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는 2018년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밀드레드 역의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여우주연상을, 딕슨 역의 샘 록웰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외에도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 등 4관왕, 영국 아카데미 5관왕 등 그 해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영화는 미주리주 에빙 마을의 외곽에 설치된 3개의 광고판(입간판)에서 시작됩니다.
'죽으면서 강간당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경찰서장 윌러비?'
영화는 이 3개의 도발적인 문구가 적힌 입간판으로 인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립니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 분)는 딸 안젤라를 참혹하게 살해된 범인이 수개월째 잡히지 않자 분노가 치밀면서 마을 외곽에 위치한 광고판 3개에 위와 같은 3줄의 문장을 게시합니다. 입간판만 봐서는 딸의 죽음이 마치 경찰서장의 잘못인 듯 실명이 적혀있습니다. 도발적인 문구는 관할 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 윌러비 서장과 밀드레드
입간판에 이름이 명시된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 분)는 부하 딕슨(샘 록웰 분)과 함께 광고회사와 밀드레드를 찾아가 빌보드를 내릴 것을 회유합니다. 그러나 밀드레드는 물러서지 않고 경찰의 수사를 거듭 촉구합니다. 밀드레드는 딸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분노의 화살을 경찰서장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 순간 밀드레드의 적은 경찰서장입니다. 입간판이 알려지면서 무능한 경찰들을 비난하는 시선과 함께 조용한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밀드레드를 비난하는 시선이 뒤섞이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진짜 적'을 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분노에 휘감겨 진짜 적은 잊어버린 채 서로를 적으로 삼은 사람들, 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일에 집착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진짜 적은 누구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 밀드레드와 딕슨을 중심으로 이들의 분노가 어떤 적에게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밀드레드는 누구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여성입니다. 그런 그녀에게도 딸의 사망은 삶을 뒤흔드는 충격이었습니다. 딸이 죽기 직전 밀드레드는 딸과 말다툼을 벌입니다. 그녀는 "나는 강간당하고 말 거야"라고 반항하던 딸의 말에 "그러길 바란다"라고 소리친 일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충격과 분노, 불안함, 죄책감을 해결하려면 적이 필요하다고 느낀 듯합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감정의 화살을 겨눌 적을 설정합니다.
* 으르렁대는 밀드레드와 딕슨
처음엔 범인이 적이었을 것입니다. 범인을 못 잡자 그 불같은 분노는 이제 경찰서장에게 옮겨 붙었습니다. 수사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밀드레드는 경찰서장을 적으로 정했습니다. 이는 3개의 입간판에 그대로 드러납니다.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췌장암을 앓고 있던 윌러비 서장이 덜커덕 자살한 것입니다. 암 투병으로 힘들게 사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더 이상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적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밀드레드는 경찰서를 불태우는 등 또 다른 적을 설정하고 분노를 표출하지만 이 역시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밝혀집니다.
잘못된 적을 계속 설정하고 있습니다. 윌러비의 자살은 광고판과 무관하지만 이웃주민들은 입간판이 원인이라 생각하며 그 광고판을 세운 밀드레드를 적으로 삼습니다. 적을 퇴치하려다 모두의 적이 된 꼴입니다. 윌러비 서장의 부인 역시 밀드레드에게 분노합니다. 그중 가장 분노한 사람은 윌러비 서장의 부하 딕슨입니다. 그는 또라이이면서 인간 말종이지만 착한 서장은 딕슨을 시종일관 감싸줍니다.
* 세 개의 빌보드
이야기는 딕슨의 시선으로 옮겨갑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이고 폭력적인 경찰입니다. 그의 인종차별은 미국 남부라는 지역적 특성과 어머니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영화 초반 입간판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민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동성애자인 점도 열등감으로 작용합니다. 윌러비가 죽기 전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무도 널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위로하고, 그의 엄마가 "여자 만나러 가냐"라며 놀리는 장면 등이 그의 성적 성향을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광고업자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이 동성애자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입간판을 세운 밀드레드가 아닌 광고판을 판매한 광고업자를 적으로 삼습니다. 입간판이 생긴 이유가 자신이 담당한 사건의 범인을 아직 검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광고업자의 사무실에 찾아가 광고업자를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고 무자비하게 폭행합니다. 업자를 두들겨 패면서 "나는 백인도 때려"라고 발언하는 것을 통해 그의 적이 달라졌음(유색인종에서 백인종으로)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딕슨에게 존경하던 윌러비의 자살은 적을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말썽꾸러기인 자기를 그래도 보듬어준 윌러비의 사망에 기절을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습니다.
* 딕슨의 폭력을 말리는 착한 륄러비 서장
진짜 적은 누구인가.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분노의 손가락질 가운데 진짜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밀드레드의 딸을 강간하고 살해한 진짜 적은 어느새 무대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적 설정에 오류가 생긴 것입니다. 밀드레드의 적 설정은 췌장암을 앓던 윌러비를 괴롭혔고, 경찰서를 불태웠습니다. 딕슨의 잘못된 적 설정으로 인해 엉뚱한 사람이 폭행당하고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쓰리 빌보드>는 미국 미주리 주(州) 외곽의 에빙이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트럼프 시대를 사는 오늘날 미국 사회의 한 풍경을 풍자한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백인우월주의와 자본만능주의, 성소수자 혐오, 성차별 등이 여전히 만연한 사회라는 점을 영화는 꼬집는 듯합니다. 각종 사회적 차별과 혐오를 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보여주지만 직접 그 차별을 만들고 조장했던 자들은 책임지지 않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책임져야할 사람이 링 밖을 떠났음에도 피해자들끼리 남아 링 위에서 지들끼리 주먹을 날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사회적 피해자인 밀드레드와 딕슨이 끊임없이 엉뚱한데서 적을 설정해야 하는 상황과 일맥상통합니다.
* 분노하는 밀드레드와 이를 달래는 윌러비
코로나 19가 창궐하면서 각자의 적을 정하기 바쁩니다. 밀드레드를 살해한 범인은 사라지고 서로를 비난하는 상황, 각종 사회적 차별이 극심한 미국의 상황과 연결됩니다. 사태가 지속될수록 '진짜 적'인 바이러스는 온데간데없습니다. 특정 국가, 특정 지역, 특정 종교, 특정 정당을 넘어 특정 인물까지 적으로 삼아 분노를 표출하는 데 급급한 현실입니다.진짜 적은 누구인가. 윌러비 서장은 죽기 직전 세 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입간판을 단 밀드레드에게, 그리고 부하 딕슨에게... 이중 딕슨에게 보낸 편지는 진짜 적을 보지 못하고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네가 증오를 계속 붙잡고 있는 한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라 생각해. 네가 이 말을 하면 질겁하겠지. 그런데 정말 필요한 건 사랑이야.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차분하고, 차분해져야만 생각할 수 있거든.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게 필요할 거야. 총도 필요 없고, 분노할 필요도 없어.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차분함은 할 수 있어."
* 나중에 화해하고 연대하는 밀드레드와 딕슨
이 편지 이후로 딕슨은 진짜 적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밀드레드와 화해하고 연대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적을 처치하는 장면이 아닌 적을 향해 함께 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는 두 사람이 연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윌러비 서장이 사망한 뒤 새로 부임한 서장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는 듯합니다. 입간판이 방화로 인해 모두 불에 탄 모습을 보고 허탈해하는 밀드레드에게 새로 부임한 서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적이 아니에요.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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