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의 유순함에 운명의 붉은실을 맞추고.
피해갈 수 없는 선율의 슬픈 운명은.
나를 향해 상기하듯 엄습해 온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운명은
분명 우리가 본 듯한 순색의 초상.
내가 흘린 슬픔의 눈물
.... 비루 .
"그대들이여, 기억하는가. 그대들의 혼을 빼앗겼던 그 날을."
차가운 암흑으로 물든 대지, 그 위에 우뚝선 선봉장. 순수했을 초혼마저
황폐히 퇴색시켰을 전장은 이미 피에 미친 미치광이들의 광활한 영토
분쟁으로 일단락을 맺기엔 산 자들의 분노가, 가슴 속의 시퍼런 서슬이
가시지 않는 그들의 피맺힌 응어리가, 쉽사리 잠재워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려,
머잖아 겨누어 질 상대를 향한 칼을 스스로 쳐들게 했다.
그들은 똑똑히 기억했다. 목숨일랑은 돌볼 생각도 없이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은 적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너도 나도 손에 칼을 쥐었다.
무엇으로도 잠잠해지지 않는 그들의 차원높은 분노가 그를 이 자리로 내세웠다.
호통의 중심 속에서 얼핏 내비추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대장군의 모습과는
자못 달랐다. 그들의 귀에 한치도 빠짐없이 똑똑히 각인되는 그 목소리는
읊조림과 같아 지긋하였으나 결코 크지 않았고 우람하다 말하기엔 부족한
풍채는 사내라기 보다 여인다운 굴곡을 갖춘 예사롭지 않은 그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들의 뇌리에 스치는
장군의 모습을 다시 그리게 하였다. 누구 하나 따를 리 없어보이는 그가 움켜쥔
병력은 턱없이 작았다. 고작해야 1만2천의 병력으로 고요했던 혼을 깨뜨린
왜놈들의
10만대군을 온전히 짓밟을 수 있는 불가사의한 힘이 나올 리 만무했다.
허나 그가 누구인가. 하나로 이 나라 대 청연을 굳건히 지켜냈던 대장군
목시진의 아들이다. 사람들은 그리 믿었다. 그는 아비보다 더 뛰어난 지략으로,
더 뛰어난 육감으로 그보다 더한 신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그리 믿어 모인
병졸이 1만2천이나 되었다. 사람들의 눈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그가 그리
허망하게 사라졌을 적에 조정은 허겁지겁 그의 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고
마침내 그 원수를 갚기 위해 그가 이 자리에 섰다.
"모두가 그리 알고 있다. 1만2천의 병력은 눈덩이같이 부푼 더러운 야인놈들의
목숨을 앗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허나 우린 여지껏 한번도 진 바 없다.
불가능한 싸움에 부하들을 내몬 적 없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너희들 1만2천의
병력이 누구보다도 소중하며 고마울 따름이다. 그대들이여!
칼의 울음을 보았는가.
그들이 이 숨막힌 전장을 주도했다. 그들이 피를 보게 했다. 이 곳이‥
나와 그대들이 죽을 자리다."
"와아아!!"
자포자기한 채로 넋을 빼고 있는 자보단 아직은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몫에서
어김없이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렇기에 1만2천의 병력을
가능하다 믿었다. 그 믿음은.. 이 순간에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끝까지 믿을 것이라고 가슴 한켠에서 그리 말한다.
그들의 함성엔 끊임이 없었다. 횃불에서 세어나오는 불빛이 천공을 가를때까지
그들은 어김없는 함성으로 그를 맞았다.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온들 막아내면 그만이었다. 그저 죽을 힘을 다하여 아군보다 적을 한명이라도
더 벤다면 그것이 곧 승리라 철썩같이 믿어온 이들이다. 그 무식함이 그들의
투지를 불살랐다. 그들은 저 자신이 죽을 곳이 어디인 지 알았다. 저가 죽을
곳은 오직 적과 함께 하는 것을 그로부터 알았다. 명민하고도 용의주도한
눈빛의 대장군은 결코 적을 맞아 피하는 적이 없었다. 대장군의
말이 고삐를 조이며 달려감으로 싸움이 시작될 뿐, 언제나 죽기를 다하여
그들의 가슴에 존경을 심어준 인사다.
"바람의 아들. 목장군, 와아아!!"
잇닿아 들리는 함성은 오로지 그를 위한 것이리. 자신을 위한 함성에도
목장군은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모두가 소중한 것을 한두개씩은 빼앗긴
이들이었다. 작게든 크게든 그들의 가슴에 결코 잊혀지지 않는 하나가 있다.
바로 어느날 불시에 찾아든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죽음의 전령사로
떠올라 인두겁을 쓰고 차마 행하지 못할 짓을 마구마구 행하는 그들.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베고 마을을 불살랐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을 잃은 빈털털이로 거리에 내몰렸다.
두 주먹이 불끈 불사오름과 동시에 오로지 그들의 가슴속에 핏발치는 것이
있었다. 복수, 싸늘한 주검으로 굳어버린 식솔들의 사체에 쓸쓸한 황천을 맞아
떠나는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노랫소리가 마을 곳곳에 퍼지며 그들이
어지럽히고 간 마을은 온통 쑥대밭이 된 채로 끔찍한 살상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듯 황폐해진 채로 불에 탄 연기만 드세게 피워
낼 뿐이었다. 그들은 보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가장 소중한 존재가 바로
눈 앞에서 지워져 가는 허탈함이 그들을 턱없이 기진맥진하게 했다. 그 날로
적군은 그들에게서 희망을 앗았다. 빼앗긴 이들의 눈에서 마른눈물조차
더 이상 뚜욱뚜욱 떨어지지 못했다. 다만 적막함마저 깨뜨리는 이곳에서
더 큰 적을 맞아 싸우기를 도래할 뿐, 그것이 그들을 지탱해 준 유일의 이유
였다. 그들의 아내, 자식, 늙은 노모‥ 그들을 앗아간 적군놈들을 찾아
시원스레 목을 벤다면 그것으로 죽어 여한은 없을 것이라 전란이 발발한 이후
줄곧 그리 알았다. 어쩌면 대장군 목연규를 이곳에 내몬 것은 싸늘한 죽음을
맞아 함께한 수많은 여한들일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베어진 이들이
쉴새없이 그의 꿈에 나타났었다. 그들은 한사코 눈물을 떨군채로 쉽사리 그
의 몽환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그를 이리로 내몰았다.
"장군, 요 근래에도 꿈에서 귀신을 보시는 것입니까? 영 몸이 좋아보이시질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고요. 이제 해가 뜨면 출전인데
괜찮겠습니까? 차라리 출전일자를 미루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미루지 않는다."
"외람되오나, 장군께선 요즘 장군 같질 않으십니다. 괜한 억지일랑은
버리시고 잠시나마 쉬시는 것은 어떠시올지 하는 것이 소관의 생각
입니다."
은일의 간청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물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물어보았자 별 효험없는 물음이었다. 쉽사리 그리하마 할
그가 아니다. 전란이 발발한 지 벌써 15년이다. 이제 내년이면 입지에 드러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참전하여 여지껏 어김없이 칼을 빼들고 있었다. 그
칼이 향할 곳은 오로지 적이었다. 그것은 15년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로
그의 눈에 각인될 뿐이었다. 적이 아니라면 동족의 피가 흐르는 자에겐 절대
겨누어선 안된다며 늘상 호된 설시로 가르침을 대신했던 아비는 이제 없다.
적군의 낯선 칼에 서슬퍼런 목시진의 칼은 능란할 의지를 잃은 채로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뒤늦게 아비를 구명하고자 나섰을 때는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비의 눈은 살아생전과 같이 퀭하니 시퍼런 서슬
을 내비추고 있었다. 아비의 차가운 손을 움켜쥐고 그는 한없이 울었었다.
한때 몹시 사랑했던 선하고 귀여운 아내 연희, 그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소중한 딸 은련, 그리고 잇닿아 사라진 아비까지. 모두 한결같이 소중한 것들을
채 살피기도 전에 모조리 거두어 버렸다. 1만2천의 병력이 어찌 모아졌는가.
모두가 하나같이 잃고, 또 잃고. 더 이상 밀려날 곳도, 잃을 곳도 없는 나락
위에 선 자들이었다. 칼 한번 써 보지 못한 이들은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가 먼저 칼을 쓰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과 내가 다르다 생각해 본 적은
한시도 없다. 그들 역시 잃었으며, 나 역시 잃었음이다. 가장 소중한 것들을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말이다. 그리고 그들과 나는 전란이 앗아간 자리를 꿋꿋히
지키고 있다. 살아남아 끝끝내 복수의 칼날을 들 그날까지.
"전장이 끝나면 가장 먼저 무얼 하시겠습니까."
"종전이 된다면 나는 이제 잃었던 딸과 아내를 되찾고 그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너도 부질없는 꿈이라 말하겠지.."
순간 실언을 한 듯한 느낌에 은일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넋을 잃은
초혼의 넋두리는 실로 망연자실하여 생명이 타는 냄새마저 서둘러 채근하며
순식간에 그의 앞에서 모든 것을 철저히 잃어가게 하였다. 요 근래 그에게서
전같은 자신감을 잃어가는 존재는 온전한 괴로움이다. 한번 부여잡곤 놓지 않
는 괴로움은 점차 책망으로 변하였고, 희망은 서서히 그의 믿음에서 그를
떠나가고 있었다. 반드시 살아있다는 믿음은 점차 퇴색되어 혹여나로 바뀌어
버렸건만 그 허탈함과 기나긴 외로움을 은일이 알 리가 없었다. 그나마
돌아가면 반겨줄 이 있는 가솔이 있다는 것이, 절로 떠올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눈 앞에서 손 한번 써 보지 못한 채로 오열하며 모든 것을 잃어갔을 그
에게 있어선 그토록 부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최전방에 가장 우뚝 선 대장군
으로 군졸들을 통솔하는 그에게도 전란이 할퀴고 간 상처자욱은 역력했다.
때로는 떨치지 못한 죄책감이 심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그를 못견디게 괴
롭게 할때면 그는 어린아이마냥, 그 옛날 사랑하던 연희에게 품을 빌려 묻듯
아주 잠시 모든 일에 손을 놓았었다. 구태여 보이지 않던 눈물은 그녀가 사라
지고 만뒤에 뒤늦게 흘려졌다. 모두가 알아 떠받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목장군의
눈물은 회포가 길었다. 매일같이 그의 꿈에 나타났었던 베어진 머리보다 더 큰
경악과 고통. 천하에 떨칠 용맹의 대장군 목연규의 손을 무력하게 놓게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가솔들이었다. 칼 하나로 천하를 발 아래 발발 떨게 하는
목장군에게도 다른 이들과 다름없는 충격이 있었다. 그 아픔으로 너희들을 능수
능란히 다룸이니라. 모두가 불가능하다 말하는 1만2천명의 병졸들.
꽉 메어진 목구멍에서 절로 나오는 소리. 그대들은 이미 죽은 그대들의 소중한
가솔들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제껏 돌아오지 않는 것은 죽어서 일테지? 살았다면.. 어떻게든 왔을거야."
"...장군."
짧은 머리칼을 마구마구 헤집어 넘겼다. 전란이 일어난 15년전에 머리를 짧게
잘랐다. 벌써 15년인가. 따지고 보면 피 튀기는 살육극의 전장에서 그의 젊음
을 모두 내세웠다. 이제 조금 후면 끝날거라고, 조심스레 종전을 꿈꾸며 찾아든
사람들의 순박한 소망은 안타깝게도 15년이나 연연하고 있었다. 허나 그는
어떻게든 미친듯이 싸운다. 돌아올 복수를 위해 연신 칼을 들이밀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행하진 않았었다. 그에겐 한껏 사랑해 준다 자부할 수 있는 아내도,
마냥 귀여워하던 한살박이 딸도 있었다. 언제나 아들에게서 자신감을 앗아갔던
엄한 아비의 설시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채로 분한 입술을 꼬옥 앙다물었던
지난날의 과거도. 아비가 내뿜은 가시 속에서 그를 지켜주었던 어머니 윤씨까지‥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복한 일상이었다. 그래, 모든 게 다 기억난다.
너무도 생생히 살아있는 기억은 세월이 잊혀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잊지 않으려 한 것인 지도 몰랐다. 소중했던 기억마저 없어진다면 그를 지탱해
줄 힘은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 기억난다. 그의 직속부관이자, 절친한 벗 일우
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
찰싹, 손끝이 왔다간 소리는 매웠다. 모름지기 양반으로 출세하려면 두가지 길이
있으니 양반이 양반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의거한 것이다. 무반과 문반, 이를 통
틀어 양반이라 하니 문으로 붓대 굴려 먹고 살기는 쉬워도 칼로써 출세키는 한계
가 있어 같은 양반들끼리도 무부놈, 무부놈 하겠다만 호통의 중심인 이곳에선 티끌
의 멸시나 비웃음이라곤 찾을래야 찾아볼 수가 없으니 문벌가로 이름을 떨치진
않았으니 칼로써 이 나라 대 청연을 반석위에 세운, 그야말로 흔들림의 조짐조차
없는 세력이라 할 것이다. 열다섯 남짓 될까, 사내답기보다 아름다운 굴곡을 갖춘
것이 예사롭지 않은 사내아이의 뺨이 방금 전 살얼음처럼 알알히 들어박히 던 설시
처럼 붉게 자욱을 만들고 있었다. 분명 아비의 손이건만 그것들은 꼭 저를 조롱이라
도 하듯 호르륵, 깔깔 웃어가며 하얀 뺨에 절로 짙어진다. 사내의 곁에서 표독스런
눈길을 흘리는 또 다른 놈은 뺨이 불거진 채로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 자체를
불신이라도 하듯 그가 호된 설시를 받는 내내 사나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짐짓
시건방진 태도가 그의 심기를 더없이 거스르건만, 영문도 모르고 아들의 해명은 들을
생각조차 않는 것이 어린 마음에 더욱 야속하다. 또 다시 주먹싸움을 했겠거니, 또
다시 상해를 입게 했겠거니. 줄곧 그를 따라온 그의 아비의 유일한 냉정의 연유일
것이다. 하기사, 냉정이랄 것도 없거니와 주먹만이 오직 그를 대신해 주는 존재이
기에 이젠 연유를 묻는 일도, 알아 해명하는 일도 지쳐간다.
고로 침묵은 그의 오랜 벗이다.
"네 놈의 주먹은 동족의 피가 흐르는 사람에게나 휘두르라고 있는 게 아냐!
헌데 넌 어찌하여 번번히 나의 뜻을 거스르고 허튼 일에만 주먹을 쓴단 말이야.
사내의 주먹은 무릇 뜻 있는 곳에 써야만 존경과 신뢰를 얻는 법이다.
너의 주먹이 향할 곳은 오로지 대 청연의 철천지 원수 율국일 뿐,
우리의 대 청연을 넘보는 그들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허니 빌어라.
잘못을 잘못으로 끝내는 것은 치졸하고 부덕한 사람에게나 존재하지.
허니 저 아이에게 용서를 구해."
이제 겨우 열넷의 소년은 요지부동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허튼 자존심을 부릴 것
같은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열넷임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서 풍겨나오는 연치는
열여덟쯤 되어 보일까? 어리다, 어리다 묻어가는 어른들과는 달리 그의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다. 아비와의 오랜 냉전이 낳은 결과라 해도 충분히 믿을 법한 말
이었다. 소년의 엣뗀 가심이 남아있을 순수한 열넷이거늘, 열넷이라기 보다 어른
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해 주위에서 겉늙은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그 와중에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싫은 것은 싫은 것이라 여기는 겐 지 아비 앞
에 무릎을 꿇은 사내아이는 제 자존심인냥 위를 향해 치켜선 눈썹을 쉽사리 꺽
어내리지 않았다. 냉한 분위기는 유독 그들 뿐이 아니었다, 무슨 연유인 지는
모르지만 소년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사내아이, 그리고 곁에 있을 윤씨부인
또한 얼음장같은 분위기에 다그쳐묻는 그 물음을 보고 그저 침묵을 지켜낼 뿐
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언제나 이리 험히 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그의 아비는 분명 소년이 믿는 자신의 선택만큼이나 굳은 가치를
지니고 사는 자였다. 워낙에 전통적인 무관집안이라 엄하게 길러졌다곤 하나,
자칫 겉돌지 않게 보이는 유순함도 때로는 필요한 법이거늘 냉철한 아비는
그를 모르는 듯 아들을 끝끝내 다그칠 뿐, 어떠한 연유도 물어내지 않았다.
"저 자식이 먼저 연희에게 추근덕댔단 말입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사내아이의 자그마한 변명. 변명과 사실이 엇갈린채로
사실을 봉인하기라도 하듯 현실은 그저 잔혹하게 그의 두뺨에 흔연히 상기
되고 있었다. 결코 억울함을 토로하는 기색은 없건만 모진 아비의 손은 다시
한번 추켜졌다. 변명이랄 것도 없었으며 단지 이유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침묵을 떠나 잠시라도 내면 대 내면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통하지 않는 진리에
있어 진실을 헤매일 필요가 없다 여겼기에 침묵했을 뿐이다. 허나 한번 닫힌
마음의 눈은 봉인되어 이젠 눈으로 투과되질 않아. 한번이라도 이들 사이를
둘러싸고 있는 장벽을 거둬 내고 싶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아비의 앞에서
그의 눈치를 보며 침묵해야 할 지를 몰랐고, 마땅히 옳은 것을 했다 여겼기에
그는 틀렸다 생각했다. 열넷이지만 소년은 결코 무력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신의 감응을 받아 태어난 생명이며 시비를 옳게 판단해 낼 수 있는 결코 뒤지지
않는 판단력을 지녔다. 헌데도 아비는 또 한번 다그친다. 검 하나에 최고를 걸
수 있는 사내, 그리고 최고를 얻은 사내. 그의 아들은 훌륭히도 컸건만 미흡
하다거나 미거하다 여기는겐가. 그의 아비 역시 흐름에 따라 검을 쥘 뿐이었다.
아직 비로소야 스스로 뜻을 세울 수 있다는 입지를 반 넘긴 젊은 연치임에도
천하라기 보다 정의는 그의손에 쥐어 있었다. 아비는 자신의 아들을 그리 만들고
싶었을 뿐. 강한 아이로, 그보다 강한 아이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정의를 되물림
하고 싶었다. 머지않아 다가올 전란을 오래된 육감으로 지목해 낼 수 있는 그는
결코 짧지 않을 이번의 전장에서 많은 것을 잃을 지도 몰랐다. 그는 안다, 피의
살육극인 전쟁이 의미하는 것을. 미치광이 정복자들에 의해 일어난 죽음의 초혼
들은 망령하여 갈 곳을 모르는 채로 사방을 울부짖고 젖 빠는 아이의 울음소리
는 잔혹하게도 사방을 망라한다. 그는 알았고,
목숨이 피워내는 불꽃 앞에 그가 태연해지는 법을 가르칠 뿐이었다.
눈물에 지지 말라고.
"그..그만 하십시오. 목연규의 말은 모두가 사실입니다. 제가 채연희에게
추근댁대며 시비를 걸었을 뿐입니다. 허니 잘못은 외려 이놈이 빌어야 합니다."
겨우 그 한마디 말을 하는 사내아이의 눈은 벌써부터 붉어져 있었다.
그에게 진 것은 아니건만 이대로 있다간 그의 아비에게서 느껴지는 눈빛은 남달
랐다. 눈조차 마주하지 못한 채로 잠시 끙끙거리며 지체하던 사내는 어느새
허둥지둥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뺨을 향해 돌진해 오던 두터운
손은 순풍을 만난 듯 잠잠해졌다. 옆에 있던 윤씨가 착잡한 마음을 죽이고 있다
그제야 가까스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 한마디에도 온 몸을 옥죄여 오는 그가 두
려울 뿐이다. 마치 칠흙같은 어둠과 함께하며 그를 회수하기라도 하듯 그의 뜻
은 때때로 애매할 때가 많았다. 허나 그것은 곧 정의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가족은 그리 믿었다. 어찌될 지 모르는 결말 앞에 윤씨는 능란하게도 차분
했다. 이런 일은 능사로 아는 그녀에게도 침묵은 오랜 벗이었다. 허나 아들은 달
랐다. 매번 옥죄어 오는 도타운 호통에 능란할 의지를 잃는다. 사내아이가 아들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야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숨가쁘게 존재하던 침묵이 온통 그
를 따라 나가고 방안엔 겨우 한숨이나마 내쉴 수 있는 여유가 들인다.
항상 이럴때면 '어미는 믿는다'며 기분을 달래어 주는 윤씨는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토록 좋지 못한 기분에 시달릴 때면 그는 누군가 마음속
위안이 될 사람을 찾게 된다. 절로 떠올린다. 그의 주먹에 나가떨어진 사내는
댓가는 치루었을망정, 자신 때문에 그을려진 빨간 손자국을 어떻게 해 볼 생각도
않은채로 그대로 나가버리는 그에게 조금의 미안함은 있었는 지 편치 못한 표정
이다. 사내의 주먹에 나가떨어졌을망정 멋있는 아이라 생각했다. 소년 역시 열다
섯 남짓 되어보일까? 씨익 웃는 통에 아직 다 빠지지 않은 새하얀 젖니가 환하
게도 드리운다. 다만 그와 자신 사이를 갈라놓는 한 획이 있을 뿐.
그는 당당한 사족의 신분인 양반인데 비해 자신은 일개 양인일 뿐, 그뿐이다.
드높인 눈썹이 소년의 앙칼진 자존심인냥 치켜섰다, 다시 누그러 들었다.
어쩌면 그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저도 몰래 떠올라
익숙치 않은 일에 머리는 자꾸만 자제라는 경고의 메세지를 떠올린다.
허나 '반드시'라는 단어가 우연찮게 들어오는 게 피치 못할 연이라는 게 저도
몰래 상기된다. 목연규. 소년의 이름은 목연규.
"오라버니, 소녀 때문에 괜한 일을 하셨습니다. 밖에서 다 듣자하니 병판대감의
호통이 오죽 커 소녀가 다 무안할 정도였습니다.. 뺨까지 맞으시던걸요?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연희야, 넌 누가 뭐래도 내 정혼자야. 어짜피 그 녀석을 흠씬 패 줄때
아버님께 맞을 뺨 한대쯤은 감내하고 있었다. 허니 자책마라, 아버지와 나
사이엔 건너 넘을 수 없는 획이 그어져 있다. 그로인해 나도, 아버지도 이를
다가서지 못해. 익숙하다. 아비에게 뺨을 맞고, 또 변명의 여지도 없이 호된
설시를 받는것 쯤은."
그렁그렁해 금방이라도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은 연희의 눈을 연규가 새삼스레
닦아준다. 그녀로 인해 아비에게 뺨을 맞고, 어떤 위로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거늘 열넷의 어린 소년에게도 사랑해야 할 여인은 있던 모양이다.
그 수모는 언제 있었냐는 듯 쌉싸름한 그늘을 떨치고 금방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웃음을 자아낼 줄 아는 사내. 열넷에도 지켜줄 이는 있다 여겼다. 이제 겨우
열넷의 연희는 자타가 구분해 놓은 소녀와 처녀의 선에서 막 소녀의
동티를 씻은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씀이 갸륵하고 얼굴이 고와
한눈에 당자의 마음을 흠뻑 빼어들었을 아이, 아주 어린 아이적부터 이미 혼담이
오가 혼인을 조금 앞둔 정혼의 연으로 맺어졌다. 전통적인 무신집안,
병조판서 목시진의 자제와 명필가 채 필의 여식의 정혼은 문무를 서로 대표하는
가문으로 어긋남 없이 순탄히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처음의 연을 마다치 않고
실려온 운명을 담담히 가슴에 맡긴 그의 몫이 컸다. 겨우 7살, 무엇이 아름
답고 무엇이 어두우며 희비가 교차하는 세상, 두렵고도 두려운 연에 의문을
던질 나이이건만 쓸려온 연을 소중히 여겨 그는 처음 대하는, 흡사 두려움에
큰 눈망울을 잔뜩 움츠렸을 지 도 모르는 여섯살 꼬마아이의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어 줄 줄도 알았다. 워낙에 율국의 침략이 빈번한지라 그들이 약탈을
할때면 언제나 여인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노소를 불문하며 그저 계집이라면
일단 낚아채고 보는 야인놈들은 아직 어린 그들의 눈에 남아있을 기억으론
차마 잔혹함을 이루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일찍부터 조혼이 성행해
열살도 채 안된 어린아이들마저 저마다의 운명을 각기 달리하며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할 자그마한 머리에 족두리며 비녀며 납득되지 않는 생소한 삶으로
이제 여인이라며 한 사내에게로 떠나갔다. 따지고 보면 다른 이들이 초례청에서
붉은 홍조를 물들이며 화합주를 마실 때 갓 순수함으로 정혼을 맺었다.
열넷이면 한 아이의 부모가 될 법한 나이, 늦을만한 나이이지만 아이는 아이
일 뿐, 여인은 나름대로 제법 여인의 몸을, 사내는 사내의 몸으로 만들기
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정혼자를 애지중지하면서도 결코 조급해
지 않았던 그로 인해 혼인은 이태까지 늦춰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의 이름 하나에 뺨에 맞은 얼룩을 지운다. 너로 인해
뺨을 맞는다면 백번 천번 맞아도 어찌 토를 달겠느냐.
아직도 호혹 거리는 소녀를 예고조차 주지 않은채로 와락 안아버렸다.
속삭이듯 지그시 감은 눈에 음성을 더하여 담긴 그녀의 눈에 하늘거리듯
의지한 소년은 어린아이마냥 그리 속삭였다.
"이번 무과만 급제하면 아버님께 너와 혼례를 올릴 것이라 청할 것이다.
너와 정혼을 올릴 아주 어린때부터 너는 이미 내 여인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어라. 사랑한다 연희야."
고동치는 심장의 요분질이 절묘하게도 소녀의 가슴에도 전이되어 온다.
황홀함은 소년보다 소녀에게 더하였을 것이다. 가끔가다 안아주는 일이 적
잖게 있었다만 이번엔 그리 미루어 오던 혼사에 종지부를 내던진 그의 다짐이
고맙고도 고마울 따름. 그의 말대로 그는 요즘 현실에 맞지 않게 어느새 성큼
다가와 버린 무과시험의 촉박함에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다.
본래 해 오던 것인지라 무리는 없었다만 언제나 체워지지 않은 부족함이
그를 감싸고 조롱하듯 흘기며 스쳐갔다. 그가 칼의 향연에 그리 맹연습을
거듭하는 연유는 결코 그곳에만 있지 않으리. 물론 작은 뜻으론 돌아오는
초파일에 이행하는 무과에 급제하여야만 오랜시간 갈망해 오던 그녀와의 혼사
를 서두를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크게는 육지에서 맞아온 숱한 적들
을 베며 굳은 신념하나로 칼 하나에 모든 것을 건 목시진의 아들,
그의 아들로써 그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움에 둘러쌓여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보지 못하려 노력하였을 뿐.
허나 언제고 마음 속에 환하게 만개하였던 진실을 보던 눈은 잊지 않고 고맙
게도 진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것을 향해 마음속 해포를 모두 풀어버리겠다
했었다. 다만 상황에 치달아 머나먼 장벽을 넘어 이를 알게 해 준
진실이 고마웠다. 소녀를 따스히 안아세우던 손길이 느슨히 풀어짐과
동시에 벌건 손자욱이 잇닿아 발갛게 달아오른 소년이,
땀에 젖은 머릿결을 슬쩍 바람결에 떠밀며 맞닿은 가슴에 거리를 두었다.
연모의 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눈치없이 스산히, 혹은 느슨히 불어닥치던
바람이 일순간 경직한 채로 그들 옆에 멈추었다. 유순한 바람은 결코 거칠지
않아 정오 주먹싸움을 다툰 그에겐 더없이 좋은 바람이었겠다만 바람결이
부대낀 감싸안은 그들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시리었다.
지어보인 웃음과 함께 연희의 볼이 장난스레 쭈욱 늘어났다.
상기된 뺨자욱은 벌써 하얀 멍으로 사라져 버린겐지 소년은 장차 부인이 될
어린 신부의 몸을 아끼며 소중히 다루었다. 풍요롭고도 흐드러지게 만발한
하늘위 구름이 엄한 눈초리로 그들을 감시하는 듯 하지만 그런 눈짓 따윈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소녀의 뽀얗게 올라 채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을
어루만지듯 꾸짖고 그리 돌려보냈다. 금새 기분이 좋아진 그의 입에선
콧노래가 연신 습관처럼 이어내렸다. 능란하게도 목검을 휘두르며 위협
적으로 혈자리마저 척척 집어내는 그를 칭찬해주던 스승은 이제 없다.
걸음마를 뗄 적부터 이미 그의 손엔 단도가 쥐어 있었다. 다섯살 쯤이었을
까. 마냥 어린 것에게 다짜고짜 단검을 쓰는 법을 알아오라며 혹여나
날카로운 칼의 공격에 상처를 입을 지 등의 불상사는 떠올리지도 않은 채로
그저 알아오라 했다. 모른다 고개를 가로저었을 때엔 급기야 손에 매를 대며
어린것의 눈에 눈물을 보게 하였다. 그날 밤 아이는 온몸이 풀덩쿨에 마구
할퀴운 채로 한손에 자그마한 토끼를, 또 한손엔 어린 생물의 몸에 깊은 상흔
을 남기었을 피마저 앗아간 생명이 숨쉬던 단도를 쥐고 돌아왔다.
생명을 앗았을 때 이미 그의 칼은 죽어 있었다. 생명이 더 이상 그 안에
자각하지 못한다. 그날 밤 소년의 몸은 할퀴운 상처의 곱절에 되는
멍을 남기고 잠들었다. 그때부터다, 그를 아비가 아닌 자신의 세뇌를
지켜보는 무언의 존재라고 여긴 건.
그날 밤, 밤새도록 토끼를 쫓아 뛰며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져 끙끙대며
발발거리던 생명을 절규도 없이 해하였다.
여섯살 때는 활과 목검 다루는 법을 배웠다. 열살 때 병법과 기마술을
배웠다. 열세살‥ 열네살, 그리고 열다섯.
아비의 명으로 가르침에서 스스로 연마함을 터득하게 하고 중도하차하게
된 스승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생 최대의 오점을 남겼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칼을 써야 하지만 칼을 쓰지 않고 그들을 베는 것.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그 가르침은 어느새 그의 최고의 가치이자, 칼끝이 겨누어지는 곳이
결코 생명은 아니기를, 칼이 절로 멈추기를 원한 채 그에게 잔혹한
가르침을 남긴채로 각인되었다. 그는 그 가르침이 어느 정도 터득되었다
여기며 따분한 지 무의식 중으로 목검을 휘휘 돌리고 있었다. 목검 따위야
진작에 깨우쳤거늘, 무술을 터득한 지도 벌써 9년인 데 어렸을 적,
단도에 어린 생명의 피를 묻히고 온후론 줄곧 진검은 구경도 못한 채 목검만
죽어라 연마하였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진검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거늘
진검은 커녕 단도 하나 쥐어주지 않는 아비가 야속할 따름이다.
허튼 생각을 품을 리 없는 아비를 믿고 또 다시 새겨져 올 가르침을
기다리고 있다. 안다, 그가 틀리질 않았다는 걸. 허나 과거가 다가올수록
진검으로만 맹훈련에 돌입한 다른 그들이 부러울 뿐이다. 목검과 진검,
결국은 청동칼과 나무. 결과는 너무 뻔하질 않은가.
목검만으로만 따지자면 승패는 겨루어 보지도 않고 끝날 것이다.
허나 꼭 한번 진검을 쥐고 싶다. 절로 내쉰 한숨에 듣는 이가 있을 줄은
몰랐는 지 목검을 부러뜨릴 요량인 지 장난삼아 손에 힘을 주었다.
이내 빠각하고 두동강이 나 절로 떨어지는 목검. 목검은 아니다.
"대련할 자가 없어 그리 기고만장이냐?"
무턱대고 모습을 드러내는 태도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그의 표정은 충분히 그래 보였다.
빠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 만한 양인출신의 나일우다. 방금전엔
그와 주먹싸움을 벌인 탓에 뺨을 흠씬 맞아 돌아왔지만 아비의 탁한 음성,
언제나 같은 말만 풀이 해올 입을 아는 그는 갑갑한 방을 빠져나와
미안하단 한마디 말 들을 차도 없이 바쁘게 연희를 마주하였다.
마주하기는 불편하지 않은겐지 아니면 일몰의 양심도 들어있지 않은
뻔뻔함인 지 능글맞게 바라보는 미소가 조롱인 지, 낯익은 대면의
인사인 지 도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그들이 정혼자이며 머잖아
혼례를 올릴 것이란 건 장안의 누구라도 다 알 만한 사실이었다.
최고의 무신과 최고의 명필가 그들의 자제, 누가 보아도 부족함없는
선남선녀로써 행실마저 바르고 곧아 주위 사람들의 축복을 받아 마지
않았다. 양인 출신으로써 아니될 걸 알면서 양반을 희롱하고 싶었다.
날때부터 왕후장상의 씨가 주어진 이 나라 청연의 분풀이를 아무곳이나
폭로하고 싶었다. 다짜고짜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고의적으로 그의 멱살을 먼저 들어 올렸다.
뒤늦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연희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덩달아
허공에 주먹의 고함을 내지르는 그의 손을 저지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을 그칠 요량이었다. 여러번의 말로 들었을
것을 금새 잊는 일은 어렸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 여겼기에 가르침을
중시하기로 하였다. 허나 헛된 주먹을 내두르게 된 결정적 요인은 결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까짓 몸이야 사내일 뿐이니 흉터로 얼룩져도
무방하고 아무는 데도 무디나 여인에게까지 손을 뻗치는 것은 치졸하다
여겼다. 눈을 꼬옥 감고 그만하라 소리를 빼액 질러대는 어린 소녀를
훑어보더니 별안간 내뱉던 말. 정의를 생각할 가치도 없이
내리꽂은 주먹이었다.
"채연희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건가? 웃음 한번 흐드러지게 값 치는
계집이군. 이봐, 목연규 말고 나는 어때? 양인이라고 깔보지 마.
적어도 저 비리비리한 녀석보단 나을테니까. 돈을 줄테니
한번 웃어볼래? 양반들은 돈이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하더군.
이 말 말이야."
괴이하게도 그의 목에선 정녕 아까의 그 기분나쁜 음성이 똑같이도
세어나왔다. 한번 찌푸려진 미간이 펴질 줄은 모르고 더더욱 깊게 자리
메김하며 나쁜 기운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두 동강이 내진 목검의 파편
중 하나를 집어들고 천천히 그의 목에 겨누었다. 그의 음산한 음성
이 이리 말하고 있었다.
"죽고 싶으냐."
그의 음성은 차분히 가라앉힌 채 침묵마저 놀래켜 달아나게 만들었다.
입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던 말이 유독 이 사내의 앞에선 서슴치 않고 불쑥
나오는 연유는 아무래도 연희와 연루되어 있는 까닭인가 싶다. 목검 따위
로 무얼 하겠느냐는 듯 괘씸하게도 하늘을 향해 치아를 다 드러내면서
호탕히 웃는 의중이 꼭 대놓고 철저히 무시를 하는 것이 뻔하다. 허나 결
코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 비록 목검일지라도 그 일이 아닌 이상 더 이상
그와 목숨을 대립하는 일을 행하고 싶지 않았다. 절로 밀려드는 한심한
후회가 목검을 쥐어들었던 그의 손을 무디게 만들었다. 마땅히 간 줄만
알았지, 지금까지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짐짓 불쾌하고도 불쾌한
느낌이다. 마음에 왠지 모를 고통이 가득 차 있는 느낌과 동시에 갑갑한
느낌마저 옥죄어 오자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사내를 철저히 외면한 채로
제 내실로 들어서려 했다. 이런 기분일 바에야 차라리 병법서나 외는
것이 낫다 판단하였다. 몸보다 마음이 한기를 띄울 땐, 그저 만사
제쳐두고 편히 쉬는 것이 상책이라 오래도록 그리 알아왔다. 물론 아비인
병판 목시진과는 조금 다른 견해이겠으나 그는 마음에서부터 오는 평온이
몸보다 더 크다 믿었다. 탁, 뒤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의도적인 묵직한
무언가가 제법 둔탁한 소리로 와닿으며 떨어지는 것이 꼭 맨 흙바닥에
세상일을 접어두고 낙향하는 냥 하다. 둔탁한 소리에 의문을 가진 그가
눈길을 돌려 등을 치고 그대로 자지러지듯 낙향해 버린 무언가의 실체를
찾아 초점을 맞춘다. 칼, 칼이다. 오래도록 만져 보지 못했던.
시퍼런 서슬을 표하며 칼집에서 칼을 뽑을 적에 나는 채앵하는 소리엔
서늘함이 띄었다. 마주본 그에게도 칼은 있었다.
"너에게 어울릴 듯 해 선물하는 것이다. 명색히 병판대감의 자제로
목검만 휘두르는 건 채신에 맞지 않아. 이것으로 너와 한번
겨루어 보고 싶다."
어울리지 않을 듯한 말이 제법 사내의 입에 맞닿아 떨어진다. 그는 소년
이 청해온 것을 흔쾌 받아들였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대련을 청해온
것이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사람을 보는 눈에 능통하진
않다만 뒤끝이 없고 늦게나마 이리 찾아온 것도 어쩌면 그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점이라 여겼을 지도 모른다. 미간이 찌푸려 질 만한
뚜렷한 이유가 없었고 모처럼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선물로 받은 그의
표정은 내심 환하였다. 칼은 서로의 목에 겨누어 질 게 못된다 여겨
다시금 목검을 택한 그의 선택은 한사코 옳았다. 진검 대신 줄곧
목검만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그의 곁에 친한 것은 날카로운 칼이 아닌
둔탁한 소리만 느낄 뿐, 실상 앗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울뿐인 칼 목검일 뿐이었다. 두 사내가 마주한 채로 손에
목검을 쥐었다.
그는 언제까지고 단호했다. 귓전을 맴도는 날카로운 칼의 울림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로 냉정을 잃지 않았다. 단호했고, 앞으로도 더욱이
단호해 질 수 있다. 이것이 정의이다. 칼을 마주한 자는 결코 자만하지
않아 비웃음을 흘리지 않는다. 언제라도 그 칼이 향할 곳은 자신의
심장부가 될 것을 알고 있다. 적이 이기는 방법은 나에게,
내가 이기는 방법 또한 적에게 달려있기에 속전속결을 원하려거든,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만 했다. 모두가 일리있는 말이다.
칼 앞에 이토록 희열을 표할 수 있던 것을 그토록 연금하여 둔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끊임없이 물을 것이다. 피를 보지 않고 적을
철저히 봉인할 수 있겠느냐고. 허나 그것은 모순이다.
보이지 않는 적에게 피를 묻히지 않고 베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단지 대련에 진검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목검으로도 얼마든지
겨룰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대결을 굳이 펼쳐야
하는 이유를 물을 생각일랑은 애초에 없었다. 연유는 마음한켠
에 고이 접어둔 지 오래, 그들에겐 서로를 알아보는 탐색전이 필요했을
뿐이고 절실했던 대련자를 새삼 만난 것 뿐이었다.
목에 겨누어 질 칼은 아니라 생각했다. 동족의 심장에 칼을 겨눈다면
후일, 대장군이 되어 천하를 호령한들 누가 그를 알아줄까.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사명감이 그의 목덜미에 파고든다.
살려야 한다, 적은 베어야 할 것이고 같은 피의 동족은
살려두어야 한다. 그것이 후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 크나큰 밑천이
될 수 있음을 쉽사리 잊진 않겠다. 마침내 탐색을 마친 그가 먼저
칼을 빼어들었다. 크나큰 기합이 으리으리한 저택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천하에 떨칠 용맹이다. 나일우 역시 칼을 빼어들었다.
챙챙챙, 끊임없이 그 부딪힘을 구하며 피워내는 앙칼진 애원은
그들의 귀를 멀어버리게 한다. 그들의 눈을 지워버린다.
대련에 앞서 그들은 하나의 적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누군가
하나를 무릎 꿇혀야만 승부가 결정나는 승부에서 먼저의 끝이란 없었다.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지독히도 무섭게도 오로지 칼에게만 달려 있을 뿐
이었다. 칼의 접전은 쉽사리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어쩌면 그리 출중할련지, 어느새 무술을 다툰 그들
의 몸은 더운 땀으로 범벅되었다. 바람이 쓸어내리려 하지만 어느것도
그들의 칼에 대한 열정을 뿌리칠 수는 없을 것이라.
제법 격렬한 투쟁이 당자들의 마음을 흠뻑 졸이게 했을 것이다.
챙, 채앵, 온전히 칼만으론 이길 수 없는 상대이던가.
절대 이것이 실전이 아니라 생각치 않는다. 이것은 오로지 실전,
실전이다. 삽십간에 퍼져버린 생각이 연규를 더욱 긴장하게 한다.
연규가 발을 쓰면 그 역시 발을 썼고, 연규가 재주를 넘으면 그 역시
재주를 넘는다. 끊이지 않는 접전에 긴장이 서려 두려움이라곤 한사코
없는 그들의 손에도 땀을 쥐게 한다. 긴장한 칼의 칼바람이 헛손질로
이어지면서 잠시 주춤하였지만 이내 그는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와 일우의 칼이 맞대어져 서로 하나를 쓰러뜨리려 할 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독히도 물 오른 힘을 빼 버렸다. 힘을 빼 버리며
그들은 동시에 뒤로 물러나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상황이라면
누구 하나만 힘을 더 주었어도 쉽사리 상대의 칼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승리에 도취되지 않은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라, 누구든 참혹한 패배에 무
릎 꿇고 말지. 의아함이 가득한 눈초리로 연규가 물었다.
"너.. 왜 힘을 주지 않았지?"
"너야말로."
날카로우나 진정 의문을 찾고자 하는 되받음이었다. 반문된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사건을 풀 실마리를 제공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끙끙
대며 이유를 찾고자 할 때, 연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로 그것이 그가 내린 정의였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내 반드시 널 베고야 말 것이나 나의 칼이
향할 곳은 네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언제나 적군을 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다운 대답이었다. 허나 나일우는 조금 달랐다. 문득 털썩 주저앉아
바라본 하늘은 재 접전을 펼친 후에 평온함을 과시하듯 짐짓 차갑고
아늑했다. 청연의 보랏빛 석양은 참으로 아름다워라, 이글거리는 태양이
저 산 속으로 잡혀 넘어갈 때에 비명을 지르는 듯만 하여 눈이 적잖게
따가웠다. 좀처럼 명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일우가 조금이나마
홀가분해 진 마음으로 말했다. 일우는 그처럼 어려운 말을 할 줄 몰랐다.
그저 워낙에 무예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아이인데다가 그 부모는 성실하여
제법 살뜰히도 가산을 메웠으나 그의 마음은 한치도 가업이나 가산에 있질
않았다. 그가 오로지 매진하는 것은 칼을 차고 천하를 탁월한 칼의 분노 아래
무릎 꿇히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히 미쳐야 했다. 양인 주제에 그런
것은 배워 무엇하느냐 눈물어린 어미의 책망은 쉽사리 그의 발을 놓아주질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 지 모르는 총탄같은
아들 앞에 어미는 그저 눈물을 탕진했을 뿐이다. 허나 그 누구도 칼에 대한
이 내 열정을 꺽진 못했으리. 자칫하다 하나뿐인 아들이 허망의 수렁에
빠진다거나 혹은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의 불을 추켜 올린다거나
한다면 그들의 아들은 이미 더없이 아래일 곳도 없는 곳으로 추락하게 될 것
이다. 안다, 어미는 안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라며 언제나 반대의
편에 서던 어미, 한번쯤 부조리한 현실의 맛에 매혹되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인것을 끝까지 불의란 놈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아비, 그리고 칼만을 사랑한
진정한 무도를 지닌 소년. 희망은 없다. 신분이 그리 호락호락한가,
날때부터 정해진 운명은 불행하게도 평생을 좌우하던 것이었다. 허나 소년은
믿지 않는다. 귀하게 되려 한다면 그 귀함의 열쇠는 모두 자신의 두 손에 쥐
어져 있다는 걸. 정의는 믿지 않아. 다만, 기꺼이 가까이 서고 싶었던
마음 뿐이다. 정의를 믿는 네 앞에.
"연유? 없다. 너와 친해지고 싶었다. 나 역시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너를 베고야 말 것이다. 허나 이런 시시콜콜한 장난에 사람 목숨을 거는 건
너무 무모하잖아? 너와 친해지고 싶다.
물론, 진심으로 사과하는 뜻도 함께 겸해 있다."
사내의 눈은 결코 거짓되어 보이지 않았다. 머쩍기라기보다는 너무도 진지한
그 눈빛의 애원을 쉽사리 뿌리칠 자는 비단 그 뿐만 아니라도 흔치는 않았을
것이리라. 정오의 일은 아직도 삭여지지 않은 울분이었다, 울분이라기보다
또 다시 그리 치부하는 아비의 가치, 삐뚤어진 눈으로 바라보는 인식이나마
되찾고 싶었다. 아비에겐 정이 없는 것을 안다. 한번도 아들의 편에 선 적
없는 아비의 호통은 언제나 날카롭고 앙칼졌다. 그 순간 그는 이미 무력한
소인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아비에게 믿음을 얻고 싶었다. 이토록 안에선
엄한 자가, 진실을 운운하는 것조차도 꺼리는 자가 밖에서 사람들의 신망을
도탑게 업으며 항상 정의 위에 서 그들을 휘하에 들 수 있는 지 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거짓과도 같은 꿈을 꾸며 진정으로 한번쯤 바라였을
것이다. 설령 눈을 보지 않고 거짓으로 말한들 입에 발린 말에라도 위안을
얻고자 했다. 그리 하지 않으면 복받히는 감정을 짓이기지 못해 사무쳐
버릴 것만 같아 두렵고도 두려울 뿐이다. 그에게서 내려쳐지는 호된 설시는
더 이상 잘하란 뜻의 질긴 채찍질에 가담치 않는다. 설시 이상으로 자신감
마저 앗아버리는 냉랭한 언사는 그의 몸과 마음만을 혹사시킬 뿐이다.
해서 아비 앞에선 늘상 자신이 없다. 상찬 따윈 마음 한곳에 고이 접어둔
지 오래, 그나마 안식처는 정혼자인 연희 뿐이었다. 아비의 눈을 피해
달밤에 몰래 만난 일이 있었다. 그의 꾸중은 도를 넘어서 다분히 설시
뿐만 아니라도 아들의 얼굴에 순순히 쓰라린 실패감마저 그릴 수 있는
손찌검도 마다치 않았다. 아비에게서 느낀 배신감이 그토록 컸기에 아비의
말대로 한동안은 쓸데없이 헛주먹질을 하고 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 날도
시정의 무뢰배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된통 싸움판을 벌이다 구경꾼 중
하나가 쪼르르 주둥이를 나불대는 바람에 아비의 앞에서 꽤 반항적인 침묵을
머금은 채로 무릎을 꿇은 일이 있었다.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다가도
그 날은 유난히도 응어리가 많이 지던 날이었다. 품에 안은채로 옷깃을
꽈악 움켜쥐던 날, 연희를 부드럽게 이끌던 목연규는 이미 그가 아닌 듯 하였
다. 얼굴 가득 메운 흉터, 달바람의 장난에 흐트러지는 머릿결, 고로 모든
상처들이 어둠 속에서 온순히 길들여지길 원했다. 허나 잔혹한 달은
상처입은 인간의 윤곽을 더욱 선명히 내비출 뿐, 순순히 숨겨주지 못했다.
그때마다 연희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잘 될거예요. 믿음직스러워요. 당신 곁에는 항상 제가 있을게요.
어려울 때 말씀하세요. 도울게요. 속상해하지 말아요.
그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요. 저는 알잖아요, 오라버니.."
그말이 예나 지금이나 그를 지탱해지는 버팀목이 되어줄 위안의 말이라곤
한치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리지만 귀여운 연인 연희는 세상의 모든
이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이 사내야말로 최고로 강한 사내라 줄곧 생각하곤
했었다. 허나 자신의 품에 고꾸라지듯 맥없이 스륵 안겨버린 그는 이번만은
자신이 아닌 그녀가 먼저 안아주길 원하는 듯 선잠 어린 부스스한 음성으로
힘없이 말하였다. '나 좀 안아줘, 연희야.' ‥그의 얼토당토 않은 말에 연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린 연인은 거부없이 고분고분히 그의 청을
받아들이려 했건만 그녀의 팔을 옥죈 건 다름아닌 그였다.
엉겁결에 그의 혹사한 어깨위에 어둠이 보채며 박차를 가하는 듯 했다.
때아닌 어깨의 통증이 어디에서 왔는가, 시정의 무뢰배에게 주먹을 휘두를 때
의 기억이 풋풋히 더듬어진다. 어렵게 속마음을 내비춘 사내는 상처받은 마음
에 위안을 받고자했고 예상대로 그 열쇠는 연희에게 쥐어져 있었다.
이미 충족할만한 위안을 받은 그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그 입술에 입맞춤을 하였다. 단순한 입맞춤이건만, 파르르 떨리는 듯 지그시
감은 눈은 절로 감기었다. 연희는 어렵사리 말했었다. 어서 바삐 혼인하여
그의 부인이 되고 싶다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짜피 아비의 호통쯤은
언제든 감내해야만 했고, 잇닿아 절로 떠올린 사랑스러운 연희는 죄가 없었다.
"좋다, 나일우. 네 제안을 받아 들이겠다. 하지만 다시 한번 연희에게 껄쩍대면
결코 용서치 않을거다."
단단히 한 마디 맺음말로써 그가 먼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제안은 저가
먼저 한 것이거늘 상황이 뒤바뀐 듯 하다. 당혹스러운 김에 떨떠름한 표정이
얼핏 서려 소년은 능란하지 못한채로 내민 손을 잡았다. 이젠 벗이리라,
새삼스레 천명하는 이 말이 마냥 좋은 것은 강인한 듯 하지만 아직 소년이라는
건 애써 부정치 못한 엣된날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대련을 마치고 흐르는
비지땀은 구슬프게도 뚜욱뚜욱 떨어지며 온 몸을 뜨겁게 적시운다. 확 끼쳐오르
는 더운 기운을 식히고자 풀밭에 드러누운 두 소년의 옷깃을 훅 지나가는
바람이 신나게도 뒤흔들며 온기를 조금의 냉랭함이나마 있는 한기로 전환시켜
준다. 풀밭 내음새가 옷깃에 베어들어 제법 상쾌한 기운을 끼쳐 오름에 잠시
뒤척이는 소년의 머릿빛 또한 초록인냥 착시를 일으켰다. 피곤에 지친 아이들
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곧잘 잠들었고, 다가오는 여름날의 감내라도 하듯
날은 이미 주야장천 밝건만 풀밭 내음새가 아닌 보랏빛의 찬란한 석양이 옷깃
에 적셔 들었음이다. 모순이긴 하나, 그깟 모순쯤이야 이미 칼을 쓸 줄 알고,
몸마저 훌쩍 커버린 그들에게야 쉽게 투과될 뿐이었다. 오랫만에 흠씬 재대로
된 대련을 한 그가 일우의 어깨에 급작스레 손을 올려놓으며 어깨동무를 하였
다. 한편으로 든 진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듯 그의 시선은 연신 진검을
향해 있었을 뿐, 그에게 있지 않았다. 드디어 진검을 쥐었다, 관심이 쏠리는
곳은 오로지 한 가지, 마냥 기뻐하는 그가 고마울 따름이다. 해를 따라
헤어짐을 고한 그들이 해가 뜨는 날 머잖아 볼 것을 기약하며 사라졌다.
무사가 되고‥
의인이 되고
그리하여 저들 앞에 서고.
목숨이 지나간 자리, 피와 살이 머문 전장.
흐르지 않는 중심.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이겨야 한다.
후우, 이거 쓰느라 정말 힘들었어용. 제가 이제부터 쓰는 소설은 모두
단편으로 이루어 질 것이며 비루는 15편내지 20편을 완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와우, 정말 길었어. ... 눈이 아퍼.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보는 게 이렇게 힘든 건, 이 긴 글을 보는 이번이 처음이야. 우와, 보는 우리도 힘들었지만. 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지. 와아, 정말 대단해. 이게 정말 언니가 쓴 글이라니, 정말 동생으로써는 언니가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
하게만 느껴질 뿐이야. 언니는 정말 대단해, 정말. 이걸 처음에 보면서, 회상 전이라고 해야할까. 그래 그 전에는 정말 슬퍼서 눈물이 약간 고였어. 모든 걸 잃어버리고, 오직 복수. 죽이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자신의 못난 몸을, 목숨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너무 가여웠다고나 할까. 언젠가 이 말을 본 적이 있어. 이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복수는 '용서' 라고 하더군. 오직 살인. 그래 복수라는 허울 좋은 명목인 살인을 위해 살아가는 저들이 가여워서 그냥 눈물이 좀 났어. 헤헤, 정말 언니, 잘 썼고. 15-20편 밖에 되지 않는다니, 아쉬운 마음이 정말 커. 어쨌든 좀 슬퍼.ㅜ_ㅜ 에에, 그리고 다음 편 기대할게. 사랑하고 언제나 건필♡
정말 꼬릿말 다는 것도 힘들텐데, 이렇게 매번 부탁할때마다 달아주는 우리 별빛이 오히려 내가 고마워, 너한테 했던 약속은 꼭 지킬게! 고마워, 별아♥
코멘 쓰는 건 정말 할 말이 .. 남아돌지 모지라지는 않아, 언니. ..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러니까 글 쓰면 빨리 말해. 말 안하면, 나 몰라.=_= <
흐아. 정말 길다. ...길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니가 참 존경스럽구나. 묘사 하나하나가 (-_-) 마치 살아 날뛰는 토끼처럼 생생하고.. 애절하기도 하고. 이런 글을 본게 기타방에선 상당히 오랜만이네. 잘 보고 가고.. 너도 나처럼 단편 전문으로 할 생각이구나. 잘 생각했어. 아무튼 정말 건필이다!! -ㅂ-
단편 전문 ㅜㅜ 푸항, 그러게; 어느새 그렇게 됐네. 장편은 이제 못 쓰겠더라공 귀찮아서. 으휴 달아도 볼게 ! 고마워 갈비♥
이 엄청난 길이.. 우와 ㅜ 대단해 ㅜd/ 이런 - - 15에서 20편으로 끝난다니...ㅠ..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무진장기대할게 > <* 연희, 연규.. 이쁜 이름이야 ㅠ 다음편 기대하고 있을게!!! 읽느라 눈이 아플정도로 대단한 한편이였어 ㅠd. 건필이야, 언니 ♡!!!
대단한 한편; 과찬이구나. 유수나 어여 들고와 'ㅂ'
헉헉 - - 이거 읽는데 얼마나 힘들던지 ;; 이제 단편으로 가는거야 ? 길이가...대단해 정말 히히; 별이언니 말처럼 눈이 아프다는.... [!] 히히 아무튼 단편이던 장편이던 열심히 써 '0' 화이팅 히히 ㅇ_ㅇ 아아 말 안한게 있는데 나나 따랑비a 히히 닉넴 바꿧어 히히 '0'
응응 ㅇ_ㅇ 비야 고마워 ㅋㅋ
토토끼끼=.,=*...제길.2편은내가1빠야.죽어도1빠야...연규나줄꺼라고생각해.내가데려갈테닌까;ㅅ;소설끝나는데로.../빨리등업되서같이소설쓰고싶으엉;ㅅ;..아.계속딴소리로샌다.음..확실히단편이라는게무척이나아쉽고화가(?)나긴하지만작가가단편이란걸어떻게하겠어;ㅅ;* 초혼의 황폐함..이라.
'죽고싶으냐'..이 한마디 때문에 내가 순간 멈칫한거 알아=_=* 분위기가 무지 좋은데, 장편해 장편!!!!!!
장편......... 끄억, 절대 싫엉. 넌 어서어서 ㅜㅜ등업이나 되려무나
잘 읽었어요,토끼 언니. 단편으로 이루어 질거라면서,한편이 이렇게 길면 사실상 15편 내지 20편을 쓴다 해도 장편이 될 것 같은데... 헤헷. 으음,그러니까.. 묘사부분이 너무 붙어있어서 눈이 조금 아픈데,조금만 더 떼어주면 안될까요? 물론 이 상태로도 읽을 수는 있지만,헤헷. 이래놓고 보니까 장르작가가 되었다는 게
조금 부끄럽네.. 내용도 정말 좋았고,묘사부분도 좋았으니까,딱 한가지! 문장 사이를 조금만 더 넓혀줘요,토끼언니~! ^-^ 아앗,그러면 스크롤바가 또 늘어나려나.. 헤헷. 길면서도 딱 적당한 곳에서 끊은 게 좋았어요. 앗,이런 말투 쓰지 말라고 했는데,습관이 되어버려서 또 이러네.. ㅠ ㅜ 설정들이 좋았어요,토끼언니.
여기서 연재시작했구나. 몰라버렸어............미안해/ 늦게 봤어.
괜찮아 ㅋㅋ
쪼금만 엔터좀 눌러주세여///너무 길어용
아 이번엔 행간을 거의 없이 하려고 결심한 터라; 예 ㅜ^ㅜ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