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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 천기세가(天機勢家).
하늘 아래 가장 지혜로운 가문인 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문과 지혜, 병법(兵法)을 수백 년 간이나 선조로부터 승계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그들은 무림의 성가(聖家)로 추앙받게 되었다.
일 년 전, 마왕성(魔王城)의 붕멸에 신단기성 다음으로 가장 큰 업적을 쌓음으로 천기세가는 무림의 성지로 추대되었다.
천기세가의 가주인 환천대공(換天大公) 우문학은 문성(文聖)이요, 다지성(多智聖)이었다. 그의 머리에 들어 있는 학문과 지계, 병법은 능히 하늘에 닿을만 했다.
그런 그가 정사대전 이후 강호출입을 끊고 그의 가문인 천기세가에 은거해 버린 일은 더욱 더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천기세가는 사천(四川)의 험지인 검문(劍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사대혈전이 끝난 직후 천기세가는 무림과 인연을 끊고 문을 닫아 걸고 말았다.
그것을 두고 무림인들은 과연 성인다운 행위라고 극구 칭송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또한 무황 못지 않은 야망가이기에 무림제황의 꿈을 키워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환천대공의 지혜와 혜안은 제갈공명을 능가한다고 하지 않는가. 당금 무림에서 그의 깊디 깊은 의중(意中)을 꿰뚫어 볼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한 생명의 탄생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다.
천기보(天機堡)의 깊숙한 내원(內院)에서 한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성이 울렸다. 방 안에서는 은은한 난향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향후 천하무림의 향배를 뒤바꿔 놓을지도 모를 엄청난 운명을 천하에 선포하듯 어린아이의 첫울음이 힘차게 울려 퍼졌다.
환천대공 우문학은 백의에 문사건을 쓴 전형적인 학자 차림이었다. 그는 육순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년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막 태어난 어린아이를 두 손에 받쳐든 채 입가에 연신 너털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허허헛헛... 드디어 삼백 년 천기혈통(天機血統)의 염원이 꽃을 피우게 됐도다."그가 받쳐들고 있는 어린아이는 사내아이였으며 금방 모태(母胎)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또렷하고 선명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후후후... 천릉(天陵), 네 이름을 하늘을 능가한다는 천릉이라 지으마. 우문천릉(宇文天凌), 너는 우문천기가의 후예로 장차 하늘과 땅이 모두 너의 발 아래 부복하게 되리라!"이 무슨 놀라운 말인가. 그렇다면 환천대공이 지극천단의 전설이라도 실현시키겠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하늘을 능가하리라는 뜻을 아들의 이름으로 삼는단 말인가?"허허허허헛... 가자, 천릉. 널 위해 안배해 둔 것이 있다. 이 아비가 네게 천하를 건네주기 위해 준비해 둔 것이 있느니라. 그것은 삼백 년 천기세가의 고통스런 준비였으며 기다림이었느니라."환천대공은 아이를 안고 몸을 돌렸다.
그의 등뒤, 침상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이를 낳은 생모는 이미 흉하게 뼈만 남은 상태로 싸늘한 시신이 되어 죽어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 천릉은 천기세가가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야망의 씨였으며, 그를 낳은 모(母)는 오직 그를 위한 희생양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혈마천신흡인대법(血魔天神吸引大法)으로 인하여 모체의 모든 정기(精氣)를 아이에게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삼백 여년 전 무림 역사상 전대미문의 마물(魔物)이 나타났으니 그의 이름은 천인마종(天人魔宗) 사환영(沙 靈)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마교의 인물이었으나 그의 무공수련 과정이 너무나 극악하고 패도적이라 마교에서마저 축출당하자 백년 간 천애오지(天涯奧地)에서 자신만의 독문마공인 혈마천신흡인대법을 연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미남과 미녀들을 유인해 쾌락의 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인육을 벽곡단(酸穀丹)처럼 뜯어 먹으면서 마공을 연공할만큼 그는 인성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무림의 저주받은 돌연변이요, 지옥의 악귀나찰이였다.
그런 그를 무림의 정도와 마도가 손을 잡고 척살(刺殺)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무공과 그 추구하는 바는 달랐으나 무의 근본은 원래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지극천단의 전설, 초인제왕의 의지를 실현시키고 하늘로 등천하고자 하는 희망이다. 흉칙한 괴수나 악귀가 되고자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영환같이 무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잔인하고 사악한 마물은 없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모여든 삼백 명의 초절정 고수들로 이루어진 천의맹(天義盟)은 희대의 마물 사환영과 태산 귀불곡(歸不谷)에서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장엄한 최후로 무림사에 그 이름을 남겼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삼백 여년이 지난 지금 환천대공 우문학의 후예가 마물 사영환의 독문마공인 혈마천신흡인대법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가?그것은 상대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장기나 음식물이 그 상대의 모든 내공진기를 다 흡수하도록 하는 일종의 흡인대법이다. 그러나 시전자의 마성을 극도로 증진시켜 상상할 수도 없는 마공을 연공하게 하는 것이라 사영환 이후 천하무림의 절대금기가 되었다.
우문학은 자신의 아들이 전 무림을 피보라 속에 던져 넣었던 희대의 마물 사영환과 같은 금라무극지체(禁羅無極之體)라는 것을 알고 무림제일룡으로 키우기 위해 태중에서부터 치밀하게 안배한 것이다.
금라무극지체로 태어나는 이는 14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다. 그러나 혈마천신흡인대법으로 마물 사영환은 자신의 천형(天刑)의 금제를 풀고 희대의 마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문학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들을 위해 무림의 절대금기를 깨뜨린 것이었다.
실로 무섭고 가공할 출생이다. 우문학은 그의 아들에게서 삼백 년 전의 마물 사영환의 환생을 꿈꾸는 것일까? 용안만한 크기의 구슬은 묵(墨)빛을 띄고 있었다. 구슬의 표면에는 검은 광택이 흘러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허허헛... 이것이 천금신주(天金神珠)다. 이제는 네 것이 되었다. 네게는 금(金)의 능력이 있느니라.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날카로운 금행성(金行星)의 정수를 얻게 될 것이다."환천대공은 막 태어난 우문천릉의 고사리 손을 펼쳐 천금신주를 쥐어주었다. 이때였다. 그의 말귀를 알아 듣기라도 하는 듯 어린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으허허허헛... 이제부터 시작이다. 천릉, 너는 앞으로 십 년간 조화풍운관(造化風雲關)에 들 것이다. 그 곳에는 삼백 년 천기혈통이 피와 고통으로 집대성시킨 만통관(萬通關)이 있다. 거기서 너는 무림제일인자가 될 기연과 만나게 될 것이다. 너는 이미 흡정대법으로 충분한 자질을 얻었다. 이제 너는 그것들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으하하핫......."환천대공 우문학, 그는 하나의 동(銅)으로 된 벽(壁) 앞에 선 채 일진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붉은 빛이 번쩍이는 거대한 동벽에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천룡(天龍)의 상(像)이 양각되어 있었다.
환천대공은 손가락을 뻗어 용의 두 눈을 눌렀다.
우우우웅......!
거대한 굉음과 함께 동벽이 열리며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두고 봐라, 무림이여. 이제 곧 널 취하러 우문가(宇文家)의 위대한 한 아이가 나갈 것이다. 기다려라. 무림이여......."그그궁!
그가 사라지자 동벽은 다시 굉음을 내며 닫쳐 버렸다. 천기보의 한 비밀장소에서 일어난 이 일이 어떤 풍운(風雲)을 일으키게 될 것인가?또한 그 곳에서 태어난 아이, 우문천릉(宇文天凌)이란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무림에 나타날 것인가? 그리고 전설의 마물 사영환의 독문마공을 알고 있는 우문학의 진정한 내력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중원은 다시 한 번 걷잡을 수 없는 대혈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십 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공포의 마왕성(魔王城)이 붕멸된 이후, 사람들은 그 끔찍했던 대혈겁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차츰 지워갔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잊어야 했고 또 잊었다. 그래서 마왕성이 천하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그 장소마저도 사람들은 완전히 망각하고 말았다.
폐허의 성(城).
처절했던 혈겁의 흔적은 불에 타버린 주춧돌과, 허물어진 성벽,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잔해(殘骸)만이 남아 그 날의 기억을 더듬게 하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폐허의 성은 야인산(野人山)의 한 계곡에 있었다. 다 자란 성인의 키를 훨씬 넘기는 잡초가 성을 온통 뒤덮고 있었는데 그 성으로 향하는 계곡 입구에는 하나의 녹슨 철비(鐵碑)가 비스듬히 기운 채 지면에 박혀 있었다.
<무림금역(武林禁域)>
철비에는 그 같은 간단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무림인들은 다시는 마왕성의 과거를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야인산에 있는 마왕성의 폐역을 돌아보고 싶지 조차 않았다. 그래서 금역을 선포하고 잊어버린 것이다.
시뻘겋게 녹슨 철비는 흡사 과거의 피냄새를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그러나 철비를 지나 계곡 안으로 들어서면 더욱 더 음산한 광경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인두탑(人頭塔)이다.
높이가 십 여장에 달하는 그 탑에는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는 해골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당년의 마왕성도는 십만(十萬)을 헤아렸는데 그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그들에게 무덤을 세워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빛나는 전공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계곡에 이처럼 흉칙하게 거대한 인두탑을 쌓아 놓은 것이었다.
인두탑 주변에는 온통 부서진 백골들이 널려 있었다.
휘류류류.......
밤이면 푸르른 인화가 날아다니고 귀신불이 춤을 춘다. 백골이 된 마왕성도들의 원혼(寃魂)이 망역에 들지 못하고 구천을 배회하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마왕성이 있던 이 계곡은 이제 백골곡(白骨谷)이란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지천에 널려 있는 해골들은 군데군데 수십 개의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이곳에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끔찍한 풍경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랜 세월 수많은 백골더미가 썩고 썩으며 형성된 시독(屍毒)과 독무(毒霧)가 계곡을 뒤덮고 있어 자칫 접근하다간 죽음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버려진 이 곳에서 또 하나의 운명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소년(少年).
아니 그는 이제 불과 십 이삼 세 남짓의 소동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함이 귀엽게 묻어 있었고 얼굴은 흡사 옥(玉)으로 빚어 놓은 듯 희고 깜찍할 정도로 잘 생긴 아이였다.
감성이 풍부하게 깃들어 있는 듯한 소년의 표정에는 아직도 유아적인 치기가 남아 있었으나 그의 두 눈만은 무섭도록 뚜렷했다.
소년이 입고 있는 흑색 단삼과 옥같이 하얀 피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아찔할 정도의 대비감을 주고 있었다.
"......."
지금 소년은 풀밭에 벌렁 드러누운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가 있는 곳은 마왕성(魔王城) 폐허 속이었다.
불에 탄 기와와 구조물들 속에 누워 있는 소년의 얼굴에 언뜻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이어 그의 작은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치잇, 나는 왜 매일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지? 저 구름처럼 자유스럽게 좀 더넓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데......."소년은 불평을 늘어 놓았다.
"맨날 고된 훈련을 해야 하고 또 지긋지긋한 책을 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시한 백골 따위나 만지작거려야 하다니 이게 뭐야! 쳇, 내가 무슨 꼭두각시인가?"실로 괴이하지 않은가? 고된 훈련과 책을 본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백골 따위를 만져야 한다니?소년의 입술이 계속 삐죽거렸다.
"어머니는 항상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다섯 늙은 괴물들은 매일같이 날 들볶기만 하니 이거야 어디 살겠냔 말야."소년은 점점 더 화가 치미는 듯 문득 팔을 뻗어 부서진 주춧돌 조각 하나를 잡더니 냅다 던졌다. 돌조각은 맞은편의 거의 무너져 내린 벽을 향해 날아갔다.
파파팍!
돌은 돌연 중도에서 조각조각 분리되더니 벽에 연꽃 형상으로 박혀 드는 것이 아닌가?실로 놀라운 암기술(暗器術)이었다.
일단 시전하는 암기에 공력을 주입하여 중간에서 잘게 부순 다음, 정확히 원하는 형태로 배열해 정확하게 적중시키는 신기에 가까운 무형탄물신공(無形彈物神功)이었다.
대체 소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런 절륜한 무공을 장난삼아 펼쳐 보이는 것일까.
이 신비한 소년의 얼굴에는 악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천진난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풍부하고 예민한 감성이 소년의 성품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다만 성격이 몹시 낙천적인 것만은 분명한 듯 했다.
"쳇, 천우(天羽)는 조금만 더 크면 이곳을 떠나버릴 테야. 지금은 저 부시독장무를 뚫지 못하지만......."소년은 일어섰다.
나이에 비해 훌쩍하니 큰 키를 지니고 있는 소년은 뒷짐을 지고 걸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언제쯤 병을 고치게 될까? 쳇, 넷째 할아버지는 맨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술을 지니고 있다고 큰소리 치면서 왜 어머니의 병은 못 고친단 말야......?"소년은 발끝으로 또 한 조각의 돌을 걷어찼다.
윙!
돌조각은 흡사 신탄처럼 빠르게 날아가 불타버린 고목둥치에 깊숙이 박혔다. 거리는 십 장 정도였다.
"이제 그 늙은 폐물 할아범들에게는 더 이상 배울게 없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매일 백골만 만지라고 시키는 거지......."소년은 으시시한 폐허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 곳에는 괴이한 광경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골인(白骨人).
흡사 살아있는 듯 여러 가지 자세로 서 있는 백 팔 구의 백골들이 둥근 원진(圓陣)을 형성하여 서 있었는데 그들의 자세는 실로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백골은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으며, 어떤 것은 땅을 향해, 어떤 것은 두 팔을 교차시키며 공격자세를, 어떤 것은 반쯤 몸을 구부린 채 좌우로 팔을 돌리고 있었다.
흡사 무예의 동작 같았다.
"이것도 이젠 다 파악했단 말이야. 이 백골들은 자신들의 초식을 파해당해 역습을 당한 것이고, 나는 이들을 죽인 수법(手法)을 다시 파해(破解)할 초식들을 모두 터득했거든."소년은 백골 사이를 흡사 춤추듯 거닐며 팔과 다리를 기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느적거리는 듯 가벼운 동작에도 사방에서 흙먼지가 튀고 나무들이 휘청거렸다.
만일 무림인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 기절초풍을 하여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으리라! 소년의 일거수 일투족이야말로 경천동지할 절학초식들이 아닌가?"헤헤... 내가 아직도 다 파악하지 못한 척 하는 이유는 그 컴컴한 지하도(地下道)에서 빠져나와 이 바깥 공기를 쏘이려 하기 때문이지."소년은 히죽 웃는다. 만일 그 웃음을 여인이 보았다면 겉잡을 수 없이 방심이 흔들렸으리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천우는 천하제일남의 용모와 기백을 갖추고 있었다.
소년은 한참 백골 사이를 춤추듯 거닐며 초식을 시전하다가 그것도 싫증난 듯 다시 이번에는 한 서까래 위로 신형을 날렸다.
슥......!
흡사 한 덩이 부운(浮雲)처럼 가볍게 올라선 그는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쳇... 심심하단 말야. 환우겁천백팔마( 宇劫天百八魔)의 무예도 더 이상 익힐게 없고 다섯 늙은이들의 그 알량한 재주도 이젠 흥미를 잃었어. 그저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 재미있는 구경이나 해야겠는데......."아니, 환우겁천백팔마라면 바로 마왕성의 무서운 최고 마두들이 아닌가? 그런데 십이 세 남짓의 일개 소년이 문파의 장문인을 능가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소년은 한 가닥 애끓는 울음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어느 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왕성 주위는 항상 회색빛 검고 칙칙한 안개가 덮여 있었는데 그것은 시체가 썩어 일으킨 부시독장무였고 살이 닿거나 한 모금만 호흡해도 모든 생명체는 살 수가 없었다.
"......."
소년은 시무룩해졌다.
애간장을 끊는 듯한 울음소리가 지저(地低)에서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낯익은 소리였고, 다름아닌 그를 부르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머니 병이 또 도지셨군......!"
스슷......!
소년의 모습은 빨려들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왕성 지하에는 여러 개의 석실과 통로가 미로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 중 한 석실의 낡은 목재 침상에는 신색이 납빛인 중년여인이 누워 있었다.
"흑... 흐흐흑......."
여인은 흡사 귀곡성 같은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너무도 처절하여 소년의 애간장을 끊어 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 속 깊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원한은 듣는 이의 사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록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었으나 피부는 옥결이요, 그 용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중년미부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흐으흑... 흐흐흑......."
흑색단삼의 소년 천우가 시무룩하게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실성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느껴보지 못한 그였다. 소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고절(孤 )하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그는 어머니가 언제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안아 줄 날이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천우는 애절하게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 건가요?"
"흐흐흑... 흐흐흑......!"
중년 미부는 아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듯 천장만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있다.
천우는 문득 주먹으로 눈을 훔쳤다.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그는 주먹을 꾹 쥐며 중얼거렸다.
"기다려요. 우아(羽兒)가 꼭 어머님을 이렇게 만든 놈을 찾아 복수를 하고 말테니!"천우는 돌아섰다. 야명주(夜明珠)가 오 장 간격으로 밝혀 어스름한 빛을 뿌리는 통로를 걸어갔다.
잠시 후 대략 방원 사오십 장 크기의 광장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온갖 기구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인체의 모양을 한 가죽벽걸이와 인형(人形)들이 수백 개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그것은 얼마나 사용했는지 온통 구멍투성이요, 걸레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수없이 많은 발자국들이 패여 있었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것인 듯 그 크기가 작았다. 그것들은 천우가 걸음을 걸을 때부터 시작된 뼈를 깎고 살을 찢는 고련(苦鍊)의 흔적들이었다.
한쪽에는 장대한 철동인(鐵銅人)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기관장치로 조작되는 것이었다. 천우는 그 철동인들과 수만 번을 대련(對鍊)했다. 때로는 걷어 차여 갈비뼈가 부러지고, 무쇠주먹에 맞아 혼절하거나 피투성이가 되는 예는 허다 했었다.
광장의 한쪽에는 소금물이 고여 있는 인공연못이 있었다. 고련 끝에 상처투성이가 된 그의 여리디 여린 살은 그 소금물에 담그어져 수백 번도 더 껍질을 벗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경공술(輕功術)을 연마하기 위해 다리에 무쇠를 찬 채 거꾸로 꽂아 놓은 검 끝에서 뛰어야 했으며, 때로는 인내력과 생존력을 키우기 위해 열흘간 물 한 방울 먹지 못한 채 사나운 이리와 둑충들이 들끓는 방 속에 내팽개쳐지기도 했다.
그 곳에서 천우는 배고픔이 극에 이르자 마침내 자신보다 더 큰 이리의 목줄기를 뜯어 이리고기를 먹는 법을 배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리와 싸워 이겨야 했다.
그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다시 소금연못에 담그어졌고 상처가 아물기 전에 이번에는 꺼칠꺼칠한 철사포(鐵砂布) 위에서 뒹굴어야 했다.
그의 뼈는 수백 번도 더 부러지고, 살가죽은 천 번도 넘게 벗겨졌으며, 끓는 기름 속에 일각 이상 앉아 있기도 했으며, 일장 가량 강철 침이 촘촘히 솟아 있는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헤헤... 이제 또 어떤 것으로 날 괴롭힐 수 있는지 모르겠어."천우는 광장을 둘러보며 히죽거렸다.
광장의 이 모든 것은 이제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는 모든 것을 통달한 것이었다.
그는 기물들을 툭툭 걷어차며 다시 다른 통로로 걸어갔다. 또 다른 석실로 이어져 있었다.
다섯 명의 노인(老人).
그들은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팔이 없는 노인, 눈이 없는 노인, 두 다리가 잘라진 노인, 또는 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노인도 있었다.
여하간 모두 비정상적인 신체의 소유자들이었고, 얼굴은 온통 주름살 투성이었고 피부는 오랜 연공의 결과인 듯 나무껍질 같았다. 산발한 머리칼은 백발이었는데 그들은 중앙에 하나의 단로를 놓고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앉아 있었다.
청동제의 단로엔 뚜껑이 굳게 닫혀 있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노인들은 손과 발바닥을 단로에 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그들의 지체로부터는 각각 붉고, 푸르고, 희거나 검은 기류가 뻗어나와 단로로 흡수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내공은 모두 단로 속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었다.
"오귀(五鬼) 할아범, 아직도 그 괴상한 놀이인가요?"
석실에 들어선 천우는 빙글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한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회색 눈알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눈빛이었으나 천우를 보는 순간 부드러워졌다.
"오늘... 일과는 마치었느냐?"
짐짓 인자한 말투이긴 하나 듣기 괴로울 정도로 탁성이었다.
"네. 할아범들은 언제까지 이 단로 앞에 앉아 있을 건가요? 벌써 한 달째인데."천우의 말에 괴노인은 무심히 말했다.
"십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걸릴지도 모른다."
"십 년!"
천우는 깜짝 놀라 외쳤고 곧 이어 안색이 불쌍할 정도로 구겨졌다.
"그럼 우아는......."
"일이 끝나야 너도 이 곳을 나갈 수 있다."
"칫, 엉터리, 날 이 곳에서 늙어 죽게 할 셈이죠?"
천우의 볼이 잔뜩 부었다. 웃는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모두 너를 위해서다."
"피이, 거짓말!"
"이것이 완성되면 너는... 천하제일의 내공을 얻게 된다.""싫어요. 그까짓 내공 없어도 나는 얼마든지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어요!""그건 그렇지 않다. 훗날 너는 우리들의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천우는 혀를 쏙 내밀었다.
"할아범들을 고마워 할 거라구요? 헹, 그 늙은 뼈다귀나 보존해 둬요. 언제고 나와 대련하게 된다면 그 날로 부러뜨려 버릴 테니!""이젠 너와 비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요?"
"너는 이제부터 모든 것을 배워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 동안 천장서고(天藏書庫)의 책은 얼마나 읽었느냐?"천우는 코웃음쳤다.
"흥, 그 따위 고리타분한 책 나부랑이를 무엇 때문에 읽는담. 온통 곰팡내 나는 것 뿐인 걸.......""우야!"
노인의 음성이 으스스할 정도로 살벌해졌다.
천우는 움찔했다. 그는 다섯 명의 노인 중 이 노인을 가장 무서워 한다. 등이 낙타처럼 굽었기에 그는 노인을 천타(天駝)라고 불렀다.
"명심해라! 네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원수는 너보다 수백 배 더 무섭고 악랄하다는 것을 잊었느냐? 너의 어머니가 그렇게 된 원인을?""잘... 잘못했어요."
금시 천우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음... 총 몇 권 읽었느냐?"
"오늘로 구천 삼백 칠십 권 읽었어요."
"정... 정말이냐?"
천타의 얼굴엔 애써 희색과 경탄의 빛을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장서고에는 천타 자신도 삼분지 일을 겨우 이해할 정도로 난해한 기서(奇書)들이 허다했다.
그런데 천우는 그 책을 거의 다 읽어낸 것이다.
"네가 일만 권 중 벌써 그 정도 읽었단 말이냐?"
"정말이예요."
"음... 좋아, 마저 읽어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지장서고(地藏書庫)를 열어라.""또... 요?"
천우는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책이라면 신물이 난 것이었다.
"필히 지상서고는 네가 모두 읽어야 한다."
"몇... 권이죠?"
"천 권."
순간 천우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회색이 만연했다.
"정말 그 정도예요? 야아! 한 달이면 몽땅 읽겠네!"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지장서고의 책을 한 권 떼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 아마 한 달에 다섯 권도 떼기 어려울 걸......?""아뇨, 천우는 자신 있어요."
"지장서고의 책은 이 세상의 온갖 악의 기술을 적은 것이다. 속임수, 변장, 독술, 기관지술, 미혼술, 환술(幻術)... 그것들을 익히게 되면 너는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게 된다.""야아! 그거 신나겠는데요?"
"너와 시합을 하자."
"시합?"
"우리 늙은이들이 이 단로 속에 연단기(練丹氣)를 채워 혈정원단신주(血精元丹神珠)를 완성할 테니 네가 지장서고의 책을 통달하는 것과 시합하는 거다. 누가 먼저 완성하는지를.""헤헷... 십 년도 더 걸린다면서요? 시합은 하나마나에요."천우는 의기양양했다. 천장서고의 책을 그는 삼년 만에 거의 다 읽어버린 것이었다. 그의 지력은 가히 당금무림을 통틀어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천타는 눈을 감았다.
"이제 가라, 어머니를 잘 보살펴야 한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어머니를 돌볼 수가 없을 것이다."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천타!"
이어 그는 신형을 날려 통로 속으로 달려 나갔다. 마음이 급해졌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천장서고의 남은 육백 삼십 권의 책을 떼고 지장서고를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은 꽃을 찾아가는 나비와 같았다.
괴소년 천우, 그는 혹독하고 음침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밝고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이었고,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피가 유난히 따뜻하기 때문일까?마왕성(魔王城)의 괴소년 천우, 그는 과연 누구의 피를 이어받은 것일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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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ㅡ 합니다
천우가주인공인가 ???????
아니면천능이 주인공인가 ??????
서로절대자로 경쟁자인가???????
다음편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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