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79
12월19일 [대림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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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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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EraSyPLZf0 (전경표 아브라함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1366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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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지...>
피정 센터에서 사목하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하나 있습니다.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길고 지루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들 답답해하고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도 작은 위로, 작은 기쁨이 되어드리자는 각오로 찾아오시는 분들을 기쁘게 환대하고 있습니다. 장거리 운전이 힘든 분들을 위해 단 한 분이라도 기쁘게 버스터미널까지 픽업 서비스를 해드립니다. 맺힌 사연들, 그 어디서도 털어놓기 힘든 사연들 훌훌 털어놓으시도록 기꺼이 배려하고 동반해드립니다.
꽤나 무거웠던 짐들을 훌훌 털어놓고 환한 얼굴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바라보며, 이천 년 전 아인카림에서의 환대 장면이 제 머릿속에 겹쳐졌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는 직선거리로 120Km, 그나마 걷기가 나은 요르단강 옆길을 따라 우회하면 160Km, 나귀를 타고 갔을 경우 적어도 사나흘,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여행길이었습니다.
힘겨운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였는데,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와 배려에 순식간에 여독이 풀렸습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 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서너 살 먹은 소녀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 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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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PNIA16sx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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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지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도전하다 그 실패에 좌절하고 맙니다. 자아는 도전하게 만듭니다. 도전하게 하려고 항상 지금 불만족스럽게 만듭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지칩니다. “열심히 살다 보니 삶이 피폐해지는 느낌이다.”, “더 잘하고 싶은데 진도가 안 나간다. 모든 일이 힘들기만 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등의 생각이 든다면 삶이 지쳤다는 증거입니다. 왜 지칠까요?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나를 지치게 만듭니다. 쉬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적당히 일하고 쉬며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란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고 합니다. 순행성 기억 상실증 환자인 그레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그는 이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레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해도 나를 조정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은 축적되어 나를 지배합니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기억도, 지성도 아닙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실패했다는 기억도, 연인과 헤어졌다는 기억도 아니란 것입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자아는 불만족의 감정을 주고 믿음은 감사와 기쁨의 기분을 줍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로, 강릉 방송국의 PD이자 DJ로 일하는 은수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항상 라면을 먹는데 이는 둘의 사랑이 라면처럼 금방 끓고 라면처럼 금방 불어버리는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은수는 이미 결혼 경력이 있는 여자이고 상우는 진지한 사랑이었습니다. 둘의 사랑이 식는 것을 느끼자 은수는 차갑게 돌아섭니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상우는 분노합니다. 홧김에 은수가 산 새 차를 긁어버리는 유치한 행동도 합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상우를 아껴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감정에 그리 매몰될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때 은수는 다시 상우가 생각이 납니다. 상우와 화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화분을 들고 상우를 만납니다.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도 모르는 은수와 다시 사귈 생각이 없습니다. 화분을 다시 돌려주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의 소리를 모읍니다. 그 소리 하나에도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에서 영원히 외로울 사람은 은수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삶을 사는 여인이고, 상우는 이제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지금 있는 자연의 소리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맑은 공기에 감사합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다는 말은 그것을 나에게 주신 분에 게 감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사는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창조자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성모님께서 “믿으신 분”이 되신 이유는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믿게 되고 하느님을 믿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이 행복지수에 관여하지 않으면 부탄이란 작은 나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행복지수를 나타냅니다. 부탄의 4대 국왕인 지미 싱게 왕축은 “국민총행복지수가 국내총생산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729년에 만들어진 부탄 왕국의 법전에는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라고 쓰여있습니다. 부탄은 국민총행복지수(GNH)라는 부서를 따로 만들어 부탄에서 행하는 모든 정책에 실제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탄이 말하는 GNH 행복지수는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교육, 문화적 다양성, 굿 거버넌스, 공동체 활력도, 생태학적 다양성 및 회복력, 생활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부탄은 400년 전인 15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도로는 전혀 없었고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국가에 의사가 단 2명밖에 없었으며 평균수명은 38세, 개인당 국민소득은 51달러로 최빈국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탄은 국민행복지수를 국가 기본 정책으로 정한 이후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달러가 못 되는 최빈국 수준이지만 국민의 삶의 질은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실력에 따라 고등교육을 제공하며 현재 국민 기대수명은 69세입니다.
물론 현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못사는 나라인지 알게 되어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리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여 청년 실업률이 증가했으며 외국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세계의 유일한 부탄도 이제 돈이 행복이라는 세상 물결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탄처럼 행복을 위한 정책을 지금 바로 우리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지금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정책을 펴면 됩니다. 내가 나를 믿고 도전하다 보면 실패를 거치며 나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지만, 주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다 보면 실패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나를 조종합니다. 지금 감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은 나를 믿는 시간이고 분명히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감사로 중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삶에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의 종살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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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엘리사벳의 이 말은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느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전례는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복음 전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음의 자세는 새로운 강생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성탄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복음: 루카 1,39-45: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미가서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가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었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29절)은 나자렛에서 150km 이상 되는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Ain-Karim)이다. 마리아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 준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해서거나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S. Ambrosius, In Lucam 2,19).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 이 먼 여행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마리아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구약의 계약의 궤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벳은 자기 집으로 그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소리로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42절) 분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렇게 위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신적인 모성(母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으로 ‘계약의 궤’가 되었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최초로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아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언자를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이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하신 대로’(루카 1,38)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당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하셨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을 항구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희생을 실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이 희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강생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파스카 신비에 정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 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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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성모님이 엘리사벳에게 간 것은,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이루어진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에게 ‘어떤 인사’를 했을까? 아마도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한다는 말과 엘리사벳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사말과 함께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과 자신의 성령 잉태를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반응을 보면, 축하받는 사람의 일반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임신이 아니라, 성모님의 성령 잉태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모님이 받은 은총을 축하하고, 찬양합니다. (그래서 성모님 입장에서는 축하하려고 갔다가 축하를 받게 된 상황입니다.)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라는 말은,
엘리사벳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태 안의 아기가 반응할 정도로, 엘리사벳이 큰 기쁨을 느꼈다는 것.) 엘리사벳의 기쁨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라는 말은, 성령에 사로잡힌 로봇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선명하게 깨닫고, 믿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마도 엘리사벳은 ‘동정녀의 성령 잉태’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금방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쳤다.’라는 말도 엘리사벳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남자들을 제외하고 여자들 가운데에서만 복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인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복을 온 인류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성모님 태중의 아기가 복되신 분인 이유는, 온 인류에게 구원이라는 복을 가져다주시는 메시아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라는 말에는, 성모님 태중의 아기가 주님이신 분(메시아이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태중의 아기가 주님이시니까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큰 기쁨을 표현한 말입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한 기쁨도 들어 있지만, 기쁨의 핵심은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의 방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라는 말은 ‘복되십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은,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과 ‘응답’을 모두 칭송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관한 말씀들’(루카 1,31-33)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았고, 천사가 전해 준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로 알아듣고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금방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루카 1,29) 그러나 믿었기 때문에 받아들였고, 순종했습니다. 사실 자신이 메시아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청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동정녀로서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도 알아듣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모님도 당시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고대하고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자신에게서 직접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한 적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순종과 응답은 놀라운 일이고, 위대한 일입니다. 믿음은 순종과 응답으로 이어져야만 가치가 있습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고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즉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성모님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일을 한 ‘첫 번째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첫 번째 인물이지만, 신앙을 기준으로 하면 성모님 다음으로 ‘두 번째 신앙인’입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이 중요한 것은, ‘증언’과 ‘선포’가 그 만남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증인이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증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두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 모르게 비밀리에 만난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증언했습니다. 어쩌면 엘리사벳은 나중에 요셉이 성모님의 성령 잉태를 믿을 수 있도록 요셉을 도와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성모님도 엘리사벳의 임신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증언해 주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엘리사벳의 임신이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성모님에게 알려 주었는데(루카 1,36-37), 성모님은 그 말을 그대로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증언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효력이 살아 있는 증언이고,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해 주는 증언입니다. 따라서 두 어머니의 만남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함께 기뻐하자고 지금 우리를 부르는 초대장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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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은 한국에서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뉴욕에서 운전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 실기시험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필기시험은 영어와 한국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3번 정도 문제를 풀어보았고, 대부분 예상 문제에서 출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어로 된 예상 문제가 있어서 필기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실기시험은 강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평행주차가 중요했고, 공식을 배웠습니다. 한국에서 운전하는 습관은 버리고, 처음 운전을 배우는 마음으로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제게 강복을 청했고, 저는 감독관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실기시험을 보았고, 역시 한 번에 통과했습니다. 어느덧 뉴욕에서 면허를 따고 운전한 지 2년이 되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의 기준인 성공, 명예, 권력은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나 라에서는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3주간 대림시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인은 두 가지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우주의 역사는 150억년, 지구의 역사는 45억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에서 시를 만들어 냅니다. 가수는 흘러가는 구름에서 노래를 만들어 냅니다. 화가는 흔들리는 꽃을 보며 그림을 그립니다.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남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람은 성별, 이념, 세대, 피부색, 계층으로 차별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 가장 헐벗은 이, 가장 아픈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사랑을 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지위도, 능력도, 업적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만, 욕심, 허영, 이기심이라는 언덕과 산을 깎아 내려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나눔, 헌신, 희생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이 되신 후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람페투사’였습니다. 교황님이 이민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 하신 후, 이민자들의 무덤이었던 람페투사는 이민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유는 바로 ‘죄, 악,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넷째 왕의 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동방박사는 4명이었다고 합니다. 3명의 박사는 별을 따라서 길을 갔지만 4번째 박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는데 강도를 당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가져간 보물을 팔아서 강도당한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헐벗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보물을 팔아서 옷을 사 주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만났습니다. 보물을 팔아서 옥에서 풀어주었습니다. 보물을 모두 팔아버린 4번째 박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예루살렘 언덕에서 4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박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내가 강도당했을 때 함께 했고, 내가 헐벗었을 때 함께 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비록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강도당한 이들에게서, 헐벗은 이들에게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서 이미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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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해일 베드로 신부님]
<두 여인의 만남>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는 모습을 전해줍니다.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2단에서 묵상하는 장면이지요. 두 여인의 만남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두 여인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잉태가 불가능해 보였던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6개월 전에 아기를 가졌습니다. 사제인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전해 들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기에’ (루카 1장 20절 참조) 벙어리가 된 것이지요.
유다교 사제인 즈카르야가 야훼의 성소에서 그분의 말을 믿지 못한 결과지만, 엘리사벳의 잉태는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루카 1장 25절) 내려주신 은총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신과 주님의 사랑이 교차하는 구약의 모습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런데 천사가 찾아간 곳은 성소가 아니라 나자렛에 있는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루카 1장 31절) 거라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장 34절) 하며 당혹해합니다. 천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장 37절)며 그 예를 들지요. 바로 엘리사벳의 잉태였습니다.
이는 천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증거가 되었고,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천사와의 대화 끝에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장 38절)라고 순명을 표현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수용되는 새로운 신앙, 신약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여인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유다 산골로 엘리사벳을 찾아가 성사된 만남은 신약과 구약의 신비로운 조화를 보여줍니다.
태중에 있던 두 아기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는 신약의 메시아를 만나서 기뻐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여인의 만남은 새로운 방법으로 변함없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한편, 두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듣고 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全) 존재로 품은 말씀에 생명을 나눠주고 성장시켰습니다. 또한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외쳤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장 45절)
나와 아기 예수님의 만남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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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영승 빅토리노 신부님]
<복된 준비>
벌써 대림 제4주일입니다. 들뜬 마음으로 전례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보라색 초에 불을 놓은 것이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하얀색 초 위에도 작은 불꽃이 일렁입니다. 복된 대림시기를 지내며 회개와 성찰을 통해 더없는 은총 안에 머무르고 계신지 여쭈어봅니다.
저희 본당에는 매년 구역별로 대림환 기도를 봉헌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녀님과 자매님들의 손을 빌려서 대림환을 만들었습니다. 정성껏 모양을 다져놓은 틀에 소박한 장식을 살포시 얹고 나니 어느새 그럴싸한 대림환들이 눈에 한가득 들어옵니다.
이제 그 위에 순서대로 불을 밝힐 초만 꽂으면 완성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있어야 할 대림초들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습니다. 글쎄, 알고 봤더니 대림환을 만든다는 것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다가 알맹이와도 같은 대림초를 주문하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며칠의 여유가 있었던 터라 부랴부랴 주문을 넣었고 작은 우여곡절이 담긴 대림환들과 함께 올해 대림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르는 길고도 짧은 여정 안에서 다양한 준비를 합니다. 어느 날 불쑥 높은 산과 마주한다면 그것을 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강이 놓여 있다면 무사히 건너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람들의 모습과 성향이 다르듯이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모습도 제각각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놓칠세라 알아보고 따져가며 꼼꼼히 준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정작 챙겨야 할 것은 뒷전이고 엉뚱한 것에만 마음을 쏟다가 헛물을 켜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내고 있는 대림시기는 우리 삶의 자리에 찾아오실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기다림과 준비의 때입니다. 그 기다림이 복되고 예수님의 탄생이 더없는 기쁨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맞이하며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건네십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장 42절-43절)
우리는 성모님께서 가장 복된 여인이신 이유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셨고 정성껏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모님의 모습을 닮아 주님의 복된 자녀요, 제자요, 신앙인으로서 ‘복된 준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대림시기를 차분히 돌아보며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부족함은 없는지, 행여나 놓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고요하고 거룩한 그 밤에 목동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며 여러분에게 그 어느 해보다 뜻깊은 대림시기의 끝자락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장 42절-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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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으며>
어제 흐린 하늘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이런 날엔 어쩐지 어릴 적 꿈을 꾸곤 하는데요. 겨울방학의 추억이 깃든 꿈에는 찬바람에 떨던 문풍지 소리가 들립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손을 녹이던 정경을 만나고 꽁꽁 언 빨래가 널린 마당에서 찬바람을 맞던 까치밥의 선명한 색을 봅니다. 그런 날은 따뜻한 추억으로 마음이 추슬러져서 생기를 되찾는 느낌이 드는 데요.
오늘의 여백을 충실히 채울 힘을 공급받은 기분입니다.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한 기억이야말로 매일 동동거리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생에 짧은 쉼을 선물하는 마음 정거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 분홍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문득 분홍색은 “사랑의 말을 발음하는 당신의 혀”라고 표현했던 시인의 글귀가 떠올라서 무지 행복했는데요. 오늘도 대림 제4주일을 맞아서 밝혀진 하얀 초의 색깔과 사제가 입은 맑디맑은 흰색 제의에서 품어져 나오는 언어가 깊고 투명하여, 고스란히 신자들에게 전해지는 은혜를 청하며 이 글을 적습니다.
기다림에 마침표가 찍히는 오늘이기에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교회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막바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을 선물합니다. 잠든 세상이 보지 못하는 별을 보기 위해서 영혼이 깨어있기를 권하고 우리를 참 행복으로 이끌어줄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기다리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아드님의 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뜻이 참으로 가혹하여 마음이 쓰려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으로 떠나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시며 ‘내 탓이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라며 목멘 심정을 토로하셨을 것만 같은 겁니다.
오늘 제2독서는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치열한 사랑을 계획하신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별 장면을 소개하는데요. 저는 감히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던 예수님의 음성이 떨렸을 것이라 헤아립니다.
해서 마음이 저릿해집니다. 새삼 우리에게 선물 된 구원의 은혜가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혹독한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으레 성당에 구유를 꾸미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올해만큼은 제발 동물의 먹이통인 구유가 아니라 찬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하고 아늑한 방, 믿음으로 가득한 마음, 희망으로 환한 영혼, 사랑이 충만한 삶의 현장에서 기쁘게 태어나고 싶으실 것이라 싶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곳에서 태어나 고작 구유에 누여지는 걸 보시며 하느님께서는 억장이 무너졌을 것만 같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또다시, 당신 홀로 창조하신 세상을 우리와 더불어 가꾸시려는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무조건, 축복하시는 가장 큰 사랑의 징표로써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십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후다닥 지나치는 우리의 매일이지만 매양 그렇고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도돌이표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은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혜의 시간인 까닭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일지라도 사실 우리가 맞이하는 매 순간순간은 전혀 새로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명심한다면 지난날, 지난 시간보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마주하는 상황에서 안달복달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고 판단하며 스스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을 삼갈 것입니다. 하여 두루 보듬어 품어 내는 사랑의 삶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과의 만남을 목전에 둔 지금, 삶의 호흡을 가다듬고 시선을 돌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면 좋겠습니다. 모쪼록 ‘나’의 근원을 아는 지혜인답게 삶의 핵심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스스로의 신앙을 재발견하고 스스로가 살아낸 삶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에 저마다의 곡절과 사연을 절절히 풀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님께 안기어서 펑펑 울음보가 터지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참회의 마음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니까요. 주님께로 돌아서 다짐하는 새로운 결의야말로 오시는 그분의 길을 환히 밝혀 드리는 세상의 화답이니까요.
주님께서는 결코 엉성한 믿음의 뿌리로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최선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동안 요만큼 자라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다 아십니다. 이 작은 사랑을 살아내기 위해서 또 얼마나 애를 쓰고 용을 썼는지, 환히 알고 계십니다.
때문에 앙상하기만 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비웃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저, 오로지, 가여워서 토닥여주십니다. 오히려 “애썼다. 고맙다.” 위로해 주십니다.
이제 이 주간의 말미, 쇠약해져서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을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인생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 모두를 ‘보잘 것 있는’ 하늘의 존재로 탄생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또다시 하느님의 아들이 오십니다.
하느님의 이 놀라운 사랑에 화답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갈히 가꾸는 저와 여러분이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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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 4 주일입니다.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오실 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어떻게 오시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오실 분’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에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오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미카 5,2)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셋째는 “목자로 나서리라.”(미카 5,3)는 것, 곧 그분께서 백성을 인도하고 먹여주고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넷째는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4)는 것, 곧 그분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화이신 당신을 건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시는 분’이 짐승의 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놓으실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이요, 그것은 ‘당신의 뜻’이며 바로 그 뜻을 이루러 왔다(히브 10,7)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2독서>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라는 말씀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에 다 같이 들어있는 말은 “이루다”는 단어인데, 앞 문장에서는 능동형으로, 뒤 문장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시는 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도록 수락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주인이 되시어 일하시도록 허용해드리는 일이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극치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응답하려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것에 응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신에 가려졌거나, 그 뜻을 알아야 하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이 그 뜻을 이루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의 불확실성을 탓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뜻’(마태 11,26;루카 10,21)을 지니신 주님의 사랑과 호의에 의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영성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 존 캐버너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캘커타에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에, 수녀님께서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존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이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가 이끌려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목적지를 알려주거나 지도를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라고 하셨고, 그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신뢰로 믿음의 길을 갔었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의 동행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었던 샤를르 푸고의 기도를 함께 드려 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고 이해하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어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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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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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십니다."(루카 1,42)
<마리아의 행복!>
주님의 은총을 가득히 입은 '두 여인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납니다. 주님의 어머니로 불리움을 받은 마리아가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아인 카렘'(Ain Karem)으로 가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친척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엘리사벳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마리아'를 '가장 복되신 분, 행복하신 분'이라고 칭송합니다.
'마리아의 행복은 어떤 행복일까?'
'마리아의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다른 행복'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했던 마리아이기에 '죽음을 받아들인 행복'이며, '주님의 뜻과 말씀을 받아들인 행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9.10)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시는 예수님(성탄의 참의미)을 받아들인 행복'입니다.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영혼이 꿰찔리는 아픔을 받아들인 행복'입니다.
엘리사벳이 칭송한 마리아의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크게 다른 '역설의 행복'입니다.
우리도 역설의 행복인 마리아의 행복, 가장 큰 행복인 '참행복'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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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에게>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벗에게>
하느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비할 데 없는 행복에
머물고픈 바로 그 순간
외로운 벗 하나
더욱 눈에 밟혀온다네
서둘러 달려가
품에 안을밖에
내 안의 하느님께서
하느님 안의 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걸음에 달려갈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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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상은 공평한가요? 아니면 불공평한가요? 당연히 불공평합니다. 저의 자발적 선택 없이 삶의 시작부터 많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국적, 성별, 부모 형제, 가정환경, 외모, 건강, 재능 등등…. 저의 선택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삶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만 모두 공평할 뿐입니다.
여기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불평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나만의 삶을 만들며 살 것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불평불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이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불평만 하기에는 자기 삶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성모님께 주어진 일 역시 성모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불공평의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불공평의 상황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 기쁨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아 기쁨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고 발걸음도 바삐 유다의 땅을 향합니다. 서둘러 가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발걸음이 가벼웠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잉태해서 무거운 몸이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무척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기쁘기만 합니다. 기쁨의 성령이 인도하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라 불릴 나이였던 엘리사벳이 앳된 동생 마리아의 방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기쁨이 바로 성모님의 노래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기쁨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요? 불공평해 보이는 하느님의 일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불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봤기에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의 불공평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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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평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불공평>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이 일어났습니다. 이 공격으로 자그마치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희생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보상금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똑같이 보상금이 주어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보상금은 25만 불부터 최대 700만 불까지 액수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죽음의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이, 경력, 교육 수준, 직군, 인종 등으로 그 차이가 생겼습니다.
최고의 지위에 있는 CEO의 죽음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행려자의 죽음을 하느님께서 다르게 보실 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불공평을 만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세상에 만연된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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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구, 다른 사람 없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한없이 주고 싶어서 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체험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마리아라는 한 인간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 준비를 다 하셨습니까? 코로나19로 마음의 여유가 없지만, 그래도 트리를 만들고 구유장식을 하였고, 카드를 보내고 선물 준비를 했다고 성탄 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있나요?
아직도 마음 안에 시기, 질투, 미움, 원한을 품은채로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가득 찬 채로인데.... 그 안에 예수님께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을까요?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했는데... 희생, 봉사, 사랑의 실천에 소홀하였는데 어떻게 그 안에 주님께서 기쁘게 거처하실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외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보다 맑고 깨끗이 정돈된 마음,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마음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 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번제물을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들 이사악이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물음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데 아들이 그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차마 ‘제물은 바로 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을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그 자리에서 체험케 되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주님께서는 롯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천사들을 통해 그 가족들의 살길을 알려줍니다. 롯의 사위들은 그 소리를 우습게 여겼고, 천사들은 결국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했습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 19,17)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고 온 성읍들과 온 들판들이 땅 위에 자란 모든 것들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 19,26).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면 돌아보지 말아야죠. 왜 돌아봅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살려주신다고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대로 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다고 원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민수기 21장4절 이하에는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대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21,5)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어 그것들이 백성들을 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21,9)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 역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한 젊은이가 산에 올랐다가 어둠을 맞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내려가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아래로 미끄러졌습니다.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줘요! 하며 소리쳤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를 구해주리라.” 젊은이는 이제 살았구나! 하며 “당신이 거기 계시니 정말 기쁩니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네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가 긴장하며 “그렇지만… 하느님..…” 주저하는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그러자 젊은이가 “예, 하느님, 당신을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믿기 때문에 매주 성당에도 나가고 성경공부도 하고 매일 기도 시간도 가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어라.”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었는데 젊은이가 아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기 누구 다른 사람 없소?”
주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를 알면서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종에게는 주인에 대한 의무만 있을 뿐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을 자처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에”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은 성모님을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9)
믿음은 이리저리 계산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상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행하지는 않으면서 능력을 먼저 보려고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2독서 히브리서 10장 9절의 말씀대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왔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1코린 15,58)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주님의 탄생을 가져왔듯이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아드려야겠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 모두가 믿음의 사람,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정이건 직장이건 어디에 서 있든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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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마을에 스스로 자기자신을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그 아이도 선물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을 못 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나만 못 받으면 왕따가 되는 데….” 그러다가 예수님께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앞으로 착한 아이가 될 테니 선물을 꼭 보내주세요!” 그렇지만 싸우거나, 거짓말을 안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쓰던 편지를 찢어 버리고 성당으로 갔습니다. 성당을 한참 돌아보다 작은 성모님상을 훔쳐 달아나서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 예수! 내 말을 잘 들어라. 협박용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지금 내가 네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있다. 그러니 네 어머니를 살리고 싶거든 24시간 이내에 선물을 보내라. 선물을 보낼 장소는 000이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협박하고, 흥정하고 달라고 떼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라고 말씀하시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번 성탄의 아기예수님께 드리는 선물은 빛의 삶을 사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어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 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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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만남의 기쁨, 만남의 여정>
-도반道伴과의 만남-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 구름 되어
임의 품 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리 하얀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대림 제4주일을 맞이하여 첫 눈다운 눈이 내렸고 마치 대림의 주님의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엊 저녁 눈 덮인 하얀 눈길을 보는 순간 아주 예전에 써놨던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란 시가 생각나 선물로 나눴습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대림 제4주일, 주님 오실 날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 4개가 희망의 빛, 기쁨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주님은 전례로,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죄의 멍에를 메고 구원을 기다려 온 저희가, 다시 맞는 성자의 탄생으로 옛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어제 미사중 본기도를 바치며 순간 깨달음처럼 다가온 ‘전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진리였습니다. 대림2부 셋째날 오늘 12월19일의 저녁성무일도“오”후렴도 우리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 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대림시기의 모든 기도문은 한결같이 주님께서 오심을 간절히 청원하는 내용들입니다. 어서 오시어 우리를 만나 구원해 달라는 소망을 노래합니다. 참으로 간절히 찾을 때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교회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를 정화합니다. 대림 제4주일, 아침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도 찬미가도 우리 마음을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대로 전례를 통해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주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여기에 오늘아침 빛을 발하라/기쁨이 마음에서 끓어올라라
다가올 기쁜영광 미리알리는/진실되 예고소리 울려퍼지네
영원한 하늘의빛 떠올라있고/구원의 아침샛별 반짝이나니
찬란한 천상빛이 우리를불러/천국의 시민되라 초대하시네”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기쁨중의 기쁨이 만남의 기쁨이요,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바로 이런 기쁨과 만남을 체험하는 복되 미사시간입니다. 특히 대림시기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아주 오래 전에 제1독서에서 미카예언자가 예고한 주님입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임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우리의 착한 목자요 평화가 되시는 주님의 도래를 예고하는 미카 예언자요, 바로 우리의 가난한 베들레헴 삶의 자리에서 그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그 만남의 원형을 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 도반들의 만남입니다. 말 그대로 만남의 기쁨, 만남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 눈에 보이는 형제 도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감동적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만남, 참 도반과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큰 소리로 외치니 그대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의 만남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도반과 구원의 만남입니다. 수도원 피정차 처음 오신 분들에게 저는 주저없이 말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형제님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초대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대로 마리아를 구원한 엘리사벳의 고백이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엘리사벳 도반을 통해 마리아를 만나 주신 주님이십니다. 오늘 구세주 예수님 탄생을 앞둔 복음의 주인공이 두 어머니 도반이란 사실이 참 인상적입니다. 모전자전입니다. 그 자식에 앞서 그 어머니임을 깨닫습니다.
엘리사벳 어머니에 세례자 요한이요, 마리아 성모님에 예수님입니다. 새삼 어머니들의 사랑과 믿음이 자녀들의 성장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두 어머니들의 만남은 태중의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참 좋은 도반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자 또 다른 나이기도 합니다. 정말 좋은 부부는 주님 안에서 이런 영적 도반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원하신 도반이신 주님 안에서 복된 형제 도반들과의 만남이 가능할 까요. 기도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예수님의 거듭된 기도가 그 모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거룩함에 힘입어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해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님은 당신은 물론 좋은 도반 형제와의 만남도 선물하십니다. 제가 수도원 십자로의 예수님 부활상 앞에서 수시로 바치는 기도는 둘로 요약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제 뜻이 당신 뜻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주님께 겸손히 바치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를 통해 영원하신 주님이자 도반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더불어 선사되는 좋은 영적 도반들이요 도반들과의 만남에 우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영원한 주님이자 도반인 당신과는 물론 우리의 영적 도반인 형제자매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보소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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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1RDSd98G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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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하얀
눈꽃송이
피어난
사랑의
새아침이다.
생명조차
아깝지 않은
사랑이 있다.
삶의 전부가
되시는 사랑이
있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대림이다.
마리아는
여인에서
어머니로
탄생한다.
어머니의 탄생은
자식을 향한
최우선의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시는
삶의 탄생이다.
언제나
기쁜 사랑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자식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전부가
사랑이라는 것을
또 다시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의
세월을 통하여
어머니를
빚어 만드셨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계시기에 삶은
기쁨이 된다.
그 사랑을
본받는
행복한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하시는
말씀 그리고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말씀을 믿는
사랑의 대화로
익어간다.
말씀을 믿는
그 가운데에
어머니가 있고
탄생이 있다.
탄생!
하나밖에 없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믿음의 시작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 탄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사랑이
되신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있다.
끝내
이루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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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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