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경험은 부담을 위해서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 경험을 많이 하는데 어떤 사람은 거의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적게 하는 사람은 많이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며,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신앙의 연조도 많지 않은 초신자에게 영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한 자신에게는 그런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특별히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닐 터인데 영적경험이 전무한 까닭을 알 수 없어 갈등과 의문만 생길 뿐입니다. 영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사람에게 영적 현상이 잘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상당히 둔감한 사람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거듭난 직후에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며, 특히 회개한 직후부터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능력 집회에 참석하는 경우 그곳의 영적 분위기에 의해서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영적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영적 분위기 속에 들어갈 필요는 있지만 그곳에서도 경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영적 경험은 자신의 의지나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 것은 사실 아닙니다. 다양한 의미가 있고 현상이라고 해도 그 수준의 차이와 이미지의 형태와 감각의 차이 등으로 많은 형태가 있어서 단정적으로 어떤 한두 가지만을 지목해서 영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상’ ‘이미지’ ‘열감’ ‘청량감’ ‘진동’ ‘황홀경’ 등과 같은 현상을 우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 분위기’ ‘천사의 출현’ ‘악령과의 면대’ 등과 같은 더 깊은 차원의 영적 경험으로부터 삶 속에서 경험하는 은혜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신앙이 긴장되고 더욱 견고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영적 현상들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드는 유익이 있지만, 자칫 그 특수성 때문에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더 사랑해서 이런 귀한 은혜를 베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월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온몸을 휘감는 열감과 전율, 포근하고 신비한 영적 분위기가 내려와 자신을 뒤 덮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그윽한 분위기, 영적 눈이 열려 천사의 존재들을 보며, 환상이 보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등의 경험이 거의 날마다 이어진다면 여러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분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며, 신앙생활이 참으로 신바람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경험의 뒤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부담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까닭은 그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순절 주의 제자들이 마가 다락방에서 신비한 영적 경험을 하고난 뒤에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험난한 길로 나가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순교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적 경험을 하면 모두 순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따른 영적 부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서 많이 찾으시는 분입니다. 영적 경험은 달콤하고 행복하고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하려고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하는 이유는 더 나은 헌신으로 불러내기 위해서이며, 그 헌신이 때로는 엄청난 고난과 어려움을 동반할 수도 있기에 그 어려움을 견디는 유일한 힘은 신비한 영적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굳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 스스로 사도로 여기고 험한 전도여행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메섹에서 경험한 신비체험이었으며, 이어서 ‘직가’에서 ‘아나니아’로부터 듣게 된 소명에 대한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어려움을 만났을 때마다 상기시켰고 공회에서 또는 위급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의 사역에서 이 경험이 힘이 되었고 스스로를 사도로 칭하도록 요구하게 되는 배경도 이 다메섹 경험이었습니다. 신비한 영적 체험이 그 수단이 꿈이었든지 환상이었든 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양한 형태의 경험들의 메카니즘 역시 문제가 아닙니다. 그 경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영적 부담을 던지는 상징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영적 경험의 각각의 요소들은 각 사람의 직무와 연관이 깊습니다. 즉 은사로 나아가고 이어서 직무로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직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며, 또한 그 직무의 독특한 기능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며, ‘선견자’의 경우 환상을 집중적으로 보게 됩니다.
자신이 선견자로 세워질 것이라는 사실도 모를 때부터 그는 환상을 다양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또 ‘예언자’로 세워지는 사람은 주로 ‘나바’라는 기능으로 예언을 하게 되기 때문에 ‘예언의 영’이 임하는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이슬비처럼 내리는 예언적 분위기를 수시로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가 수금을 탈 때 이런 예언적 분위기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이 분위기는 매우 감미로워서 그는 이런 분위기를 갈망해서 자주 수금을 탔습니다. 특히 ‘선지자’로 세워질 사람은 격렬한 영적 분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선지자는 기름부음이 주로 영적 분야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역자나 은사자들이 전혀 경험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하고 깊이 있는 영적 경험들을 수도 없이 행하게 하십니다.
이렇듯이 영적 경험은 직무와 연관된 부담을 주기 위해서 치르게 되며, 또한 타인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은 예외 없이 이 부담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타인을 섬기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 모두가 ‘사랑장’이라고 알고 있듯이 사랑의 의미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언급한 곳입니다. 그 말씀 가운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라는 내용이 말하듯이 섬김은 헌신입니다. 이 헌신을 하게 되는 배경에는 남다른 특별한 영적 경험을 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신비한 경험뿐만 아니라 주님을 영접하는 감격적인 만남의 경험도 포함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이나 갈릴리 해변 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만난 사도들처럼 강력한 은혜 속에 주님을 만남으로써 평생 동안 주를 위한 헌신의 길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영적 경험은 주를 위해서 타인을 섬기게 하려는 부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섬김의 형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힘들며, 일시적인 감동이나 감흥으로 인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우리가 평생 해야 할 일이며, 특히 전문 사역자로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일이 평생의 일로 되는데 여기에는 많은 위험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초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부 사역자들은 처음 사랑의 잃고 타락해서 돈이나 명예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극단적 타락에 이르지 않더라도 설렘과 감동은 사라지고 어느덧 상투적이고 습관적으로 사역을 행하는 직업인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기교가 능력을 대신하며, 타성이 신비를 대신합니다. 감격은 사라지고 영적 부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며, 헌신의 모양은 있지만 누구를 위한 헌신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둔탁해져버리기가 쉽습니다. 자칫 이런 불행한 지경에 이르는 것은 수식간입니다.
영적 경험은 우리의 영적 삶을 신선하게 하는 것이지만 자칫 이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삶을 망치는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헌신이 사랑을 전제로 하는데 그 사랑이란 쉬운 것이 아님을 고린도 전서 13장이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공과가 아닙니다. 절대로 경솔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는 이 조건 앞에 엄격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많은 영적 경험을 한 사람은 많은 희생과 헌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경험을 한 사람은 남들이 할 수 없는 헌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오순절 경험을 한 주의 제자들은 순교에 이르기까지 나아갔으며, 다메섹의 신비체험을 한 사도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았고 한 번은 죽기까지 했습니다. 신비한 영적 경험은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서로 자랑하고 누가 큰 사람인지 키 재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을 지어 분열했고, 하나님이 주신 신비한 경험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비한 경험을 만난 후에 그들은 이것을 자랑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우월함을 들어내려고 합니다.
전단지를 만들어 천국을 몇 차례 다녀왔다고 자랑하며, 불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높여 사람들을 모으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육체를 따라 온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신비한 영적 경험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헌신을 위해서 긴장시키고 격려하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영적 경험을 통해서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타인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2:3 “각 사람은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