지만, 용서하셨습니다.
단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에 대하여 눈물로 통곡했고, 가롯 유다는 수치심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반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용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바로 우리에게도 용서가 필요하며, 그 용서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어느 스페인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로 하고 신문광고를 내게 됩니다. 아버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파코라는 아들과의 화해를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도시에 광고를 냅니다. 특별히 “엘리베랄”이라는 큰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태나 호텔에서 만나자. 아빠는 너를 다 용서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아빠가.”
그런데 이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무려 800여 명이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한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용서를 바라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용서처럼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용서만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인생의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용서에 출구가 있습니다. 용서로 책임소재와 공평성의 문제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의 새 출발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비은혜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이 용서의 기적은 누군가의 삶을 바꿔 놓는 역사가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꿔놓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달라진 삶이 또 누군가에게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용서는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용서로 치유 받는 최초의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용서가 중요하고 절실하건만 사람들은 무지해서 용서의 시급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그가 전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스데반을 죽이는 현장에서 있었다는 것, 그가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코 전도자가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용서받았을 때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기에 위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디모데전서 1장 13-16절을 보세요.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도 주님처럼 인간의 무지함을 이해하면서 살아갈 때 용서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고, 인간의 무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New song church, Dave Gibbsons 목사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날 밤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던 밤이다.
그 몇 개월 전 아버지의 셰비 블레이저를 세차하다가 좌석 깔판 밑에서 카드를 발견한 일이 있다. 어머니의 의심에도 ‘딴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날 내가 찾아낸 것은 다른 여자가 아빠에게 보낸 <밸런타인데이 카드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침대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15세 때 일이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대화가 단절됐다.몇 달 후 어머니는 아버지 차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며 칼로 좌석을 찢기 시작했다. 이웃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경관들이 차를 에워쌌다. 아버지는 변호사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어머니를 터치하면 당신을 죽여 버릴 거야!”라고.
당시 내 안에는 적개심과 분노가 가득했다.
대학 2학년 때였다.풋볼 구장을 산책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는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다.”
“저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그게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단다.”
“저는 아무 감정이 없다니까요”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헌신이란다. 내 아들 예수가 감정이 있어 십자가의 길을 간 것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이 지나가기를 원했지만, 너에 대한 헌신 때문에 십자가를 진 것이다. 너도 너의 아버지에게 헌신해야 한다.”
그일 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리스마스 때 뵙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그의 새 부인을 만났다. 아버지의 눈을 쳐다보며 나는 말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는 아버지께 좋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절 용서해 주시겠어요?”
그때 키가 6피트나 되는 덩치 큰 아버지가 울기 시작했다.
“데이브, 나를 용서해다오(Dave, please forgive me).”
그 후에도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2년 전의 일이다. 사역 때문에 태국에서 살던 시절이다.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65세로 은퇴를 앞둔 아버지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의사들이 죽을지 모른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애리조나의 병원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살이 빠져 홀쭉해진 아버지를 본 순간, 포옹하며 “사랑한다.”라고 했다.
“아버지의 새 부인을 모실 수 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제는 아버지를 향한 느낌이 많다고 말했다.
그때 오래전 교회를 떠나 있던 아버지가 “성경을 사줄 수 있니?”라고 부탁하셨다. 즉시 성경을 사드렸고 몇 주 후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는 너무 오래 내 곁을 떠나 있었구나!’라고 말씀하시더라.”몇 달 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그가 하나님과 화해하셨음을 확신한다.
오늘 이 찬양을 부르며 함께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1.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2.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3. 비웃는 저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 주님 몸 깊이 찔렀네.
정결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4.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리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셨던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가슴을 울리기를 바랍니다. 불행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것입니다. 용서하는 자가 자유로움을 얻습니다. 용서하는 자가 나음을 얻습니다. 용서하는 자가 기적을 경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