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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진리의 복음)을 등한히여기면, 사탄에게 영생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롬7:7-25절) 罪의 정체
人間들은 마음이 어떤 원리(原理)에 의해 움직여져서 선(善)을 행하거나, 악(惡)을 행하는지를 이해해 보려고 많이 애를 썼지만, 아직까지도 똑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죄짓는 사람들이 아예 생긴 것 자체가 다르게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범죄형(犯罪形)’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즉 죄를 짓는 사람은 생긴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마가 튀어나오고, 턱도 튀어나오는 등 좀 다르게 생겼다는 뜻입니다.
미국에는‘흑인범죄’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백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흑인들이 있는 곳을 피하려 하고, 실제로 흑인들이 사는 곳에서 범죄가 많이 저질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개의 경우, 죄(罪)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너무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거나, 죄스러운 분위기에 자주 접촉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습관화 되어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식의 범죄를‘생계형(生計形)’범죄라고 하는데, 사실 이런 죄는 주로 좀도둑이라든지, 아주 경미한 경제사범(經濟事犯)인 경우입니다. 정말 무서운 죄는 생계형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심각한 사실입니다.
도대체 죄라는 것은 무엇이며, 사람들은 어떻게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예전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사람들은 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罪)와 벌(罰)>에서 공감을 얻곤 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게으르고 무능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전당포에 돈을 빌리러 갔다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이익을 챙기는 전당포 할머니를 보고
*이런 사람들은 사회의 기생충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혼자 몰래 가서 그 할머니를 살해하고, 범죄 현장을 목격한 소녀도 죽이고, 패물을 훔쳐 감추어 놓았다가 나중에 자수하는 내용입니다.
얼마 전, 우리 사회에는 이와 비슷한 엽기적(獵奇的)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청년이 나름대로 사회적 기생충(寄生蟲)이라고 생각한 여생들이나, 부자(富者)노인들을 골라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살인했다가 붙들렸던 사건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해 가장 과학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라면. 지그문트 프로이드 입습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속에 우리가 의식하는 외에 무의식(無意識)의 세계라는 것이 있음을 알아내었습니다. 즉 사람은 의식하는 것보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 안에 아주 강한 성적욕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적욕망이 자의식에 의해 거부당하고 좌절되면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때로는 정신병이 생기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
성경은 성적(性的)충동이 사실은 죄의 욕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시무시한 죄의 욕망이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숨어 있습니다. 결국 죄의 욕망이 살아나 광기(狂氣)를 부릴 때, 남을 죽이기도 하고, 엽기적(獵奇的)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욕망은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성인군자(聖人君子)라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짐승이 한 마리씩 살고 있습니다.
단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을 뿐입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은 이런 죄의 욕망이 그 사람을 삼켜버려서 죄를 짓고, 인생을 망치고, 감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경이 인간아니, 나 자신의 문제를 얼마다 정확하게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야말로 인간의 심리학중의 심리학(心理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Ⅰ.인간 안의 죄의 욕망
평소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지만, 모든 인간들의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는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짐승이 최소한 한 마리씩 살고 있습니다. 그 짐승의 이름은 곧‘죄의 욕망’입니다.
다행스럽게 죄의 욕망이 대부분 시간의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서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씩 표면으로 나타나 광기(狂氣)를 부릴 때는 인생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과 죄의 욕망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7:7절)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탐심(貪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더 잘되고, 더 좋은 옷을 입고 싶고, 더 좋은 집(아파트)에 살고 싶고, 더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죄(罪)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욕망이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원동력(原動力)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마음의 *탐심을 죄(罪)*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집이나, 아내나, 나귀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무엇이든지, 마음속으로 욕심을 내어도 곧 우상숭배(偶像崇拜)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골3:5절)...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자가 여인을 보고, 마음속으로 음욕(淫慾)을 품어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마음속으로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것까지 죄(罪)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즉 남의 물건을 빼앗지 않는 한 마음속으로 욕심을 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대해여 더 나아지려는 욕심이라든지, 성공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전제(前提)되어야 합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흔아홉 가지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고, 자기에게 없는 한 가지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며,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때가 많은데, 이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은 아주 고상한 신앙인의 고민입니다. 우리는 보다 현실적인데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얌전하고, 정상적이다가 갑자기 광기(狂氣)를 부릴 때가 있습니다. 주로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우리 안에 있는 욕망(慾望)이 자극을 받았을 그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평소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나름대로 몸을 씻고 공부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버지가‘요즘 너 공부를 통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잔소리할 때,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갑자기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자기 방 문을 발로 차고, 책을 던지고, 가출해서 하루 종일 께임 방에서 께임을 했다고 합시다.
이 학생은 이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씻고 공부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시면서 갑자기‘열을 받아’생각지도 않은 행동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죄의 욕망이 활동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심한 자극을 받으면, 이런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즉 굶어서 배가 고프다든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심하게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든지, 친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본다든지 하면,‘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혼자 자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즉 무엇인가를 너무나 하고 싶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즉 어떤 여자가 백화점 진열대에서 너무나도 사고 싶은 옷을 보았을 때, 그 옷을 사지 못하면, 마음속에서 욕망의 짐승이 날뛰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옷을 사기까지 절대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집단으로 모이게 되면, 쉽게 광기(狂氣)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노동자들이 파업한다든지, 집단의 이해 문제로 충돌하든지, 하면 사람들이 쉽게 충동을 받고, 선동(煽動)에 따르게 되고, 처음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과격한 행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마음속에 있는 죄의 욕망이 충동을 받아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죄의 욕망이 발작을 일으키면, 대형 사고가 터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런 수준보다 훨씬 고상한 차원입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탐심(貪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집의 남종이나, 여종이 너무나도 탐이 나고, 혹은 다른 집이 너무나도 탐이 났는데, 이것이 죄라고 생각한 순간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이 발작을 일으키더라는 것입니다. -
사람은 얼마든지 해도 될 때는 별로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일단‘하지 말라’고 하면 얼마나 하고 싶어지는지 모릅니다.
어렸을 때, 어떤 영화는‘미성년자 관람 불가’라는 표시가 붙어있었습니다. 청소년들은 그런 영화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어떤 아이는 나이를 속이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숨어서 들어가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영화를 보고나면, 별것도 아닌데,‘보지 말라’고 하면, 마음속에서 보고 싶은 욕망이 발광을 하게 됩니다
전에 통행금지가 있을 때입니다. 밤새도록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으면, 하는 욕망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상 통행금지가 해제되니까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자려고하지, 쓸데없이 돌아다니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7:8절)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여기‘죄가 기회를 타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단 사람의 마음속에 무슨 욕망이 일어나지 말아야지, 일어나면,‘기회를 탄다.’는 것입니다. 즉 욕망은 무슨 핑계거리든지 만들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해내고야 맙니다.
예를 들어서‘이런 것은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거야?' 라든지,‘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꼭 한 거야?' 라든지,‘이것은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것이야?' 라든지 무슨 핑계라도 대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움켜쥐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것을 가지면, 마음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들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욕망을 채우고 난 후는 더욱 허전한 마음이 들고, 그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시시해지고, 죄의식이나, 사탄의 공격까지 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7:11절)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마음속에 있는 죄가 나를 속입니다. 지금 그것을 손에 넣어야 내가 너무나 행복하고, 능력 있고, 만족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평생 바보로 살게 되고, 나중에는 미쳐 죽을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막상 그대로 했을 때, 만족감은 없어지고, 금방 시시해져서 결국 죄의식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암논 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성격이 좀 이상했습니다.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좋아해서 상사병(相思病)이 생겼습니다. 그때 아주 간사한 친구가 계략(計略)을 알려주기를‘아프다고 해서 왕에게 그 동생을 보내어 과자를 구워주면 병이 나을 것 같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조금만 분별력이 있었더라면,‘과자’라는 말에 정신을 차렸을 것입니다.
그리고‘이 놈이 어디서 꾀병을 부리느냐?' 고 야단을 쳤더라면, 그 병(病)은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암논은 자기의 방으로 배다른 여동생을 끌어들여서 억지로 강간죄(强姦罪)를 짓고는 금방 싫증을 느껴 다말을 집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죄(罪)라는 것은 저지르기 전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천사로 보이지만, 죄를 저지르는 순간 가장 추악한 악마(惡魔)로 둔갑(遁甲)합니다. 어쩌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더 엄청난 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힘이 지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恩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켜 주시지 않았다면, 욕망의 광기(狂氣)에 붙들려서 얼마든지 끔찍한 죄를 저지를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의 문제는 바로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있는 죄의 욕망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너무나도 싫어하고, 광기(狂氣)를 일으키며, 실제로 모든 인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죄의 욕망이 하나님에 대해 반항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만들고, 때로는 정신적 질병(疾病)까지 걸리게 합니다.
Ⅱ.율법의 기능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우리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음으로 나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7:9-10절)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한 번씩 죄의 충동에 사로잡혀 발작을 일으켜도 심각한 죄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누구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오히려 한 번씩 이렇게 해야 다른 사람들이 나도 성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집안에서도 말을 잘 듣고, 순종을 잘 하는 자식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씩 광기(狂氣)를 부리고, 사건을 터트리는 자식은 더 신경을 씁니다. 그러기에 순종을 잘 하는 아이는 자기가 충분히 관심을 받지 못해서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한 번씩 발작하고, 광기(狂氣)를 부리더라도 큰 죄가 되지 않는 한 다행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수양(修養)이 덜 되어 그렇지, 좀 더 수양(修養)만 쌓으면, 얼마든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마음속에 있는 죄의 욕망을 수양(修養)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죄의 욕망이 분명히 죄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혼자서 무지무지하게 고민하면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하면, 죄를 짓는 쪽으로 가버립니다.
결국 죄를 짓고 나서는 욕망을 이루었다는 만족감보다는 엄청난 죄의식(罪意識)과 자신이 또 하나님을 배신(背信) 했다는 사탄의 공격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알았고, 죄인 줄 알았지만, 죄를 이기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될까? 이런 짓을 한번 하고 난 후에는 신앙이 뿌리채 흔들리면서 뽑히려고 합니다. 도대체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내가 무슨 신자냐? 하는 생각이 들면서 교회에 가기조차 싫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안다는 것만으로 공룡과 같은 죄의 욕망을 때려잡지는 못합니다. 단지 우리 속에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는 엄청난 죄의 시궁창이가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너무나 형편이 어려워서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시궁창에서 시도 때도 없이 시커먼 물이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7:12-13절)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하는 역할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엑스레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겉으로는 큰 병이 아닌 것 같은데,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그 안에 암세포가 퍼진 것이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알고 난후에 나 자신을 보니까 내 속에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즉 온 마음이 죄로 가득차 있고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여기서 사람들의 운명(運命)이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더욱 더 강퍅한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속에 있는 암 덩어리를 발견하고도 도로 덮고, 무시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며,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그 속에는 가장 끔찍한 사람의 시체(屍體)가 썩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셨을 때, 요1:47절)...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나다나엘은 자기 속에 있는 죄를 감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인정하고, 고백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의 옛 사람을 못박아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내 속에 있는 죄의 욕망도 죽게 됩니다.
Ⅲ.절망하는 사람
자기 안에 두 가지 의지(意志)가 싸울 때, 이 사람은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에 걸렸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7:14-15절)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절망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을 두고 연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사도 바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기 전의 사도 바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율법律法)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이런 모순을 수양의 부족이나, 기질(器質)이라고 생각하지, 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예수님께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면 예수 믿는 사람은 자주 넘어지기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심하게 절망(切望)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복음(福音)으로 거듭나지는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기 안에 있는 모순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죄를 이기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우선 이 사람은‘율법은 신령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여기서‘신령(神靈)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율법(律法)은 내가 하나님과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즉 음란하지 말 것과, 탐내지 말 것과, 거짓말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자꾸만 음란한 충동이 생기고,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고, 수도 없이 다른 사람을 마음으로 미워하며, 죽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 금식하기도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멀리 계신 것 같고 나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마음속의 모순(矛盾) 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갈등이나, 모순(矛盾)을 없애기 위해서 신앙적으로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열심히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혼자 고민을 무지무지하게 합니다. 혼자 모든 죄의 짐을 짊어지고 고민하다가, 그 다음에는 견디지 못해 주저앉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죄를 지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더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게 되고, 더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타락(墮落)한 것입니다. 주위에서 잘 믿던 청년이나 교인들이 하루 만에 타락(墮落)해서 교회도 다니지 않고, 술도 마시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은 혼자 죄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으니까 죄에게 굴복함으로 해결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해결이 아니고, 마음속에는 언제나 죄의식이 남아 있게 됩니다.
7:15절)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7:17-19절)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욕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결국 이런 식으로 절망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고민 고민하다가 신앙생활을 포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인데, 자기 힘으로 완전에 도달하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자기 육신을 쳐 복종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우선 많은 시간 기도도하고, 성경을 읽고, 세속적 직업을 포기하고, 수도원 같은데서 명상도 해보고, 금식도 하고, 선교 여행도 떠납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하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죄는 마음속에 들어와 있고, 음란도 들어와 있고 미움도 들어와 있습니다. 즉 마음속으로는 아무리 죄를 짓지 않고, 천사처럼 살려고 해도 실제로 사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사람 속에는 두 가지 의지가 있으며 언제나 두 가지 충동이 싸우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이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비유를 하면, 중병을 얻어 병원에 꼼작 못하는 채, 몇 년씩 있어야 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얼어나서 밖으로 나가 뛰어다니고 싶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7:24절)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곤고(困苦)한자’라는 것은‘파멸에 빠진 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했기 때문에 마음과 육체가 모두 다 지치고, 파멸되기 직전에 있습니다. 자신을‘이 사망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은 완전히 죽었다는 뜻입니다. 의식만 살아 있지, 몸과 마음은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서 파멸직전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문제는 절대로 자기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죄를 모두 다 가져가셔야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평화가 오고, 자신이 용서가 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은 곧 이와 같은 절망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무서운 죄의 본성이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 죽습니다. 물론 예수 믿은 후에도 욕심도 있고, 정욕도 있지만, 이것은 그 짐승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설득이 되고, 자신의 결심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 법(法)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21-23절)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마치 프로이드가 의식과 무의식을 이야기한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머리로 인식하기로는 선(善)을 행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잠재의식의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법칙에 따라 행동하지만, 잠재의식은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 안에는 모두 두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본능이나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입니다. 사람이 욕심이나, 다른 자극을 받으면, 잠재의식의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즉 은혜 받을 때는 은혜의 법칙이, 자극을 받으면, 육체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분열 증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잠재의식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굴복되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안에 얼마나 무서운 맹수(猛獸)가 있는지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이 맹수가 다른 사람들을 말로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행동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집단적 광기를 일으키면, 난리가 일어나기도 하고, 전쟁이 터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바로 잠재의식속의 죄의 본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본성을 죽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고민을 가져가십니다. 그리고 예전에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안 되던, 일들이 믿음으로 하나씩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나 자신의 힘을 완전히 빼버려야 합니다. 내 힘과 욕심으로 살려고 하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점점 더 죄의 세력의 밧줄에 칭칭 감기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내 힘으로 믿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것이 야망과 욕심이 이상하게 힘을 잃고, 상당히 약화(弱化)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광기(狂氣)를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그야말로 광기(狂氣)의 시대입니다. 어느 순간에 어떤 사람이 미쳐 날 뛸지 모르는 정신분열증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지하철에 불을 질러서 멀쩡한 사람들이 많이 타 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죄의 짐승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바보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은혜와 평강중에 지켜 주실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536장 *죄짐에 눌린 사람은*
묵상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10:32)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習慣)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하신 주님! 내게 맡긴 재물과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려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필수요.기본 상식.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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