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30년 전쟁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를 뽑으라면, 아마도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이 그 중 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의 승리와 드라마틱한 죽음 덕분에 그는 전사하는 순간부터 전설이 되었고, 이후 18-19세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집단과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그의 신화에 투영해나갔다.
덕분에 온갖 전설과 신화가 중첩되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구스타프 아돌프의 이미지는 실제 인물과 상당히 동떨얼진 수준까지 와버렸다. 실제로, 대중서에 등장하거나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구스타프의 이미지와 20세기 후반부터 근대 초 전공 학자들이 논의해온 구스타프는 상당히 다르다.
신화화된 구스타프 아돌프는 혁신적인 전술로 전쟁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근대 전쟁의 아버지'였으며, 강철같은 규율로 최초의 근대적 군대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가 창조한 최초의 근대 군대는 잘 훈련되고 보급을 받아 약탈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일종의 '독일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의 수호자'로서 죽음을 당한 일종의 순교자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러한 이미지들 상당부분이 역사상의 실제 구스타프 왕과는 인연이 거의 없거나, 크게 과장된 일종의 집단 기억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실제 인물 구스타프는 어떤 군인이었으며, 왜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일까?
왜 참전했는가?
이미 소강상태로 접어든 30년 전쟁에 구스타프의 스웨덴이 뛰어든 이유는 사실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1697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그가 남긴 문서 상당수가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공식 포고령 등은 정치가들이 늘상 그렇듯 본심을 다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판단이 쉽지가 않다. 나머지 상당부분은 앞서 말했듯 18-19세기에 형성된 신화들이 채워넣었다.
일단 그가 밝힌 공식적인 목표는 '독일과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위해서'인데, 이것을 말 그대로 추상적인 구호라 해석하기 나름이다. 물론 좀더 현실적인 목표들도 여러 행간에 드러나긴 한다. 다만 어떤 목표가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흔히 제기되는 '구스타프의 참전이 종교적 동기였느냐 아니면 종교의 외피를 쓴 현실적 동기였느냐'는 사실 틀린 질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관찰되는 현상이 '모 아니면 도'라는 아주 잘못된 이분법이다. 17세기의 종교와 세속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 해석일뿐더러, 사람이 큰 결정을 내릴때의 동기가 100퍼센트 순수함일수도, 100퍼센트 세속적일수도 없다. 당장 우리들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왜 역사적 인물을 해석할때는 자주 이런 이분법에 빠지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스웨덴의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구스타프가 독일의 자유와 프로테스탄티즘을 구하기 위해 싸움에 뛰어들었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실러의 해석이 그러하다. 1813년 경에 뤼첸에 세워진 기념비에도 "여기 구스타프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쓰러졌다" 라고 새겨졌다. 지금은 학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프로테스탄티즘=자유와 진보" 사관의 일환이다.
물론 17세기 사람인 구스타프가 19세기식 '종교의 자유' 개념을 이해할리 없다는 점과 17세기 초중반 종파주의 시대에 '종교의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전쟁을 일으킬리 만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도 안되는 해석이다. 게다가 피터 윌슨 선생 말마따나, 스웨덴이 유럽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가장 늦게 성립된 국가에 속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오스트리아는 18세기 말인 요제프 2세때 종교의 자유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고, 프랑스는 혁명 이후, 영국은 19세기 초에 가톨릭 해방이 이루어지고 점진적으로 확대된 반면, 스웨덴인들은 1866년까지도 루터교를 버릴 경우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해야 했다)
그렇다면, 종교적 동기와 함께 구스타프가 참전을 통해 달성하려고 했던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살펴보자.(여러번 말하지만, 17세기에 이 둘은 절대로 칼같이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은 늘 감안해야 한다) 구스타프가 다소 추상적인 구호와 함께 보다 명확하게 밝힌 목표는 개전 이후 제국군이 거둔 성과를 뒤로 돌리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는 팔츠 선제후를 비롯해서 반역죄로 영지를 몰수당한 이들을 복구시켜서 독일의 정치적 지도를 1618년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실질적으로 스웨덴의 국가 안보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구스타프의 개인적인 야망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스웨덴이 유럽 열강으로 당당히 인정받아서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되는 것은 구스타프 뿐 아니라 많은 스웨덴 귀족들의 오랜 꿈이었다. 그런 면에서 30년 전쟁에 뛰어드는것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다. 필자의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팔츠 선제후가 독실한 칼뱅파로서의 소명의식과 독일 개신교 제후국들의 맹주가 되겠다는 야심을 결합시켰듯이, 구스타프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문제는 이 원대한 목표를 실현하는 방안인 전략과 전술에 있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앞서 말했듯, 천재적인 명장이자 혁신가로 오래도록 칭송을 받아왔다. 과연 이러한 이미지는 얼마나 사실과 일치할까?
전략가로서 구스타프
스웨덴의 안보 강화, 개신교의 리더 국가로서 국제적 위상 확립 등등 다 일국의 지도자로서 꿈꿔볼만한 목표이긴 하지만, 문제는 당시 스웨덴이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었는가다. 이 시기 전쟁은 기본적으로 왕과 귀족들이 하는 일이다. 전쟁은 귀족들에게 영광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 댓가로 피를 요구한다. 그런데 스웨덴에는 전쟁에서 피를 흘려달라고 요구할 귀족들이 다른 국가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이미 1621년 이래로 폴란드와 전쟁으로 인해 인적자원을 상당히 소모한 상태였다. 게다가 스웨덴은 작은 나라라 물력도 한계가 있었다. 여러 면에서 스웨덴은 장기간 대규모 전쟁을 감당할 여건이 안되었다.
물론 구스타프로서는 '독일 개신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었기 때문에,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기대했을수도 있다. 모자라는 피는 이들의 지원을 받아 보충하고, 독일의 식량을 먹으면서 전쟁을 치르면 안될 것도 없었다. 단, 독일 개신교 제후들이 스웨덴의 개입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러나 독일 개신교도들의 반응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지근했다. 일단, 구스타프가 명분으로 내걸은 구호와는 달리, 스웨덴에게 도움을 요청한 독일의 공동체는 슈트랄준트 하나였다.
특히 당시 개신교 진영의 대표적인 제후국들인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스웨덴의 개입에 대놓고 부정적이었다. 이 당시는 보헤미아 반란이 진압되고, 덴마크의 개입까지 수포로 돌아갔으며 전쟁은 사실상 끝난것처럼 보이는 때였다. 페르디난트 황제는 보헤미아의 반란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태에 단단히 빡쳤는지, 아니면 연달은 승리로 기고만장해졌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아무튼 개신교 제후들에게 상당히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긴장감은 팽팽했으나, 전쟁이 재개될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단 필자의 지난 글에서도 설명했듯이,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들의 대다수는 종파를 막론하고 온건파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페르디난트의 고압적인 행동에 상당히 많은 가톨릭 제후들까지도 황제가 선을 넘었다고 느꼈다. 신성로마제국은 전통적으로 합의의 정치를 통해 운영되어왔으며, 이는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망한 소수파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제후들이 종파에 관계없이 동의하던 바였다.
따라서 1630년 레겐스부르크 회담에서 선제후들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한데 뭉쳐서 황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아무리 긴장감이 팽팽했어도, 결국 제국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밀고 당기기 회담과 타협을 통해 사태가 해결되리라고 충분히 예측할만 했다. 그리고 당시 개신교의 대표격으로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가톨릭 온건파 제후들과 함께 황제를 압박하기 위해서 한창 협상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스웨덴이 개입을 선언해버렸으니,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입장에서는 "아니 우리가 지금 간신히 수습하고 있는 판에, 저 인간은 왜 또 불쏘시개를 던지는거야?"라고 생각할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스타프가 독일 개신교 제후들 다수의 지원으로 인력과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압도적으로 화려한 승리를 거두면서 "내가 이렇게 대단한 천재고, 나를 따르면 떡고물이 맣이 생긴다"는걸 확신시켜줘야 했다. 전략적인 면에서 결코 건실한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다.
구스타프가 범한 또다른 실책은, 윌슨 선생이 잘 표현한대로, 명확한 출구전략(exit strategy)를 세우지 않고 대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스웨덴처럼 한정된 인력과 물력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한 전략이 처음부터 잘 세워져있어야 함에도 말이다.
전쟁 기간 내내 구스타프의 전략 목표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했다. 누군가는 전쟁에서 목표는 유연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유연해야 하는 것은 목표를 실현해야 하는 방식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목표 자체가 바뀌어버리면 전쟁 수행 자체가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구스타프가 계속해서 전략목표를 변경한 이유는 절반은 개신교 제후들의 협조 부족과 스웨덴의 물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점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본인이 야심을 자제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야심을 가지는것 자체는 문제될게 없지만, 그것이 실현 가능한 것이었는가는 문제가 된다.
우선 그에 대한 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지지는 앞서 말했듯 시종 미지근하거나 조건부였다. 조건부라는 것은 각지의 개신교 제후들이 "우리 동네의 이 문제를 해결해주면 당신을 지지하겠다", 혹은 "~~를 점령해주면 당신을 지지하겠다"라고 조건을 세웠다는 뜻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스타프는 부대를 이리저리 쪼개서 이 요구들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당면한 전략 목표는 늘 갈팡질팡할수밖에 없었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부대를 계속해서 이리저리 보내다보니 구스타프가 직접 지휘하는 본대는 잘해야 2만5천 명을 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구스타프 신화의 한 요소인 스웨덴 군의 소위 '강철같은 규율'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약탈은 일상이 되었다.
구스타프 본인의 문제도 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17세기에 보기 드물었던 결정적인 승리였고, 구스타프의 분명한 위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승리를 거두고나자 그는 갑자기 오버를 하기 시작한다. 일단, 그는 이전에 프랑스와 했던 약속을 어기고 가톨릭 연맹 소속 제후들의 영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복한 영지로 자기 부하들 월급도 주고, 나머지는 독일 제후들에게 나눠줘서 동맹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이었다. 프랑스의 지원금보다 그게 더 남는 장사라고 계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짧은 계산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렇게 정복하고 흩뿌려댄 영지들은 구스타프의 동맹자들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원한을 품은 새로운 적들도 양산해냈다. 그리고 이 적들이 달려갈 곳이라고는 합스부르크 진영밖에 없었다.
물론 그쯤이야 구스타프도 예상을 했겠지만, 이 정책의 정말 심각한 결과는 독일 여기저기를 동맹과 원한 가진 상대들이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만들어놓는 바람에, 스웨덴이 깔끔하게 얻을것만 얻고 평화조약으로 발을 빼는 것을 정말 어렵게 만들어버렸다는데 있었다. 게다가 새로 생긴 동맹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스웨덴군은 더 쪼개져야 했고, 하나의 대전략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졌다.
물론 이러한 실책에는 구스타프만의 잘못만 있는것도 아니었고, 근본적으로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가진 체급의 한계에서 나온 점도 있었다. 게다가 필자가 늘상 강조하듯, 어떤 실책들은 뒤에 가야만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실수들만 가지고 구스타프를 지나치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 그것 자체가 맨 서두에서 언급했던 '모 아니면 도"의 오류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략가로서 구스타프에게 한계가 있었던 점도 분명하다. 그는 분명 전국을 주도하는 천재적인 전략가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가 자주 칭송을 받는 전술 혁신가로서의 면모는 어땠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 주제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첫댓글 좋은글 잘봣습니다!!
좋네요~얼릉 써주세용
얼른 다음 글 읽고시퍼요 ㅠㅠ ㅋㅋㅋㅋ
1. 슈트랄준트가 적극극적인 이유도 발렌슈타인이 슈트랄준트를 공격했고 급하니까 인질까지 바친걸로 아는데 당연히 스웨덴 개입에 적극적이었겠죠...
2. 전 절정의 황제군을 쥐고 있던 페르디난트가 스웨덴의 개입과 무관하게 결국 자기 결정을 밀어붙인걸로 아는데, 스웨덴의 개입 사실이 복권칙령을 강행하는데 영향을 미첬던 건가요?
정확한 시점이 문제인데, 현재 가장 최근 연구들을 볼때는 스웨덴 개입 시점까지는 물밑협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스웨덴 개입으로 협상이 물건너간거죠. 신성로마제국의 구조를 봐도 기본적으로 합의의 정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황제가 독단을 하기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당장 황제군의 총수인 발렌슈타인조차도 지나친 강경책에는 회의적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