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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삼하 17:21-29
21 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22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24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27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삼하 17:21-29 / 그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사라지자 우물 속으로 들어갔던 두 사람이 기어올라와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아히도벨이 오늘 밤 안으로 왕을 기습해야 된다고 조언하였으니 어서 요단강을 건너가십시오!' 22) 다윗은 즉시 부하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그들이 모두 그 밤 안으로 강을 건너서 날이 샐 무렵에는 마지막 남은 한 사람까지도 모두 강의 건너편에 있었다. 23) 한편 아히도벨은 자기의 조언이 더 이상 압살롬에게 통하지 않자 이미 사태가 결판난 것으로 예견하고 나귀에 안장을 얹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그는 가사를 정리하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긴 다음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의 자살 원인은 단순히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 데 있지 않고 압살롬이 패배하여 결국 더 비참하게 죽을 것을 예견한 데 있었다. 그의 죽음은 바로 부왕의 배반자 압살롬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신호였다. 아히도벨은 이렇게 고향에서 죽어 자기 아버지의 무덤에 묻혔다. 24) [마하나임에 이른 다윗] 마침내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온 군대를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넜을 때에 다윗은 이미 안전한 요새 도성인 마하나임에 이르러 있었다. 25) 다윗이 요압을 군대 총사령관으로 세운 것과 같이 압살롬도 아마사를 온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세웠다. 아마사의 아버지 이드라는 본래 이스마엘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 여자 아비갈과 결혼하면서 데릴사위가 됨으로써 본인도 귀화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고, 그의 자식들도 모두 여자 집안의 족속이 되었다. 이드라는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결혼하여 아마사를 낳았고,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아마사는 바로 다윗의 조카뻘이 되었다. 26) 압살롬은 요단강을 건넌 다음 길르앗 지역에 진을 쳤다. 27) 한편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몬 족속의 랍바 왕궁에서는 하눈과 의견을 달리하던 왕자 소비가 찾아와 있었고. 로데발에서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와 있었다. 그는 본래 사울의 추종자였으나 므비보셋이 잘 대접받는 것을 보고 감동되어 다윗의 추종자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로글림에서는 길르앗의 거부 바르실래가 와 있었다. 로데발과 로글림은 마하나임에서 북쪽으로 갈릴리 호수 사이에 있었다. 28-29) 그들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광야의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굶주리고 목마르고 지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윗왕과 그의 부하들에게 필요한 요와 이불, 접시와 냄비, 밀과 보리, 밀가루와 볶은 곡식, 콩과 팥과, 꿀과 ㄱ) 응유, 몇 마리의 양과 소 등을 대량으로 준비해 가지고 왔다. (ㄱ. 버터)
다윗과 일행은 위기를 모면하고 마하나임으로 도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아히도벨의 자살(21-23) 방해하는 자들이 사라지자마자 두 제사장의 아들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갔고, 다윗을 만나 임박한 위험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은 그와 동행한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했습니다. 한 편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채택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자살하게 됩니다. 아히도벨의 자살은 그의 공허한 인생을 드러내 줍니다. 그는 다윗의 신임받는 고문으로 백성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배신하여 본성을 드러냈고 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과 압살롬의 문제를 대단히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는 왕국의 미래가 압살롬과 함께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이 그를 자살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을 추격하는 압살롬(24-26)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 대신 후새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함으로써 압살롬은 다윗에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셈이되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낙심하여 흩어진 부하들을 다시 모아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도 군대 조직을 개편하여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했습니다. 다윗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요압이 다윗을 따라감으로써 압살롬은 요압의 사촌에게 그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습니다. 양편은 모두 요단 강을 트랜스 요르단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동부 마하나임에 도착했습니다. 마하나임은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넌 지점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다윗(27-29) 다윗과 그의 일행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세 명의 자산가가 다윗의 군대를 위해 푸짐한 음식을 자져왔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 다윗에게 은혜를 입었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 부자들의 이름은 소비, 마길, 바르실래입니다. 다윗은 자기 백성들한테는 배척당했지만, 이들 이방인들한테는 정중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지금 다윗은 마하나임에서 압살롬이라는 떠오르는 위협에 대항하여 왕국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다윗의 통치 초기와 후기에 마하나임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적 용 : 우리 주변에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며 격려와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옛날 한 청년이 스승을 찾아가 지혜를 구했습니다. “저는 꼭 성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을까요?”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알아야 해. 성공은 실패의 변형일 뿐이거든.” 스승은 차근차근 세 가지 실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첫 번째 실패는 하기 싫은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야. 성공의 대가는 얻겠지만, 삶의 의미나 즐거움을 얻기는 어렵지. 두 번째는 하고 싶은 일에서 실패하는 것이야. 계속하면 진정한 성공을 얻을 수 있지. 이때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실험일 뿐이란다. 마지막 세 번째 실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실패도 성공도 없지. 그러나 인생을 낭비한 책임을 져야 해. 가장 치명적인 실패지.” 세 가지 실패를 모두 말한 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성공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 설 교 >
아히도벨의 죽음
지난 시간에 거짓말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상식이 모두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생각하기에 그런 사고방식에서 구축된 상식과 지식은 하나님이 개입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을 거둬 버린 채 세상을 보기에 세상이 좋아하는 것이 내게도 동일하게 좋은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보게 되면 참된 것은 진리며,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야 말로 거짓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한 인생의 마지막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여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다윗에게 가서 후새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후새의 말대로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너 도망을 칩니다. 결국 이것으로 압살롬은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의 실패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의 내용대로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됩니다.
아히도벨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본문에는 아히도벨이 죽음을 택한 이유나, 그의 심적 상태 등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모략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것으로 인한 자존심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6:23절에서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아히도벨의 모략이 아예 시행되지도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아히도벨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고 다윗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 도망을 쳐 버린 상황에서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은 다윗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짐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히도벨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자기 실패에서 하나님을 보지 않았던 것,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어쨌든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은 권위가 있던 아히도벨의 모략이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후새의 모략을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채택하게 된 것은 아히도벨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아히도벨의 실패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7:14절에서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라”는 말씀을 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아히도벨의 모략이 더 좋은 것이었으나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시기 위해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후새의 모략으로 기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히도벨의 실패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을 파하신 하나님을 보기 보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모략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것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아히도벨의 죽음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과 같은 실패는 이하도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어떤 문제를 의논할 때 내가 말한 의견이 묵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없습니까?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기에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없습니까?
이처럼 아히도벨의 문제는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발생하는 것이기에 아히도벨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아히도벨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과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아히도벨이 하고자 하는 모략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라면 아히도벨의 모략은 시행될 수 없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략을 파하셨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묵살되는 것에서 자존심이 상하게 된 것이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성취해 가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며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나의 계획과 생각은 실패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계획과 생각이 실패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실패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실패하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상할 이유도 자존심이 구겨질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의견을 받지 않은 것은 함께 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파하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이 자존심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깔려 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일이 나의 모략대로 계획대로 성사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의 생각, 나의 계획이 성사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의 일을 실패하게 하셨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보기에 자존심 상하는 것만 염두에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히도벨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그분이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으로 자존심 상해하시고 창피스러워 하셨던가요?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예수님 자신에게는 실패와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일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았기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세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이 실패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일하고 계신다는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의식함으로 자신의 실패를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내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것을 교회로 국한 시켜 생각하면, 교회의 형제들이 내 말을 들어주고 내가 말한대로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든 교회든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뜻을 따라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압살롬에게는 좋은 것이었지만 결국 후새의 모략을 듣게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생각, 좋은 계획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보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뿐입니다.
아히도벨이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는 것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내 말대로 되고 안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