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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혁신가 아돌프-근대전쟁의 아버지?
군사혁신가로서 구스타프 아돌프의 면모는 여러 매체와 대중 역사서 등을 통해서 오래도록 찬사를 받아왔다. 그 흔적은 지금도 모 위키의 해당항목으로 가면 상당히 오글거리는 볼드체로 쓰여있는 것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스타프 이미지는 프로이센의 군사사학자 한스 델브뤽이 초석을 놓았고, 20세기 중반에 마이클 로버츠 교수의 소위 '군사혁명론'을 통해서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주로 '프로테스탄트 순교자', '자유의 투사' 정도로 생각되던(물론 지난번 글에 설명했듯이, 실제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미지다) 구스타프가 근대 전쟁을 낳은 혁신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관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혁신가 구스타프의 이미지를 창조해낸 것은 20세기 중반까지 역사서술을 지배해온 '역사의 단계적 발전' 사관의 산물이다. 이 사관에 따르면 유럽의 군사적 발전은 중세에서 스페인 테르시오→오랑예 공 마우리츠의 네덜란드 전술→구스타프의 스웨덴 전술이라는 단계를 걸쳐서 근대의 전열보병 전술로 진화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중에서도 마우리츠와 구스타프는 이른바 '군사혁명'의 아버지들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에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이러한 도식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일단 16-17세기의 혁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상당수가 사실은 중세에 이미 그 싹이 자라서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것으로 어느 시대에 갑자기 확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난번 글에도 썼지만, 스페인 테르시오에서 마우리츠의 진형으로 진화했다는 것은, 본래 편제명인 테르시오를 전술 대형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스페인군이 마우리츠에게 패해서 도태된다는 식의 '단계적 발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구스타프의 혁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마이클 로버츠의 '군사혁명론' 테제에 따르면, 구스타프는 기병을 개혁해서 카라콜을 금지시키고, 기병의 본질인 기동성과 돌격전술을 다시 활성화시켰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6-17세기 내내 유럽 기병은 한번도 돌격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카라콜은 전혀 일반적인 표준 전술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이를 수시로 금지했다. 구스타프만이 유독 혁신적인 지휘관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구스타프가 갑자기 기병 개혁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역시 구스타프 사후 한참 뒤의 신화화 작업에서 기인한 것으로, 동시대 사료에서는 관련 언급을 찾기가 쉽지 않다. 스웨덴의 적들이 구스타프의 스웨덴 기병을 보고 두려워했다는 말도 거의 없다.
구스타프의 보병 전술 혁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구스타프는 대열을 더욱 엺게 펼쳐서 보병 화력을 극대화하고, 보병 전열의 유연성을 강화해서 훗날의 전열보병전술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가 치른 전투를 보면 후대의 전열보병 전술과는 상당히 다를뿐더러, 유의미한 연결고리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최근 학자들의 중론이다. 이러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스페인군의 보병전술을 둔중한 방진으로, 마우리츠와 구스타프의 보병전술은 날렵한 선형진으로 본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지난번 테르시오 관련 글에도 언급했듯이, 30년 전쟁 당시의 보병 대형은 스페인군이나 제국군이나 스웨덴군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구스타프 최대의 승리인 브라이텐펠트 전투도, 곧 살펴보겠지만, 스웨덴군의 우월한 보병 화력으로 거둔 승리라고 부르기 어렵다.
사실 스웨덴의 보병전술과 표준 대형은 철저히 스웨덴이라는 역사적 맥락의 산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스웨덴이 오랜 숙적이었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태어난 것이며, 폴란드군과의 충돌을 우선으로 상정하고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전쟁에서는 때로는 성공도 거두고 때로는 실패도 맛보았다. 모든 상황, 모든 적을 상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전법은 없다.
마지막으로, 구스타프를 근대 포병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평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실 이것도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 이 평가는 구스타프가 다수의 경량화된 야전 포병대를 개발하려 노력했다는 데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것이 전장에서 얼마나 실효를 거두었는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Parrot 선생이 지적했듯, 포병이 야전에서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는 것은 훨씬 후대의 기마 포병대가 등장하면서 가능해졌다. 이때 비로소 포병은 기병과 비슷한 기동성을 발휘하면서 중요한 지점으로 빠르게 이동하여 화력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구스타프가 아무리 경량화 노력을 했어도, 이 시기의 야포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일부 개량은 했어도 근본적으로 이 시기 포병은 방어전에서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고, 스웨덴군도 이 한계 내에 있었다.
전술가 구스타프 아돌프
그렇다면 이제 30년 전쟁 중 구스타프가 치른 두 차례의 대전투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번째는 그가 치른 최대 규모의 회전이자 최대 승리인 브라이텐펠트 전투다. 흔히 이 전투는 구스타프의 '신형 전술' 대 제국군의 '구형 전술'의 대결로 많이 묘사되지만, 그것은 예전에 썼던 글대로 허구의 도식이며, 구스타프의 승리가 특별히 어떤 혁신이나 신기술 덕분이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당연히, '신진 세력'인 구스타프가 구세력을 상대로 승리하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골즈워디 선생은 칸나이 전투를 다루면서 '불세출의 천재이신 한니발'이 승리하도록 정해져있었던 것도 아니고, 로마군은 패배하도록 정해져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한니발에게도 리스크와 꽤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브라이텐펠트도 마찬가지였다.
전투 초반, 틸리 백작 휘하 제국군 우익의 맹렬한 공격에 구스타프 군대의 좌익을 담당하던 작센 군이 완전히 와해되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스웨덴군의 본대의 좌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 입장에서는 이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으며, 실제로 조금만 삐끗했어도 여기서 완전히 끝장이 났을 것이다.
이때 스웨덴군을 구한 것은 오로지 중앙을 지휘하던 구스타프 호른 원수의 기민한 판단과 대응이었다. 그는 즉시 휘하 부대를 90도로 틀어서 제국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전투 중에 이러한 대형 전환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스웨덴군의 훈련도와 실력을 아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환이 조금만 늦었으면 구스타프 아돌프의 신화는 만들어지기도 전에 끝났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제국군은 라이트훅이 막혀버린 상황에서, 이 라이트훅을 날리기 위해 전열의 중앙부가 얇아진 상황이 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제국군의 중앙부를 후려쳤다. 창병 대 창병이 맞붙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제국군의 전열이 붕괴되었고, 구스타프는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전술 지휘관으로서 구스타프의 역량은 분명하다. 반격을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고, 어지러운 전장에서 그 타이밍을 잡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적시에 제대로 된 반격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분명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실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를 상대로 혁신적인 군대가 거둔 승리는 아니었다. 틸리 백작의 전술도 상당히 건실했으며, 제국군의 능력은 구스타프를 패배 직전으로 몰고 갈만큼 강력했다. 이 전투는 비슷한 수준의 두 군대가 만나서, 기회를 제대로 포착한 군대가 위기를 넘기고 결국 승리를 거둔 전형적인 사례다. 브라이텐펠트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요건들, 구스타프의 기민한 판단력, 뛰어난 휘하 장교단, 군사들의 실력 등등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지만, 동시에 어떤 시대든지 승리하는 군대가 일반적으로 갖추도록 요구되는 점이기도 하다. 물론 기본을 제대로 갖춘다는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전혀 폄하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대단히 새로운 신기술이나 신형 전술에 의한 승리는 아니라는 점 또한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구스타프의 승리와 그의 역량은 철저히 그 시대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 시대를 초월한다거나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고까지 볼 수는 없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뤼첸 전투이다. 뤼첸 전투는 구스타프가 여기서 전사하는 바람에 곧바로 전설이 되었다. 그 전설은 급기야 이 전투를 트라팔가르 해전 급으로 올려놔서, 위대한 개신교 순교자 영웅 구스타프가 승리를 거두고 그 순간 쓰러졌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뤼첸에서 구스타프의 지휘는 브라이텐펠트에 비하면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브라이텐펠트에서의 유연한 대응과 달리, 뤼첸에서 구스타프는 스웨덴군의 전술교범을 그대로 따라서 부대를 배치했다. 이때 스웨덴군의 대열이 발렌슈타인이 지휘하는 제국군보다 좀더 얇고 길었기 때문에, 많은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라인 배틀을 내다본 선진적인 대형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지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성급한 평가다. 뤼첸 전장은 습지와 도랑들로 인해 기동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스웨덴군의 긴 횡대 대형이 움직이기에 쉬운 곳이 아니었고, 이동 경로가 뻔했기 때문에 긴 대형을 이용해 제국군을 포위하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윌슨 선생 지적대로, 구스타프 본인이 이때까지 거둔 승리로 인해 교본의 포로가 되는 함정에 빠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투 초반, 스웨덴군의 행동은 오히려 브라이텐펠트에서의 제국군을 그대로 닮았고, 구스타프의 지휘도 틸리 백작을 닮았다. 그리고 틸리의 실수를 그대로 범했다. 브라이텐펠트의 제국군처럼 스웨덴 보병부대는 무리하게 제국군을 포위공격하려고 시도하면서 대열의 간격을 지나치게 벌렸고, 마치 브라텐펠트의 스웨덴군이 그랬듯이, 제국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그 결과 구스타프가 공격의 주력으로 쓰려고 했던, 그의 최정예 보병부대 상당수가 이 전투에서 거의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다. 그중에는 7-8년 가까이 복무한 고참병들도 다수였기 때문에 이는 이후 스웨덴군에 장기간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뤼첸 전투에서 스웨덴 청색 여단의 붕괴-그레이엄 터너 作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사이, 익히 일다시피 구스타프 본인이 전사해버렸다. 그러나 전투는 지휘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스웨덴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돌격해서 제국군 1열을 밀어내면, 제국군 예비대가 돌격해서 다시 스웨덴군을 밀어내는 식의 소모전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오후 3시 무렵 지칠대로 지친 양군이 모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구스타프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복수심으로 기운을 쥐어짠 스웨덴군이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거의 실탄도 다 바닥난 상황에서 총을 몽둥이삼아 처절한 난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쌍방간 막대한 피해를 낸 뒤에 또다시 기진맥진해져서 주저앉았다. 다음날 발렌슈타인은 피해보고를 받고 더이상 전투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철수 결정을 내렸다.
이것 때문에 뤼첸은 구스타프의 희생으로 이루어낸 대승리라는 선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니 전혀 대승리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언제부턴가 은근슬쩍 '피로스의 승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냥 전술적 무승부라고 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혹은 더 나아가 발렌슈타인의 승리라고 보는 시각도 일부 있다.
사실 막대한 사상자 보고 때문에 평정심을 잃어버린 발렌슈타인이 철수 결정만 내리지 않았다면 이 전투는 제국군의 명백한 승리로 역사에 남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발렌슈타인은 더이상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지만, 정작 제국군 장병들 대다수는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철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스웨덴군은 진짜로 전투를 속개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스웨덴군은 제한된 인력자원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고참병과 유능한 장교들의 피해가 컸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지휘관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일단 전략적 관점으로 봤을때, 발렌슈타인은 사실 그해의 가장 직접적인 전략목표를 달성했다. 만신창이가 된 스웨덴군은 한동안 심각한 위협이 되지 못했으며, 보헤미아와 바이에른에서 스웨덴군을 밀어냈기 떄문이었다. 장기적으로도 뤼첸 전투는 구스타프 본인이 사망함으로서 유럽 개신교 세력들의 맹주로 군림하는 스웨덴 제국 건설(물론 본인이 합스부르크의 권위를 어느 정도까지 대체하려고 계획했는지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지만)이라는 원대한 꿈을 사실상 끝장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술했듯이, 뤼첸은 브라이텐펠트처럼 비슷한 기량을 갖춘 대군이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별다른 기교 없이 정면으로 맞부딪쳐야 했던 전투였다. 신기술이나 신형 전술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떤 기발한 책략을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브라이텐펠트와 같은 극적인 돌파와 역전도 없었다. 그저 두 거인이 서로 움켜잡고 둘 다 지쳐 주저앉을떄까지 하루 종일 서로 주먹을 날려댄 전투에 더 가까웠다.
나오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구스타프 아돌프 왕의 신화 상당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이 글은 구스타프를 사실 거품 명장이었다든지, 무능한 지휘관이었다고 말하려는 글이 아니다. 브라이텐펠트에서의 지휘라든지, 그가 양성한 스웨덴군의 실력을 보아도 그는 분명 손꼽힐 만큼 유능한 장군이었고, 탁월한 전장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시대를 초월했다거나 흠이 없는 무결점의 초인은 아니었다.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임금이라고 해도 그는 15세기의 맥락에서 봐야지, 21세기의 민주적 지도자로 포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듯이, 구스타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철저히 17세기의 맥락에서 파악을 해야 한다. 그는 17세기 한 국가의 왕으로서 그 국가의 가장 당면한 과업을 위해 군대를 양성했으며, 거기에는 성과와 한계가 동시에 있었다. 그가 신이 아니라 사람인 이상 그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한 명의 초인으로 인해서 낡은 체제가 한번에 일소되고 새 시대가 열리는 내러티브는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는 줄지 모르겠지만, 역사와 사회의 본질을 심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참고문헌
Peter H. Wilson, Lützen (Oxford, 2018).
Peter H. Wilson, Europe's Tragedy: A New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Cambridge, 2009).
David Parrot, "Strategy and Tactics of the Thirty Years' War: The 'Military Revolution'". from Clifford Rogers (ed.)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Boulder, 1995).
첫댓글 흑흑 나의 구스타프짱은 이렇지 않다능..
학생님의 글과는 상반된 견해군요. 잘봤습니닿
학생님글을 재미있게 봤었지만, 항상 의문점이 있었죠.
아니 현대에서도 몇만명이 붙는 전장에서 상황판단에 따라 병력을 움직이는게 정말 힘든일인데 저 당시에 정말 병력운용을 저렇게 할 수 있었나?
특히 카라콜과 관련해서는 저런식으로 싸우면 절대적으로 사거리가 길고 안정적으로 화승총을 사용할수 있는 보병대열이 절대적으로 유리할건데 제게 가능했었나 하는 의문점이었죠.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비교적 최근의 사학 논의들은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스타프의 허와실을 보고 갑니다
1. 가죽포라는 것을 써보긴 했는데, 후대에 별로 쓴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닥 효율이 좋지는 않았던 게 아닌지... 브라이덴펠트 전투에서 화력의 우세라는게 실상은 이 가죽포의 숫자를 포함한 것이라고 해서 생각만큼 화력에 우위를 잡았다고 보긴 어려운 거 같네요..
2. 생각해보면 "움직이는 삼각보루"라는게 결론은 중앙에 창병을 두고 주변에 화승총을 배치하는 전형적인 16~17세기의 전술 시스템이네요..-_-;; 모양은 좀 다르지만 테르시오의 유연성을 설명해 주셨으니 황제군도 필요하다면 비슷한 진형을 구사했을 것이고..
3. 30년 전쟁에 들어서 기존의 테르시오 모델들은 전체적으로 연대 구성 인원을 줄이고 총병을 늘렸다..고
들었는데.. 큰 맥락에서 결국 대부분의 장군들은 시대적 흐름에 충실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네요..
4. 호른 원수는 후에 뇌르틀링겐에서 유연성이 부족한 전술지휘(반복된 돌격..;;;)을 하다가 전투를 말아먹었는데.. 전장에서 항상 유연하고 냉정하게 최선을 수를 찾아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거 같습니다. 하기사 스포츠 시합에서도 감독이 멘탈 나가서 허둥대다가 완전 말리고 개털리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 거 보면;;;;;; 수 많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에서는 훨신 이런 압박감이 더하겠지요..
@델카이저 30년 전쟁 들어서서 갑자기 변화가 되었다기보다는, 당시 군 편제 자체가 국가 막론하고 상당히 유동적이었습니다. 전장 환경도 제각각인데다가 회전보다는 소규모 전투를 치러야 할 일이 훨씬 많으니까요.
사실 구스타프도 뤼첸에서는 꽤나 삽질한데다가, 브라이텐펠트의 패장인 틸리도 결코 무능한 장군은 아니었죠. 전투 한두개만 보고서 이 사람은 불세출의 명장이니, 이 사람은 답없는 졸장이니 하는 시각이 사실 문제가 매우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